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교제
고린도전서16:1-24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헌금은 교회의 공 집회의 한 중요한 순서이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하셨다. 십일조와 헌물은 신약시대에도 헌금의 모범이 된다.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다.
헌금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헌금은 전도자들과 교회의 전임봉사자들의 생활비를 위해 사용되고 또 교회 안의 물질적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헌금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덕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한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세워서 투명성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으로 범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남자답게 강건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복종하고, 또 그런 자들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자. 또 복음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사역자들을 존중하자. 또 우리는 자원함으로 주의 일을 하자.
1. 성도를 위하는 연보(헌금) (1-4절)
[1절]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헌금에 대한 교훈이다. ‘연보’라는 원어(로기아)는 ‘모금’(collection)이라는 뜻이다. ‘성도를 위하는’이라는 말은 헌금의 목적을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부탁하였었다(행24:17; 고후8, 9장).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헌금의 목적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전도와 구제를 위하여 물질로 섬기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라는 말씀은 성경의 교훈이 어느 한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보인다.
[2절]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바울이 목표하는 것은 그들이 적기에 연보를 준비하여 두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조심성도 없이 급하게 서둘러서 한 일이 제대로 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을 각 사람이 그 능력에 따라, 안식일, 곧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이 예배드리러 모이는 날 헌금하라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카다 미안 사바톤)이라는 구절을 ‘첫 안식일에’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에, 혹은 그들이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나 다 모든 안식일에 연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편리한 말로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 둘째로, 신자들이 성도들의 모임을 즐거워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모임은 그들에게 부가적인 자극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식일이 여기서 ‘주의 날’로 대치되었다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 초기에 사도들이 그들이 이미 친숙하였던 그날을 지켰던 것은 매우 그럴듯한 일이다. 그러나 후에 유대인들의 고지식한 준수가 그것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다른 것으로 대치하였다. 이제 주의 날은 모든 다른 사람들이 더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율법의 그림자를 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생각나게 하는 날이다.
마지막으로, 그 구절에서 우리는 신실한 자들이 그들의 일을 멈추고 휴식을 하는 특별한 날을 항상 가졌었다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날은, 그런 일이 날마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예배를 위하여 함께 모이는 날로 지정되어야 한다. 다른 구절에서, 바울이 한 날과 다른 날 사이의 어떤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금하였는데, 우리는 그가 제도적이거나 외적인 질서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 존 칼빈 주석 - ]
‘매주일 첫날’은 일요일 곧 주일(主日)이다. 이 날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여 저축하라는 지시는 초대 교회가 이 날 공적인 집회로 모여 헌금했음을 암시한다. 사도시대 직후인 소위 속사도들의 글들에 보면 초대 교회들이 더 이상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았고 일요일 곧 주일에 공적 예배를 위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후 100년경의 바나바 서신은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날을 지킨다”고 말했고, 주후 107년경 익나시우스의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도,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그들의 삶을 형성한다면,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주후 150년경 순교자 저스틴도,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라고 말했다.
[3-4절]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은 헌금을 취급할 때 교인들의 시험과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이든지 그들을 보내도록 처리하였다. 한글개역에는 ‘인정한 사람’이 단수명사이지만, 원문에는 ‘인정한 사람들’로 복수명사이다. 헌금은 두 사람 이상에 의해 바르고 깨끗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교회의 일꾼이 마귀의 시험을 받아 거룩한 헌금을 오용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큰 화가 될 것이다.
2. 성도의 교제를 원함 (5-9절)
[5-7절]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교제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길에 그들에게 잠시 들리기를 원치 않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며 겨울도 지나기를 원했고, 또 그들이 그를 그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원했다.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만한 것인지! 거짓과 미움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교회처럼 진실과 사랑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그런 교제를 기대할 수 있다.
[8-9절]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본 절은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대략적 시기와 장소를 보여준다. 그것은 사도행전 19장에 해당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그 도(道)를 비방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2년 동안이나 했고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의 사역이 에베소에서 큰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라는 말씀은 그의 전도 사역에 큰 열매가 있었음을 뜻한다. 사도행전19:19-20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5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증거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의 문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힘있는 말씀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해야 한다.
