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 존 칼빈주석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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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사람
- 로마서7:14-25 -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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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자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의 육신에는 죄성과 연약성이 남아 있다. 구원받은 자에게도 이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다. 그러나 그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도 점점 거룩해져 간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1. 중생한 사람의 실례를 제시하며, 율법과 인간의 성품을 비교한다. (14-17절)
(1)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는 말은, 바울은 이제 율법과 인간의 성품을 보다 면밀하게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악의 근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바울은 중생한 사람의 실례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 중생한 사람 안에서 그의 영이 주의 율법에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하는 만큼 육신의 자재들이 그 율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과 인간의 본성을 간단하게 비교하고 있다. 인간과 관련이 있는 문제들 중에 영육 간에 존재하는 경우보다 더 심한 불일치는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영적이요 인간은 육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 율법 간에 무슨 일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두움과 빛과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나, 율법을 신령하다(영적이다)고 부름으로 해서, 어떤 주석가들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바울은 율법이 우리 심령의 내면적인 감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대조함으로써, 육적(육신에 속하여)이라는 단어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율법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육과 영에 대한 대조가 여기에 명시되어 있다. 육신이라는 용어가 인간들이 모태로부터 가지고 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은 문맥으로 미루어 보아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미 또한 드러났다. 육신이라는 단어가 혈통을 가지고 태어나 선천적인 성품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적용된 명칭인 것은, 인간들이 타락하고, 아무런 평판도 없으며, 조잡하고 세상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의 완전한 교훈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대립이 된다. 그러므로 그 뜻은, 율법은 천국적이고 천사적인 의를 필요로 한다. 이 의에는 아무런 흠도 나타나지 않으며, 그 의는 더 이상의 청결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다만 그 의를 거스려 저항하는 것만을 행할 뿐이다.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죄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밝혀 주고 있다. 본질상 인간의 죄의 종인 것은, 몸종의 경우 그들이 소나 당나귀인 것 마냥 그들의 주인들이 그들을 사서 자기 마음대로 부려 먹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죄의 세력에 완전히 부림을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심령과 모든 우리의 행위는 죄를 짓기가 쉽다.
(2)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라는 말은, 바울은 이제 이미 거듭난 사람에 대한 보다 특정한 실례를 언급한다. 신자의 의지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선을 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반하여, 완강하게 반항하며 저항하는 본성의 부패성이 그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에게서 우리의 본성과 율법의 의 사이에 얼마만한 정도의 불일치가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적합한 실례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중생한 자가 보여 주는 실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단순한 고찰보다도 다른 구절에 대해 보다 적합한 증거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이 논증의 전체를 보다 확실하고 충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에 의해 언급된 이 갈등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된 연후에야 비로소 사람 속에 존재케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사람은 그 자신의 본성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정욕이 완전히 발동하고 만다. 비록 경건치 않은 자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그들이 악을 즐길 때에는 다소 쓴 맛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악을 미워하거나 선을 좋아한 다는 것을 추단할 수가 없다.
이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고통들을 당하게 허락하신 것은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 그의 심판을 나타내시려는 것이지 의를 사랑하거나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들이 갖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않은 사람들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경건치 못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의 판단을 받아 자기들의 죄악을 깨닫게 될 때 그 죄악들을 정죄하지 않을 만큼 그들의 마음이 가리어져 있거나 결코 완악해지는 법이 없다. 지식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들은 옳고 그릇된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또한, 그들은 그들의 죄의식 때문에 혐오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금생에서마저도 일종의 정죄를 선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하여 죄를 만족하게 여기고, 그래서 아무런 혐오감도 없이 죄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양심의 가책은 그들의 의지의 반감에서라기보다는 심판의 반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중생시키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육신의 잔재로 말미암아 땅에로 다시금 뒷걸음치고 만다. 따라서 그들은 이와 같은 상태에서 그들 자신의 본성을 대적하여 싸우며 또한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신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정죄하는 것은 그들이 이성의 판단에 의하여 강요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감정으로 그것들을 증오하고 죄를 범하는 그들의 행위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영육간의 전투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5:17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 그의 영혼 전체의 동의와 감정의 일치를 얻어 죄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과, 그러나 그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순간 즉시로 분열이 생긴다고 말씀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주제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계획을 미숙한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이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인간의 능력에 대한 그러한 서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철학적인 원리에 있어서 훨씬 깊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이래로 사악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성경이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노니"라는 말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범한 행위들을 그 자신의 것으로 그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행위들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라는 말은, 바울에게는 언제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소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었으면서도, 그가 원했던 것을 행하지 못하는 즉, 민첩하게 선을 추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다만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가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경우에 실패한 것은 그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넘어졌기 때문이라고 불평한다.
"원한다." 그리고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표현의 말씀은 성령에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신자들 가운데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육신도 그 자체의 의지를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바의 의지는 특정한 감정을 가지고 추구한 것을 뜻한다. 그를 대적하여 겨루는 것을 그는 그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으로 일컫고 있다.
(3)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6-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사악한 행위를 육체의 탓으로 돌림으로 해서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들을 위장할 수 있는 정당한 방어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경솔한 사람들처럼, 자신은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양,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사람의 탄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감정과 그의 육신 간에 있는 불일치의 정도에 대한 선언이다.
본문 또한 바울이 여기서 이미 거듭난 경건한 사람들만을 논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 자신이 죄에게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참으로 그 자신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의를 간절한 마음으로 추구하고 열망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그 자신 안에 새겨 두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기 때문에, 죄가 그의 영혼의 한 구석에만 남아 있는 것이다.
2. 나에게도 육신에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적 싸움이 항상 있다. (18-20절)
(1)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8절)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는 말은, 본성에 관한 한 그 속에 아무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속"이라는 말의 뜻은 ‘내게 관한 한’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논술의 서두에서 아무 선한 것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 거하되, 그러나 그의 육신에게는 결코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지 않도록, 수정을 가한다.
