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의 시기와 방법

 

하나님께서 예정에 대한 사역을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하셨는가 하는 문제들은 예정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그 시기와 방법을 따로 구분해서 상술(詳述) 하기로 하겠다.

 

1. 예정의 시기

 

여기서 문제는 선택과 유기의 섭리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가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시기는 시간을 기초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기초로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작정 섭리 과정에 있어서의 사건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즉 그 시기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시기 전인가? 아니면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신 후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같은 문제는 신학적으로 전자를 가리켜 전택설(前擇說)이라고 하고 후자를 가리켜 후택설(後擇說)이라고 하는데, 이들 학설(學說)은 오랫동안 대립이 되어 논쟁을 해 오고 있으나 아직 완벽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두 학설을 차례로 검토(檢討)한 후에 최종적인 성경적 결론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먼저 전택설(前擇說)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主權)으로 영원 전에 인간 창조를 계획하실 때에 구원시킬 자와 멸망시킬 자를 먼저 예정하시고, 다음으로 인간의 타락(墮落)을 허용(許容)하실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하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서 죄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성구들은 많이 있다.(115:3, 16:4, 10:15, 49:9, 18:6, 11:2526, 20:15, 9:17, 9:21) 이 성구들은 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비유를 토기장이와 진흙과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전택설에 대하여 말하기를 전택설자들이 수납하는 작정들의 순서는 후택설의 그것보다 더 논리적이며, 통일적이라고 보여진다. 이 설은 구경목적(究竟目的)과 중간방편(中間方便)들 사이에 합리적인 순서가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천사들에 관한 예정의 유추는 전택설의 입장에 찬성하는듯 함은 그 예정은 오직 전택설적으로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반증(反證)을 제기하고 있다.

(1) 공무(空無)는 선택되기 불능하고

(2)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3) 무죄자를 정죄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모순이며

(4)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造成者)로 만들고

(5) 유기(遺棄)에 주권적 열의의 과도한 치중이며

(6) 은혜언약(恩惠言約)과 중보교리(仲保敎理)를 구성하기 불가능하다는 것 등을 제기하고 있다. 실로, 이러한 문제들은 전택설을 무기력하게 하는 중요한 난제(難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후택설(後擇說)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를 알아보기로 하자. 후택설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포괄적인 작정을 하실 때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시려는 작정이 인간을 선택하고 유기하시려는 예정보다 먼저였다는 이론이다. 즉 예정보다는 타락을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하셨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성경적인 근거를 들기도 한다.


이에 박형룡 박사는 이 설은 그 서술에 있어서 신적 작정들의 순서가 전택설의 제시한 그것보다 적게 철학적이요, 보다 더 자연스러우며 신적 작정 실시의 역사적 순서와 조화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실시에서와 같이 그 작정에서도 인과적 순서(因果的順序)가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 순서가 성경에 계시된 구원 실시의 역사적 순서를 반영(反映)하고 사색에 의하여 하나님과 죄의 관계를 해결하려고 자임(自任)하지 않는 것은 겸손한 태도이고 그 논법이 듣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적게 주며 실 생활의 요구와도 잘 조화된다.”고 언급하였다. 이어서 전택설자들은 자기들의 작정 교리의 도안(圖案)이 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주장하나 후택설자들의 소견에는 이 도안이 참으로 논리적이다. 이 설은 모든 부분이 잘 연결되며 조화되어 분리될 수 없는 사슬을 형성한다고 보여진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역사적 지위로 보아서 후택설은 전택설보다 우월하다. 전택설은 종교개혁이전부터 어거스틴파의 어떤 반열에 소개되었으나 지금까지 보편적 수납을 얻지 못하였다. 어거스틴 자신과 그후 그의 교리를 채택한 큰 무리가 후택설의 신종자들이었으며 현금에도 그렇다. 그리고 개혁교회 여러 파의 공적 교리서(公的敎理書)들이 항상 후택설을 채택하였다. (전택설에 대해서는 관용의 태도를 보이면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증은 없지 않다. 이에 대해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반증들을 요약하였다.

(1)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2) 허용적 작정설의 난관이 문제이고

(3) 유기의 원인 해명에 난관이 있으며

(4) 신적 작정의 통일성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역시 후택설에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반증들이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택설이나 후택설에 있어서 한 가지 공통점(共通點)을 가지는 것은 그 선택 시기가 모두 창세 전, 즉 영원한 때라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시고 구원하시고 멸망시키시는 섭리에 있어서, 이러한 일을 예정하실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먼저 생각하셨겠는가? 하는 것은 성경도 분명히 밝혀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타락 허용을 먼저 작정하시고 다음으로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신 것인지, 선택과 유기를 먼저 예정하시고 창조와 타락 허용을 작정하신 것인지 혼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택설이나 후택설이 모두가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전택설이나 후택설이 서로 대립하여 논쟁을 하는 것은 전택설은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고 후택설은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돌리지 않으려는 이론이다. 두 이론이 논리의 초점이 다른 것이다. 이같은 논리의 대결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정의 시기에 대한 문제의 해결은 전택설이나 후택설의 논리로 불가능하다.


