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 몸과 지체
고린도전서12:1-31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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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자연적 은사들을 나누어주심으로 지금도 교회를 세워 가신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은사, 영혼들을 보살피는 은사, 병든 자들이나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보며 위로하는 은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사 등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심으로 교회 전체가 유익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지체만으로는 몸이 되지 못하듯이, 교회도 그렇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은사들과 직분들이 있다. 성도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쓰임을 받는 자가 되기를 원해야 한다.
1. 성령의 은사 (1-11절)
[1-3절]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사람은 돈이나 건강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지식도 가지지만,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대하여는 관심이 적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 영적인 것들은 더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우리에게 참 기쁨과 평강이 되신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닌 자들이었으나 이제 그 허무한 것들에게서 구원을 받아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와서 그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살전1: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성도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구원을 받는데 그때 바른 신앙고백을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은 성령의 역사이며 구원받은 표시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죄로 죽었던 영혼들을 살리시고 그들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게 도우신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불신자들이 열광적인 말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진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물론 그 결과에 관한 한,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중생의 은사는 그것대로 다르며, 또 단순한 실제적 지식의 은사는 중생의 은사와는 별개의 것이다. 가룟 유다는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는 그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4-7절]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카리스마)는 값없이 주시는 재능을 가리키며, "직분"(디아코니아)은 봉사의 일이나 직분을 가리키고, "사역(事役)"(엔에르게마)는 일하심이나 활동하심을 가리킨다.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들과 직분들과 사역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이다. 성령께서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목적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은 개인의 유익보다 특히 교회 전체의 유익을 말하는 것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한 활동들은 교회의 유익과 영적 건립을 위한 것이다.
"직분은 ...... 주는 같으며", 교부들은 이 구절들을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증거로써 아리안파들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서 성령이 명명되었으며, 그 다음에 주님,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칭호가 명명되었는데, 일체이시며 동일한 활동이 3위에게 해당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를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존 칼빈)는 그 구절들에 대한 이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이 아리안파를 반격하기 위한 논증으로는 이것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불안하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다’라는 말과 ‘주’(혹은 주님)라는 단어 사이에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배드리는 것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면에서 봉사를 하든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반대의견은 올바른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 말들이 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억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8-11절]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지혜의 말씀 ... 지식의 말씀", 나(존 칼빈)는 지식이란 거룩한 일들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지혜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은 때때로 그들 사이에 중간적인 위치를 취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지식을 어떤 실제적인 목적으로 전환시키려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 두 낱말들은 참으로 상호간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낱말들이 서로 나란히 병행하여 나타날 때, 그들 사이에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혜는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은밀한 비밀과 고차원의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여기서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문맥이 곧 분명히 밝혀주듯이, 특별한 종류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속주, 칭의, 성화 등의 전체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그런 믿음의 형태가 아니라, 기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는 그런 형태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유다도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였을 때 바로 이런 믿음을 가졌었다. 크리소스톰은 그것을 ‘기적에 관계된 믿음’이라고 부름으로써 가볍게 그 차이성을 두었으며, 기독교인의 교훈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과 내가 방금 말한 해석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 행함을", 혹은 다른 사람들이 표현하듯이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동일한 확신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마귀를 대적하며 또한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마귀들을 권위 있게 정복하고 그들을 패주시킬 때, 그것은 효과적으로 사역하신다는 말인 "에네르게"로 표현되었다. 또 다른 실례들을 살펴보면, 바울이 박수(마술사)를 눈이 멀게 한 일(행13:11), 또 베드로가 말하는 순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즉시 땅에 쓰러져 죽은 사건(행5:1-11)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둘 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멸망시키기 위하여서는 그의 기적을 준엄하게 행하신다.
나(존 칼빈)는 예언이란 낱말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로서, 말하자면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들을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영들 분별함"이란 뜻은 그들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입증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예리한 척도가 된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통찰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적 판단력은 단순히 거짓말하는 사람들이나 또 허위에 싸인 어떤 상태에서 그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을 방지하는 것만이 아니고, 마치 그들이 선과 위선을 분별하는 어떤 표를 가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참 사역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차이점을 분별해내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각종 방언 말함" 이 은사는 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후자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떄때로 그들이 상대하여야 할 사람들의 말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통역자들은 외국어를 자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그 당시에는 이 언어를 힘든 노력을 통하여 혹은 그 말을 배움으로써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놀라운 계시로 이 은사를 받은 것이다.
