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존 칼빈주석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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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教会=Heian Church



하나님의 의와 구원

- 로마서10:1-21 -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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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의()가 있다. 하나는 율법의 의 곧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얻는 의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를 고집하다가 실패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사람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10:9). 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그 말씀을 들으려면 전파하는 자가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1.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책망을 들을 때, 자기에게 악의가 없었던 것으로 그가 말할 것 같으면, 대개 가장 적절한 변명으로 간주해 준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구실을 내세워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내는 데 전심전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의적인 악의가 없이, 다만 알지 못한 까닭에 선의로 저지른 과실은 어떤 것이나 용서 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아무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잔인무도하게 사도들을 학대하고, 그리고 복음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려 했던 것을 용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가 자랑삼아 내세우는 것과 똑같은 구실-‘악의는 없었다또는 몰라서 그랬다라고 말하는 것 따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의에 대하여 적당히 얼버무리려 하는 그와 같은 빈 말들은 다 집어치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중심에서 찾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에게 가는 정도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탈선하여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보다는 정도로 느릿느릿 가는 것이 더 낫다. 만일 참으로 경건하고자 할 것 같으면, 락탄티우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리-유일하고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를 기억하기 바란다.

 

(2)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3)

그들의 어리석은 자만(自慢)은 하나님의 의를 그들이 알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가 대조되어 있는 점에 또한 유의하라.

우선, 이 둘이 서로 상반되는 까닭에 함께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는 때에는 즉시로 하나님의 의가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 유형의 의를 대응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를 "하나님의 의"라 칭하는 한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거나 또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는 것으로 믿는 것을 인간의 의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단계가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데에서 의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의가 없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는 가에 대해서 진술한 바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바울은 선지자들을 우쭐대게 하는 자만을, 비록 그들이 열심을 가장하여 그것을 숨기고 있지만, 통렬하게 비난한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림으로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며 반항하고 있다고 말한다.

 

(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4)

유대인들은 정도를 추구해 온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의 의에 전심전력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로서는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논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여기서 이와 같은 논박을 함에 있어서, 그들 자신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힘쓰는 자들이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자들인 것은, 율법이 우리를 다른 의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다. 사실, 율법의 모든 교훈과, 모든 명령, 모든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벗어 던져버리고, 우리가 지은 죄악들을 깨닫고서 굴복되어야 하고, 또한 공로 없이 거저 주시는 의를 오직 그에게서만 구하게 되는 때에 가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크게 악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악을 행함으로 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오히려 거침돌이 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비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부끄럽게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 분명한 것은, 그들이 율법의 핵심과 정신은 거부하고서 죽은 문자만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의가 대신해 왔다. 그 의는 우리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값없이 주어지는 까닭에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의(1장에서 우리가 살핀 대로)는 율법에 의하여 증거된다.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꾸준하게 노력하여 율법이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믿음의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5-8)

 

(1)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5)

"모세가 기록하되"라는 본문의 말은 레위기18:5에서 인용한 것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바울 역시 이와 같은 개념으로 그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용한 것이며,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금생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레위기의 그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낸 것이다. “만일 율법의 모든 부분을 정확하게 성취하지 않는 한, 율법에 규정된 의에 아무도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완전에 결코 미치지 못해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율법의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 의를 얻을 가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율법이 불가능한 조건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약속 자체에서 논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행위에서 나는 의를 세우기 위하여 율법의 약속들을 인용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우리가 그 약속들에서 구원을 결코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만일 그것들을 우리가 신뢰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저주가 임할 것이다.

