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고

- 에베소서 6:11~15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6:11~15]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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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꼽히는 것은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1)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2)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3)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4)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5) 구원의 투구를 쓰고 (6) 성령이 주시는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 (7) 성령으로 기도하라

 

+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지만, 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진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것 같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기쁨의 대상으로 받아주시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관계(입장, 상태)를 하나님 편에서 허락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해 주신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세 번째입니다. 그 전신갑주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입니다.

 

1. '평안의 복음'은 다툼에 관한(대처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 에베소서 6:15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는 말씀을 보면, '()''평안의 복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암시하는 성경 구절이 구약성경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서 52:7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 여기에 '발의 직무'가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직무는 좋은 소식(Good news) '평안', '복된 좋은 소식', '구원''전한다', '알린다'는 뜻입니다. '전하다''알리다'라는 말은 사람에 대한 관계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전도' 혹은 '선교'라는 말로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좋은 소식''전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좋은 소식'을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자 그대로 평안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다양한 관계에서의 '평안(평화)'에 관한 것이라면, 적은 그 반대의 것을 가져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평안의 반대는 '다툼', '적의'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마귀(사탄)'평안'을 아주 싫어합니다. 항상 우리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분쟁을 가져오고, 그 분쟁을 통해 사탄은 역사합니다. 갈등을 통해 우리는 상대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영적 현실에서는 악령이 국가, 가정, 직장, 학교, 교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어떤 분쟁의 배후에는 사탄의 계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분쟁의 당사자에게 '자신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 사탄의 계략인데, 사탄은 진짜 적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렇게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람과 사람-가족,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 안의 다양한 관계에 적대감을 심어주고, 분쟁의 영을 주어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등의 원인, 갈등의 배경이 되는 것은 교만,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시기, 미움, 분노 등입니다.

 

+ 구약성경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특징은 어떤 일이 자신에게 닥쳐도 결코 다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불운을 당했느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이 너무 커서 이웃 나라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창세기 26). 그래서 그들은 이삭의 아브라함 시대에 파놓은 우물을 모두 흙으로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 현대로 치면 괴롭힘, 교활한 괴롭힘입니다. 그들은 이삭에게 우리 거주지에서 떠나가 달라." 고 이삭에게 말했습니다. 이삭은 묵묵히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물이 솟아나는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근처에 있던 목동들이 이 물은 우리 것이라며 이삭의 목동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다툼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우물을 팝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또다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 당시 물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었을 것이고, 우물을 파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물의 이권을 놓고 다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삭은 스스로 물러나서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 그러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삭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왜 나를 찾아왔느냐?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를 너희에게서 쫓아내지 않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들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나이다. 그래서 우리와 평화의 계약을 맺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 그들이 돌아간 후에도 새로운 우물에서 물이 솟아나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삭은 결코 다투지 않아도 하나님이 물을 계속 공급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물이 몇 번이나 메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평화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삭은 왜 다투지 않았을까? 그것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사람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5)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은 '다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설령 자신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도 다투지 않으면 땅을 물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 지상에서 많은 것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다투는 마음은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 이러한 다툼의 배경에 있는 것은 교만,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시기, 미움, 분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분노의 감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날이 저물 때까지 분을 품고 있지 말고, 27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 바울은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다음 날(유대인인 바울은 아마도 날이 저물어가는 것을 '다음 날'로 생각했을 것이다)로 넘기려고 한다면, 그 분노를 통해 마귀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성읍을 점령하는 자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잠언에 분노에 대한 내용이 있으니 조금 들여다보겠습니다.

(1)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읍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2) 잠언 15:18 “성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다툼을 잠잠케 하느니라.”

(3) 잠언 15:1 “부드러운 대답은 분을 가라앉히지만, 격렬한 말은 분노를 일으키느니라.”

+ 신약성경에서는 사랑하는 형제들아. ... 누구든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노하기를 더디 하라. 사람의 노여움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1:19,20)"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질이 급하고 쉽게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혹은 다양한 관계를 맺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2. '평안(평화)의 복음이 준비하는 삶'이란?

 

+ 그래서 '다툼'을 일삼는 원수의 계략에 대항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을 항상 발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사실 에베소서를 쓴 사도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2장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4~16]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말씀을 요약하면, (1)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다. (2) 그리스도가 평화를 실현한다. (3)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적대감'을 묻고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 여기에는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우리가 다툼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이 '적대감'이 존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결과, 바빌론 포로라는 망국의 비애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해방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온 후에도 이방인의 지배는 4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점차 자신들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들의 성전 안에 '이방인의 정원'을 만들어 성전의 가장 바깥쪽에 두고 더 이상 이방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만약 '유대인의 뜰'에 들어가면 '죽여라'라는 진입 금지의 칸막이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이방인의 지배에 의해 착취당해 온 역사 속에서 길러진 자기방어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정원'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 성경 본문에서는 '적대감이란 여러 가지 규정으로 이루어진 계명의 율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길을 제시한 선한 것입니다. 그 좋은 율법의 어디에 적대감이 끼어들었는가 하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자신들이 다른 존재,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기 위해 다른 백성은 '이방인'이라는 경멸적 용어로 전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방인'이라고 불린 이방인은 유대인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박해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울타리'로 삼음으로써 자신들이 우수한 민족이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으로 주어진 계명이 유대인들의 자기 방어적 감정에 의해 이방인들과 자신들 사이의 '장벽'이 되어 적대감을 조성해 버린 것입니다.

 

+ 이러한 적대감을 버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폐기하셨을까?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한 것으로 계명의 가치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르다는 구분의 벽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벽이 무너지면서 적대감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라는 선언이 성립됩니다.

 

+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는 항상 스스로 벽을 만드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가문이 있다든지, 학력이 있다든지, 재산이 있다든지, 능력이 있다든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다든지.... 그런 것들을 '장벽'으로 삼음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런 벽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 됩니다.

 

+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은 항상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만들게 하려고 합니다. 적의가 있는 곳에는 분쟁이 생깁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항상 반항심과 혼란과 모든 악이 존재합니다. 사탄이 지배하기 쉬운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을, 다툼의 영을 내 삶에서 몰아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이삭처럼.

 

+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적대감은 모든 적대감의 비유입니다. - 적대감을 없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 - 하나님과의 화해, 사람과의 화해, 그리고 자신과의 화해 -

(1) 거기에는 '담을 쌓는' 인간의 죄의 모습, 적대감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입니다.

(2) 거기에는 적대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3) 거기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화해(평화)하는 길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다툼의 태도를 보이는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에게 다툼으로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갈등을 드러내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자제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다툼을 자기에게서 몰아내는 것,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 상처를 입어도 빨리 용서하고, 화를 내기에는 느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평화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평화를 창조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 그리스도 없이는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입니다.” - 당신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이번 세 번째 전신갑주,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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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이 끊이지 않는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평화의 왕, 평화의 왕자'라고 불립니다. 이 분과 우리가 단단히 결속되지 않고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개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평화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적대감을 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https://meigata-bokushin.secret.jp/swfu/d/auto_vEJmjw.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