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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과 방언

고린도전서14:1-40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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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면서 교회의 덕과 유익을 생각할 때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교회 안에서 방언이 가치를 가지려면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모든 모임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적 질서는 교회에 평안과 덕을 이루지만, 무질서는 교회에 부덕(不德)과 해를 가져올 것이다. 질서는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남의 인격을 존중할 때 가능하다. 여성도의 활동 제한도 성경적 질서에 속한다.

 

1. 예언이 다른 은사들보다 나음 (1-19)

 

[1]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 바울은 예언이 다른 모든 은사들보다도 더 나은 것이라고 증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예언이 은사들 중에서 가장 큰 은사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 문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즉 그는 어떤 유용성이 있는 은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잘못된 열심히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언을 지도적 위치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은사라도 무시하지 말라. 나는 예언이 그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 다른 모든 은사를 사모하라고 여러분에게 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사랑을 구하라는 뜻이다. 사랑은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영적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이다. ‘신령한 것은 영적 은사들, 곧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물론 사도시대이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친 줄 안다. 만일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한다면, 은사들을 사모하지 말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고 성경으로 권면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다(16:29-31; 22:18-19).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되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가르친다. 본절의 내용은 본장 전체의 요지이다. 즉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이다. ‘예언한다는 일차적으로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때때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豫言)도 포함한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2]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바울은 이제 실제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왜 그가 예언을 다른 모든 은사들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외국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하므로 다른 은사보다 더 화려한 전시효과를 나타내게 되어 그들이 지나치게 이 방언의 은사에 관심을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원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전혀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방법이 아니므로, 그것이 얼마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첫째 요점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한 이유는 아무도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만 들을 뿐이며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말하자면 영적 은사로 인하여’ “그는 신비와 또한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유익을 가져오지 못한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에서 신비를 좋은 의미,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탁월한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존 칼빈)는 그것을 나쁜 의미, 곧 이해불가능하고 나쁜 영향을 주며, 또한 수수께끼 같은 말로 해석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는그런 말이다.

 

[3-4]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바울은 방언이 땅에 묻힌 보화인데 반하여, ‘예언은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어떤 일에 귀한 모든 시간을 사람이 허비하는 것 이상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또 있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을 전혀 돌보지 않고 게을리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말하여 덕을 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적절한 교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용어가 종교와 믿음에 대한 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배와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책임감을 갖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에 싸여 있고, 또한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불리한 입장에 있을 때에 그러나 우리들 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극이 필요하므로 바울은 교훈을 곁들여 위로와 격려의 말을 주고 있다. 이 구절의 앞의 말에서 예언이란 예언을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겠다.

 

[5]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바울은 그가 방언에 대하여 여유를 주는 그런 아무런 방법을 제시함도 없이 무조건 예언만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신데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의 교회에 어떤 은사를 주시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아마 그 당시에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잘못된 멸망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은 이 은사를 어느 면에서는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고, 또 다른 면으로는 심지어 유해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그 잘못을 수정함으로써, 그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방언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잘 선용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만일 해석이 덧붙여지면, 예언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어떤 사람이 외국말을 중얼거리는데 교회의 시간을 허비하여도 된다고 허락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같은 일을 많은 다른 나라 말로 선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때때로 외국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이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유일한 목적은 교회를 수립하기 위한 일이 되도록 하자.

 

[ 사도시대에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 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들이 방언들로 말하는 것보다 예언하기를 원하는 까닭은, 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예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크다고 되어 있다. 예언이 통역 없는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는 뜻이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6-9]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바울은 자신을 실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자신의 상황이 그가 특별히 말하여야 했던 것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교훈이 가져다 준 풍성한 열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그가 그들에게 말할 때 방언들을 사용한다면,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하고 그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경험에 대한 이런 호소를 통하여, 그는 예언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그는 어떤 사람을 제외하기보다는 그 자신 편에서 이와 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정죄하는 데 있어서 공격하기 위하여 동일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바울은 네 가지 교화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계시와 지식, 예언, 그리고 교훈이다. 해설가들이 여기에 대하여 각각 다른 견해들을 취하고 있으므로, 나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주관적인 상상의 견해이기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각각 좋을 대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는 계시와 예언을 하나로 취급하며, 또한 예언을 계시에 종속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식과 교훈에 대해서도 동일한 견해를 취한다. 그러므로 계시를 통하여 얻은 것은 무엇이나 예언에 나타나야 한다. 교훈은 지식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계시의 해설자가 되고 또한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예언에 대한 정의에 저촉되기보다는 그것을 지원하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예언이 성경에 대하여 단순하고 불충분한 해석을 포함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기의 필요에 적응하게 하는 지식을 또한 내포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계시와 특별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기 때문이다.

