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에 따르는 문제들
1장에서 예정론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았고 2장에서는 예정론의 정당성을 살펴보았다. 특히 성경적 증거들을 통하여 기독교 예정론의 정당성을 너무도 분명하게 확인했다. 그 결과, 이에 따르는 문제들이 많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해도 결국은 간단하게 두어 가지 문제로 요약(要約)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유의지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책임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정말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로보트를 지어 놓으셨다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 섭리에 의하여 인간을 선택해 구원하시고 유기해서 멸하신다면 죄에 대한 책임(責任)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마땅히 하나님께서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들이 당연히 제기된다는 것을 필자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본장에서는 이 문제들을 논의함으로 ‘예정론’ 교리가 진리됨을 확증하고자 한다.
제1절 자유의지 문제
예정론의 정당성에 대하여, 제일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작정하시고 택자와 불택자를 예정하셨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물질에 불과하거나 로보트에 지나지 않는 기계적 존재라는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없이는 예정론이 절대로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경적(신학적) 의미보다는 철학적 의미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데서 많은 장애를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자유’라는 말의 의미만 보아도 성경적인 의미와 철학적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즉 성령에게 매여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인간 의지가 그 무엇에게도 간섭이나 제재(制裁)를 받지 않고 본능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어서, 마치 방종(放縱) 상태를 연상케 하여 자유와 방종과의 한계를 정할 수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유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와 철학적인 의미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의지’라는 말의 의미 역시 성경적인 의미와 철학적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절대의지에 지배를 받는 종속의지(從屬意志)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그 무엇에게도 간섭이나 제재를 받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자유롭게 결단할 수 있는 독자적(獨自的) 의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의지’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적인 견해와 철학적인 견해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것이다.
1. 자유의지의 유무
예정론 진리를 대하는 자들은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유무(有無)’에 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운명론(運命論)에 대한 것, 인간의 노력에 대한 것, 전도하는 일에 대한 것 등에 관하여도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예정론 진리를 수납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근본 문제부터 해결하고 그 부수적(附隨的)인 문제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태를 정확히 구분하고 그 상태에 따라 자유의지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후 계속 변화의 과정을 겪어 오고 겪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을 상태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 될 수 있다.
그 첫째는 원인(原人)이다. 이는 아담이 처음 지음 받아 타락하기 전 생령체(生靈體)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다음은 타락인(墮落人)이다. 이는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그 결과로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자를 말한다(계3:1). 즉, 영으로 죽은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는 중생인(重生人)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로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거듭난 자를 말한다.
마지막은 부활인(復活人)이다. 이는 육체의 모든 더러움을 벗고 영화(榮化)로운 몸으로 다시 산 완성된 사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상태를 구분하여 자유의지 문제를 논의(論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되는 이유는 그 상태마다 자유의지에 대한 결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상태에 따라서 논리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바르게 정립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의 개념에 대한 올바른 정립이다.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인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어디까지나 종속적(從屬的)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독자적으로 의지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될 수 없다. 만일 인간이 독자적으로 의지결정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만이 절대적(絶對的)인 자유의지를 소지(所持)하셨기 때문에 그의 의지의 결단은 절대적이요 그 무엇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으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나 피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종속적인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먼저, 원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하여 유기적(有機的)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종속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하기 전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을 수도 있었고 따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유기적 종속의지(從屬意志)가 있었다. 이러한 유기적 종속의지는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제재(制裁) 아래 있는 자유의지이다. 즉 절대적 제재를 당하지만 유기적인 종속 관계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실상으로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종속된 부자유(不自由)한 존재인데 자유롭다고 착각(錯覺)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 예를 들면, 어머니의 복중에서 자라나는 태아는 위치에 있어서나 영양관리 또는 정서관리 등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피할 수 없는 제재 아래 속해 있지만 태아 스스로는 그러한 제재가 부자유로 느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예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이해에 조금의 도움은 될 것이다. 결국, 타락 전 원인으로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제재 아래서 유기적인 종속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혹자들은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 성급하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 항목에서 취급하겠기에 조금만 참아 주기를 바란다.
다음은 타락인에 대한 자유의지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유기적인 종속의지를 소유했던 인간은 그 의지의 결단에 의하여 유혹자인 뱀의 꾀임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뱀의 말에 순종하고 말았다. 바울이 로마서 6장 16절에서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 바와 같이 뱀에게 순종한 인간은 결국 뱀의 종이 되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유기적 종속의지 마져 상실하고 말았다. 종속의지 뿐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5장 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라고 말했다.
