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
고린도전서10:1-33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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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 대한 지식을 가진 성도라도 우상의 생각을 가진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지 않도록 행해야 한다. 즉 그들이 우상제물을 우상제물인 것으로 알고 먹어 우상숭배의 죄에 떨어지게 하지 않도록 덕스럽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고 그를 범죄를 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 실패의 본보기들 (1-13절)
[1-4절]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았다. 구약성경에 증거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제적 예로서 모든 인류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였던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 광야를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 다 구름 아래 있었다. 구름기둥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출13:21-22). 또 그들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다. 그 바다는 홍해이었다(출14:21-22).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연합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죽음의 바다에서 구원을 얻었다. 또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고(시78:25; 105:40),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다(출17:5-6).
바울은 그 반석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양식이시요 참 음료이시다(요6:48, 51, 55; 7:37-39). 그는 만나같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같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되신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울은 먼저 세례를 취급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의 뜨거운 태양열에서 보호하신 것을 가르쳤으며, 또한 그들의 행진로를 인도하시고 바다를 건너게 하신 것은 참으로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세례와 같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또한 바위에서 물이 흘러넘쳤으며, 만나와 성찬에 부합하는 성례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이 모세의 관할 하에 혹은 그의 지도력 아래 있었다는 뜻이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1:13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에 들어가게 되며, 또 그 둘째 이유는 세례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의 이름만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모세의 인도와 관할하에 있는 그들은 ‘모세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어떻게, ‘구름과 바다에서’,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두 번씩이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 대해서 두 가지 징조가 언급되고 있다고 나는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일치하는 세례 한 가지에만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질문이 제기된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한 이런 은사들은 일시적인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이 틀림없다. 구름이 태양열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였으며 그들의 길을 안내하여 주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이 현실 생활에 관계되는 육적인 은사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홍해를 건넌 것은 바로의 잔학으로부터 피한 것이며, 또한 절박한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그들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례는 영적인 것이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 바울은 주님의 최고의 성만찬에 해당되는 다른 성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만나와 반석에서 흘러내린 물은 육신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영적 영양소도 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육신을 위한 영양소를 공급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위에 그것들이 다른 목적을 위한 봉사에 방해물이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육신의 양식의 필요성에 직면하였을 때, 그는 동시에 영원한 영혼의 복리도 베푸신 것이다.
이 두 가지 면은 쉽게 조화가 되며, 그것은 요한복음6:31 이하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곤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만나를 우리 육신을 타락하기 쉽게 하는 음식으로, 또한 그것을 우리 영혼의 참 양식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의 말씀은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성경 저자들이 성례를 취급할 때, 혹은 그 문제에 대한 다른 일들을 취급할 때, 때때로 그 방법이, 그들이 취급하고 있는 역량에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바울은 할례를 항상 같은 방법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는 할례를 ‘믿음의 의로운 표’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할례를 단순한 외형적 상징에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과 할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 그는 그들이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례는 저주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조상들이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라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성례의 능력과 효력이 어떤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 그는 율법시대의 성례가 오늘 우리 시대와 동일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만나가 영적 양식이었다면, 그 적나라한 모습들은 성례에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참 형태의 실상이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공허한 외형으로 우리를 양육하실 만큼 그렇게 속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적은 참으로 표적이며, 또 그 자체의 본질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옛날의 증거와 오늘 우리의 그것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두 번째 요점을 취급하고 있다. ‘옛 율법의 성례는 다만 은혜를 나타낸다는 것은 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교리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성례는 은혜를 베풀어준다.’ 이 구절은 그 모순을 논박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례의 실체가 우리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옛날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조상들이 율법 아래서 실체 없는 표징을 가졌다고 상상하는 것은 소르본 학파들의 사악이다. 나는 그 표징의 효과가 율법 아래 있었던 구약의 우리 조상들에게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훨씬 더 풍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므로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다만 적은 차이밖에 없거나, 혹은 보통 말하는 것처럼, ‘다소’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것은 약간이고, 우리는 더 충분히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실체를 가진 데 대하여 그들은 형상만을 가졌다는 그런 경우는 아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물을 흘려내는 바위가 마치 그 바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들이 가는 곳마다 흘러넘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6절]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남자들 약 60만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과 본보기가 된다. ‘거울’이라는 말은 ‘예들, 본보기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본보기들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 같이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7-8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와 참 지식의 시작이다(잠1:7). 우리는 하나님 외의 것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육신적 쾌락도 돈도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바꿀 수 없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순종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인간관계의 죄들 중 첫째로 중요한 죄는 간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부 관계를 벗어난 음란 행위들을 매우 미워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음행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큰 재앙으로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부부의 관계를 중시하신다. 우리 각 사람은 가정의 순결과 부부의 사랑을 잘 지켜야 한다.
[9-10절]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주를 시험하다가......우리는 저희와 같이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한 놀랄 만한 증거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불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중재자로 그를 통하지 않고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 의하지 않고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행에 항상 그들과 함께 하셨던 천사는 때때로 야웨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때 그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또 바로 그때, 그는 이미 그가 우두머리였던 교회의 안내자였다.
이스라엘 중에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의심하였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았다. 이것은 불신앙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고 늘 함께하시며 도우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질병에 걸렸을 때나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다.
[11절]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말세를 만난 우리"라는 말은 신약시대가 말세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지구의 역사는 현재까지 약 6천년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책이다. 지질학에 의한 수십억 년의 연대는 주로 방사성 우라늄 동위원소의 반감기에 의해 측정한 것인데, 지금부터 수천 년 전의 지구의 상태를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추론일 뿐이지 결코 확증된 연대가 아니다.