 

[10-12]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있지만 의미 없는 소리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내게 무슨 말을 했을 때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내게 말하는 그에게 야만인이 되고, 내게 말하는 그 사람도 내게 대하여 야만인이 될 것이다.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은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 영적 건립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훈은 분명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였으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곧 다른 이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중요하다.

 

[13-14]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여기서 바울은, ‘그러면 어떤 사람이 외국어를 안다면, 그의 은사가 무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드릴 수 있는 것을 왜 어두움 속에 비밀로 감추어 두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것을 쉽게 예상하고, 바울은 여기서 대답을 하고 있다. 바울은 치유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 또한 통역의 은사를 구하도록 하자. 한편 만일 그가 통역의 은사를 갖지 못하였다면, 허식적으로 통역하는 것을 절제하도록 하자.’

 

"내가 만일 방언으로 ......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이것이 또한 그가 지금까지 권고한 것을 확증하는 적절한 본보기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나는 그것을 새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방언을 말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던 것처럼, 또한 그들이 방언으로 곧잘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또한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이 두 가지 남용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인데,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모두 하나이고 또 같은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다른 한편, 여기서 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적어도 우리는 그런 어떤 실례를 읽어보지 못했다). 방언의 은사는 시끄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통의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로마어의 방언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헬라어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헬라어로 말하도록 지시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는 마치 사람의 소리를 흉내 내도록 하기 위하여 훈련한 앵무새나 까치, 그리고 까마귀와 같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방언의 은사를 받은 어떤 사람이 지각이 있게 또 현명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깨닫지 못하는 영의 기도는 헛된 것이다라는 말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영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의미가 분명하여진다. “만일 내가 나도 모르는 말로 기도를 만들어서 한다면, 그리고 성령께서 나에게 말이 유창하게 흐르도록 하여 주신다면, 나의 혀를 지배하시는 그 영 자체는 참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이해력은 다른 곳을 방황하고 있을 것이며, 여하튼 나는 그 기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만일 이해력이 기도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라고 바울이 생각하였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과 소원을 아뢰는 일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다시 영적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다만 입술로부터 나오는 것보다는 그 기도의 본질과 조화되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취하는 휴식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입술을 움직여 기도할 때에, 만일 마귀가 그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절하게 기도하고 있다고 믿는 그 생각들을 세상에서 그렇게 많이 빼앗아가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들이 이 모든 영적 일들에 철저하게 친근하여졌을 것이다.

 

또 가톨릭교도들은 그렇게도 지나치게 어리석어서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도 모르는 말로 속삭이고 중얼거리는 무지한 짓을 더 좋아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최종적인 뜻이 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격렬한 단편적인 궤변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한 스페인 사람이 많은 세상적인 걱정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대격변의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 독일말로 하나님을 저주하였다고 가정해 보면 그때 그가 공식적인 기도를 하는 한, 또한 잠깐 동안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해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하고 생각한다.

 

[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통역하지 못하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통역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 어떤 교훈이나 권면이나 위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는 하나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영을 직접 사용하시는 현상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성도의 영의 활동이었음에 불구하고 그의 지성(知性)은 방언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였다. ‘마음이라는 원어(누스)생각, 지성, 이해력을 뜻한다. “나의 마음이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15-17]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어떤 사람이 그렇다면, 기도에는 성령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라고 항의할지도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바울은 마음, 곧 이해력이 기도에 따르는 한, 영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그것은 절대로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에 있어서 영적 은사의 활용을 인정하고 또한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게을러서는 안 되며, 또한 물론 마음이 중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당시에 찬미하는 습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또한 추측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적어도 40년 동안 혹은 바울이 죽은 뒤 그렇게 서술을 하였던 플리니(Pliny)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이 트기 전에 그리스도에게 찬미를 드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나는 바로 초기부터 그들이 유대인 교회에서 찬미되는 법을 채택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지금까지 바울은, 만일 마음과 목소리가 함께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면, 우리 각 개인이 드리는 기도가 무익하고 결실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또한 공적 기도를 계속 취급하고 있다. 만일 공중의 이익을 추구하며 또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일반 평신도들이 적절하게 그 기도 내용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 결국 그 기도가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내용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그 기도에 참여할 수가 없다. 동일한 사례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축복에도 적용이 된다.