즉, 타락인은 어디까지나 사망 권세의 다스림 안에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망 권세 역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를 받고 있는 권세이기 때문에 사단이 타락한 인간을 다스리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를 받는 사망의 권세 아래서 절대적인 제재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종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된 사단에게 종속이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따라서 타락인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기적 종속의지 마저도 전혀 없는 것이다. 타락인에게 의지가 있다면 사단의 권세에게 종속된 노예의지(奴隸意志)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타락인이 행하는 일 모두가 사망권세에게 종노릇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세번째는 중생인에 대한 자유의지 문제를 고찰할 차례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중생인이 가지는 특성이 문제가 된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셨으니 중생인이란 “성령으로 난 영”을 말한다. 즉, 불순종으로 인하여 죽었던 선택자들의 영이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어 성령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혹자들은 죽었던 자가 살았으니 자유의지가 완전히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중생인은 타락 전 원인(原人)인 아담의 상태가 되었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중생인은 타락 전 아담과는 다른 것이다. 타락 전 아담은 죄의 저주가 덮이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생인은 아직도 죄의 저주가 덮인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인이란 말은 거듭난 속 사람만이 아니고 겉사람 즉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육신까지를 포함해서 인식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특성(特性)을 지닌 중생인은 자유의지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론 겉사람은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매여 자유의지를 상실한 상태이다. 그러나 속사람에게는 성령의 능력에 절대적으로 제재를 받는 유기적인 종속의지가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중생인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죄의 권세에게 지배를 당하는 겉사람의 의지와 성령의 능력에 지배를 당하는 속사람의 의지와의 내적(內的)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의 승패는 자체들 만의 두 의지만으로서는 결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겉사람의 의지나 속사람의 의지 모두가 독자적으로 의지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 22절에서 25절에 나타난 깨닫기 전의 바울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타락 전 아담에게 있어서는 주어진 하나님과의 유기적 종속의지에 의하여 그 어느 한 편을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중생인에게 있어서는 자신 안에서 겉사람의 의지와 속사람의 의지가 언제나 맞서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으로는 그 어느 한 편을 택할 수가 없다는데 그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중생인에게 있어서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겉사람은 이미 장성한 자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속사람은 아직 자라지 못하고 어린 상태의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자연히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겉사람의 의지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중 난 이삭(속사람)과 먼저 난 이스마엘(겉사람)과의 싸움에서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이삭(속사람)이 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중생인은 아무리 중생을 했다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이 승리가 가능한 것이다.(롬8:13 참고) 그것은 중생한 속사람에게 다시 회복된 의지는 하나님에게 유기적(有機的)으로 종속된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활인에 대한 자유의지 문제이다. 부활인은 타락 전 아담과도 다르다. 타락 전 아담은 죄의 저주가 없는자로서 부부생활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창1:27∼28) 부활인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 천사와 같은 몸을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부활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궁극적 완성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활인의 의지는 매우 심오(深奧)한 경지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부활인 자체가 매우 심오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작품이기에 그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역시 타락 전 아담의 것과도 다른 경지의 의지라 하겠다.
