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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고린도전서7:1-24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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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자는 부부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제의 은사를 주신 자라면 독신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제하지 못하여 시험해 떨어지며 범죄를 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 결혼한 부부는 서로 나뉘지 말아야 한다. 혹 부득이하여 나뉘더라도 재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든지 다시 화해하여 재결합하든지 해야 한다. 부부 중 한 쪽이 믿지 않을 경우 그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쪽이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성도는 이에 구속받을 것이 없이 헤어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1. 결혼의 원리 (1-9절)
(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1-2절).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가까이 하다’는 ‘만지다, 붙잡다, 육체적 관계를 가지다, 결혼하다’는 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혼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좋은 제도이다. 창세기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잠언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결혼은 죄가 아니며(고전7:28) 결혼을 금하는 것이 오히려 악령의 사상이다. 디모데전서4:1-3,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바울이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까닭은 임박했던 환난 때문이었다. 26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심한 죽음의 환난이 닥치면 가족 관계는 즐거움과 행복이 아니라 근심과 짐이 될 수 있다. 또 성도는 결혼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32-33절,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오늘날도 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자는 독신(獨身)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음행의 연고로", 이 구절은 또한 일부다처제에도 위배가 된다. 사도 바울은 여자들마다 한 남편을 두어야 하고 남편도 부부간에 서로 의무를 지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편이 일단 아내에게 그의 신실함을 서약하였다면, 그는 결코 아내를 떠나서는 안 되며, 이것은 분명히 재결합되어져야 한다.
독신의 장점이 확실히 있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의 불가피한 목적도 있다. 결혼의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서로 교제하며 돕기 위함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교제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 사랑의 교제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다.
둘째는 자녀 출산을 위해서이다. 창세기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해서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런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다. 결혼은 음행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다. 잠언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한다.
(2)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3-4절)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결혼한 남녀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자기의 의무들을 다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다정한 표정과 따뜻한 말로 그 사랑을 표현해야 하며 경제적 책임도 다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 양육, 식사 준비, 빨래, 집안 청소 등을 감당함으로 남편이 바깥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들은 부부 생활의 의무도 포함한다. 아내도 남편도 이제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해서는 안 된다. 결혼한 자는 이제 한 몸이므로, 자기 몸을 상대방이 주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부의 감정은 항상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그의 필요를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부부 관계에 불만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3)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5절)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말은 "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말로서 상대방이 원할 때 거절치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기 위해 분방할 경우도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할 것이며 기간도 너무 길지 않게 ‘얼마 동안’ 해야 할 것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처럼 보이게 매혹시켜서, 우리가 아내와의 교제를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소명을 포기하고, 다른 생활상태를 갖게 한다. 다시, 바울은 얼마나 사람들이 자애에 빠지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기쁨 속에 도취되기를 열망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자신의 열정에 만족하면서, 아내에게 무관심할 뿐 아니라, 그를 경멸하게까지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때때로 아내가 싫어지는 느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바울은 결혼에 있어서 서로간의 의무에 대하여 이렇게 염려스럽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거룩하기 때문에, 혹은 한 사람에게 매이지 않는 방종스런 생활을 갈망하기 때문에 독신생활을 갈망하면서도 결혼을 한 사람들에게 이런 사상이 들어간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부부의 긴밀한 결합을 기억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남자는 혼자로서는 반신일 뿐이며,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이런 생각으로 자신들을 제어하여야 한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이 필요로 할 때,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합의상", 바울은 ‘합의상’이라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는데, 첫째로 그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부부 한 사람만의 절제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곧 두 가지 다른 예외를 첨가하고 있다. 첫째는 그 분방이 일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이유는 계속적인 분방은 그들의 힘으로 자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것이고, 또 사단의 간계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외는 절제 그 자체가 선이고, 또 거룩한 행위인 것처럼, 혹은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이나 되는 것처럼 부부생활을 절제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더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그 일을 위하여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문장에서 그렇게 주의 깊은 설명을 하였는데도, 사단은 더 우세한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생활에 대한 부적절한 갈망의 수단으로서 불법적인 이혼을 자행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남자들은 아내를 버리고, 수도승처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고독한 생활을 택한다. 