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 존 칼빈주석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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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의 구원
- 로마서11:1-12 -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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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 증거는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신자들이 유대인이었고 바울 자신도 그러하였다.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는 배교의 시대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1.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1-6절)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1절)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은,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 마땅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전에 맺은 언약이 폐기되었는지 그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불충실성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파괴된다고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리와 선택이 인간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난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2절)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는 말에서, 바울의 대답은 부정적이요, 한정적이다. 만일 그 백성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단연코 부인했었다고 하면, 그는 자가당착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충하는 말을 끼어 넣어, 유대인들이 버림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약의 신뢰성과는 정반대로 행하여, 아브라함의 씨 전체를 결코 버리신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버림을 당했다고 해서 몇몇 씨가 구원을 못 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조직체로서의 유대 백성이 버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에 속한 회원은 아무도 버림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례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상적인 표적이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외적 소명 그 자체로서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영예가 제공되는 데도 그들이 그것을 거절하는 까닭에, 그 영예가 그들에게서 박탈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특별한 백성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이 불변하시다는 증거를 그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불변성의 근원을 그의 은밀한 선택에서 찾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관심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가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자기의 결의를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앞서 말한 바 있는, “미리 아신다”는 동사가 하나님께로 나와 오도록 되어 있는 각 개인의 성품을 그가 미리 보고 아시는 뜻에서 그저 한번 보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까닭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행위도 할 수 없는 자들을 자기의 자녀들로 택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된 것은(갈4:9),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은총을 미리 베푸셔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데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일반 소명이 결실을 맺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성은 결코 페하지 않으며 남은 자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보존하신다는 점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차별 없이 자신에게로 초대하기로 하시지만, 그가 자기 자신의 백성인 줄로 아시고, 그의 아들(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이요, 또한 끝 날까지 신실하게 그가 지켜주실 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아무도 내적으로 소명하여 인도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여 교회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겠다. 만일 성령의 빛을 듬뿍 부여받은 탁월한 선지자 엘리야도 자기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수효를 헤아리고자 했을 때 이와 같이 오류를 범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경우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 분별력은, 엘리야의 것과 비교하면, 무디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하여 경솔한 결정을 내리지 말고, 오히려 교회가 우리의 육안에는 전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하여 자라나고 있다는 이 진리를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선택받은 자의 수효를 계산하는 자들은 우둔하고 교만하게 행세하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3-4절)
"칠천 명을"이라는 말을, 우리는 칠천이라고 하는 한정된 수를 무한정의 수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뜻하신 바는 큰 무리를 명기하려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통탄할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처럼 크게 넘치는 까닭에,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경건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을 경솔하게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한편으로, 온 세계 도처에 아무리 불경건이 가득하고, 가공할 만한 혼돈이 사방에서 우리를 짓누른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하나님의 날인(捺印) 하에 안전하게 남아 있다는 이 진리가 우리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감시로부터 자기들의 허물들을 감추려고 하듯이, 아무도 이와 같은 사실을 구실로 삼아 게으름을 핑계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건전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들만이 구원 받는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자기들의 몸을, 비록 겉으로만 행한 것일지라도, 우상을 섬기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만이 건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본 구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순결성을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부정이나 미신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게 하는 것까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5-6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라는 말로서, 바울은 그의 진술을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비교시켜 부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에서 나는 공로는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세우게 되면 다른 하나를 파기하게 된다.
그러기에, 선택을 논함에 있어서 행위를 참작하게 될 때에는, 공로와는 무관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바울은 선택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자비를 크게 높인다-를 필시 가리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미리 보시는 자격을 우리의 선택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광신주의자들은 그들이 바울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참작하는 것이 과거의 행위이든지 아니면 미래의 행위이든지 간에, 은혜가 있는 곳에는 행위가 발을 붙일 곳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바울의 말이 늘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 또는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고, 한 계단 더 올라가서 왜 하나님이 창세전에 어떤 사람들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간과하셨는가를 묻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하신 뜻 외에 다른 이유로 인하여 이 같은 구별을 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고 진술하고, 행위를 조금이라도 인정하게 되면 그만큼 은혜를 감소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행위에 대한 예지를 선택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를 미리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의 예지를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버리신다고 할 것 같으면, 행위에 대한 보상이 이미 정해진 것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유일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다만 우리의 선택에서 반쪽만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앞에서 아브라함의 칭의에 관하여 논증하기를, 보상이 지불되는 경우에는,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똑같은 근원에서 그의 논증을 끌어내어 진술하기를 하나님이 어떤 수의 사람들을 양자로 삼아 구원 얻게 하실 때 행위가 참작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당연히 지불되어야 하는 보상에 관한 문제이며, 따라서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게 되고 만다.