 

공로를 입증하기 위해서 헛된 약속들을 붙잡는 것을 좋게 여기는 교황주의자들의 우둔함은 더욱 더 가증스럽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헛되이 약속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범죄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6-7)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라는 말에서, 모세가 하늘음부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들이 이르기에는 너무나 멀고 험한 처소들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이 단어들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다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는 마치 어떤 영적 비밀이 그것들 아래 숨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말한 것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해설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한 말씀을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 생명이 우리를 위해 획득되어 있다는 것과 사망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복음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사실들에 의하여 확증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해서 사망을 삼키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해서 그가 그의 권능으로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주는 유익이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것을 우리가 구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믿음에서 나는 의만 있으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아주 충분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요소들-이것들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이 그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누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기업이 우릴 위해 준비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는 말씀은 누가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육신의 죽음에 수반하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의심들이 믿음에서 나는 의로 말미암아 제거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그런데 첫 번째 의심은 그리스도를 하늘에 모셔 내리려는 것이 되고, 또 하나의 다른 의심은 그를 다시 사망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지의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내리려고 하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옥의 공포에서 건져내 주시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이 아직도 이와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되는지의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요, 실로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3)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8)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라는 말에서, 바울이 이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율법의 교훈은 결코 양심을 고요하게 해주거나 평온하게 해주지 못하며, 양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것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말씀은 환유법에 의하여 약속의 말씀”, 즉 복음 자체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인데, 이는 그것이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이 대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같이 구별하여 이해할 때,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다만 사람들이 믿음을 소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구문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바울이 모세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와 모세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 역시 신적 은혜에 대한 약속에서만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3.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9-13)

 

(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9)

주의 말씀은 그것이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우리가 시인(고백)하는 것은 입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다.

믿음앞에 "시인"이 나와 있는 것은 성경에 아주 흔히 있는 도치법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이 순서상 먼저 나와 있고, 입으로 말미암는 시인-이 시인은 믿음에서 생겨난다-이 뒤따라 나왔더라면 어순이 더 좋았을 뻔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권능이 충분한 주이심을 우리의 입으로 참되게 시인하는 것이며, 그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그분이시오, 우리에게 복음이 되시는 그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명시하여 언급했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의 전체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속죄와 속상(贖償)이 비록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기는 했지만, 죄와 사망이 사단을 이기는 이김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획득된 것이다.

또한 이 부활에서 의와 새 생명과 영생불멸의 소망이 나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우리의 구원의 보장을 확증할 목적으로 우리 앞에 가끔 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그의 죽으심에서 딴 데로 돌리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그의 죽으심의 결과와 열매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으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한 바 있다.

더욱이나, 바울은 역사적 신앙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부활 자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의도를 포함시켜 높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그를 부활하게 하신 의도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여 생명 얻도록 하게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 생명을 되찾으실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부활 사역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되어져 있다.

 

(2)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는 이 구절은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구절의 말씀은 복음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하여 받아들임으로 해서 우리가 의를 얻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믿음의 거소가 머리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믿음이 위치하고 있는 신체의 부분에 대하여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진지하고 신실한 감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믿음이란 단순한 개념이 아니고, 확고한 확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뿐이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은, 바울은 앞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것을 자주 선언하였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지금은 우리의 구원의 일부가 입으로 하는 시인(고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 하는 시인이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다만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신 믿음을 입으로 고백함으로 해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사실, 그는 다만 참된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참된 믿음에서 고백이라고 하는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 그가 그렇게 가르쳐 주고자 한 것은 아무도 내용 없는 빈껍데기 믿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히 마음이 불붙음으로 해서 그 자체의 화염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말은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보는 대로, 바울은 분명하게 구분하여 칭의의 원인은 믿음이라는 것을 밝혔고,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는 데 무엇이 요구되는가를 또한 보여주었다. 아무도 입으로 고백(시인)함이 없이 마음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결과로써 필연적으로 입으로 하는 고백이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고백해서 비롯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믿음으로 만족하는 까닭에, 입으로 하는 고백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소홀하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가상적인 믿음을 크게 자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그들이 바울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 화염도 없고 열도 없는 데도, 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바보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1-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라는 말은, 오직 확신만이 요구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부요하시도다."라는 이 단어가 여기에서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자비하다은혜롭다는 듯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6:37, 44). 또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11),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고 참된 믿음과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