아내들은 남편의 뜻을 거역하고, 독신의 배지를 휘장처럼 달고 다닌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서약한 그 신의를 배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으며, 또 그들이 결혼의 멍에를 깨뜨림으로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도 떠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제 옛 사람들인 무지 때문에 과오를 범하고 잘못된 생각과 일생을 극기하겠다는 맹세를 경솔하게 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즉 ‘만일 결혼한 사람이 때때로 일정 기간 동안 부부의 친교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그들이 영원히 절제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한 힘이 그 한계를 넘어서 어떤 것을 시도하게 될 때,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을 격퇴할 수 있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만일 무기와 방어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도록 기도해야지’라고 그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모한 우리의 싸움에 하나님께서 헛되이 우리의 방어자가 되시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절제하지 못함을 인하여’라는 구절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사단의 유혹에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추방하고, 우리의 보호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친교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무모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며, 참으로 그들은 저항에 대한 영원한 힘을 하나님과 의논하는 사람들과 같다.
(4)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6-7절)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용인하는 것뿐이다. ‘권도’라는 말은 ‘허용, 용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고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다(8절). 이 말씀들에서 그는 분명히 독신(獨身)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마10:10-12).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이 관계에서 있어서는 자유 선택권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여기서 아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다 주어지지 않은 특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마19:11)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여기서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독신생활은 놀라운 은사이며, 그것이 ‘은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나(존 칼빈)는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바울이 말씀한, 모든 사람이 이 은사를 받지 못하고,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하여 무모한 서원을 하여서는 안 되며, 만일 당신이 당신의 소명을 살펴보지 않고, 또한 당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은사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옛 사람들이 독신생활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잘못에 빠져 들어갔다. 왜냐하면 들은 독신생활이 모든 미덕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인 양 그것을 찬양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도 위험스런 오류는 계속되고 있으며, 사실은 거의 1%정도밖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독신생활이 아주 높게 평가를 받는 것처럼 생각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무모하게 영원한 독신생활을 서원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려는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나온 오류는, 교회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결혼이 그들의 성직 생활의 거룩함을 지키기에 적절한 생활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멸시하고 영원한 독신생활을 무모하게 서원하는 자들의 오만을 벌하셨다. 첫째는 그들의 은밀한 번뇌스런 정열의 불길 때문이요, 둘째는 가증스럽고 불의한 행위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성직자들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전횡적인 독단의 결과로 교회는 많은 유능하고 성실한 성직자들을 빼앗기고 있다. 왜냐하면 정직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그 함정에 빠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때까지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번뇌가 그 악취를 발할 것이다.
(5)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8-9절)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결혼한 사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에라스무스의 추리는 변덕스럽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놀랄 만한 겸손의 표본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극기 생활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극기생활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위하여 그 치료제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경고의 사람이 되고 있다. 즉 만일 우리가 남다른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사람은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다. 연약한 감정은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다(딤전 5:14). 결혼의 한 목적은 음행을 방지하는 데 있다. 또 결혼한 자는 부부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제의 은사를 주신 자라면 독신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제하지 못하여 시험해 떨어지며 범죄를 해서는 안 된다.
2. 결혼한 자에 대한 교훈 (10-24절)
(1)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0-11절)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결혼한 자들은 서로 나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이혼을 금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이기도 하다. 마태복음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이혼의 합당한 경우는 상대방이 음행했을 경우이다(마5:32).
"그대로 지내든지", 정당한 이혼이 아닌 경우 여자가 부득이 남편을 떠나 별거하게 되면, 재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든지 그 남편과 다시 화해하여 합하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의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5). 남편도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음행의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격상 결함이나 무서운 질병이나 또는 자녀를 출산치 못하는 것 등은 이유가 될 수 없다.
