성찬 [3] 

 

- 고전 11:23-26 -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로서 살아감의 표상이며, 성도들이 함께 생명의 양식 나누는 영적 잔치이다.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 약속을 확증한다.

 

[3-1] 로마 가톨릭 화체설 비판

 

1.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사제의 축성(祝聖)으로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한다.

 

+ 그들은 떡의 육체로의 변화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1) 첫째, 떡의 실체가 없어진다. 떡은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잃는다.

(2) 둘째, 떡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새롭게 존재하며, 지역적, 육체적으로 현존한다.

(3) 셋째, 그리스도의 몸은 떡의 형상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도 그리스도의 몸은 편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승천하신 그대로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지역적 현존을 육체적 현존으로 이해한다.

 

2.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궤변에 따르면 한 분 그리스도께서 다수의 몸을 갖게 된다.

 

이러한 난점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들은 떡의 실체와 형상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여, 성찬에 있어서 떡의 실체는 없어지고 떡의 형상은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새로운 실체로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하늘에 현존하는 몸이 떡에 현존하는 몸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하여서 그리스도의 육체는 인성의 제한을 받으나 무제한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3.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육체적, 물질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성찬의 표징으로부터 그것에 의하여 의미되는 본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시킨다. 그리하여서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로써 드러내심으로써 성도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자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이렇듯 표징과 그 의미와의 관련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들은 병재(竝在)에 의해서 살과 피가 동시에 한 표상으로 제시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적 진리에 따른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이 아니라, 사제의 기적적 능력을 가정한 은밀한 현존을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떡의 외형 아래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전혀 비성경적인 은밀한 궤변이 있을 뿐이다.

 

 

[3-2] 루터란 공재설 비판

 

1.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는 달리, 루터란들은 떡의 실체가 변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들도 떡과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체적 관련성은 부인한다. 그들은 성례에 있어서 떡이 그리스도를 제시함을 떡이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한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현존한다는 사실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떡이 몸이다.' 라는 말과 '몸이 떡과 함께 있다.' 라는 말은 천양지차이다.

 

2. 로마 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떡에 내포시키려고 하는 반면에 루터란들은 그것을 떡에 부착시키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썩을 요소들에 가두거나 고착시키는 것은 그 분의 영광에 합당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속성을 그 분의 몸에 돌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지금도 양성 가운데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은밀한 현존이라는 모호한 말로써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떡 가운데도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주장을 한 반면에, 루터란들은 승귀한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현존한다는 편재성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공재설(共在說)을 전개하였다.

 

3. 루터란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영광의 몸을(3:21) 인성의 제한을 받지 않는 보이지 않고 무한한 몸이라고 곡해한다.

 

그들에 의하면, 그 몸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나 어떤 공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궤변은 속성 교통에 대한 그들의 오해로부터 기인한다.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말씀은 모두 위격적 연합 가운데 읽어야 한다. 어느 특정한 성에 속하는 사실은 전체 위격에 돌려진다. 양성은 위격 안에만 있으며, 위격을 통하여서만 교통한다. 위격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것은 아니다.

 

승천 후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계시고 신성에 따라서는 어디에나 계신다. 신성에 따라서는 장소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인성에 따라서는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실 수 없다. 한 성에 따른 것은 다른 성에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성에 따르던 그 주체는 양성의 위격이다. 즉 인성에 따라 특정한 곳에 계신 분도, 신성에 따라 어디에나 계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 전체시다.

 

4. 루터란들은 이러한 양성의 위격적 교통을 곡해하여 양성이 위격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교통하여 서로 혼합되거나 변화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에 혼합되어서 육체인 채로 어디에든지 현존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마찬가지로 루터란의 공재설도 성찬을 받는 성도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3-3] 로마 가톨릭 미사와 거짓 성례들 비판

 

1. 로마 가톨릭은 미사를 죄를 보속하기 위한 공로를 쌓는 희생 제사로 여긴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세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5:6, 10; 7:17, 21; 9:11, 26; 10:10, 14, 21; 110:4; 14:18).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19:30; 10:18, 26), 죽을 인간이 제사장이 될 필요도 없다(7:17-19). 미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의를 곡해하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성찬를 제거하고 폐지한다. 그러므로 전적 은혜를 감사하는 성찬과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는 미사는 양립할 수 없다(4.18. 1-3, 7).

 

2. 로마 가톨릭은 세례와 성찬 외에 비성경적인 다섯 가지 성례를 거행한다.

 

(1) 견진례는 세례 받은 성도들이 거룩한 영적 싸움을 싸울 능력을 주는 성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이미 세례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6:4)이기 때문이다.

 

(2) 고해에는 가시적인 표징이 없다. 내면적인 통회가 회개의 표징이자 본체이기 때문이다. 고해 역시 견진례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세례에 포함되어 있다.

 

(3) 종부성사는 임종을 맞이한 신도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병 낫기와 영혼 구원을 구하는 예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를 제정한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

 

(4) 신품성사는 일곱 가지 직분에 나아가는 서품의 예식이다. 그러나 이는 직분의 임명과 다르지 않은 의식으로서 성례의 표나 말씀이 없다.

 

(5) 혼인성사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연합의 신비를 기념하는 예식으로 여겨진다(5:28-32). 그러나 진정한 성례적 연합은 세례와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교통으로 족하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거짓 성례들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무화(無化)시키고 단지 인간의 공로만을 부각시킬 뿐이다.

 

+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이므로, 은혜의 약속이 말씀으로 제정되지 않는 어떤 예식도 단지 헛되고 참람할 뿐이다. 그러므로 거짓 성례들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무화(無化)시키고, 단지 인간의 공로만을 부각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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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30주제[항목]-Shalom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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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들에게도 기독교강요를 통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겠지만 목회자들이 기독교강요로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글을 쓰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기독교강요는 교리서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 있는 좋은 서책입니다본문을 선택해 설교 제목을 잡아 묵상을 하면서 설교를 작성해 나가면 원래 신학적 뜻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칭의를 말하고 있는데 성화를 가르치면 안됩니다. 기독교강요를 알면 절대로 본문을 놓치지 않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주석 설교 신학적 잡지등과 같이 읽기를 원하면서 기록하였습니다. 기독교강요는 기본교리로서 중심을 잡아주고 주석을 참고하도록 헸습니다. < 문병호 교수의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