[ "방언"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50회 사용되었는데, ‘혀’라는 뜻으로 17회, ‘언어’라는 뜻으로 8회(행2:11; 계5:9; 7:9; 10:11; 11:9; 13:7; 14:6; 17:15),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는 뜻으로 25회(막16:17; 사도행전에 3회, 고린도전서 12-14장에 21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언어’라는 다른 용어(디알렉토스)는 사도행전에서만 사용되었는데 6번 나온다(행1:19; 2:6, 8; 21:40; 22:2; 26:14). 특히, 사도행전2:6, 8, 11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묘사하면서 두 말이 동의어로 교대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글로싸‘라는 말이 언어라는 뜻임을 증거한다. 오순절에 약 15개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여온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디알렉토스)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행2:6) 또 그들은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디알렉토스)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2:8)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글로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말하였다(행2:11). 또 성경에 ‘새 방언[들]’(막16:17), ‘다른 방언[들]’(행2:4), ‘방언[들]’(행10:46; 19:6)이라는 표현들과,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든지, 그것을 기도와 찬송과 감사에 사용한다든지, 그것을 통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등도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언어적 성격을 잘 보인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 그러니까 대략 주후 100년경에 중단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들을 거두심으로 그것들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칼빈은, “방언의 은사와 그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워필드는,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중지되었음을 매우 밝히 가르쳤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기적들]은 사도시대 교회의 특징이었고 오직 사도시대에 속하였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거두신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하는 목적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약성경이 기록되기까지 필요했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거두어졌다. 그것은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설치된 비계목들이 건물이 완성된 후 철거되는 것과 같았다.
성령의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동일한 한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돌아보신다.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개인을 중생(重生)시키시고 점점 더 거룩하여지게 하시며 마침내 교회 전체가 든든히 세워지게 하신다. - 김효성 성경강해 -]
2. 몸과 많은 지체 (12-31절)
[12-13절]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이것에 대한 증명은 세례의 효과들로 나타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가 되고 서로 지체로서 연합하기 위하여 결합되었으며, 또한 한 생명으로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공동협력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한다.”
물론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효력을 나타내는 믿는 사람들의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는 단순히 어떤 효력이 없는 상징에 불과한 의례일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성례를 통해서 어떤 진실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을, 우리 인간 편에서 그것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실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적절한 투시력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례의 본질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외적인 상징에 의하여 그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덧붙이고 있다.
[ 사람의 몸은 머리, 눈, 코, 귀, 입, 손, 발 등 많은 지체들이 있는데, 뇌, 위, 간, 폐, 심장 등 약 128개의 기관들과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로 구성되었고, 뇌(腦)는 약 80억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도 많은 지체들과 직분들이 있어 한 교회를 이룬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 된 것은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성령 세례는 민족, 피부색깔, 사회적 신분, 직업, 경제 정도 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죄씻음받아 한 몸이 되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믿는 이들이 두 번째의 경험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받은 것이며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성령을 물로 비유하여 성령을 받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요7:37-39). - 김효성 성경강해 - ]
[14-20절]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만일 발이 이르되",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그는 좀 우월한 지체와 그보다 조금 낮은 가치의 지체들 사이를 비교하면서 각 지체들이 자신의 직무와 적절한 위치에 만족하면서 다른 부위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와 다르다고 해서 자기가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발과 손, 귀와 눈은 서로 달라도 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또 몸의 각 지체는 다 필요한 지체이다. 몸에는 눈도 귀도 코도 다 필요하다. 한 지체만으론 몸이 될 수 없다. 한 지체만 가득한 몸은 없다. 몸의 각 지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의 각 지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21-27절]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몸의 지체는 어느 것 하나도 불필요하거나 쓸데없는 것이 없다. 눈이 손더러 ‘너는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손이 없다면, 눈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집어올 수 없다. 또 머리가 발더러 ‘너는 걸어다닐 줄만 알지 생각이 부족하니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발이 없다면, 머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생각해도,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다. 이와 같이, 몸의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무시하여 쓸데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몸의 지체들 중에는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것이 많다. 눈은 약한 지체이지만 참으로 중요하며, 두뇌나 심장이나 폐 등도 약하지만, 매우 중요한 지체들이다. 또 몸의 지체들 중 덜 귀히 여기는 것이나 덜 아름다운 것은 옷을 입히거나 신을 신기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가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를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신다. 그래서 각 지체로 서로 싸우거나 분열치 않고 서로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다.