"만일 갈릴지라도", 이것은 음행으로 인하여 내쫓김을 받은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시에 그것이 초래하였던 형벌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로마법에서는 그것이 으뜸가는 범죄였으며, 일반적인 ‘국제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의 생활 태도가 자기에게 맞지 않다거나, 혹은 아내의 용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어떤 사실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서 아내와 이혼하는 일이 있으며, 또 때로는 부인들이 그 남편이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아내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혼을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사도 바울은, 결혼은 이혼이나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도 결코 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은 이름으로 거룩하게 이루어진 계약이므로, 그것은 인간의 마음대로 지속하거나 혹은 (인간의 뜻대로 깨뜨려지는 그런 무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요약한다면, 다른 계약들은 단순히 인간의 동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당사자들의 합의만 이루어지면 파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결혼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그 결혼을 후회할지라도, 그들은 ‘그 유대를 끊는다’는 일(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처럼)은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새로운 그들 자신의 조정방법을 모색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자연권이 파훼될 수 없다면, 우리가 아미 말한 대로, 이것은 더구나 중요한 현세의 자연적 결속에 대하여 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 헤어진 아내와는 결혼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명령에 있어서 그는 별거가 용납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아내가 남편을 떠나 살아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그 남편 집에서 쫓겨났거나, 버림을 받았다면, 그 여자는 그런 상황에서 그 남편의 지배력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남편이 그 결혼을 무효 시킬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남편과 갈라서도 된다거나, 혹은 마치 그들이 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과의 공동생활에서 벗어나도 좋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비록 남편과 다시 결합하지 못할지라도 그 결속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이 다른 남편에게로 갈 수가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아내가 음란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극기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여자가 계속 정욕에 불타고 있는데 결혼의 치유책을 그에게 거절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그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태가 잘 진전되어가지 않을지라도 우리를 제어하시고 주장하실 분은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그렇게 하신다. 만일 아내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을지라도, 그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다른 아내를 구할 명분은 못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결혼 후에, 남편이 어떤 병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한다면, 이런 근거로 아내는 재빠른 어떤 다른 상황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제하지 못함을 인하여 그 치유책으로써 합법적인 결혼을 제정하여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잘 이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도록 하며, 우리의 잘못에 대한 고통을 감수하도록 하자. 결혼을 하였으면, 만일 사태가 우리의 기대 이하로 악화되어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소망을 갖도록 하자.
(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2-13절)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나머지 사람들’이란 일반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결혼한 두 사람이 서로 종교가 같지 않을 때에, 그 모순되는 결혼은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첫째는 믿는 사람이 불신자인 상대방에게서 헤어져서는 안 되며 그 상대방이 버리기 전에는 결코 이혼을 하면 안 되다는 것이다. 둘째로, 만일 부부 중 불신자가 종교적인 문제로 상대방을 버린다면 그때는 그 버림으로 인하여 결혼의 결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미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그들에게 제시한 것 때문에 그들이 어느 정도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 바울이 그 자신을 이 법칙들의 근원으로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아무 것도 하시지 않은 그런 법칙들이 순전히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뜻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율법이나 선지서의 어느 부분에도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설명이 없으므로, 그는 이런 방법으로 그가 말하는 것에 개인적인 책임을 지면서 불경건한 자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두뇌의 산물인 것처럼, 모든 것이 경솔하게 처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후에 그의 설명이 단순히 그의 주관적인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앞에서 쓴 것과 일치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의 존엄성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증오하고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를 쫓아냈다면, 그 아내가 불신자인 남편과 더 함께 있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3)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바울은 믿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결혼의 친밀성은 유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의 반신이며,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아내가 여러 가지로 남편의 동반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남편이 믿지 아니하는 아내와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마치 아내가 남편을 더럽히기나 하는 것 같은 모독에 대한 두려움은 없으며, 오히려 그런 결혼이 더 거룩하고 순결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가 결혼의 계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결혼을 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안 믿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는 곳에, 혹은 믿는 여자가 안 믿는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 이 충고가 적절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고후6:14,15) 그러나 이미 그렇게 결혼한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없다.