3. 디모데와 아볼로에 대한 증거 (10-12절)
[10-12절]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디모데는 바울처럼 주의 일을 힘쓰는 자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그를 존중하고 예우하라고 권한다. 여기에 복음사역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의무가 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무엇을 명령하거나 그의 심령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주의 사역자들은 겸손히 서로 존중해야 한다. 또 주의 일은 자원함으로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4. 마지막 권면 (13-18절)
[13절]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본 절은 네 개의 명령어로 되어 있다: (1) 깨어라(그레고레이테 ), (2) 믿음에 굳게 서라(스테케테), (3) 남자다워라(안드리제스데), (4) 강건하여라(크라타이우스데).
세상은 악하고 마귀와 악령들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백방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교훈하셨다(마24:42).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사람이 죄를 짓고 세속적 쾌락에 빠지면 영적으로 해이해지고 잠이 드는 것이다. 또 성도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엡2:8).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우리로 낙심하고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려 한다. 또 우리는 남자답고 강건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의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담대하고 강건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다(요16:33).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말했다(엡6:10).
[14절]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교회에 필요한,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들에 필요한, 중요한 덕은 사랑이다. 고린도교회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으로 일치 단합하여야 했다. 사랑은 이상적인 인격의 덕이다. 우리 속에 참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유익을 끼치며 주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15-18절]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바쳐진 가정이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등은 교회를 섬기는 헌신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에게 찾아왔고 정신적으로 또 아마 물질적으로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바울과 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이것은 아첨하는 칭찬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온 인정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 같은 자들에게와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고 또 이런 자들을 알아주며 인정하라고 권면한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의 복음의 일을 위해 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한 봉사자들을 존중하고 알아주고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헌신된 자들을 세우셔서 자기의 양들을 지키시고 양육하게 하시고 교회가 진리 안에서 바르고 질서 있게 진행되기를 원하신다.
5. 문안과 축복 (19-24절)
[19-21절]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의 가족들로서 서로 진심으로 그리고 거룩한 사랑으로 교제하고 문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은, 온 세계의 성도들은 한 교회를 이룬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교회들과 유럽의 교회들의 차별이 없다. 사도시대에는 또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다. 외적으로 훌륭한 건물이 있어야만 교회가 아니고 집에서 모이는 교회도 참된 교회일 수 있다. 교회의 교회다운 점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섬기며 순종하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데 있다.
[22-24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 서신의 결론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받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이 그들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사랑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이 그들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사랑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고백하는 사람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그는 가장 준엄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바울은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외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물질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또한 공허한 겉치레만을 즐기면서, 교회 안에서 혼란을 조장하는 사기꾼들과 위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파문의 저주를 선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더한 저주를 빌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기를 그가 원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증오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나는 오히려 신자들 앞에서 저주받기를 그가 원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1:8에서, 그가 복음의 타락을 가르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하였을 때, 그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배척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꺼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하여 보자. 곧 “그들이 뿌리째 뽑혀 멸망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독충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부패한 욕망을 위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유익을 취하는 그런 사람들처럼 유해한 존재는 참으로 없다. 참으로 성실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형제 앞에 걸림돌이 되는 어떤 방해를 할 수 없게 함으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때, 이 악의 근원을 그가 지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 존 캴빈 주석 - ]
마지막으로, 바울은 두 가지 내용을 말한다. 첫째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랑 없이 내뱉은 경박한 저주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 사항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주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 외에 이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그 분 외에 아무 곳에서도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와 위로를 찾을 수 없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시다. 더욱이 그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셨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자라면 어찌 주를 사랑치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은 원어로 ‘마라나 다’(marana qa)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람어로서 ‘주여, 오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말씀이다.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말씀으로 끝난다. 요한계시록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 주께서 다시 오시면 모든 일이 완성될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주를 사랑한 자들은 영광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인들과 악인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보상, 보응]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주의 사랑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자. 또 우리는 참으로 구주 예수님을 사랑하자. 또 우리는 주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자.
- 김효성 성경강해를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