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함
- 사도행전 4:1~31 -
샬롬선교회
[사도행전 4:27~31]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사도들의 사역에는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1) 2장 4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 4장 8절
“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3) 4장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사도행전을 읽는 한 흥미로운 점은 성령 충만한 자들이 어디에도 '성령을 주십시오'라거나 '성령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제3자(여기서는 누가)가 사도들의 상태를 보고 '성령 충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도들의 담대함과 유대 당국의 사도들에 대한 '위협'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1. 체포되고 구금되어 심문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의 대담함
+ 베드로와 요한이 사두개파의 영지 안에서 아무런 제지 없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더구나 사두개파가 부정하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디아포네오마이' διαπονέομαι를 新改訳은 '곤경에 처하다'로 번역하고 있지만, 新共同訳은 '짜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2과 16:18 두 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어휘입니다. 제사장들, 사두개파의 동료들이 모여서 참다 참다 못해서라는 뉘앙스인 것 같습니다. 제사장들, 궁궐 경비대장, 사두개파 사람들 - 모두 사두개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가두어 두었습니다.
다음 날, 산헤드린 회원들이 모여 “무슨 권위로, 누구의 이름으로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느냐”고 심문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누가 허락했느냐',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 '누구의 뜻이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권위자의 허락 없이 독단적인 언행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선천적으로 앉은뱅이가 무엇으로 고침을 받았는지에 대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라고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심문하려는 유대 당국에 대해 “너희 집을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었도다.”라는 시편 118편 말씀으로 유대 당국에 대한 단죄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유대 당국은 베드로와 요한의 대담함을 보고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두 사람의 태도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로 '대담함'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담대함'의 원어는 '팔레-시아'παρρησια, 신약성경에는 31번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5번 나오는데 그 중 3번은 4장에 있습니다(4:13, 29, 31).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대담하게 말하다.
(2) 확신을 가지고 대담한 태도를 취하다 - 공개적으로,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유롭게,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주저하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겁내지 않고.
2. '협박'만 할 수 있는 유대 당국
+ 베드로와 요한의 대담함에 대해 유대 당국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사람을 권위를 내세워 '협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위협하다'라는 단어도 4장에서 세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1) 17절 동사 '아페이레오' απειλέω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2) 21절 동사 '프로스아페이레오' προσαπειλέω
“...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3) 29절 명사 '아페이레' απειλή
“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 말을 듣지 않는 자녀에 대해 부모는 최후의 수단으로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 자녀를 '협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유대 당국의 '협박'과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도 많이 배워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주님을 대적하여 소란을 피우는 세상의 권세자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시편 2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소란을 피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더욱 강하게 증거하는 도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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