 

이제 바울의 말하는 방법이 교역자들 중의 한 사람이 분명한 목소리로 기도를 되풀이하거나 혹은 기도를 드릴 때 또 한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전 회중이 그들의 마음으로 따르고 있음을 나타냈는데, 이것은 그 기도자가 기도를 끝마칠 때까지, 그 기도 내용이 동시에 그곳에 모인 군중들의 기도도 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표명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아멘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어 아멘이라는 말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뢰’, 혹은 진실이라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확증은 우리가 기도에서 확인하는 일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 말을 오랫동안 사용하여 익숙해졌으므로, 그 결과 그것이 그들에게서부터 이방인들에게도 전하여졌으며, 또 헬라인들이 마치 그것이 그들의 언어의 일부인 양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제, ‘만일 여러분이 공적인 기도에서 무식한 사람들이나 일반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그들 앞에서 기도한다면, 아무도 여러분의 기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며, 여러분의 기도나 감사가 아무런 공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바울은, ‘아무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기도와 찬양에 그의 아멘을 추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즉시 거절하는 그 일을, 가톨릭교도들은 거룩하고 합법적인 관례로 본다. 이것은 다만 그들의 놀랄만한 몰염치를 나타낼 뿐이다. 참으로, 그보다도 이것은 더 눈에 띄는 실례인데, 사단이 가톨릭교도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그의 공격의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 무식한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는, 그 사람이 공적 기도의 내용에 참여할 수 없다는 바울의 말 이상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감사의 기도를 공석에서 드릴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 이외의 다른 말로 드려서는 안 된다는 이 금지 이상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그들이 날마다 행하는 때에, 그들이 그를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때에, 그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그들 가운데서 아무 거리낌 없이 어떻게 자신을 즐기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극악무도한 강퍅함이 그 사실로 인하여 배반을 당하고 있는데, 경고를 받은 후에도 그들은 회개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심각하게 불과 검으로써 타락을 실제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 ‘영으로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지성으로 이해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내용을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고 스스로 통역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가 방언으로 찬미하고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성도는 그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 그는 감사를 잘하였을지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였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18-19]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바울은 여러 나라 언어들로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들로 말하게 되었음을 감사하였다. ‘깨달은 마음으로라는 말은 생각을 가지고, 이해력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한다는 말은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한다는 뜻이다. ‘낫다는 말은 원한다는 뜻이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하노라이다. 바울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방언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그 둘의 가치의 차이는 다섯 마디의 말일만 마디의 말의 대조로 완전히 분명해진다.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2. 질서 있는 모임 (20-33)

 

[2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지혜라는 말은 생각,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본절은 지혜, 생각, 깨달음에 있어서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한다. 악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 악은 모를수록 좋다. 악은 경험해볼 필요가 없다.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을 알면 알수록 악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잠언23:7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사람됨]도 그러한 즉이라고 말했다.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자이며, 생각이 성숙하면 성숙한 인격자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완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생각에 있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21-22]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이 구절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러므로라는 말이 앞에 나오는 문장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앞의 논쟁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방법의 언급인가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만일 그것이 앞 문장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이렇게 될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들이 그렇게 갈망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은사가 아니라, 사실은 불신자들에 대한 보복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형벌이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이해될 때에, 바울은 방언의 계속적인 사용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일어나고 있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서만 언급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이 전체의 논쟁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그 범위를 넓히기를 원한다면, 비록 방금 설명한 그 해석을 나는 더 취하고 싶지만, 굳이 그 사람과 다툴 생각은 없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뜻은, ‘방언이 표적, 다시 말하면 기적인 한, 방언은 엄격한 의미에서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방언은 여러 면으로 유익한 것이다. 복음 전도자들이 언어의 상이성 때문에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하여 방언은 실제로 필요하며, 그러므로 또한 그들이 다른 민족 간의 의사 전달에 불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방언은 또한 불신자들이 이적을 보고 놀라움과 감동을 받게 하는 데도 필요하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이적은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몰랐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준비를 갖추게 하는 목적이 있다. 이미 그리스도의 교훈에 헌신하는 믿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준비를 갖출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예언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시한 채, 방언의 은사에 지나친 강조점을 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물론 예언은 특별히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런 이유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이 예언과 친숙하여야 한다. 방언에 관계되는 한 모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기적적인 요소에 관계되고 있다.