정리해 본다면, 타락 전 아담은 유혹자인 뱀의 유혹을 받아 뱀이 하라는 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의지였으나, 부활인은 유혹자인 사단의 세력을 무저갱에 가둠으로 유혹자가 없는 상황(狀況)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의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하나님에게 유기적으로 종속된 의지이며(계20:3참조), 또한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탕자와 같은 상태에서 사단의 지배를 받아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부활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자의 상태에서(계3:22참조) 의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부활인은 영생할 수 있는 상태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해 본다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에게 유기적으로 종속된 의지로 유혹자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유혹자인 뱀에게 순종할 의지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반해 부활인은 유혹자가 없는 영원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능하신 주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유기적으로 종속된 의지에 의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모든 의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인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의지대로 결정하여 행하는 일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의지와 완성된 부활인의 의지와의 사이에는 결과적으로 일치를 이룬다는 심오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자유의지에 따르는 문제들
결과적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의지가 없는데, 특히 현세에 살아가는 자연인 즉 타락인이나 중생인에게는 모두가 독자적인 의지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을 대략 살펴 본다면 먼저, 인간은 숙명적(宿命的)이 아니냐는 문제이다. 결국 기독교는 이교적(異敎的)인 숙명론을 수납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문은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예정론’과 이교에서 말하는 ‘숙명론’과는 아주 판이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숙명론’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근원(根源)에 있어서 주관자가 없고, 과정에 있어서도 의미도 없으며, 결과에 있어서도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정론’은 그 근원에 있어서 만사를 계획된 작정 속에서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과정에 있어서도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써의 분명한 의미가 있는 것이며,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작정 섭리를 따라 성취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교의 ‘숙명론’을 혼동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반론(反論)이다. 하나님께서 모두 작정하셔서 그 섭리대로 역사해 가신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으려고 힘쓸 것도 없고, 선하게 살려고 애를 쓸 것도 없으며, 잘 살아 보려는 노력도 필요없고, 인간적인 계획이나 설계(設計) 등도 다 필요없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같은 문제에 대하여 앞에서 자유의지 문제를 설명할 때 조금 설명은 했으나 여기서 세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이 모든 행동의 출처가 어딘가가 중요하다. 타락한 자연인에게 있어서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사단의 도구인 육체의 욕망에서 발기된다. 즉 죄의 권세에 장악되어 있는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망은 결국 죄의 권세로부터 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락인은 자기 자신이 노력을 해야 하겠다는 결정은 물론이지만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의지적 결정을 단독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죄의 권세 아래에서 종노릇 하는 육신의 소욕에 따라 힘도 쓰고 애도 쓰며 노력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생인은 육신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각각 육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과 영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의 발원지가 되는 것이다. 이 두 소욕이 육신의 소욕은 죄의 권세에게, 영의 소욕은 성령의 권세 아래 장악(掌握)되어 있으므로 그 근원에 의하여 하고자 하는 노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권세와 성령의 권세는 서로 대립(對立)되는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종속 관계를 형성(形成)한다. 따라서 중생인은 결과적으로 영의 소욕이 육신의 소욕을 거스려 승리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궁극적인 구원이 절대적인 성령의 권세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육체의 소욕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행동이나, 성령의 소욕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행동은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관이 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일이나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힘이 인간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의 근원(根源)이신 하나님께 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주권적인 작정 섭리에 의해 선택으로 예정된 자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전도(傳道)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하는 반박이 일어난다. 이 의문 역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줄로 착각(錯覺)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전도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진정한 전도가 가능하다. 사도들이 전도한 것도 자신들의 의지의 결단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어 하게 하시니까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한 것이다. 혹자들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의 지상(至上) 명령으로 생각해서 전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말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 본문은 “내 증인이 되라”고 하는 명령문이 아니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예언적 약속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사도들이 전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성령께서 하게 하셔서 한 것이지 사도들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確信)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했다.
제2절 죄의 책임 문제
예정론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죄의 책임문제(責任問題)가 장벽처럼 방해가 되고 있다. 이같은 약점을 예정론에 대한 반대자들이 모를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정론을 수납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시느냐고 반문하면서 비난과 조소를 퍼붓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예정론을 믿고 수납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말문을 닫아 버린다. 왜냐하면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죄가 인간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한다면 예정론이 무색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곤란 속에서 예정론은 하나님의 신비(神秘)로서 설명 불가능한 것이라고 돌려 버리고 마는 것이다. 혹자들은 미궁에 몰린 나머지 천사의 타락을 말하면서 지위를 떠난 타락한 천사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고 애쓰는 자들 역시 허다하다. 그러나 천사가 타락한 것도 원인이 없는 타락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천사가 타락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그 근원적인 책임자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기 때문에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는 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난제로 남아 있을 성질의 것만은 아니다.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죄의 책임’이라는 말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앞서야 한다. 즉 ‘죄(罪, sin)’라는 말이나 ‘책임(責任, responsibility)’이라는 말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성경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죄’에 대한 성경적인 관념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인간이 범하는 행동, 즉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을 ‘범죄’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인데 인간의 내면(內面)에 자리하고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욕심, 미움, 살기, 음욕 등을 말한다. 그러나 윤리나 도덕적인 입장에서는 인간 서로가 상대적인 입장에서 공동(共同)의 유익을 위해 설정된 어떤 규범(規範)이나 윤리나 도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규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종교적인 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말하고 윤리나 도덕적인 죄는 인간이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책임’에 대한 성경적인 관념은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피조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지워지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으나, 윤리나 도덕적인 관념은 한편만이 일방적으로 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서로가 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이같이 ‘죄’나 ‘책임’이라는 언어 관념 자체가 성경적인 입장과 윤리나 도덕적인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前提)하고 이 문제를 풀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악에 기원하여 범죄를 낳는 것이다. ‘악’이란 ‘하나님이 싫어하심’이고, ‘죄’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의 내적인 실존(實存)’인데 실례를 들면 아담의 경우 선악을 아는 것이며, 범죄는 죄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악이란 인간 타락 전에도 존재했으나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 뿐이었고, 죄는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내부(內部)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범죄는 타락한 인간들의 모든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죄책의 당사자에 대하여 말하고 그 다음으로 거기에 따르는 제반 문제 몇 가지를 취급함으로 죄의 책임은 왜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를 알아 보고자 한다. 과연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이실까?
