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말, 긍휼, 용서
에베소서4장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더러운’이라는 원어(사프로스)는 ‘썩은, 나쁜, 불건전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삼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형제에게 ‘라가’[빈 머리, 바보]라고 말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건립한다’는 말로서 남의 신앙을 건립하고 그에게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 ‘성령,’ 혹은 ‘영’이라고 표현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령께서는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도덕적으로 성결하시다. 또 그는 자신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는 우리에게 거룩한 정신과 생각, 거룩한 마음과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안들(일위신론자[一位神論]들--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힘이나 기운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며 성령께서도 그러하시다. 그는 기뻐하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신다. 그가 근심하시면 진노하실 것이다. 이사야 63:10은,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인을 치는 것은 확인하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문서를 확인할 때 거기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이다. 그 효력은 ‘구속의 날까지’이다.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므로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보장하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부족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셔서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요 3:16; 6:39-40; 롬 8:30).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우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한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범죄하면 그는 근심하시며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거하면 그는 진노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의 뜻을 깨닫고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확신하고 감사하며 힘써야 한다.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이라는 원어(피크리아)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뜻으로서 독한 생각을 뜻한다. 독한 생각에서 ‘노함과 분냄’이 나온다. 분노는 또 ‘떠듦과 훼방’으로 나타난다. ‘훼방’은 남을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끝으로 ‘악의(惡意)’라는 말은 남을 해치려는 소원과 계획을 가리킨다. 남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말은 남을 해치려는 의지로 발전한다. 위의 말들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종류의 악독이요, 그 다음에는 노함과 분냄, 그 다음에는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의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죄성 즉 옛사람의 성질들이다. 이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들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하다’는 원어(크레스토스)는 ‘자비롭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프랑크노스)는 ‘동정적이다, 불쌍하게 여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인간 관계에서 취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며, 인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본문은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말한다. 용서는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결함과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들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후,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1만 달란트의 빚과 같고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 정도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1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의 돈인가?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만 계산해도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다.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는 1만 달란트와 같았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결코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만한 우리의 많은 죄를 다 용서하셨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 상태 곧 옛사람의 성질들인 모든 악독, 노함과 분냄, 떠듦과 훼방, 모든 악의를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옛사람의 잔재들이다. 우리 속에 참으로 구원의 새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모든 옛것들을 다 추방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정 있는 자들이 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마땅하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옥 갈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신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을 용서할 마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정도의 잘못을 행한 자들을 용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10에베소서.htm#4장: 교회의 일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