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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教会=Heian Church


하나님의 상속자

- 로마서8:15-25 -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요한복음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구원을 받은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며 참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15-17)

 

(1)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5)

본문의 두 가지의 영 곧 하나는 "종의 영"이라고 바울이 칭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율법에서 얻을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으로서, 그것은 복음에서 나온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전자는 과거에 주어진 것으로 공포심을 자아내고, 후자는 현재에 주어진 것으로 확신을 갖게 해준다.

"다시"라는 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오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준 측량할 수 없는 특전으로서, 우리는 이로 인하여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양자의 영을 받지 못했다고 하거나, 또는 율법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종들이었고 아들이 아니었다고 추론하여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율법 시대의 사람들을 복음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다기보다는, 율법의 역할을 복음이 주는 혜택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약 시대의 선조들을 다루던 것보다는 훨씬 더 관대하게 신자들을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 신자들에게 훈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인 면에서만 우리가 구약의 선조들보다 나을 뿐인데, 이는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의 신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몽학 선생하에 두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지금 알려진 그 자유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는 말은, 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차별 없이 모든 언어로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시게 될 정도로 하나님의 자비가 이제는 온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목적은 모든 민족들 간에 존재하는 감정의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사이에 아무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나안의 방언이 모든 민족에게 공통어가 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좀 다르게 말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같다. 그는 언어의 외적인 형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마음이 일치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순전한 예배를 드릴 때의 한결같은 동일한 열심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짖느니라."는 단어는 확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는 의심쩍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두려움이 없이 큰 소리로 기도하여 하늘에 닿게 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다.

 

율법 아래에서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복음 아래에서처럼 자유롭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휘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성소로부터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출입문이 활짝 열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큰 소리로 자랑할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같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2:23). 그 약속이 더욱 분명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6)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에게 증인이 되신다는 것만을 단순히 말하고 있지 않으며, 라틴어 Contestatio(증거)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 Contestatio(증거하다)라는 라틴어로 번역될 수 있었던 복합 동사를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증거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안내자요 또한 교사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가 이 같은 확신에 선행하여 있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이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16절의 이 말씀은 앞 문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실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이 확신을 우리 마음속에 넣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마음이 확신으로 차있을 때에만이 우리의 입이 열리는 것으로 보아서,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부성애에 관하여 우리의 마음에 증거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혀는 벙어리가 되어 기도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속으로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올바르게 기도할 수가 없다는 원리를 언제나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 기도드림으로 해서만이 우리의 신앙이 증명될 수 있다고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원리도 이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성령의 이 같은 증거를 회상하게 해주고, 은혜의 약속을 깨달은 자들이 힘써 기도할 때만이 모든 신자의 신앙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알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본 구절은 도덕적 추측에 관한 궤변론자들의 천박한 논증들에 대한 좋은 반박이기도 하다. 궤변론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추측이란 마음의 불확실성과 근심 또는 동요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본 구절에는 그들의 반론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이 증거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보다 충분하게 논하고 있다. 또한 이 서신은 본 구절에 대한 보다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울 수가 없다고 하는 명제는 여전히 성립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의 확실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지식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3)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는 말은, 바울이 이같이 말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우리의 영원한 영광의 원인을 우리의 공로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방식의 표현법은 성경에 흔하다. 바울은 구원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성취해 주기 위해서 밟은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행위에서 오는 공로를 반대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충분하게 논증하였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인내를 권유하고 있지만, 우리의 구원의 근원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이어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이어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다. 마태복음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고난 후에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장차 영광을 받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다.

 

2.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18-21)

 

(1)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8-19)

 

바울은 그가 우리에게 권면하였던 인내의 본을 말을 못하는 피조물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본 구절에 대한 각종 해석들은 생략하기로 하고, 나로서는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 ‘현재의 고난을 알게 됨으로 해서 감정이 상하게 되면, 부활의 소망을 간절히 고대하지 않을 피조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바울은 두 가지의 진리, 곧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영원한 영광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또한 알 수 있다. 사실 그 영광이 값진 것이기에 만물이 그것을 간절히 고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고대한다라는 표현은, 다소 흔하지 않은 진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의미하고자 한 것은, 피조물들이 큰 근심에 억눌려 있고 또한 간절히 고대하는 나머지 안절부절 못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을 밝히 나타내게 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영광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대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는 요한이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요일3:2). 나는 바울이 말한 원문을 그대로 살려 두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라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내 생각에는, 사도의 의도를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지나치게 의역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지막 날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들의 썩어질 몸을 벗어버리고서 하늘의 영광을 입게 될 때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바람직하고 행복한가 하는 것이 그날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에게 그 소망이 있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눈을 뜨고 보이지 않은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생명이 외관상으로 초라한 가운데 감취어져 있는 것이다.

 

(2)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이라는 말은,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목표를 선포하되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피조물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전하게 회복될 때까지는 새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것들의 재생을 기다리는 한편 하늘나라가 나타날 것을 고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들이 허무한데 굴복한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흔들림이 없이 확실하게 남아 있지 못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버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허무한 것을 본래적으로 완전한 것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뜻이 아니요."라는 말은,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에게는 아무 의식이 없는 까닭에 이라는 단어는 본래적인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본질은 본래적인 그것은 성질을 따라서 그 자체를 보존하며 완전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의인화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부분들이 의식을 부여받은 존재인 양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만일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의 불확실한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르지 못할 것 같으면 우리의 우둔함을 크게 부끄러워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3)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라는 말은, 우리는 이 같은 사실로부터 우리가 받은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추론할 수가 있는데, 이는 천하에 모든 무죄한 피조물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중에 발버둥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류가 받은 정죄는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의미하는 바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더불어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나름대로 더 나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인류를 완전한 상태에로 회복하시는 것처럼 현재의 타락된 세계를 그렇게 완전한 상태에로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짐승이나 식물들이나 금속들에 의해서 증명되게 될 완전한 상태에 대해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서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옳지도 않다. 왜냐하면 썩어짐의 주요한 요소는 부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리한 그러나 균형을 잃은 주석가들은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불멸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그 여부를 묻는다. 만일 이 같은 억측들을 마음대로 구사할 것 같으면, 결국 우리는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3.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 (22-25)

 

(1)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2-23)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처음 익은 열매라는 단어를 진귀하고 두드러지게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나, (칼빈)로서는 그 같은 해석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모호한 표현을 피하기 위하여, 그 단어를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을 사도들에게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서 또 몇 방울의 성령으로라도 뿌림을 받은 일이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즉 믿음에 크게 진보한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양의 성령을 부여받았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하기에는 요원한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 같은 사람들은 처음 시작하는 것들 또는 처음 익은 열매들로서, 완전히 다 익어서 수확한 것들과는 대조가 된다. 만일에 있을 성령 충만이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하여 동요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바울은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까지도라는 말을 덧붙여 우리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히 욕망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탄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참함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에는, 우리 또한 탄식하기때문이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는 말은, 우리가 구속 받은 것에 대한 대가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불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를 사망이 그것의 굴레로 주장하고 있고, 우리 안에 사망의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

 

(2)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은, 우리에게 그가 다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소망은 장래에 관한 것이요 현재의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으로 잡아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법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장차 그것을 완전히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