 

[23-25]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어리석음과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불신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또 불신자들이 그들의 모임에 들어가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불신자들이 알아듣도록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또한 경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말이 아닌 알아듣지도 못할 의미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태도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본다면,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불신자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희들의 우스운 행위를 비웃고 있는데 너희들은 스스로 마음속에서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다는 이 문장에는 신랄한 비난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고, 또한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완전히 분명하게 알고 있는 그 어떤 것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그가 이미 믿음의 가족들에게 예언이 방언의 은사보다 얼마나 더 유익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앞에서 밝혀준 것과 같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또한 이제 그는 국외자들에게 그것이 역시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가장 큰 은사인 예언의 은사를 무시하는 극도의 사악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교회에 속하는 믿음의 가족들을 무용한 다른 은사에 현혹되도록 하며,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게 하였다. 그는 예언이 가진 효력을 지적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불신자들의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소환하고, 또 무관심 속에서 확실한 복음을 멸시하는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실감이 있게 깨닫도록 그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구절을 다른 구절, 곧 히브리서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말씀과 비교한다면, 그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모든 것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또한 책망을 받는다라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우리는 그가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라는 것을 모든 예언하는 사람들로부터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구절의 처음에 만일 다 예언을 하면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에 대한 그들의 (고린도교회 교인들) 멸시를 제거하기 위하여 ’(모두)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불신자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선지자가 그 불신자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표명하지 않고 비밀리에 그들에 대한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하거나 혹은 분명한 말로 심판에 대한 것을 감추었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심판에 대하여 들을 때, 그들의 양심은 듣고 깨닫게 된 것을 통해서 양심 자체의 심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그의 상태로(죄의 상태-역자주)계속 빠져 들어가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살펴본 후에, 그는 그가 무엇과 같은가를 깨닫게 되고, 그 전에는 그가 부인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일에 대하여 언급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 즉시로 바울은, ‘그 마음의 숨은 것이 드러나게 되므로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여하튼 나의 생각에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전에는 그에게 감추어져 있던 그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양심이 자극을 받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26]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사도시대 교회의 집회 순서는 주로 찬송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찬송시는 시편 찬송을 가리킨 것 같고, ‘가르치는 말씀이란 설교에 해당한다고 본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도 교훈적 성격을 가진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의 순서는 사도시대에만 있었고, 그 후 시대에는 없어진 순서들이다. 교회의 공예배의 순서들은 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물론 공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영적인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집회는 사람들에게 유익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집회들은 이것을 위하여 유익한 모임이 되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다. - 김효성 성경강해 - ]

 

[27-28]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바울은 이제 그 순서의 개략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무용한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다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교회는, 오늘날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실례에서처럼, 예언의 도움이 없이는 방언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아무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신실한 자들의 모임으로부터 성령의 어떤 은사를 견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이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미 방언이 기호인 한 그것이 신자들에게 적합하다고 앞에서 말하였으므로, 여기에도 역시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만일 기적이 특별히 불신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특별히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어느 면에서 신자들에게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편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이 믿는 사람들의 단체에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은사를 배척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는 것을 몰래 탈취하는 야망을 막기 위하여 제한을 두고 있으며, 또 어떤 덜 중요한 은사를 중요한 자리에 배열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그는 결과도 없는 어떤 허식만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에 조미료를 치고 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바울은 그의 은사를 자신만이 마음속으로 즐기도록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자비롭게 자기에게 주신 은사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조용히 감사를 드리고 그것을 공적으로 사용할 기회가 없을 때는 그것을 자신의 사유물인 것처럼 혼자 즐기라는 것이다.

