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하는 하나님과 "여호와이레"의 신앙
창세기 22:1~19
샬롬선교회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축복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이 고백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에 대해 상고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이 '축복하는 하나님'이라는 것
창세기 22장이라고 하면 아브라함 신앙의 최대의 시련이 기록되어 있는 곳으로서 알려진 중요한 곳이지만, 그 22장 17절에서 히브리어의 강의형이 사용된 동사를 본다면, '축복하다'라고 하는 '바-라후 בָרֵך'가 그것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아낌없이 바친 것에 의해, 여호와는 사자를 통해 "나는 확실히 너를 크게 축복하고…"라고 약속하고 있다. '크게 축복하다'는 원문에서는 '축복에, 축복하다'라고 되어 있고, 그 '축복하다'라고 하는 동사가 피에르형(수동형)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사람을 혹은 피조물을 축복한다고 말할 때에는 반드시 피에르형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축복하고,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사람을 축복하셨다. 창세기 1:22, 28/2:3/5:2/9:1, 26/12:2, 3, 3/14:19, 19, 20/17:16, 16, 20/18:18/22:17, 17, 18/24:1, 27, 31, 35, 48, 60/25:11/26:3, 4, 24, 24, 29/····(구약에서는 327회)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담을 축복하고, 노아를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이어서 이삭을 축복하신다. 성경이 '축복하다'라고 하는 동사를 피에르 형태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 하나님이 스스로 주는 것을 기쁨으로 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독자적인 성경의 신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 그리고 인간을 축복하셨지만 그 축복을 받는 올바른 관계를 방해하는 죄가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를 축복하고 그 길을 열려고 했지만, 그것을 막는 죄의 힘은 커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축복의 담당자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아브라함을 소명하는 곳에는 '축복하다'라는 동사가 세 번('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되'가 두 번, '사람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다'가 한 번) 쓰였는데 모두 피에르형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구원'과 동의(同義)라고 할 수 있다. 축복은 하나님의 독점 행위이며, 하나님의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계획이다. 그 계획의 담당자로서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14:19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소개한 멜기세덱도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역시 피에르형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축복은 이와 같이, 반복하고, 갱신되어 간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있는 3개의 '바-라프 בָּרַך'를 보면, 17절의 '크게 축복해'가 '축복에, 축복하다'에서 2회 모두 피에르형. 그리고 18절의 '축복을 받게 되다'는 '바-라프'의 히트 파에르형에서 역시 강의형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에 따라 축복을 이어 받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의를 바탕으로 한 구원의 계획이다. 그렇다면 축복의 담당자로서 호출된 아브라함 신앙의 마무리는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받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로 키워간다. 그 마지막 마무리의 시련이 22장이었다.
'축복하다'는 '바-라프'는 그리스어로는 '유-로게오- εύλογεω'라는 동사가 사용된다. 신약에서는 41회. 신약에서는 축복의 주역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최초로 선정되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9)라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축복이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모든 영적 축복이자,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그것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여호와이레"라는 고백이 의미하는 것
22장 7절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님이 ...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번역된 부분은 '에로-히-ㅁ 이루애'라고 되어 있다. '이루애 יִרְא'는 '라-아- רָאָה'의 단수 남성 미완료 파울로형으로, 본래 '보다, 찾다, 찾아내다'를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어 新改譯과 新公同譯에서는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다'고 의역했다. 그런데 가톨릭계의 프란시스코회역, 바르바로역에서는, 하나님이 '조치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들의 번역을 모두 아우름으로써 이 '이루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둘도 없는 외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따라 최선을 다해 주신다. 필요를 준비하여 주신다. 그렇게 '이루에'를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야말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대답한 '에로-히-ㅁ 이루애'가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14절에서, 아브라함은 '아도나이 이루애 יהוה יִרְאֶה'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고백이며, 17장 1절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는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22장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들 이삭의 순종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는 믿음이 함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축복은 계승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신약시대에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예고하고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이루애', 즉 '조치'는 '한 마리의 대신의 양'이었지만 신약 시대에 그 '조치'는 '예수의 부활'이다. 인간의 속죄를 위해 아버지는 자신의 둘도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고, 실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속죄(대신)를 삼았다. 아들은 그 아버지에 대한 끝까지 신뢰로 인해 하나님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소생, 즉 '부활'이다. 이 사건으로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사람과 한 사람, 이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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