“거룩하게 되고", ‘거룩하게 된다.’는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내면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고,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본인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그가 아직 믿지 않을지라도, 그와 그의 가정은 이미 세상 사람들과 또 그들의 가정들과 구별되었다.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 믿는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도 거룩하다. 부모 중 한 쪽만 믿어도 그러하다. 이것은 언약적인 의미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이 증거되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출생한다. 여기에 유아세례의 근거가 있다.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통하여 내면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자녀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이것은 결과에 기초를 둔 논증이다. 즉 ‘만일 너희 결혼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때는 그 결혼에서 출생하는 자녀들도 깨끗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다. 그러므로 너희 결혼 역시 거룩하다. 그러므로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의 불신앙이 그 자녀의 거룩한 출생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혼 그 자체를 순결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목할 구절이며, 또 가장 심오한 신학이다. 그것은 믿는 자의 자녀들이 어떤 특별한 특권에 의하여 다른 자들로부터 구별되었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이 교회에서 거룩하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 곧 에베소서2:3의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와 다윗의 부르짖음인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는 성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 죄와 형벌을 받은 일반적인 번식이 있다고 나(존 칼빈)는 대답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들이 믿는 자의 자녀이든 불신자의 자녀이든 간에 모두가 다 이 저주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불신자일지라도 육신을 따라 자녀를 낳으며 그들은 심령으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일지라도 육신을 따라 자녀를 낳으며 그들은 심령으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두가 다 똑같은 본래의 상태에 있으므로, 그들은 죄에 종속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믿는 자들의 특별한 권리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 근원을 언약의 축복에 두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중재로 말미암아 본래의 저주가 소멸되고 또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본래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11:16에서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생명의 언약 속에 그들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르신다. 이제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그 기원을 두었던 동일한 구원의 언약이 우리에게까지 베풀어진 것이다.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분리되기 위해서, 일반적인 인류의 상태에서 면제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왜 우리는 그 표식(언약)을 숨겨두어야 하겠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그들을 그의 교회로 인도하셨다면, 왜 우리는 그 표식을 그들에게 부인하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엄밀히 믿는 자의 자녀들이 어떻게 거룩하며, 또 그런데도 어떻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타락을 하는지, 여러분은 로마서10장, 11장에서 그것을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4)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5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문제를 취급하는 바울의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게 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부인과 이미 결혼한 남편이 그 아내에게서 배척을 받았을 때, 그 믿는 남편은 자유이며, 마찬가지로 부인 편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믿지 않는 남편에게 거절을 받았을 경우, 믿는 아내 또한 자유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 불신자는 그의 아내나 혹은 남편에게 불법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 관계라 하더라도, 부부 중 한 쪽이 믿지 않는 경우,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 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되는 방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백년의 지상 생활에 속한 부부 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화평 중에서", 주석가들은 또한 여기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즉 ‘우리는 화평 중에 부름을 받았으므로, 분쟁하게 되는 모든 일을 피하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이것을 더 간단하게 ‘가능한 한 우리는 화평을 추구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이 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진리 문제, 신앙 문제, 이단 문제 때문에 싸우고 분리해야 할 때가 있으나, 우리는 가능한 한 화평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헤어지기를 원할 때 먼저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별거는 부득이한 경우의 일이며 이혼은 최악의 조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방적인 방법으로 불신자와 헤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불신자인 상대방이 만일 주도권을 쥐고 먼저 단절을 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각자의 복리를 위해서, 평화로운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신 것이다’라고 나(존 칼빈)는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취급한 첫째 부분의 문제(믿는 자들은 만일 불신자인 상대방이 결합되어 있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혼을 원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위배되기 때문이다.)에 속한다.