 

[29-31]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우리는 아직도 왜 그가 예언과 말에 대하여 둘 다 동일한 수로 제한을 하였는지 질문을 계속하여야겠다. 그는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많아야 세 사람이라고 분명히 덧붙이고 있는데, 만일 말이 그렇게 귀중한 것이라면, 그것이 더 소중하게 사용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즉 예언은 말 속에 포함되며 그 방법으로 바울은 낱말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말은 설교할 때, 또 기도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그 설교자는 예언을 대신하고 있으며, 따라서 더 빈번히 말이 사용되고 있는 가운데서 제 1위의 방법이 되고 있다. 그는 다만 교만 때문에 그것이 허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거기에 제한을 가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무력한 사람들이 그들이 말할 차례와 기회의 더 좋은 권한을 박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그가 말하는 책임을 할당한 사람들이 그들의 최량의 부분에서 끌어온 것이어야 하며 또한 공적인 동의로 말미암아 임명되어야 함을 뜻하고 있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그것은 또한 그들이 뭔가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가졌을 때마다, 말할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선에 대한 모든 것이며, 또 그렇게 그들은 성령이 얽매여 있거나, 혹은 그의 음성이 침묵케 된다고 불평하는 더 이상의 이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사태가 그것을 요구하였을 때 모든 사람들은 말할 기회와 자유를 얻게 된다. 한 가지 조건은, 아무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만족에 도취하며, 순서 없이 자신만을 위하여 덤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바울은 그들 모두가 이 자제력을 발휘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들 각자가(실제로 말할 때)뭔가 여러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참 자유는 각 사람이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두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부터 최저의 위치에 있는 사람까지 간에 그 말씀을 잘 청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계시의 신뢰성에 관한 한, 우리는 곧 그것에 대하여 배우게 될 것이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먼저, 바울이 모든이라고 말할 때 믿는 사람들을 모두 이 말속에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들이 모두 같은 순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받은 은사를 따라, 개개인이 그 은사에 맞는 정도로 말하기 위해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누구도 내내 기다릴 수만은 없으며, 말할 기회는 때로는 이 사람에게, 또 때로는 저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예언자들에게 적합한 것이며, 또한 사실상 바울은 그들을 특별히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 질투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우세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자기들과 같은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충심으로 더 기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세가 바로 그런 자세를 가졌었다고 말하고 있다. 모세의 사역자(여호수아)가 어리석은 질투로 불타고 있을 때 또 예언의 은사가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부여된 것을 분개하였을 때, 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8)라고 여호수아를 책망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그것은 양심적인 사역자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특별히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재 확신시키는 위대한 원군이 되고 있다. 또한 많은 사역자들이 있고 또 그것을 증거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도록 크게 도움을 받는 것은 고무할 만한 일이다.

 

[32-33]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 제재를 받나니", 그들이 차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다른 예언자들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한 예언에서 잘못을 발견하게 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비평을 받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때때로 회중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내가 이미 말한 대로)아무도 다른 사람들의 비평에서 제외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교훈이 동시에 비평에 종속되는 규정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물론 거기에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들의 영이 제재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지라도 성령 자체는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성령의 은사인 예언이 인간의 판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심지어는 성령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그는 면밀한 검토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일인가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성령이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종류의 비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의 주장은 성령께서는 그가 누구의 판단을 받지 않으심은 물론, 그가 친히 모든 것을 판단하시기 때문에 그의 존엄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그 말씀이 나타나시자마자 그것이 곧 아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계속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검사를 받기 위해 종속되는가?’라고 여러분은 질문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충만한 계시를 받았다면 그 사람과 그가 받은 은사는 모든 비평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계시의 충만성이 있는 곳에는 종속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각 사람에게 어떤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부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최대한으로 어떤 한 사람에게 은사를 많이 부어주신 경우라도 항상 뭔가 부족함이 있으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의 높은 위치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 볼 만큼 그가 받은 은사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며, 또 사람들에게는 뭔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여지가 항상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방법으로든지 아무런 모욕이 없이 성령을 관찰하며, 그의 은사를 음미하여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모든 것이 연구되며 또한 아무 것도 고칠 필요가 없다고 판명되면, 동시에 뭔가 발전하는 것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은사는 이런 방법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며, 예언자들은 그가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가를 시험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언의 근원이 성령이므로, 더 이상의 혼란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또 일어난다. 곧 어떤 표준이 검사를 위해 설정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은 이미 바울의 입을 통하여 친히 밝히고 있다. 그는 로마서12:6에서 예언을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척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평가에 관한 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깨닫게 된 것만이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수단에 의하여 인정을 받지 않은 것만이 정죄를 받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판단하실 수 있으며, 오직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전령관이 될 뿐이다.

