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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고린도전서13:1-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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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논하다가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사랑이 그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을 먼저 구하며 사랑 가운데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놀라운 은사들이 사랑과 관계가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참된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 된다.

 

1. 사랑의 중요성 (1-3)

 

[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은 먼저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뜻한다. 그러나 방언하는 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랑은 방언들보다 더 중요하다. 또 예언과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가진 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과 교훈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특별한 종류로서, ‘산을 옮길 만한이라는 말이 덧붙여져서 더욱 분명하여졌다. 그러므로 궤변가들은 이 구절을 믿음의 능력으로부터 제거하려고 잘못 해석하는데 그들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말이 의미에 많은 차이들이 있는 낱말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그 낱말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에 주의하게 될 것이다.

이제 바울은 그의 자신의 해설자이다(내가 이미 말한 대로).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믿음을 이적에 대한 것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리소스톰이 징조와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특별한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그의 전체로 보지 않고, 다만 기적을 행하는 그의 능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경우처럼, 성화되지도 않은 채 사람들이 때때로 이것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

 

또 믿음과 능력의 은사를 받은 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목적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격자가 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가치하다. 사람들은 큰 믿음과 능력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또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구제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릴지라도 그것이 사랑의 동기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즉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나 영웅심에 도취되어 행한 것 등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2. 사랑의 성격 (4-7)

 

[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바울은 사랑의 성격에 대해 증거한다. 무엇보다 첫째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이 감정이라면 그것은 영속적 감정이다. 사랑은 머리로 잠시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사랑은 조급한 심정을 극복하게 한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아내로 얻기 위해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했으나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29:20).

 

사랑은 또한 온유하다. ‘온유하다친절하다는 뜻이다. 거칠고 사나운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고 그들을 구타하지 않고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서 친절할 것이다.

사랑은 또한 투기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가 잘되는 것을 샘내거나 질투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축하할 것이다.

또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자랑은 그런 자랑거리가 없는 상대방을 낙심케 하거나 슬프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배치된다.

사랑은 또한 교만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 앞에서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사랑은 또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하다보기 흉하게 행하다는 뜻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절을 지킨다.

사랑은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다.

사랑은 또한 성내지 않는다. 사람이 진리와 공의를 위해 성내는 경우가 드물게 있고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면 기뻐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고 손해가 되면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사랑은 또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 사랑은 남을 위한 선한 마음가짐이요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참 사랑은 결코 불의를 행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참 사랑은 성결하고 의롭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그냥 죄 없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독생자에게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시키심으로 공의롭고 정당하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우리가 참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것은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고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진실한 성도간의 관계는, 비록 지금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모든 것을 참으며", 바울의 모든 것이라는 언급에서 우리는 인내해야 할 것과 또한 올바른 자세를 취하여야 할 일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악을 참지 못하고, 우쭐거리는 말로 그 악에 동조함을 나타내 보이든지, 아니면 우리의 무관심으로 그 악을 묵인함으로써 그것을 지지하게 되든지 하게 된다. 다시 이 인내는 훈련의 분량이나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인내는 인성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하여도 적용된다.

 

"모든 것을 믿으며", 그리스도인은 고의로 또 계획적으로 자신이 짐을 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속이기가 더 쉽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지혜와 분별력을 자기 자신에게서 일부로 제거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하얀 것에서 검은 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판결을 하는 신실성과 인성이며, 또한 여기서 그는 이 두 가지 덕이 끊임없이 서로 손을 맞잡고 협조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악에 기초한 의심을 통하여 그의 형제를 해치는 원인이 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인이 그 자신의 친절과 좋은 성품을 통하여 형제를 믿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사랑의 영원성 (8-13)

 

