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기도하라 (후편)

- 에베소서 6:11~18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항상 성령으로 기도하라. 이를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를 다하여 기도하고 또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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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성령으로 하는 기도''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삶을 세우는 기도'라고 정의했는데,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세우는 기도'입니다. 두 가지 정의는 자동차로 치면 양 바퀴의 관계이고, 동전으로 치면 동전의 앞뒷면과 뒷면의 관계입니다. 성령에 의한 기도의 삶은 이렇게 두 가지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그러나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상대에 대해서는 호스피탈리티 마인드를 가지고 대응할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타인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합니다. 그렇지 않고, 타인에게는 항상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황금률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삶을 세우는 기도'의 삶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런 기도의 생활양식은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듯이,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도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삶이 토대가 될 때, 사람과의 관계는 저절로 조금씩 세워져 갑니다. 이번에는 '중보의 기도''소원의 기도'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와 믿는 자의 '소원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 '중보의 기도'? : 중보자(예수님)가 하는 기도란 뜻이며, 중보자(예수님)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기도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 '소원의 기도': 앤드류 머레이는 누가복음 11:5~8의 비유를 진정한 '소원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보고'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가정할 때, 한밤중에 그 사람에게 가서 '친구야, 빵 세 개를 빌려 달라. 빵 세 개를 빌려줘. 친구가 여행길에 우리 집에 왔는데 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집 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귀찮게 하지 말아줘. 이미 잠도 다 잤고, 아이들도 나도 자고 있으니 일어나서 뭐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서 무언가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그는 친구이기 때문에 일어나서 무언가를 주지는 않겠지만, 계속 부탁하면 일어나서 필요한 것을 줄 것입니다.

 

+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따라 가르치신 '주의 기도'에 이은 비유입니다. 모두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전자의 '주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후자의 비유는 '소원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비유의 등장인물을 염두에 두십시다. 이 비유에는 특히 '소원하는 자의 중요한 자질'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필요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

 

이 비유에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자발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과 관련된 사람의 필요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적 배고픔, 사랑이라는 마음의 굶주림, 욕망을 쫓는 왜곡된 마음의 욕망을 채우려는 굶주림도 있습니다. 오늘, 배고픔을 채우자고 하는 마음의 갈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생존을 위협하는 굶주림뿐만 아니라 방어의 보장(도움)의 필요도 있습니다. 또한 '한밤중'은 상징적입니다. 그것은 불신과 절망에 우리를 가두는 어둠이며 위기입니다.

 

(2)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

 

이 비유에는 사람의 필요를 감지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어줄 것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사람의 필요에 대해 전혀 무력하다는 자각입니다. 거기서부터 교섭이 시작됩니다. 찾아오는 사람을 위해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빵 세 개를 빌려 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세 개의 빵'은 사람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3) 거절과 그 의미

 

그런데 여기서 의외로 거절을 만나게 됩니다. 이 거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경험의 의미는 '소원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한지, 그 정도가 얼마나 진실한지 종종 시험받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구하고 있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친구에 대한 우정의 확실성,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확실성을 시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거절입니다. 하늘의 본성은 베푸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게다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며,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미루어 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들어주시지 않는 기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이 비유의 원리는 '다만 계속 구하면, 그에게는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4) 끝까지 신뢰하고 계속 기도할 것

 

+ 예수님은 그는 친구이기 때문에 일어나서 무언가를 주지는 않을지라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주지는 않더라도 '다만 계속 구하면', 즉 반드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계속 구하면 그 믿음 때문에 친구는 '일어나서 필요한 것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끈질기게 계속 부탁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뢰의 끈끈한 유대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인내와 지속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 이번 '성령의 기도' 본문에도 항상 깨어 있어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를 다하여 기도하고 또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원의 기도'에는 이렇게 같은 것을 위해 여러 번 반복해서 기도하는 인내와 지속성이 요구되는 것일까?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믿음의 확실성을 시험하는 측면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타이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까?

 

2. 영적인 돌파구를 열기 위한 일정량의 기도의 물질

 

영의 영역에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힘, 생명의 강물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자 Christ For The Nations의 설립자인 고든 린제이 목사는 이를 '기도의 물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생각에 따르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달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성령의 실제적인 힘이 축적되고, 그것이 풀려서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더치 시츠 저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기도)

 

손전등을 켜는 양과 한 건물이나 마을 전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용량은 다릅니다. 영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각에 따라 다른 양의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7:14~21.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나간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와 금식하지 않으면 나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양, 다른 수준의 힘이 필요하다는 이 원칙이 많은 기도가 응답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간구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힘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용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기도의 물질'이 저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장된 기도는 결국 홍수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장애물까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3. 끈질기게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사례들

 

(1)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

 

엘리야 선지자는 과부의 아들이 죽은 곳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몸을 아이의 몸 위에 엎드려 얼굴을 맞대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열왕기상 17:21). 왜 세 번이나 기도했을까? 믿음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첫 번째 방법이 잘못된 것일까? 그 이유는 성경에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영적 기도의 양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3'이나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단순한 횟수인 '3'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영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1에서 주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러 가라. 내가 이 땅에 비를 내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에는 구름이 나타날 때까지 엘리야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 임산부의 자세로 7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비가 내릴 때까지 7번이나 기도해야 했을까? 그 이유는 충분한 기도를 드릴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소원의 기도'를 통해 충분한 힘이 풀릴 때까지 엘리야는 계속 기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2) 다니엘 선지자의 경우

 

다니엘 선지자도 하루에 세 번씩 충실히 기도함으로써 영의 영역에서 힘을 축적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 악령의 저항을 무너뜨릴 만큼의 힘이 쌓이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가진 천사를 보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지옥의 모든 악령을 물리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원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소원의 기도'는 돌파구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돌파구를 열기 위해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3시간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영의 세계에서 힘이 해방되어 돌파구가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의 경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바라는 것과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풍성히 나누어 줄 수 있는 분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에 걸쳐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20).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힘으로'라는 구절입니다. , 우리가 간구한 기도의 분량에 따라 우리의 원하는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 그분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토록 있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16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의인의 간절한(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치지 않는) 기도는 큰 힘(폭발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열심적''지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기 위해 기도를 쌓아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는 모이고 쌓이는 것입니다.

 

+ 우리의 원수는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호소하여 기도를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원수의 계략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바울이 에베소서 6:18에서 말한 '성령의 기도'에 대해, 특히 이 구절의 후반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라고. 그런 기도를 쌓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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