(5)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6-17절)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이 문장을 둘째 부분으로 확증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즉 ‘소망에 대한 불확실성이 당신을 눌러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이외의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받은 은혜가 이 격려의 말 속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만일 아내가 남편을 자기의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크고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신자들은 그렇게 절망적인 곤경에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믿도록 감동을 받을 수가 없다. 그들은 분명히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부인이 어떤 유력한 소망을 가졌을 때,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때, 그 아내는 생활을 통한 선한 행실로써 남편을 그 길로 인도하며, 남편 앞에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야 한다. 남편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그 소망에 대한 모든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의 진술은 실제로 엄밀하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만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으로 그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에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그의 능력을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또한 최소한 그가 말씀하신 것, 그가 행하시는 것이 그들을 통하여 성취되는 그런 방법으로 그들의 봉사와 연결되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홀로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람들에게 그렇게 돌리시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받을 때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이 말씀의 뜻은 “유일한 해결책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며, 또 자신의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것에 대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이웃을 봉사하기에 모든 자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며, 특별히 자신이 받은 소명이 특별한 직능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게 하여야 한다.”
바울은 두 가지를 의미하고 있다. 즉 ‘소명’과 ‘은혜의 방편’이며, 또 그들이 이일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을 우리가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은혜의 종들로 지명 받을 가치가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하신 그 봉사에 격려를 받은 우리에겐 큰 자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우리의 소명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역경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멍에 아래 우리는 있어야 한다.
(6)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18-19절)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 세례 의식도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세례가 외형적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가르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례는 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참여할 때에만 효력이 있다. 참 종교는 의식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의 마음에 있다. 로마서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성령 안에] 있고 의문[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갈라디아서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 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라디아서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7)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0-24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도가 가진 세상적인 신분이나 어떤 육신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옛 시대에 그가 종의 신분이냐 자유인의 신분이냐 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매우 중요하겠지만, 주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다 동등한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라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3:11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베드로전서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바울이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종들을 격려하고, 자신의 노예 신분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마치 너희들의 노예 신분이 그리스도인 되기에 적합하지 못한 것처럼, 어떻게 하여야 이 노예의 멍에를 벗어버릴까 하고 노심초사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평안히 갖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회에는 신분과 계급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신분과 계급을 무시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내(존 칼빈) 생각에는 ‘있거든’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분명히 더 강조된 것 같다. 즉 “종으로 있는 것 대신, 만일 네가 자유할 수 있거든, 그것이 너희들에게 더 적절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유가 좋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이 노예보다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노예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그의 뜻은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염려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만일 그것이 너희들에게 온다면, 나는 너희들이 자유를 즐기는 것을 막지 않겠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이 말씀을 6장 마지막 절에서 다른 목적으로 기록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값’이라는 단어를 이미 설명하였다. 이 구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종들이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걱정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상전의 불경건하고 악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에 급급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헌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기쁘게 하려고 우리를 더럽히지 말자. 우리가 그들이 요구하는 악행을 할 때에 우리는 바로 자신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경고는 종들이 위협과 채찍질,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떤 예외적인 선택도 없이 주민들의 모든 요구에 복종하여야 했던 그 당시 어떤 예외적인 선택도 없이 주민들의 모든 요구에 복종하여야 했던 그 당시 상황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때는 종들이 매춘부를 주선하는 일이나 그 외의 다른 치욕스런 일이라도 주인의 명령이기만 하면 정직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치욕스럽고 사악한 일은 순종하지 말고 포기하도록 하는 예외를 만들 정당성을 발견한 것이다.
나(존 칼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결의를 마음속에 굳히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상품처럼 사람들 앞에 파는 그런 경향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신 바 되었고 이제 그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만 순종해야 한다.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