 

우리는 바울의 이 구절에서 어떻게 교회가 놀라운 부와 다양한 영적 은사로 말미암아 번창하게 되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순번을 완전히 할당하는 기관이 되기 위하여 거기에는 선지자들의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대단히 다양한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약간 과다한 것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빈약한 재능과 결핍을 사실상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망은에 대한 대가로써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풍요함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또한 그의 관대하심은 줄어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자비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관대하심으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을 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경건을 실행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를 얻기에 게으르지 않는 한, 아직도 우리는 빛과 교훈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또한 나누어 줄 수 있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34-40)

 

 

 

[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 . . .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 오직 복종할 것이요.", 회원 중의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여성이 모든 집단체를 지배하는 권력적 위치에 선다는 것은 얼마나 부적당한 일인가! 그러므로 그것은 양립하기 어려운 모순에 기초한 논증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 여성이 복종하는 위치에 있다면, 그는 공적으로 가르칠 권위를 가지는 데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인 예외 그 자체가 그 효력을 갖는 곳에서는,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이 공적인 직무수행으로부터 제외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여성들의 통치는 부적절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상식이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더구나 한때 로마의 법정에서 여성들이 변론하도록 허락되었지만, Caia Afrania의 건방진 언행의 결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추론은 솔직한 것이다. 가르치는 권세는 여성들의 직무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성이 가르치면 그는 모든 남성들을 지배하게 되는데, 이것은 여성이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가 또한 이 과오로 인하여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그곳에는 여성들이 모여 조잘거리는 장소가 있었든지 아니면, 그들에게 방대한 자유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성들이 가르치거나 혹은 예언을 하든지 간에 그들이 공적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상황에 따라 질서정연한 방법으로 허용될 수 있거나 혹은 교회가 잘 설립된 곳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여성이 말할 수 있는 그런 필요성이 있을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적절하게 조직된 회합에서는 무엇이 적절한 일인가를 친히 제한하고 있다.

 

[35-37]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 부끄러운 것임이라.", 비록 바울이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는 여성들이 필요하면 선지자들에게 의견을 듣는 것을 금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남편들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모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별력 있는 독자들이라면, 바울이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문제들이 선인가, 혹은 악인가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이 적절하며 덕성에 위배되는 일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금지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바울이 선지자들에게 일찍이 위임한 판단의 의무는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인정하여 그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궁금해 하는 무엇을 그들이 검사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가르침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바르게 판단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첨가하며, 그것은 그의 사도적인 권위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이 그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결점에 대한 교훈을 그들에게 주고 있음을 그는 단호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것들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어떻게 바울이 주장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들에 대한 확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곧 만일 그것들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그때 그것들이 준수되어야 하며, 인간의 양심에 묶여져야 한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행정상의 배열문제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지켜야 할 강제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나 그 이외의 곳에서 외적인 일들을 배열하는 방법을 그가 추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경외를 취급하는 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법률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유용한 형태이며, 또 전혀 무시되지 않는 것이었다.

 

[38-40]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을 다른 은사들보다 더 사모하여야 한다는 주요 문제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예언이 다른 모든 은사들에 비해 가장 유용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다른 은사들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것을 배열하는 방법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언이 다른 모든 은사에 비하여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열망할 가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그들이 방언의 희귀한 은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아끼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갈망할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이 결론은 더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몇 마디 말로써 전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다른 국면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그것은 외적인 조직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사정하는 적절한 표준을 제공하고 있다. 그가 여러 구절에서 의식에 대하여 취급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 점에서 모든 것을 아주 간략하게, 곧 예의가 지켜져야 하고, 무질서가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요약하고 있다.

이 설명은 마치 그들이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묶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앞에서 말한 교훈에 대하여 사람들의 양심이 의무에 묶이기를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만 그들이 적절한 예의와 화평에 관하여서만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일반적인 원리를 얻게 되는데(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이 원리는 교회의 조직이 봉사하여야 할 목적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경외가 이런 일들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외적인 의식에 대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무제한과 무절제의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자유에 대한 어떤 울타리(한계)를 부여하신 것이다. 혹은 어쨌든지 간에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그런 방법으로부터 그가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깊이 잘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노예들을 대하는 증오할 만한 그런 형태로 인간의 양심을 부숴버리는 교황의 폭군적인 칙령과 교회의 훈련과 질서를 준수하는 그런 교회의 경건한 법의 각각 다른 상이성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내용으로부터 이 일반적인 명령에 근거한 교회의 법을 깨달으면서 그 교회의 법을 단순한 인간의 전통으로 여기지 않아야 하며, 또한 말하자면 그리스도 자신의 입으로부터 친히 나와서 승인을 받은 것이라는 인상을 분명히 준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