[8-10]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가톨릭교도들은 어떤 성경적인 권위도 없는 교의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왜곡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죽은 영혼들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날조한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추리한다. 기도는 사랑이 보증하고 있는 영원한 봉사이다. 사랑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 속에서 계속 살아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존 칼빈)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하게 논쟁할 의향은 조금도 없지만 그러나 내가 양보함으로써 그들이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반대 의견에 대하여 간단히 대답하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마음대로 상상하는 모험을 하여도 된다면, 축복 받은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그럴듯한 추측이다. 또 상호 중재의 책임이 오직 살아있는 사람, 곧 이 세상의 살아있는 순례자들에게만 해당되며, 그런 이유로 죽은 자들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고 내가 말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지식도 폐하리라.", 이 말의 의미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학문과 다른 은사에 있어서도 뛰어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무식한 사람들과 동일한 입장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라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나(존 칼빈)는 믿는 사람들인 나의 독자들에게,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지나치게 고통을 겪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들은 천국에서의 그들의 상태가 장차 어떠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런 문제에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우리가 그런 호기심에 빠져들지 않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추측할 수 있는 한, 또 이 구절에서 내가 이끌어낼 수 있는 불충분한 정보를 통하여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려고 한다. 이 세상의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나 어학에 대한 지식, 이와 비슷한 은사들은 내 생각에 이 세상 마지막 날이 올 때에 그대로 존재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배운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은사가 폐하여진다 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상태가 더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은사에 대한 결실을 받을 것이며, 또한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잘못 설명한다. 곧 그들은 우리의 지식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그런 속에서 발전을 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일이 예언에도 적용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바울이 나타내는 의미는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지식이나 예언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적으로라는 뜻은 우리가 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식과 예언은 불완전이 우리에게 따르고 있는 한 우리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의 불완전성을 돕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미완성의 상태로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지적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곧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은사는 다만 일시적인 것이라고 그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지적하는 이유는 은사를 받는 축복은 날마다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우리가 목적지를 향하여 향상하여 나아가는 데서 그 효력이 나타난다고 가르치려는 목적 때문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결승점에 도달하였을 때, 그때는 그 달리는 과정에서 우리를 돕던 사물들은 그 도움을 그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것을 어떤 부분적인 것과 대조하면서, 그전에 그랬듯이 동일한 방법의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우리의 불완전을 돕던 모든 것은 폐지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완전이 언제 올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때에 우리는 육체와 함께 많은 연약함을 벗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곧 뒤에서 배우게 되는 것과 같이 심판날까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논쟁 전체를 중간기에까지 적용시키려는 것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은 완전한, 이상적 인격의 특성이다. 사랑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생활 원리이며 영광스런 부활체들의 속성이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조하여,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의 일시적 성격을 말한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사랑의 가치가 드러난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간의 가치적 차이는 무한히 크다. 그러면 사랑의 중요성이 충분히 증명되며, 우리가 사모하여야 할 덕이 무엇인지 확실히 분명해진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부분적인 것에 관계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지식의 은사는 부분적인 지식에 관계되고 예언의 은사도 부분적인 것에 관계된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에 관계하던 은사들은 폐지될 것이었다.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시기는 온전한 것이 올 때이며, 폐지될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에 관계된 것들이 불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충족한 지식, 충족한 예언이 오게 되면 부분적인 지식, 부분적인 예언은 불필요하게 된다.

 

여기에 온전한 것은 무엇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언제인가?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것은 신약성경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게 된다. 신약성경 27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과 교훈에 관한 한 온전한 것이다. 사도시대에 신약성경 27권이 다 기록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충족한 지식과 교훈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지식의 은사, 부분적인 예언의 은사 등 사도시대 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후 시대에 불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중지되고 폐지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 김효성 성경강해- ]

 

[11-12]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비교를 통하여 그가 말한 것을 예증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해당되던 많은 일들이 우리가 성년이 되었을 때에는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었지만, 성년들에게는 우스운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완전한 지혜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연령에서 성숙하게 되는 완전을 이루게 되면 그때는 교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모든 일들이 그렇게 될 것이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4:14)에서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 상태로 있지 말자고 권고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구절을 살펴볼 때에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로 하겠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이제 우리는 비교를 적용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의 형태는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에 적합한 것이며, 그것을 우리의 어린 아이 시절로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하늘나라의 신비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또 그 나라의 환영을 바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바울은 다른 비유, 곧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과 같은 것이며, 또한 희미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수수께끼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 불분명성을 전달하고 있다.

 

먼저 그가 말씀의 임무와, 그것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거울에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런 것들을 지정하셨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로마서1:20과 히브리서11:3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우주의 전 구조를 포함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피조된 만물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위엄이 그 속에서 나타나 보이도록 하는 거울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특히 영적 은사를 취급하고 있는데, 이 영적 은사는 교회가 행사하는 사역을 돕는 것이며, 그 사역과 함께하는 것인데, 우리는 더 이상 지엽적인 문제를 논하지 않겠다.

 

(존 칼빈)는 말씀의 사역이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겠다. 천사들은 설교나, 다른 열등한 보조재료, 혹은 성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다른 유리한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얼굴을 다만 거울로 보듯이(in speculo)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palam se illis praesentem exhibit). 그러나 그런 고차원적인 척도의 눈을 갖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iem Dei speculamur)을 말씀과 성례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희미하게'(aenigmaticam) 보는 환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희미하게 보는 것은 그 실존 자체가 의심스럽거나 혹은 어떤 현혹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날까지 결국 그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같은 일을 고린도후서5:6, 7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믿음은 부재(不在)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tanquam absentem)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거울 속에서 그 형상을 보고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in speculi imagine).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갈 때에 가까이 계시며 또한 눈앞에 바로 나타나 보이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하여야 한다. , 우리가 그의 말씀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확실한 것이며 또한 참된 것이다. 그리고 모호하거나 난해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희미하다라고 하는 것은 비교하는 방법상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보게 될 때에 보게 되는 분명한 계시에 비하면 현재 보는 것은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어떤 다른 구절들, 곧 때로는 율법에 대하여, 또 때로는 성령 전체에 대하여, 또한 복음 전체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는 그런 다른 구절들에 대하여 어떤 면으로든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에 관한 개방적이고 적나라한 계시가 들어 있으며(우리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에 족함), 믿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우리를 불확신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런 이해불가능의 것(imvolutum)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이 계시의 몫은 그 얼마나 적은가! 그러므로 이것을 장차 나타날 다른 것에 비교할 때 희미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라는 부사는, 우리의 죽은 후에 곧 나타나게 되는 것을 지적하기보다는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 그러나 계시가 충만하게 성취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까지 연기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죽는 순간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뵙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영혼은 우리의 몸에서 떠나게 되며, 또한 외적인 사역이나 혹은 다른 열등한 조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내가 이미 지적한 대로)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논쟁 때문에 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는 지식이 경건에 대하여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은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요일3:2)에서 동일한 내용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뵙게 되는데 그의 영상(imagine)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이며 말하자면, 서로 보게 될 것이다.