아담은 창조된 후 거의 천년 가량 살았고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노아가 태어났다. 아담 창조 후 2천 년경에 아브라함이, 3천 년경에는 다윗이, 그리고 4천 년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자기 아들을 보내주셨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2천년이 지나고 있으니 확실히 지금은 말세지말 즉 말세의 마지막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또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경계가 된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빠져 실패자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12-13절] 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섰다"는 말은 믿음 안에 섰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정상적 상태이다. ‘넘어 진다’는 말은 범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기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것도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주를 의심하는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고 믿음으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늘 의와 선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으로써,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며, 또 이 불변의 확신 위에서 신실하고 담대하게 사단과 죄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의 연약함을 기억하면서, 두렵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또한 그의 염려 중에도 기쁨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거룩한 일이며, 성경 여러 곳, 특히 로마서8:35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결코 믿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확신은 그 근원을 무관심에 두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로 말미암아 매우 자만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들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아주 무관심할 때, 그렇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들이 모든 사단의 공격에 대하여 공개적이라는 결과를 안고서 자신들의 위험권 밖에 있는 것처럼, 잠자코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확신에서 야기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자기만족을 바울이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를 바울이 원했던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확신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들이 염려하고 불신하는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든지 혹은 가톨릭교도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그들의 구원에 대한 의심 때문에 불안해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을 믿는데서 온 잘못된 확신으로 부풀어 잇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 아닌 사람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연약함을 멈추라고 그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골로새 교인들의 견고함이나 혹은 “믿음의 굳은 것”을 칭찬한(골2:5)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믿음에 굳게 서기를 그들에게 부탁하고 있다(골2:7).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바울이 좀 전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런 무서운 본보기를 듣고 난 후에, 그들이 괴로움을 당하거나 놀라고 또 낙담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이것을 기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권고가 어떤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는 회개의 기회가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도우실 것을 기억하고,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상숭배나 음행이나 불신앙이나 원망 등의 죄를 범하지 말고 오직 범사에 믿음으로 행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2. 우상숭배를 피하라. (14-22절)
[14절]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상숭배는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육신의 쾌락이나 돈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바울은 골로새서3:5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불렀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
[15-18절]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축복의 잔과 떼는 떡은 성찬을 가리킨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신 속죄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찬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며 그 떡을 조금씩 떼어 나누는 것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신비적으로 한 몸이 됨을 나타낸다. 또 제물을 먹는 자들, 즉 화목제물을 드린 후 그 일부분을 먹는(레7:15-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에 참여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주시는 은택을 누리는 것이다.
[19-20절]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미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였다(고전8:4). 이방인의 제사는 종교적 성격을 띤다. 조상들을 위해 드리는 제사나 차례는 단순히 조상을 공경하는 행위가 아니고 종교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우상이나 조상신은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악하고 헛된 일이다.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들의 우상을 인정하고 그 우상숭배에 빠져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1-22절]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성도는 이방인의 제사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신자가 섬기는 우상이나 조상신을 인정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진다면 주께서 우리에 대하여 노여워하시고 질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한 분만 섬기며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다투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이며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의 상에 참여하는 것, 즉 그들의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런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며 질투하시게 만드는 가장 큰 죄악이다.
3. 덕을 세우라. (23-33절)
[23-24절]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울은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과 자유함이 있음을 강조한다. 8장에서도 그는 성도들이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고 자유함과 권리가 있음을 말했었다(8:1, 7, 9, 10, 11절).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가하며 우상제물에 대해 자유함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8장부터 10장까지에서 우상제물에 대한 교훈의 방향은 분명하다. 우상제물은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상제물을 먹으라는 교훈이 아니고 먹지 말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서이지, 우상제물 자체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주를 아는 자라면, 우리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이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25-26절]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식물을 먹는 문제에 관하여, 그는 일반적인 진술을 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즉 첫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나 깨끗한 양심으로 먹을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실제적인 상황에서 약한 사람들의 양심에 손상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자유의 수정을 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논쟁의 결론 부분에 가서는, 이것이 그것에 대한 두 부분을 갖게 된다. 그 첫째는 중립적인 일들에 있어서 우리가 자유와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자유의 훈련이 사랑의 법칙에 따라 통제를 받도록 그 수정에 관한 것이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치 말고 사서 먹으라는 뜻이다.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어라’는 말씀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 혹시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임을 알게 될 때 약한 자들의 양심에 거리낌이 될 수 있으므로 묻지 말고 그냥 먹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에 우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상은 신이 아니다. 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청지기의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27-30절]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불신자가 식사 초청을 할 때 성도는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식사 초청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절 없는 일일 것이다. 그때 그 앞에 차려진 식탁에 우상제물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함께 동참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먹으면 된다. 그러나 어떤 이가 식탁의 음식물 중 어떤 것을 우상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는 알게 한 자의 양심을 위해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비록 지식 있는 자는 그것에 대해 자유함이 있을지라도, 함께 식사하는 이들 가운데 연약한 자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제물이라고 알게 된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옳고 그래야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하는 것, 곧 덕을 세우는 것이 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먹는 일에 비방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31-33절]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이것은 모든 성도의, 아니 모든 인생의, 삶의 제일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게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43:7). 바울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였다(고전6:19-20).
32-33절을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같이, 너희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넘어지게 하지 않는 자가 되라.” 이것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여 행하라는 교훈이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