1. 죄책의 당사자
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예정론에 따르는 지엽적인 문제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죄의 책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에 의하여 인간의 타락까지라도 다 작정해 놓으셨다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한 죄의 근원적인 책임을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 지셔야지 인간에게 왜 그 죄의 책임을 물어 멸망시키느냐? 하는 반문(反問)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한 조직신학적인 학문적 내용을 피하고 성경 전체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대 섭리관(大攝理觀)을 중심해서 논리를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죄의 성립이 어떻게 가능할까?
성경이 말하는 종교적인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법에 의하여 정죄하시고, 인간은 주신 법을 불순종할 때에 죄가 성립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법을 제정하신 자로서 범법자(犯法者)를 정죄하시는 죄의 조성자(造成者)요, 인간은 법을 순종해야 할 자로서 범법한 죄의 조성자이다. 그러므로 죄란 법을 세우신 하나님이나, 순종해야 할 인간 양자 사이에서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범죄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으나 포괄적인 결론은 “법+불순종=범죄”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에 의하여 세우신 법을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정죄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의 ‘법(法, the laws of God)’이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공동의 의견에 의해 정해진 규율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만의 단독적 의지에 의한 일방적인 선포였다. 여기에 인간은 순종 아니면 불순종 할 수 있는 종속의지, 즉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작정대로 밖에는 할 수 없는 유기적인 의지만을 소유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태아(胎兒)가 출생하여 엄마의 젖을 먹든지 먹지 않든지 태아에게는 어디까지나 자유선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아는 출생하면 엄마의 젖을 먹게 된다. 누가 강요하거나 가르쳐서가 아니다. 아기 스스로의 본능에 의한 의지 결정에 의하여 먹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기적 종속의지란 그 무엇에게도 억압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행하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룬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계를 혹자들은 기계론적(機械論的) 혹 결정론적(決定論的)인 논리라고 속단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는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기계론’이나 ‘결정론’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에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없이 기계적으로나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유기적 종속의지’는 어디까지나 피조 인간의 자체로서는 아무런 억압도 간섭도 느끼지 않는 자의식에 의한 의지 결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데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같은 유기적인 의지를 소유했던 인간으로서는 하나님께 스스로의 과오(過誤)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전가(轉嫁)하려는 생각마저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담을 꾀었던 유혹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이론이 적용되는 것이다.
유혹자인 뱀도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누구도, 특히 하나님도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하고싶은 대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란 법을 어긴 불순종자에게 있어서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 입법자이신 하나님에게는 범죄의 성립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법 자체가 상대자들끼리의 공동의 의견에 의한 상대적 법일 때에는 입법을 한 양 당사자에게 범법이 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단독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법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법과는 그 성질이 아주 다른 것이다. 따라서 죄란 어디까지나 피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 할때 범죄의 성립이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갑과 을이 공동의 의견에 의하여 세워놓은 법은 갑이 어기면 을에게 범죄가 되고 을이 어기면 갑에게 범죄가 되는 상대적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주권에 의한 입법자 하나님과 피조된 법의 수행자인 인간과는 상대적 관계가 아닌 절대적 관계이므로 범죄의 성립에 있어서도 절대적이다. 즉 인간 자신만이 입법자 하나님께 대하여 죄가 된다. 절대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범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죄책을 돌리려는 생각은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결과이며, 논리의 커다란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도 범죄나 죄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범죄의 개념에 대한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범죄란 “법+불순종=범죄”라고 하는 논리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에 ‘법’이라는 것은 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법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또한 ‘법’이 없었으면 ‘불순종’이라는 죄의 성립의 한 요소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 성립의 주도자(主導者)가 하나님이시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하면서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했고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롬7:7∼13,참조)고 말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 되게 하시려고 선한 율법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신 ‘금과법(禁果法)’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왜 그 법을 주셨을까? 물론,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법을 주신 목적 역시 ‘죄’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반론이 있음직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되게 하시고 왜 우리를 허물하시는가? 라는 반문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절대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하시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이유를 제기할 대상이 감히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죄인 되게하시면 죄인이 되고 의인이 되게하시면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 알고 보면 ‘죄(罪, sin)’라는 것은 선택자에게 있어서는 은혜가 은혜되게 하는 방편이 되지만, 유기자에 있어서는 멸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두움과 빛이 정반대(正反對)라고 생각되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빛과 어두움이 일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책이 전가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죄의 개념에 대한 착오 때문이다.