예정의 시기에 대한 문제는 초점을 달리한 논리에 의해서 그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 이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섭리 방법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섭리의 목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논리의 출발은, 스스로 영원전부터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비롯한 인간을 창조하시려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명제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목적 없는 창조 사역을 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며, 이 목적은 모든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두 가지의 학설이 있다.


먼저, 인생의 행복(幸福)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목적이라고 하는 학설이다. 이것은 칸트(Kant),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 릿출(Ritschl) 같은 감화적 인물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1) 사람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이며

(2) 사실(事實)과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3) 성경적인 증거(證據)가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다음은 창조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선포(宣布)하는 데 있다는 학설이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41항에서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은 자기의 영원한 권능(權能), 지혜(智慧), ()의 영광의 현현(顯現)을 위하여 유형, 무형의 세계와 만물을 6일 동안에 모두 심히 선하게 무()로부터 창조 혹은 제조하여 내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대자들의 반증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하나님은 이기주의자라는 것


(2)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신 분이라는 것 등의 반증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기주의자라는 반증은 하나님을 인간과의 상대적(相對的) 존재로 보는 데서 나오는 과오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충족된 만족의 표현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충족하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revelation)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절대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심에 있는 것이며, 이에 수반되는 창조의 간접적(間接的)인 목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들 수 있겠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들의 행복의 결과적 표현이며,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은 전자(前者) 목적에 수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선포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 창조의 목적 역시 하나님의 영광 선포(榮光宣布)가 목적인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목적을 인간 창조로 이루시는 것은 먼저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기 위함이시다. 그러기에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본질(本質)보다 수단(手段)이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까?’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무엇을 만들까?’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자(選擇者)와 유기자(遺棄者)를 먼저 예정해 놓으시고 창조와 타락을 작정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고(思考)의 순서가 되는 것이다. 사실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때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들을 시간적으로 그 순위를 결정하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가 무모한 일이 아닐런지! 왜냐하면 영원이란 시작과 끝이 하나이며 처음과 나중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2. 예정의 방법

 

하나님께서 예정 사역을 하실 때에,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원하기로 선택하실 뿐만 아니라 멸하기로 유기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인간을 선택하시고 유기하시는 예정 사역을 하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위해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1) 선택(選擇)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함에 있어서 개인 뿐만 아니라 한 국가와 민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시며, 한 개인을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생존하도록 작정하여 선택하기도 하시고, 각자 개개인의 직업이나 배후자나 자녀들까지도 작정하여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려는 것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개개인의 선택을 논하려는 것이다. 각 개인이 하나님께 구원받기로 선택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 따른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그의 기쁘신 뜻대로 되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너무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


선택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고, “긍휼(矜恤)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심에 따라 된 것이며, “그 기쁘심을 따라……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하였고, 그리고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企業)이 되었도다고 했는데 이들 말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적 의지를 담고 있는 말씀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떠한 신앙(信仰)이나 선행 또는 공적에 의한 조건적인 선택이 아니고 전연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선택을 하신 것이다.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란 장소성(場所性)을 말하고 있으나 우리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의한 우리의 선택적 구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2) 유기(遺棄)에 대하여

 

유기는 버린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버리기도 하시고 개인적으로 버리기도 하신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유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다. 즉 각 개인 하나하나에 대한 예정 안에 버리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조건적이냐, 무조건적이냐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선택이 무조건적이라면 유기 역시 무조건적일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는 후택설이라는 이론으로 이러한 문제를 그럴 듯하게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문제 해결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타락을 작정하셔서 온 인류를 다 타락에 처하게 하시고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여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타락한 상태에 그대로 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 역시 타락하도록 작정하신 하나님께 궁극적인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는 근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의하여 택자와 불택자로 지어졌음을 밝혀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고 했고, 바울도 로마서 92223절에서 영광 받기로 예비한 긍휼의 그릇과 멸망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 있다고 했고,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8절에서 불신자가 그리스도에게 부딪혀 말씀에 불순종하여 넘어지는 것은 저희를 이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기되기로 예정된 자들이 무슨 조건에 의해서 그렇게 유기되어 졌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기의 방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기쁘신 뜻에 의하여 조건 없이 유기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출처: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