 

[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초보적 성격을 말한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마치 사람의 어린 시절과 같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리다. 어느 날 심방갔다 오다가 길에서 한 성도의 어린아이를 보았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였다. “모싸님 안넹 가쩨오.” 나는 그 귀여운 말을 다 알아들었다. 어떤 유치부 아이는 선생님 사진을 보다가 선생님의 바지가 바뀐 것을 보고 말했다. “선생님도 쉬쌌어요?” 그것은 그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시기는 교회가 장성한 사람이 될 때이며 그 이유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어린아기에게는 젖병과 장난감들이 필수품이지만 크고 나면 더 이상 필요치 않듯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교회의 창설시기의 것들이며 후시대의 것들이 아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진리의 지식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불명료하다. 그것은 마치 쇠로 만든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온전하게, 충족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27권의 완성된 계시가 초자연적 은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전체적이고 명확하고 충족한 말씀일 것을 암시한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완성된 특별계시이며 그의 명료하고 충족한 말씀이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13]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사도 바울이 "믿음"을 다른 곳에서 눈으로 보는 것과 대조시킨 것처럼, 또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는 동안만 계속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우리의 죽음 후에는 계속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 구절에서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의 뜻을 아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교회의 복음 사역을 통하여서 알게 되었으며, 혹은 만일 당신이 더 좋아한다면, 그 믿음의 충만함을 알게 되고 또한 믿음의 적절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소망"은 믿음 안에서 참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으면, 그 후 계속 우리는 모든 것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 견디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소망의 어머니라면, 소망은 또한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지켜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이 이미 그 세 가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듯이, 만일 우리가 사랑이 갖는 효력에 대하여 그 탁월성을 평가한다면, 우리도 역시 이 사랑을 최고의 위치에 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또한 그것의 영속성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각각 개인의 축복을 그 자신의 믿음과 소망에서 얻게 되지만, 반면에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에 대하여 함께 공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완전한 상태에 이른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결과를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고, 또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여 본다면, 우리는 믿음이 여러 면에서 월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또한 같은 사도 바울의 증거(설전1:3)을 따르면, 사랑 그 자체는 믿음의 산물이며, 또한 그 결과는 틀림없이 그 원인보다 더 낫지 못할 것이다. 첨가하여 놀랄 만한 찬사를 믿음에 부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즉 요한 사도(요일5:4)는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듭난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또 영생을 얻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모든 축복이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축복들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몇 가지 실례만으로도 믿음이 많은 그 결과 면에서 사랑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때 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전달하였을 것이다. 사랑이 모든 면에서 더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영원성 때문에, 또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주요한 역할 때문에 더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그러나 카톨릭교도들이 만일 믿음이 정당하다면 더 위대한 것으로 묘사된 사랑이 더 좋은 것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어떻게 그들이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는가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제 이 논쟁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내가 말한 내용에서 분명히 그 해답이 주어졌다. 사랑이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가정을 하면, 그것이 더 위대하기 때문에, 인간을 정당화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이 논증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왕은 농부보다 밭을 더 잘 경작할 것이며, 제화공보다 구두를 더 잘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왕은 그들보다 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은 말보다 더 잘 달릴 것이며, 코끼리보다 더 무거운 짐을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그런 동물들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원리 아래서 천사들은 해나 달보다도 더 밝은 빛을 지구 위에 내려 비칠 수 있는데, 그것은 천사들이 그 천체들보다도 훨씬 더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당화하는 힘이 믿음의 가치나 공로에 의지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더 가치 있고, 또한 더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정당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 안에서 자유로이 주어진 의로움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위대성이나 혹은 가치는 이 안에서 작용할 분야를 갖지 못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카톨릭교도들에게 조력을 더 이상 줄 수 없는 이유인데, 만일 사도 바울이 믿음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에 두었을지라도, 카톨릭교도들을 지지하는 더 이상의 근거가 못 된다.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본절은 13장의 결론이다. 믿음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경건하고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믿는 것이다(20:30, 31; 21:24). 그것은 모든 성경을 다 믿는 것이다(24:14).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과, 영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필수적 덕목들이다. 성도에게는 믿음도 꼭 필요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고 사랑도 꼭 필요하다. 믿음은 구원의 방법이며 소망은 힘과 위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꽃이요 열매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들의 필수적 덕목들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된 믿음과 소망의 결과요 증거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이다.

 

사랑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다.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쳤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필요하며 그 중 사랑이 제일이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자. - 김효성 성경강해 - ]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