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
- 누가복음 1:67-75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1:67-75]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서언
[누가복음 1:49-50]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누가복음 1:77-78]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 마리아의 찬양에 2회, 사가랴의 찬양에서 "긍휼"로 번역된 '에레오스'ελεος라는 명사를 3회(신약성경에는 27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강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에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하였습니다.
[67-71절]
+ 찬송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이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입니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킵니다(예레미야 23:5-6; 에스겔 34:23-24; 호세아 3:5; 이사야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입니다.
[72-75절]
+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보이시며, 긍휼을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 '긍휼'('에레오스'ελεος)과 '은혜'('카리스'χαρις)의 차이.
신약성경에서 '은혜'와 '긍휼'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은혜'는 grace로 번역되고, '긍휼'은 일반적으로 mercy로 번역됩니다. 성경 중에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없지만, 동사로 “긍휼히 여겨 주소서”라고 예수님께 탄원하고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구체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11 이후에,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긍휼히 여겨 주소서"라고 탄원했을 때, 그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장 18:35에 한 맹인이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시니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긍휼로 인하여 그 맹인의 눈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긍휼'의 행위에 의해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 사랑을 '은혜'('카리스' χαρις)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의 출처, 혹은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동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는 배경에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일방적인,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호의(사랑)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사랑('아가페' αγαπη)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로 주시는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평안'을 얻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 '은혜'와 '긍휼'과 '평안'의 관계 ; 바울의 인사에서
사도 바울이 편지의 인사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는 형식(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 디도서, 빌레몬서)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편지에서도 그 형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의 편지에서 바울은 분명히 의식하면서 사랑하는 제자의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라고 적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가 목회적인 의무에 대한 어떤 나약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으로, 바울은 자신을 예로 들면서 자신도 본래는 그런 의무 같은 것이 주어질 리 없는 자, 더 이상의 죄인은 없다고 생각되어도 어쩔 수 없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자신을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의무를 기대해주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이제 자신이 이런 봉사를 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실제로 행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생각나게 하면서 사랑하는 제자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긍휼과 평안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 '은혜'와 '긍휼'과 '평안'의 관계 :
'은혜'는 우리에 대한 일방적인 하나님의 호의, 동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평안'은 히브리적 색채가 강한 샬롬에서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의 총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순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은혜'에서 출발하여 '긍휼'의 일을 하고 '평안'('평화'도 같은 원어)이라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인간 측에서 말한다면, '긍휼'과 '평안'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깊게 알게 되는 순서가 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대담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언
