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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한 고난

베드로전서3:8-22

 

8.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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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같이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서로 사랑하며 단합된 모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하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1. 선한 마음을 가지라. (8-12)

 

[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김효성 강해: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권면하고 그치려 했던 것 같으나 성령께서 계속 좀더 교훈하도록 감동하셨던 것 같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다 마음을 같이하라고 말한다.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론)생각을 같이하여라는 뜻이다. 사랑과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서12:16, “서로 마음[생각]을 같이하며.” 고린도전서1:10, “같은 마음[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립보서2:2, “마음[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생각]을 품어.” 생각이 같아야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생각이 다르면 다투고 분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서로 체휼하라고 말한다. ‘체휼하다는 원어(쉼파테스)같은 감정을 가지다,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 감정도 중요하다. 감정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서로 사랑으로 단합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비슷한 것은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바람직하다.

셋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전13:4-7).

넷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의 부족과 연약을 볼 때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도 성도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라고 교훈하였다. 에베소서 4:32,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섯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겸손하고 친절하라고 말한다. ‘겸손하며라는 본문(타페이노프론)친절하며’(필로프론)라고 되어 있다. 겸손함과 친절함은 거리가 멀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겸손하며 친절해야 한다.

여섯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남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주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5:3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셨다(5:44).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교훈하였다(12:17).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 평안의 복, 또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이 복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

 

[10-12]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 김효성 강해: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천국의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한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악한 말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성도는 그런 악한 말을 그쳐야 마땅하다.

 

또 우리는 입술로 궤휼 즉 속임과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했고, 또 요한계시록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해야 한다.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말에 있어서 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한다. 갈라디아서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

 

2.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17)

 

[13-14]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김효성 강해: 예수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가 있다.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5:10). 그때 우리는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그것을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하나님을](전통본문)7)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김효성 강해: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셔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님, 즉 절대주권적 작정자와 섭리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임의로 다스리시되 사람들을 공의로 통치하시고 악인들에게 보응하시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소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확증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천국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주신 내세의 소망에 대해 간증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았을 것이며 또 지금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르게 살고 새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

 

[16-17]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혀를 놀려 많은 말을 매우 거침없이 지껄여대지만 자기들의 생활과 부합되지 않으므로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정직한 양심만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지껄여대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여 불경건함을 드러내는 자는 자신을 비웃음의 대상물로 만들뿐만 아니라 진리 자체를 악한 자들의 비방거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에 합당한 생활이 따르지 못하면 아무런 도움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 김효성 강해: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12:35). 우리가 악한 것과 거짓과 음란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말과 행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으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그들의 악한 비난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

 

3.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 여기서 육체란 겉 사람을 의미하고, ‘이란 그리스도를 정복자로 죽음에서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 김효성 강해: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원어(하팍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7:27; 9:12, 26, 28; 10:10, 12, 14).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고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18절은 난해구절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RSV, NASB)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영은 죽임을 당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사르크스)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영육을 가리키고, ‘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KJV, NIV). 즉 본절은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 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

 

[19] 저가 또한 영으로[성령으로](KJV, NIV)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느니라].

 

"저가 또한 영으로" - 베드로가 이 말을 함으로써 자기가 말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준다.

바울도 로마서5:5절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만을 살린 것이 아니라, 똑같은 자신의 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게 하여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그 능력이 미치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밖에는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에서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다만 그가 영이 되셨다는 말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가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의 능력으로 전파하셨다는 각기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베드로는 이라는 말을 강력하게 사용함으로써 참된 실재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관념을 배제시키고 있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그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사상은 길게 논박할 필요조차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앙으로 계속 죽음으로 향하는 자들은 소망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구속이 노아 시대에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효험이 되었지만, 그들은 홍수에 빠지기 전 잠시 동안 회개를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다 그럴듯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완악함에서 기인한 형벌로 육체의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영원히 멸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매우 위태로운 해석이다. 이 해석은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오직 노아의 식구들만 구원함을 받았고 방주 안에 있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멸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베드로는 일반적인 결론,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경건한 영들에게 나타났다는 것과 이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참고 견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아니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왜 베드로가 경건한 자들의 영이 그들의 육체에서 벗어난 후 옥(감옥)에 있는가 하는 의심이 생길 것이다.

 

나는 옥(퓔라케)이라는 말이 파수꾼이 파수할 목적을 위해서 있는 망대, 혹은 파수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경건한 영들이 비록 멀리 바라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들에게 약속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상은 헬라 저자들에게서 매우 흔히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이것이 가장 알맞은 해석인 것 같다. 거룩한 선조들이 살아있었을 때나 죽은 이후에 이러한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을 (감옥)’이라는 말에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적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갈3:23에서 바울이 말한 바에 의하면 율법은 그들이 살아있을 경우에 행동을 제한하는 일종의 감옥이었으므로 죽은 이후에는 아직까지 자유의 영이 충만하게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리스도를 향한 동일한 열망으로 속박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기다리는 괴로움은 그들에게 일종의 감옥이었다.

