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2]
- 골로새서 3:9-10 -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두려움으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 참된 회개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삶에 이르게 한다(요한복음 3:3-7).
새 사람(새롭게 난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는다(골로새서 3:10).
[2-1] 계속적인 회개의 삶
1. 구원에 이르는 참 회개로 중생한 사람은 옛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삶을 산다.
(1) 새사람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산다.
이제는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그 분의 영의 소욕대로 산다. 다만 거듭난 사람의 삶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으니, 이는 그 안에 탐심을 촉발시키는 부싯깃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의 지상의 삶 동안에 계속된다. 죽을 육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성도는 여전히 정욕에 매여 산다. 이러한 육체의 소욕은 단지 연약함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죄가 된다.
(2) 중생(신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는 끝이 나지만 죄의 질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죄는 지배력을 잃으나 여전히 성도들 가운데 남아있다. 죄의 형벌인 사망의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롬 6:6) 죄의 법 즉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에게도(롬 8:2) 여전히 죄의 여적(餘滴)이 있다. 사람의 욕심과 육욕은 무질서한 것들로서 하나님의 질서에 반한다. 그러므로 죄이다.
(3) 중생(신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법은 폐지되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죽을 육신 가운데 남아서 역사한다.
우리는 지상의 삶 동안에 죄를 아예 없애지는 못할 것이로되 다만 죄가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롬 6:12). 죽음의 죄책은 옛사람과 함께 죽었으나 죄는 여전히 남아서 역사한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것들’ 가운데 놓여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강함이 함께 역사하는도다!
2. 성도의 삶 가운데 맺는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거룩함과 순결함이다.
(1) 내면적인 감동이 없는 외면적 회개로서의 참 회개란 없다.
참 회개는 한 마음을 품고(약 4:8), 그 마음을 찢고(욜 2:13)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듭남에 이르는 단회적 회개와 거룩함에 이르는 반복적 회개는 구별된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죄사함이라는 열매를 함께 맺는다(막 1:4; 눅 3:3).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전반).
(2) 회개의 제 일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사 55:6-7).
회개함으로써 공로를 얻어 마땅한 죄사함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 회개로 거룩함에 이르는 죄사함을 받음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3)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행 11:18)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엡 2:10).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은 성도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사 63:17) 성령의 조명에 따른(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계속적 회개로써(히 6:4-6), 영생에 이름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고후 7:10)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 줄곧 역사한다.
3. 성도의 삶은 계속적 회개의 삶이니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다.
(1)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말미암은 간절함이 있다.
(2) 둘째, 자신의 옳다함을 버리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정결함에 이르고자 하는 변명이 있다.
(3) 셋째, 마음속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노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에 대해서 뉘우치는 분함이 있다.
(4) 넷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근심하며 떠는 두려움이 있다.
(5) 다섯째, 마땅한 의무를 기꺼이 순종하려는 사모함이 있다.
(6) 여섯째, 진정 수렁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으로서 다음 일을 행하고자 하는 열심이 있다.
(7) 일곱째, 엄격히 죄의 값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징벌이 있다. - 버나드가 말했듯이, 회개는 마치 쓴 쑥에 꿀을 섞어 먹음과 같으니 달게 해서 먹으면 쓴 것이 약이 된다.
[2-2] 회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직 주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사 61:1; 눅 4:18)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다(마 11:28). 회개는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다.
- 크리쏘스톰이 말했듯이, 회개는 죄를 씻어내는 약이며 하늘의 선물이자 놀라운 능력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
1. 첫째로, 마음의 통회 자체가 회개의 은총을 받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1) 회개에 있어서, 마음을 찢는 그 자체에서 능력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찬미함이 더욱 합당하다.
2. 둘째로, 죄가 제사장 앞에서 고백될 필요가 없다.
(1)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변역하리니”(히 7:12),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함이 합당치 않다.
심지어 구약의 제사장도 죄의 고백을 듣는 직분이 없었다(신 17:8-9). 서로 죄를 고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은(약 5:16) 죄를 듣고 사하는 권세를 특정인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다.
(2) 오직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듯이 죄의 고백도 그러해야 한다.
열쇠의 권한은 주님의 교회에 주신 선포하는 권능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제에게 사죄권을 부여함이 아니다. 죄를 고백하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3. 셋째로,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생명의 능력이 있다.
(1) 죄사함은 값없는 용서로 인한 것이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유일한 대속물로서 우리를 위한 무름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나오는 보속(補贖, satisfactio)이 가당치 않다.
우리가 스스로 갚아서 구원에 이른다면 어디에서 양심의 평화를 찾을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얻고 화목에 이르게 될 뿐(골 1:14, 20), 아무 것으로도 먼저 드려서 갚음을 얻을 수 없다.
(2) 사제가 열쇠의 권한을 가졌으므로 이러한 보속을 대신 감당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죄를 가져가신 분께서 벌을 친히 감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이루심은(롬 3:24; 고전 1:30; 엡 1:7; 골 1:14) 자신을 죄의 값 즉 속전으로(딤전 2:6) 드리셨음으로 말미암는다.
(3) 가톨릭의 연옥설과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설에 기초하므로 전혀 비성경적인 사설(邪說)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그저, 값없이 구하는 공로 밖에 없다. 전적으로 의지(依支)하는 공로, 전적으로 기대는 공로, 그것은 사실 공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잊고, 지워버리시는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 분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그 분께 고백하자. 그 분은 의사이시다. 그 분께 우리의 상처를 그 분께 보여드리자. 그 분은 상처를 입으시고, 징계를 받은 분이시다. 그 분께 평화를 간구하자. 그 분은 중심을 헤아리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시다. 그 분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자.
종국적으로, 그 분께서 죄인을 부르시므로,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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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30주제[항목]-Shalom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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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0주제[항목]정리 Sh. M. | < 문병호 지상강좌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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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국가 [2]-법, 국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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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를 통해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평신도들에게도 기독교강요를 통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겠지만 목회자들이 기독교강요로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글을 쓰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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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칭의를 말하고 있는데 성화를 가르치면 안됩니다. 기독교강요를 알면 절대로 본문을 놓치지 않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주석 설교 신학적 잡지등과 같이 읽기를 원하면서 기록하였습니다. 기독교강요는 기본교리로서 중심을 잡아주고 주석을 참고하도록 헸습니다. < 문병호 교수의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