2. 죄책에 따르는 문제들
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는 경우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그렇게 무거운 문제들이 아니다.
먼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지음 받은 인간(창1:31)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다음은 아담의 죄에 대한 형벌이 너무 크다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면, 첫번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 좋게 지음 받은 인간이긴 하지만 그때는 선과 악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선악에 대한 관념이 아담에게는 없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알지 못하게 하셨으며, 왜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선악의 표준(標準)이 하나님만의 절대 권한이며 선악 그 자체는 심판의 표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이 선악의 표준이시며 심판주가 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악은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알려질 수 없으며 알려져서는 안 되는 하나님만의 고유 권한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악을 안다는 것은 피조 인간이 심판주가 된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선악을 아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 것이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복종적(服從的)인 존재이어야 한다. 혹자들은 아담이 처음 지음 받았을 때 지금 우리 타락인들처럼 인간 스스로를 중심으로한 선과 악에 대한 관념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타락인이 가지는 선과 악의 관념은 타락의 결과라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타락인이 가지는 선악에 대한 관념은 하나님의 선악 관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지음받은 아담은 주어진 유기적 종속의지에 의하여 순종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러기에 유혹자의 간교한 속임에도 선하고 악한 것을 분별 못 하고 순종해 버린 것이 곧 아담이 타락하게 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에게 내려진 죄의 형벌이 너무 무겁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아담이 먹고 싶어서 과일 한 개를 따 먹은 것이 그렇게도 커다란 죄가 되느냐는 뜻에서 있을법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질문을 하는 자들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선악을 앎이, 하나님 중 하나와 같이 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범죄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기준이나 척도를 정하시는 분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것,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죄(창3:5 참조)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당하는 형벌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는 견해에는 이의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담의 죄는 과일 하나 따먹은 단순한 죄로 그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아담의 죄를 아이가 과일 가게에서 과일 하나를 몰래 먹다가 주인에게 발각된 죄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결과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정면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기가 심판자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못된 타락인의 근성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결과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예정론’에 있어서 최종적인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인간을 지으셔서 더러는 버리고 더러는 선택하여 지옥으로 보내고 천국으로 보내는 것일까? 라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본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理性主義者)들의 철학적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1단에서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은 자기의 영원한 권능, 지혜, 선의 영광의 현현을 위하여 유형 무형의 세계와 만물을 6일 동안에 모두 심히 선하게 무로부터 창조 혹 제조하여 내기를 기뻐하셨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적인 영원한 영광의 드러냄(나타냄, revelation)이라 하겠다. 즉, 화가가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내면 세계를 화판에 표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주권적인 영원한 영광을 표한한 것이 바로 창조인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궁극적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유일(唯一)한 목적에 의하여 지어진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목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신 결과로 나타나는 부수적인 반응(反應)에 불과한 것이며 인간의 행복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외일 수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의 표현 결과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사만물의 의미가 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하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기독교 예정론’이야말로 그 얼마나 타당한 절대 진리인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절대주권 영광의 빛 아래서는 어둡고 그늘진 수많은 의문(疑問)들이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만다.
성경 신ㆍ구약 66권 내용에 있어서, 본주어(本主語)는 절대자 ‘하나님(God)’이시며, 본동사(本動詞)는 ‘하신다(do)’이다. 즉 섭리적인 면에서 신ㆍ구약 성경을 최대한 단축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내용으로 요약이 된다. 그 외의 모든 내용들은 모두가 이 본주어와 본동사를 수식(修飾)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끝을 맺으신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이라도 성경을 바르게 보고 깊이 상고한다면 예정론이 얼마나 성경적인 바른 진리체계(眞理體系)이며, 교리인가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출처: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