몸의 지체 중 한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 몸의 모든 지체는 그 아픔을 함께 나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지체는 없다. 모든 지체가 한 몸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는 함께 그 영광을 누리며 즐거워한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성악가는 입과 목만 칭찬을 받지 않고 온 몸이 칭찬을 받고, 금메달을 딴 마라톤 선수는 발과 다리만 축하를 받지 않고 온 몸이 축하를 받는다. 모든 지체는 한 지체의 영광에 참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 몸의 각 지체이다. 그러므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다르다고 자기는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각 지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 지체만 가지고 몸이 될 수는 없다. 또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 분쟁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 한 지체의 고통은 모든 지체의 고통이요, 한 지체의 영광은 모든 지체의 영광이다. - 김효성 성경강해 -]
[28-31절]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장의 초두에서 바울은 ‘능력들’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이제 그는 직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문제의 순서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 후 그들을 사역자들로 임명하고 그 후 그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를 다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절대로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이 교회 일을 하려고 억지로 부르는 것은 광신적인 것이며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동안 줄곧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전적으로 무지한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소명을 받았다고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연적인 순서로는 그 은사가 실제적인 직무보다 먼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대로 그것을 공공유익을 위하여 공헌하는데 사용하여야 하며, 바울도 이제 그렇게 그들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즉 직무는 그들의 서로 결합을 이룬 노력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동시에 각 사람이 특별히 공헌을 하는 그런 방법으로 분배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바울은 이 목록 속에 모든 종류의 직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은 실례를 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4:11에 직무의 목록이 다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교회 정치에 계속 필요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다면, 그가 그 모두를 설명하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그 구절을 취급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앞에서의 구절에 관계되는 한, 우리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어떤 직무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에 반하여 다른 직무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 영원한 직무는 교회 정치에 필요한 것들이다. 한편 일시적인 것들은 처음부터 교회의 기초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며, 또 이것은 얼마 후에는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교사의 직무(officium doctbris)는 제 1급에 속하며, 사도의 직무는 제 2급에 속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도들을 임명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온 세상에 두루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특정 지역이나, 교구를 할당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모든 나라와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들 속에 들어가 주님을 위한 대사로서 일하기를 원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일정한 영역, 곧 자신들의 교회를 각각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과는 다르다. 목회자들은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책임으로 맡겨진 교회를 돌보는 데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4:11에서 바울은 목록에서 사도들 뒤에 복음 전하는 자를 포함시키고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최상위의 순서에서 선지자들로 곧장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존 칼빈)는 그가 선지자들이라는 말을,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풀이하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성경 말씀을 제시하는 유일한 은사를 받은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울이 모든 다른 은사에 대하여 예언을 더 좋아하는데 그것은 예언이 교회의 더 큰 근원이며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에 거의 적용될 수 없는 말, 곧 교회의 큰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가 선지자의 일을 규정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가 하고 있어야 할 일들을 취급하였을 때, 그는 그가 위로와 격려 교훈에 전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예언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선지자들이 (1) 성경에 관한 탁월한 해석자들이며, 또한 (2) 교회의 일에 직접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지혜와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고 적절한 말씀을 주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는 사자들인 것이다.
그들과 교사들 사이의 차이점이 지적될 수 있는데, 교사들의 임무는 종교의 순수성이 교회에서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건전한 교리를 널리 지키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제는 다른 방법으로도 또한 사용되고 있으며, 아마 여기서는 오히려 목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누가가 또한 선지자들과 함께 묶어서 취급하고 있는 사도행전13:1의 경우에서와 같이, 가르치는 능력의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더 좋아한다면 말이다.
내가 선지자의 임무를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 중에서 두세 사람만이 말을 하여야 하며, 더욱이 교대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그들의 행동과 일치되는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의 견해는 여기서 선지자들에 관계되는 것은 예언과 경고, 약속, 그리고 성경의 모든 교훈을 당시의 교회의 필요성에 적절하게 적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잘 알리는 데 세련되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이 점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갖는다면, 나는 그럴 여지가 있다고 충분히 인정하며, 그것 때문에 그 사람과 다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다만 그 흔적과 그림자 정도만을 유지하는 정도로 오랫동안 박탈당하여 온 은사와 임무에 관하여 우리의 마음을 결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병을 고치는 은사", 나는 이미 12장에서 밝힌 바 있다. 그것은 다만 바울이 그 은사들 자체에 대하여 그 은사들을 실행하는 만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서로 돕는 것", 바울이 직무들을 여기서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는 까닭에, 나는 "돕는 것", 즉 유지, 혹은 도움이란 낱말을 연약한 자를 격려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말이 무슨 뜻이 되겠는가? 분명히 그것은 오래 전에 교회에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직무와 은사의 두 가지를 언급하는 말이거나, 혹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말하자면 집사의 임무였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두 번째의 경우를 더 지지하고 싶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12:8에서 두 종류의 집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나는 집사 문제에 대하여 관계된 주석서에서 언급하였다.
"다스리는 것", 나는 다스리는 것을 훈련의 책임을 진 장로들(Seniores)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에 ‘장로회’(senatus)라는 것이 있어서 백성들을 바로 살도록 지도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디모데전서5:17에서 나타내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장로들의 이중적인 질서(duplicem ordinem)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성이나 경험, 그리고 권위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장로들이 이 다스리는 책임을 감당하였다.
"각종 방언", 바울은 각종 방언 속에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것과 그 언어들을 풀이하는 은사 두 가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각각 서로 별개의 은사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많은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가 알아야 하는 실제적인 교회의 말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 해석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 사도이겠느냐", 물론 한 사람이 많은 은사를 받는 일이 있으며, 또 두 가지 직무를 감당하는 일이 있으며, 또한 그 임무를 잘 감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타난 바울의 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만만하여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많은 은사를 받은 것만큼 그 직무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전체의 조직체를 이룰 수 없다는 그런 방법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이 구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 교만이나 왜곡된 질투, 오만, 형제를 멸시하는 일, 악의, 이기주의, 그리고 그런 종류의 모든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데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가장 좋은 길", "가장 좋은", 이 말은 ‘가치가 높은’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 문맥에 아주 잘 어울린다. 어떻게 하든 그것은 그 의미에 별 차이를 주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을 확고하게 세우는데 가장 효과적인 그런 은사들을 소중히 하고 또 그것을 갈망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