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개인적인 기도요청
- 에베소서 6:19~20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6:19~20]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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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기도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반복해서 쓰여져 있는데, 그 내용은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1) 적절한 말씀(말해야 할 말씀) / (2)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때 적절한 말을,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부분을 특별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담대하게 알릴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이번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엄격한 바리새인이었고, 열렬한 율법학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성경(구약성경)의 교사(랍비)였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가장 권위 있는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열렬히 핍박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렬히 전파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가 생애 말년에 자신이 3년여 동안 겸손을 다해 수많은 시련 속에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르치며 손수 세운 에베소 교회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이 처한 환경
+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도시 로마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바울의 생애를 기록한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음에서 부활하고 40일 후 하늘로 승천한 후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교회가 탄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약속의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대하게 선포되어 갑니다. 어떤 유대 당국의 위협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는 계속 전진해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써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대상이 확대됩니다.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 번의 전도여행을 다녀온 후 유대인들의 음모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그가 항소하여 로마로 끌려가게 됩니다. 로마에서 그는 자신의 집을 빌려 살 수 있지만, 항상 감시를 받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연금이니 감옥에 갇히거나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사슬에 매인 것'(엡 6:19)과 같았습니다.
+ 자신은 자유롭게 어디로 갈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오는 것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의 모습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8:30-31을 읽어 봅시다.
[사도행전 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이때는 서기(A.D) 62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은 여기서 끝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거꾸로 말하면 '모든 길은 로마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이방인)의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 바울이 옥에 갇혀 있던 동안 바울은 '옥중서신'(실제로는 옥중이 아니라 옥중에서 연금을 받고 있었지만, 왜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지 모르겠습니다.)이라고 불리는 편지 -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 세 편을 썼습니다. 그 후, 즉 약 2년간의 가택연금 상태 후에 바울은 일단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고 전해지지만,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체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 편지에 따르면, 바울이 투옥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D.67년경에는 당시 악명 높은 네로 황제에 의해 바울은 순교하게 되는데, 62년 로마에 온 지 5년 후인 A.D.62년, 결국 그의 상소는 기각되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 그러나 에베소서를 쓴 시기에는 바울은 연행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에서 '내가 입을 열 때 할 말이 주어져서 복의 비밀을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비록 앞으로도 계속 쇠사슬에 묶여 있더라도 할 말을 담대히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도 요청은 같은 시기에 쓰여진 골로새서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바울은 “말할 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한 것일까? 그 단서가 바로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여기서 옥중서신의 내용, 즉 다루고 있는 주제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① 에베소서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 ② 골로새서 ...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라는 주제 / ③ 빌립보서 ...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기쁨' / ④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 ... '로마의 근간을 흔드는 요청'
+ 이 편지들에는 복의 깊은 의미에 대해 정말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이 선교사역보다 명상의 시간이 풍성하게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④의 내용을 '로마의 근간을 흔드는 요청'이라고 했는데, 이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저는 이번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문득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아주 짧은 편지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에는 로마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담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대담'한 것일까?
+ 바울이 로마에서 만난 오네시모라는 노예, 그 노예가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그도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은 한 가정 집회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노예가 왜 바울의 곁에 있느냐 하면, 아마도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도둑질이라도 해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도망쳐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노예는 가축과 같은 입장이었고, 살리고 죽이는 것도 주인의 뜻대로 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악행을 저지른 노예는 주인에게 죽임을 당해도 당연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주인을 두려워한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를 믿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바울은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여전히 노예인 것은 변함없고, 그 주인이 빌레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도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만약 주인인 빌레몬이 바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오네시모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에게. ...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바울이 감옥에서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에 대한 부탁입니다. 그는 전에는 당신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오네시모를 당신께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는 내 마음 그 자체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복을 위해 감옥에 있는 동안 당신을 대신해 나를 위해 봉사하게 하고 싶었지만, 당신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베푸는 친절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동안 당신에게서 멀어진 것은 아마도 당신이 그를 영원히 되찾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더 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노예 이상의 존재, 즉 사랑하는 형제로서 말입니다. ... 만약 당신이 나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해 주십시오. 만약 그가 당신에게 손해를 입혔거나 빚을 졌다면, 그 청구는 저에게 하십시오. 내가 갚겠습니다.”
+ 이 바울의 소원은 당시 노예제도에 있던 로마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제국은 노예들의 존재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그 노예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가 아닌 노예 이상의 존재, 즉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로마제국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대담한 발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부탁처럼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발상이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네로 황제 시대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를 지탱하고 있던 무법자라고 불리는 노예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사도 바울의 담대함
(1) '담대함'이라는 단어
+ 이번 시간에는 특히 '담대함'에 대해 주목하고자 합니다. '담대하게'라는 헬라어는 '팔라시아'(παρρησια)로 '모든'이라는 뜻의 '파스'(πας)와 '말하다'라는 뜻의 '레시스'(ρησις)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단어가 합성된 어휘입니다. '모든 말해야 할 것', '말해야 할 말을 모두 말하는 것'... 이것이 '대담함'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참고로 '대언장어(大⾔壮語)는 내용도 없는 허황된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거창하게 말하는 것이지만, '대담함(大胆)'은 바로 말해야 할 모든 것을, 그것도 목숨을 걸고 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은 초대교회에서는 핍박을 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 바로 '대담하게'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복의 깊이를 '담대하게' 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대담함은 결코 바울의 전매특허는 아닙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믿은 제자들이 '담대함'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였던 바울은 진정한 의미의 율법을 지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말하자면 '말 잘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획을 바르게 이해했고, 그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명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에게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증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예화②]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예증③] 스테반의 순교가 바울에게 미친 영향.
+ 이런 흐름 뒤에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스데반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돌보기 위해 집사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학자도 아니었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음의 조상,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존경받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게까지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너희가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가 되었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져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돌을 던지자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같은 기도입니다.) -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교회 시작 후 첫 순교자입니다.
+ 이 스데반의 순교는 결코 헛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 담대하게 말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눈여겨본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바로 훗날 사도 바울입니다. 아마 이때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강렬한 후크 펀치를 맞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후 곧바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카운터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데, 그 전의 후크 펀치가 상당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제자들의 '대담함'의 특징
+ 초대교회 예수의 제자들의 특징은 '대담함'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① 확고한 확신 / ② 위로부터 주어지는 용기 / ③ 죽음도 불사하는 순교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바울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본 모습은 바로 그런 대담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담함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① 바울의 회심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일관된 바울의 태도 / ②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정신 / ③ 인간적인 노력이 아닌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능력.
+ 참고로 '담대히'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나온다. 그것도 '대담하게 악을 행한다'는 뜻이지만, 신약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도 이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입니다. 게다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힘에 완전히 실망한 자들입니다. 거기서부터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즉, 제자들의 '대담함'은 결코 타고난 성격도, 기질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노력도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위로부터의 힘, 성령의 힘이 없이는 '담대하게' 살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에베소 교회 사람들에게 '말할 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 요청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위로부터의 힘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담대히'라는 말을 구약성경에 있는 표현으로 바꾸면 어떤 말이 될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답은 '용맹하라, 강건하라'가 될 것입니다.
3. 바울이 기도를 요청한 '담대함'
+ 우리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합니다. 그런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말할 것을 담대히 말하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크리스천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일은 없을까요? 부끄러워서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숨기는 일은 없습니까?
+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서로 기도할 필요는 없을까요? 그런 확신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의 선물입니다. 그 은사를 받으면 '대담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용감하고 강인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러분은 기도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는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 바울의 기도 요청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본문: 에베소서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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