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전념한 제자들

- 사도행전 1:14 -

샬롬선교회 


[사도행전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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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12~26] :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머물며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4)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락방'은 최후의 만찬을 한 장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22:12의 최후의 만찬을 한 '큰 다락방''아나게온 메가' άνάγαιον μεγα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고, 新改訳口語訳新共同訳에는 모두 '이층의 큰방'이라고 번역되어 있어나, 사도행전 1:13 '다락방'은 사도행전에만 사용되는 '히페르온' ὑπερον이라는 어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13/9:37,39/20:8). 누가복음도 사도행전도 누가 자신이 쓴 것이기 때문에 단어가 다르면 다른 장소()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 제자들이 계속 머물렀던 방은 '히페르온' ὑπερον입니다. 사도행전 20:9에 보면 '다락방'에서 집회를 하던 중 유두고라는 청년이 잠이 들어 '3층에서 아래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다락방'(히페르온)'3'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곳에 모여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 마음을 합하여 기도에 전념했다.

 

[사도행전 1:14] 본문

 

(1) '마음을 같이하여'

 

+ '마음을 합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모스마돈' ὁμοθυμαδόν이다. 이 단어는 '하나'를 뜻하는 '호모' ὁμο'감정'을 뜻하는 '스무스' θυμυς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부사입니다. 이 어휘 역시 사도들의 사역을 상징하는 어휘입니다. 신약성경에서 11번 쓰이는데, 그 중 10번이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1:14/2:46/4:24/5:12/7:57/8:6/12:20/15:25/18:12/19:2910번이지만, 후반부 12:20 이후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1:14~8:66번에만 좋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에만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합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징이었고, 영적인 축복과 능력의 나타남의 원천이었습니다. 주님께 있는 자들이 '마음을 합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2) '힘쓰더라(전념하다)'

 

+ '힘쓰더라'는 단어도 살펴볼만합니다. '힘쓰더라(전념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프로스카르테레오' προσκαρτερέω입니다. '끊임없이, 변함없이, 꾸준히, 꾸준히 계속하다, 바쁘게 ~에 힘쓰다, 열심히 ~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어휘도 사도들의 사역을 상징하는 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10. 그 중 6번은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는데, 1:14/2:42,46/6:4/8:13/10:76번입니다. 특히 6;4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무엇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 전념'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지혜로운 결단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세야말로 교회를 영적인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는가'

 

+ 사도행전 1:12에서 그들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을까? 원문은 '그 뜻을 기도하기를 ... 계속하고 있었다.'입니다. 관사형 명사의 '기도'('프로스유케이' προςευχή), 그것을 전념하여 '계속하고 있다'('에이미' είμι의 미완료형)는 뜻입니다. 여기서 관사가 붙은 '기도'라고 하면 유대인의 전통적 기도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기서 그런 기도에 전념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신 '그 기도', '주님의 기도'에 대해 묵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기도가 '주의 기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지금까지 주 예수님께서 늘 기도해 오셨던 기도이고, 또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였기 때문에, 그 기도를 기도하면서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해 생각을 계속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참고로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심오하고 종말론적 시각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 기도를 반복해서 음미하면서 깊이 마음에 새겨 넣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마음을 합하여'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 '힘쓰다', '전념하다',는 것은 '나의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시편 27:4)라는 다윗의 신앙과 연결됩니다. 혹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가만히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선순위, 우선순위의 확립이야말로 초대교회의 강점이었다고 믿습니다.

 

2. '이스라엘의 회복'의 관점에서 본 '사도의 보충'

 

+ 사도행전 1:15 이후에는 가롯 유다가 주님을 배반함으로 사도의 결원이 생기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도를 선택하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이 성취되어야만 했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유다의 배신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필연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필연성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 키워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필연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키워드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그 열쇠를 사용하면서 '피의 땅'이라 불리는 '아겔다마''12'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사도 베드로를 주목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1) '아겔다마'

 

[사도행전 1:17~19]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가 자살한 그 비참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가 산 땅이 '아겔다마'라고 불렸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다 자신이 그 땅을 산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27:1~10을 읽으면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마태복음 27:3~10]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 마태복음에 따르면, 땅을 산 것은 유다가 아니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유다가 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땅은 도공의 밭이었던 곳인데, 그곳을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곳이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아겔다마''히놈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그곳은 '모렉'에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친 곳이며, '토페데에 세운 높은 곳'이 있던 곳입니다. 그곳을 '예수의 피로 산 땅'이라는 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그네'로 번역된 원어 그리스어는 '크세노스' ξένος'외국인, 체류 이방인, 체류자'를 뜻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죽었을 때, 그들의 무덤으로 예수의 피값이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언적입니다. '나그네''흩어진 양떼'를 상징합니다. , 이스라엘 집안의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참고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쓴 편지의 수신인은 야고보서 1:1에 나오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즉 사도들은 단순히 유대인뿐만 아니라 '흩어진 양떼'에 대해서도 깊이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온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52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도, 제사장들도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아겔다마'(피의 땅)를 사게 된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12지파를 의미하는 '12'라는 숫자에 집착하여 결원된 사도를 채우려 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온 이스라엘의 회복'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12지파의 회복

 

+ 한 가지 질문으로, 사도 베드로는 왜 사도직의 지위를 계승하기 위해 공석이 된 부분을 보충하려고 했을까? 아무래도 '12'라는 숫자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고집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추첨으로 뽑힌 '맛디아'에 의해 12사도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 되었습니다.

 

+ 기독교 교회는 대체신학의 영향으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예언적 계시를 경시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천명'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4~10]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 요한계시록의 시대는 말하자면 이방인의 완성의 때인 동시에 유대인 이스라엘의 구원이 임하는 때입니다. 특히 잃어버린 10지파가 출현하여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온 이스라엘(12지파)의 회복'이 이뤄지는데, 144천명은 결코 영적 기독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이방인인 우리 눈에는 신기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예언된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입니다.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 베드로가 다시 한 번 사도직의 인원을 '12'라는 숫자로 다시 설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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