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구원
- 로마서11:13-24 -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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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자기 골육 이스라엘 사람들로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사하는 곡식 가루의 처음 한 줌이 거룩하면 그 전체가 거룩하며,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하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1. 이방인을 시기하게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한다. (13-16절)
(1)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3-15절)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망에서 생명을, 어두움에서 빛을 신기하게 나오게 하셨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백성이 부활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생명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더욱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다고 바울은 추론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부활(사는 것)은 우리가 사망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2)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6절)
"처음 익음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떡덩이도 그러하고"라는 말에서, 기억할 것은, 이와 같이 비교할 때에 바울이 민족과 민족을 대조하고 있고, 사람과 사람을 대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비교할 것 같으면, 그들이 다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동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로부터 구별되었던 것은, 그들이 여호와께 특별히 속한 백성이 되기 위함이었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거룩한 언약에 의하여 성별되어 있었고, 또한 특별한 영광을 덧입고 있었다. 그러나 언약이 그 시기에는 거의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축복이 실속 없는 것이거나 효력 없는 것이 결코 아니었음이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유전적인 거룩이 족장들에게서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바울은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약속을 고려하여 넣었다기보다, 사람들만을 주제로 하여 논하고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이와 같은 결론은 정당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의롭다고 해서, 그가 자기의 정직성을 자기 아들에게 직접 전달시켜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도 거룩하게 되리라는 조건으로 그를 성별하셨고, 따라서 아브라함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전체 후손에게까지 거룩성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모든 유대인들인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성별되었었다고 바울이 논증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견해를 확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가지의 은유를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제사법에서,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에서 취해 온 것들이다.
제물로 드려진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전체 떡덩이를 성별시켜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무의 즙액은 뿌리에서 가지에로 퍼져 나간다. 떡덩이가 처음 익은 곡식 가루에 대해서 또는 가지들이 뿌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관계성을 후손들이 그들의 부모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에게서 성별되어 있다는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단지 여기서 거룩이 유대 민족의 영적 고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와 같은 영적 고귀성은 그들의 본성에 본래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언약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본성적으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유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서 우리의 최초의 본성으로 인하여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민의 고귀성을 초자연적 특권이라고 말해서 좋을 줄로 안다.
2. 이방인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17-21절)
(1)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17-19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를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라는 말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서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내세울 수 있었던 모든 구실들을 예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실들은 그들에게 교만을 넣어 주기보다는 겸손케 하는 것들이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꺽이었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접붙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의당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을 낮추고 순복하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열매는 우리 안에서 겸손과 두려움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확신과 반대되는 공포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더욱 우리가 걱정하거나 안절부절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의 본질은 어떤 것일까? 여호와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것을 생각토록 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이중 상태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본성의 비참한 상태를 늘 염두에 두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오직 두려움, 권태, 근심, 그리고 절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그에게 부르짖게 되도록 완전히 낮아지고 상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나 자아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지 못하거나 평안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권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위로를 누리지 못하게 되거나, 또는 이 근심과 절망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확실한 기쁨과 소망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이 두려움은 교만하여 경멸하는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수단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주제넘게 행세하고, 무뚝뚝한가 하면,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만하고 무례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자긍으로 들떠있지 않도록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아낌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다소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이 권고의 말씀은 육신을 억제하는 것-이 육신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결코 믿음의 확실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앞서 진술했던 것, 즉, 바울의 말은 개인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방인 전체를 뭉뚱그려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특별히 명심해 두어야 한다.
이방인들 가운데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말로만 그것을 고백하면서, 까닭 없이 교만하여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이방인들이 꺾이어질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뒤에 가서 다시 알게 될 것이지만, 이유 없이 그렇게 경고한 것이 아니다.
(2)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0-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라는 이 말씀은 모든 오만을 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이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버림당한 것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파멸되게 한 가지 요인은 그들이 얻은 고상한 품위를 경시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이 멸시한 데 있었다. 그들은 비록 원가지들이었지만, 아낌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하여 무례하게 될 경우, 돌감람나무 가지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같은 점을 깊이 생각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아주 대담하고도 끈질기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게 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바울이 일반적으로 이방인들 전체를 뭉뚱그려 말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꺽이고"는 개인들에게 적용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의 경우 그것이 변경될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그것이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선언하기를, 만일 그들이 유대인들을 모욕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버리셨던 옛 백성을 다시금 자신과 화목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들의 교만을 인하여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는 말씀에 의하여 겸허를 배워야 한다. (22-24절)
(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라는 말로, 바울은 경건한 자들을 각기 따로 떼어서(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말하지 않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비교하고 있다.
바울은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이라는 조건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택함을 받은 개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에 대해서 뭉뚱그려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악용하는 때에는 즉시, 그에게 베풀어진 긍휼이 박탈되어 마땅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 중 아무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의 긍휼 안에 그가 계속 거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택하실 때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앙의 견인-이 견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가 우리 안에서 완성하게 된다-은 선택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접붙임을 받아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된 것으로 바울이 앞에서 인정했던 자들을 그가 어떤 의미에서 찍히는 바가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가 있다.
우선 이와 같은 일이 택한 백성에게는 일어날 리가 없지만, 그들에게 이 같은 경고가 필요한 것은, 육신의 교만을 꺾기 위함에서이다. 사실상 육신의 교만은 그들의 구원에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공포에 질려 육신의 교만이 꺾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추임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제 멋대로 거부하는 육신의 요소를 그들이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는 이 말씀에 의하여 겸허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바 있듯이, 바울이 여기서 각 개인의 특별한 선택을 논하고 있지 않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대립시켜 놓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그릇되게 자랑한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한편, 공통되는 온몸(교회)에게 말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이름뿐인 신자들과 그리스도인의 지체들이 많이 있었다.
(2)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3-24절)
이방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끼지 않고 꺾어버리셨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들인 이방인들도 꺾어버리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하지만, 불신앙과 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분이 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