바울은 여기서 선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논법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관한 전체 논증에 그것을 확대 적용시켜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때에는 언제든지, 행위에는 전혀 공로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은혜를 언급하는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파기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2. 구원의 원인이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달려 있다. (7-10절)
(1)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7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라는 말에서, 똑같이 죄인이 된 자들을 그렇게도 엄청나게 구별되게 한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오직 선택에 의해서만이 그 같은 구별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누가 여기서 알지 못할 것인가?
즉, 우리가 의를 얻게 된 유일한 이유는 "택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마치 그가 말하기를 , 의를 얻으려고 애써도 공로를 의지하는 자들은 그것을 얻지 못하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된 자들은 의를 얻게 된다고 한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남은 자를 전체 이스라엘과, 아니 그 백성 전부와 간략하게 바울이 비교하고 있다. 결론은 구원의 원인이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라는 말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파멸에서 건짐을 받는 것처럼, 택함을 입지 않는 자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무딘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유기된 자들에 관하여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이 당하는 파멸과 정죄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의 말씀들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따왔다. 우리가 만일 그것들을 그것들의 문맥에서 면밀하게 살펴볼 것 같으면, 바울이 의도한 것과는 모순되어 보인다.
각 구절이 의미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 마음이 무디어지고 완악해진 것이 징계로 간주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못한 자들에 의하여 이미 행하여진 사악한 행위들을 이와 같이 징계하여 벌하신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입증하고 하는 것은, 본래 사악한 자들이 마음이 무디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을 받은 자들이 무디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난제를 간단히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때 우리의 본성이 완악해진 그것이 그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불경건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원한 유기에 대해서 말할 때에, 열매가 그 나무에서 또는 강이 그 수원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기에서 연유하는 결과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였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그들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아 심령이 무디어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들의 파멸의 근원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저주를 받은 까닭에, 그들의 모든 언행심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당하게 되는 저주만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영원한 유기의 원인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대할 때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바로 바울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온 인류에게 가장 지선의 것이라고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을 그가 자유롭게 결정하지 않으신 것 마냥,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고 숨겨져 있는 이 제일의 원인을 다른 외관상의 직접적인 원인들 밑에 가리워 놓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더럽고 부패한 씨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받아 마땅한 보상을 하나님이 개인들에게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2)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8절)
바울은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가 사용한 어순을 반복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결론만을 그에게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실 백성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예언의 말씀의 핵심을 찔러 진술하기를, 사람들이 이 같은 우둔함에 내어 버려졌을 때 모든 감각이 완전 마비됨으로써, 그들이 신랄하게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선언하기를,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이 혼미해져 버린 까닭에, 몹시 놀란 상태에 있게 되어 전혀 의견을 세울 능력이 없다고 했다. "보지 못할 눈"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언의 말씀이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오늘날까지"라는 말을 첨부하고 있다.
(3)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9-10절)
"다윗이 이르되 ..."라는 말은, 이 저주가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들에게 임함으로써, 그들의 음식은 변하여 독물이 될 것이기 때문에(복음이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다. (11-12절)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절)
사도 바울이 한번은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때에는 개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유의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그의 이 논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크게 당황하게 된다.
(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2절)
이스라엘 중 소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대다수는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절하고 이제껏 믿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되었다.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풍성한 구원이 되었다면, 장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면 온 세상이 얼마나 더 충만한 구원의 복을 누리는 것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의 회복을 암시한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