여기서 다시금 그는 그가 모든 인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다만 육신의 잔재와 성령의 은혜 때문에 자신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만일 자신의 어떤 부분이 부패로부터 면제되고 그래서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고 아니할 것 같으면, 무슨 목적으로 이 수정을 첨부하였겠는가? 바울은 "육신"이라는 용어 아래, 성령의 성결케 하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 본성의 모든 자질과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포함시키고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라는 이 말은 그가 무력한 욕구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위의 효력이 그가 원하는 것에 부합되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오는 말, 곧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또한 이 의미로 해석되어야 함은, 육신이 신자들로 하여금 신속히 행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또한 과오를 범하도록 그들에게 방해가 되는 많은 장애물들을 그 육신이 놓아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잘 준비하여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의지’(원함)는, 믿음에의 준비로써, 성령은 경건한 자를 단련하여, 그들이 열심을 내고 준비하여 그들의 지체를 하나님께 순종케 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의 능력이 그의 원함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것, 즉 그가 바랐던 선을 성취하는 일이 그에게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2)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9-20절)
본 절의 말씀은 앞의 말씀과 같은 취지로 되어 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그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은, 아무리 신자들이 바르게 감화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연약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어떤 행위도 흠이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경건한 자들의 몇몇 실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애의 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한 가장 선한 행위들이 언제나 죄의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는 한, 어떤 상급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결론지을 수가 있다.
3.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21-23절)
(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라는 말은, 바울은 여기서 사중의 법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런데 이 법만이 법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것은, 우리의 삶이 바르게 형성되는 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법에다 "마음의 법"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코자 하는 충성스런 마음의 준비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준봉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죄의 법"이 있다. 바울이 말하는 바 이 죄의 법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의 육신 안에서 불법이 행사하는 세력을 뜻한다. "폭군의 법"도, 아무리 그것이 간악할지라도, 여전히 법이라고 불린다. 이 죄의 법에다 바울은 ‘지체 속에 있는 법’을 상응시키고 있다. 이 법은 바로 그의 지체 안에 있는 탐심이다. 그는 탐심과 불법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선한 것을 행하려고 힘쓰는 동안, 그들 자신 안에서 포악한 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고 반대하는 악한 성향이 그들의 골수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22-23절)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는 말은, 우리는 여기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열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 영은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나, 육신은 그를 반대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에 의하여 마음이 산란해져 있기 때문에, 이제 그는 이중의 피조물이다. 바울이 그가 그의 육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 것은 그가 아직도 악한 정욕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충동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육신적인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영적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속사람"과 "지체"의 뜻을 주의 깊게 유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나쁜 길로 빠졌다. 그러므로 속사람이란,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난 영혼의 영적인 부분을 뜻한다. "지체"란 다른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영혼이 인간의 보다 우등한 부분이고 몸이 더 열등한 부분이듯이, 영은 부패하고 오염된 영혼으로써 몸을 대신한다.
이러한 이유로, 영은 "속사람"이라고 부르고, 육신은 "지체"라고 하는 것이다.
속사람이 고린도후서4:16에서는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 있으나, 본문의 경우는 내가 내린 해석이 적당하다. 영을 특별히 속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심령과 숨은 감정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반하여 육신의 정욕은 사람 밖에서 길 잃고 헤매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땅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체라는 말을 육신적인 것들을 경멸할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법이란 의심할 나위 없이 바르게 정돈된 감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임에 분명하다.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지식이 없다고 한 것은, 그들의 영혼이 그 이성을 상실한 까닭이다.
4.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24-25절)
(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로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육신으로 더불어 투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서와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의 불행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애통하고 비탄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오직 단 한분의 구원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처럼, 그가 의심에 빠져 있기나 한 듯이 누가 그를 건져내 줄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사망의 몸"이란, 죄 덩어리 또는 인간 전체를 형성하고 구성 요소들을 뜻하나, 예외적으로 그의 경우에서만은 죄의 잔재들이 남아 있어서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이다. 바울이 가르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안이 열려 있어서, 그들의 본성의 부패 및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사망을 하나님의 율법과 분별력을 가지고 분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몸이라는 단어가 바깥사람과 지체를 뜻하는 것은, 죄의 기원이 창조의 법칙을 인간이 떠나서 육신적이고 세속적으로 되어 버린 데 있다는 것을 바울이 유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 야수보다는 더 낫다. 그러나 그의 참된 우월성은 상실되었으며, 그리고 남아있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패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그의 영혼이 타락되어 있는 한, 육신으로 변해버렸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기에 창6:3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은 여기서 그의 영적인 우월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래서 경멸할 목적으로 동물에 비교된 것이다.
바울의 이 본문 말씀은 육신의 모든 자랑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가장 완전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한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사망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철저하게 살펴보면, 그들 자신의 본성에는 곤고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나 바울은 그 자신의 실례를 들어서 완전주의자들이 무감각에 빠지지 않도록 고통의 절규를 깨우쳐주고,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들의 죄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책으로써 사망을 구하도록 그들에게 명하고 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절)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이 짧은 끝맺음의 말에서 바울은, 신자들은 그들이 육신에 거하는 동안에는 결코 의의 목표에 이를 수가 없고, 몸을 벗어버릴 때까지는 계속 그들의 영육간의 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다시금 "마음"이라는 단어를, 철학자들에 의해 높임을 받게 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조명을 받음으로 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결의하게 된 그 부분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은 지식-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건져주신 것에 대해 아는 지식이다-을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식에다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연결하여 놓았다. 이 예외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것과 더불어, 그는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많은 타락과 부패로 더럽혀진 채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