+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밖에 없습니다.
+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습니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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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のあわれみ
- ルカ福音書1:67-75 -
シャローム宣教会
[ルカ福音書1:67-75] 67. さて父ザカリヤは、聖霊に満たされて、預言して言った。68. 「ほめたたえよ。イスラエルの神である主を。主はその民を顧みて、贖いをなし、69. 救いの角を、われらのために、しもべダビデの家に立てられた。70. 古くから、その聖なる預言者たちの口を通して、主が話してくださったとおりに。71. この救いはわれらの敵からの、すべてわれらを憎む者の手からの救いである。
72. 主はわれらの父祖たちにあわれみを施し、その聖なる契約を、73. われらの父アブラハムに誓われた誓いを覚えて、74. われらを敵の手から救い出し、75. われらの生涯のすべての日に、きよく、正しく、恐れなく、主の御前に仕えることを許される。
序言
[ルカ福音書1:49-50]「49. 力ある方が、私に大きなことを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御名は聖く、50. そのあわれみは、主を恐れかしこむ者に、代々にわたって及びます。」
[ルカ福音書1:77-78]「77. 神の民に、罪の赦しによる救いの知識を与えるためである。78. これはわれらの神の深いあわれみによる。そのあわれみにより、日の出がいと高き所からわれらを訪れ、」
= マリヤの賛歌に2回、とザカリヤの賛歌において、「あわれみ」と訳される'エレオス' ελεοςという名詞を3回(新約聖書では27回)使っています。
本文講解
バプテスマ、ヨハネの父、ザカリヤは口が開かれた後、聖霊が満たされて預言しました。
[67-71節]
+ 賛歌は、神様のされたことを知り、彼の恵みを体験した者だけができることです。
賛歌は神への信仰告白であり、祈りであり、神の救いに対する証です。サガリヤの賛歌の内容は、主がその民を顧みて、贖いをなし、「救いの角を、われらのために、しもべダビデの家に立て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御言葉は旧約聖書に記録されたメシアの預言の成就を指します(エレミヤ書23:5-6;エゼキエル書34:23-24;ホセア書3:5;イザヤ書11:10など)。角は力の象徴です。「救いの角」とは「力の救い主」という意味です。
[72-75節]
+ 旧約聖書と新約聖書は、神が恵みによって人々に憐れみを与えてくれる救いの約束です。
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救いの理由は、私たち自身にはなく、神の憐れみだけです。神は契約と誓いによって恵みを自分の民に啓示し、憐れみを自分の民に与えられました。
* あわれみと恵み(「カリス」χαρις)との違い。
新約聖書では、「恵み」と「あわれみ」は密接な関係を持っています。英語では「恵み」は「grace」と訳され、「あわれみ」は一般に「mercy」と訳されます。どのように違うのでしょうか。聖書の中にはその意味をはっきりと説明している箇所はありませんが、動詞で「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イエスに嘆願しているところでは、必ず、具体的な神の行為が促されています。たとえば、ルカ17:11以降で、10人のツアラートがイエスに「あわれんでくださ」と声を張り上げて嘆願したとき、それがいやされる奇蹟が起きています。次章の18:35に登場するある盲人がイエスに「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大声で叫び立てた時、イエスは「わたしに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尋ねられ、「目が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と言うと、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つまり、主のあわれみがなされたのです。
神の目に見える具体的なあわれみのわざによって現わされた神の好意、愛顧が「恵み」カリスχαριςと言われるものです。「恵み」は神のあわれみの出所、あるいは本源とも言える神の動機を意味することばです。人間は、具体的な神のあわれみを経験することで、神の恵みを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神のあわれみの究極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わされた十字架と復活による救いの出来事です。それをもたらした背景には神の私たちに対する一方的な、見返りを求めない好意(愛顧)があるのです。「恵み」は、「愛」アガペーαγαπηとほとんど同義です。
+「神の恵み」によって「神の憐れみ」としてくださる「救いの目的」は、「神の平安」を得て、生涯にわたって神の前で聖と義をもって恐れずに神に仕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
* 恵みと憐れみと平安のかかわり。 - パウロの挨拶から -
パウロが手紙の挨拶として最も多く使っているのは、「私たちの父な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恵みと平安があなたがたの上にありますように」というパターン(ローマ、コリント、ガラテヤ、エペソ、ピリピ、コロサイ、テサロニケ、テトス、ピレモン)です。ペテロもその手紙で同じくそのパターンを使っています。
ところが、テモテの手紙では、パウロは明確に意識しながら、愛弟子のテモテに対して「恵みとあわれみと平安がありますように」と記しています。それはテモテが牧会的な務めに対してある弱さを感じていたためで、パウロは自分のことを例に出しながら、自分も本来はそんな務めなど与えられるはずのない者、これ以上の罪人はいないと思われても仕方のない者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神はそんな自分を赦してくださっただけでなく、期待して福音の務めをゆだてくださったことを証しています。主のあわれみのゆえに、今、自分がこのような務めをしていることを述べてテモテを励ましているのです。パウロは自分の身に実際になされた神のあわれみを深く思い起こしながら、愛弟子を励ましているのです。それゆえに「恵みとあわれみと平安がありますように」と挨拶しているのです。
+「恵みとあわれみと平安」との関係:
「恵み」は私たちに対する一方的な神の好意、動機を表わすものです。「あわれみ」は、神の「恵み」が具体的、実際的な行動としてあらわされた出来事です。そして「平安」はヘブル的色彩が強いシャロームから来ているもので、神の祝福の総称を意味するものと考えます。これらの三つは常に循環しているものです。
神の側では「恵み」から出発して、「あわれみ」の行為をなし、「平安」(「平和」も同じ原語)という神のすべての祝福を与えられるのですが、人間側から言うならば、「あわれみ」と「平安」を経験して、はじめて神の「恵み」をより深く知っていくという順になります。あるいは、神の「恵み」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神に大胆に「あわれみ」を乞うことができますし、その結果、神のあわれみと祝福を経験することもできるのです。
結言
+ 救いの理由は、神の恵みと憐れみだけです。
すべての人は自分自身の中には救われる何の義も、条件もありません。神の恵みと憐れみによってではなく、世に救われる人はいません。永遠の地獄刑罰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罪人たちが救われる理由は、神の恵みと憐れみしかありません。
+ 救いの目標は、光と平安です。
イエス・キリストは「日の出」として来ました。その光は真の知識と義と喜びと命であり、平安の道に導かれる光です。救われた者たちは、永遠に神の御前で聖と義を持って神に仕えるで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