 

사도의 말씀은 사실이고 논리의 전개와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음 구절들에는 약간 논점이 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신실한 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불신자들만 말하고 있어서 이 구절은 앞에서 한 해석을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전에 경건한 자들의 원수요, 핍박자이든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의 심판주가 되심을 깨닫게 되지만, 베드로는 그들이 죽을 때에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벌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고 한다.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 증거된 것은 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좇아 살게 하기 위한 충만한 믿음의 특성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장에서도 베드로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반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베드로가 특별히 의도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 그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주는 것임을 보여주고, 역시 죽은 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알려졌으므로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생명을 얻으리라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면 베드로가 왜 믿지 않는 자들만을 언급했는지 고찰해 보자. 베드로는 한때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나타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베드로가 그 당시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불신자들과 함께 섞여 있었고 많은 불신자들로 인해서 거의 가려져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헬라어 구문이 이러한 의미와 다른 것을 인정한다. 만일 베드로가 이것을 의미하고자 했었다면 절대 소유격을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종종 다른 구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또 베드로가 여기에서 많은 것들을 한데 겹쳐놓고 있어서 달리 적합한 의미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뒤엉킨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믿지 않는 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복음 전파를 받은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 후에 곧이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많은 악한 자들에게 거의 압도당하고 있었던 거룩한 선조들이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베드로는 그 당시 신실한 자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에 의심을 가진 자들을 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거의가 모든 세상이 불신자들로 가득 차 있어서 불신자들이 모든 권세를 행사하고, 그 생명도 그들의 권세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험은 사망의 정죄 아래서 사실상 벗어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을 흔들어놓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조상들의 형편도 그와 같았음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온 땅이 악한 자들로 온통 뒤덮어 있다 하더라도 성도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지켜질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베드로는 경건한 자들이 자기들의 숫자가 극히 적다는 이유로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경우에 모든 옛날의 행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본보기를 들어서 그러한 세상은 홍수로 멸망했다고 위로해 주고 있다. 온 인류가 멸망 받은 중에서 노아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피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지적하고, 그것이 일종의 세례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다.

 

이 구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요약해 보면, 세상은 항상 불신자들로 가득하지만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많은 수효 때문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아는 비록 불신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결코 자기 믿음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었다.

 

[ 김효성 강해: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절의 말씀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도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타난 진리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들은......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태만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불신자들에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 김효성 강해: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고 심판을 120년간 유보하셨었다고 보고(6:3), 그 동안 노아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7:13-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비교적 적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적은 수에 들기를 원하며 감히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물은 ......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 슈엔크펠디우스와 같은 열광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증거를 왜곡하고 어리석게도 성례에서 그 능력과 효험을 삭제해 버리고자 한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의식이 헛되거나 효험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세례를 타락시키고 부패시키고자 하는 위선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배제시키려 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례에 대해서 말할 때 표시와 세례는 나누어 생각한다. 세례에 있어서 표시는 물이지만, 세례 그 본질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영혼을 씻는 것과 육체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의식은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표시는 사람들이 남용함으로써 종종 그 효력을 갖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성례의 본질을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자체와 그 표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본질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동시에 우리는 교황주의자들 속에 침투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죄악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땅히 구별해야 할 세례의 본질과 표시를 구분하지 않고 외부적인 요소에서 그치고 이 외부적인 요소에 자기들의 구원과 소망을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이는 물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개념을 삭제해 버리는 짓을 저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든 축복들을 성례 속에서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영광을 물로 바꾸며, 성령의 은밀하신 능력을 보이는 표시에 고착시키고 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세례에 있어서 그 주요한 부분은 영적인 것이며, 세례는 죄의 용서와 옛사람의 혁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옛사람이 새롭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새로워지기 전에 어떻게 선하고 순전한 양심이 있을 수가 있는가? 또 우리가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를 의지하고 또 이에 의해서 유지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응답할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베드로는 그 중심에 세례의 효험을 설정하기를, 위선자들이 하고자 하는 것처럼 텅 비어 있고 죽은 의식 속에는 아무런 영광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베드로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물이라는 요소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보혈의 모형이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베드로는 부활을 말할 때 자기가 앞에서 말한 교훈, 즉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돌이켜보고 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요,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의 부활 속에 포함되고 배제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고정시키지 아니하고서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세례에서 유익을 찾아낼 수가 없다.

 

[ 김효성 강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물로 받는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 김효성 강해: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바이다. 마가복음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사도행전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로마서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히브리서1:3, “[그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8:1,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브리서10:12,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12:2,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한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

 

- 존 칼빈 주석, 김효성 강해를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