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화선교의 신약성경적 기초

장 흥 길(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조교수)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한 과제는 다름 아닌 기독교적 문화관 정립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면으로는 각 기독교인 실존의 경우 그 믿음과 삶의 불일치가 문제시될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는 교회의 사회성 내지는 사회적 책임이 문제시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교회가 충분한 성경적·신학적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세상의 문화를 도입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 '근대주의'(modernism)가 정착하기도 전에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가 유입되어 사회의 제반 문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더욱이 가속화되는 세계화로 인하여 올바른 기독교적 문화관 정립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한국교회가 정립해야 하는 기독교적 문화관은 '기독교 문화선교'이다. 그 본질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영위해야 하는 삶의 형태가 다름 아닌 '전하는 것'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화선교'라 함은 좁은 의미에서 문화가 선교의 수단이 되는, 곧 문화를 통한 선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치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총체적인 활동의 산물인 문화가 대상이 되는 선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문화선교'는 복음적 정신으로써 인간 문화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적 실천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학의 모든 실천적인 분야처럼 '기독교 문화선교'에서도 그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는 것은 결코 두 번째나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기초 없이는 어떤 신학도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신학적인 이론이나 체계를 입증하기 위한(dicta probantia) 인증서가 아니라, 신앙과 신학에서 그 원리를 제공하는 표준적인 규범서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독교 문화선교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학적인 원리를 모색함으로써 기독교 문화선교의 올바른 신약성경적인 방향을 찾고, 그와 함께 문화선교이론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신약성경 진술의 적절성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약성경적인 기초를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먼저 신약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문화' 용어에 상응할 수 있는 '세상' 개념을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과 세상' 단락(2장)에서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의 단계를 따라 조사하고, 그런 후 '문화선교의 다양한 기초'(3장)를 주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과 세상

신약성경에서 '문화' 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문화가 인간 생활의 제반 영역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총체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개념화는 신약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용어와 견줄 수 있는 '세상'(kosmov")이나 '세대'(aijw'n)와 같은 등가어(等價語)는 신약성경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 단락에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 용어의 개념과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문화선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주제를 조사하고자 한다.

 

2.1 공관복음에 의한 예수의 가르침
공관복음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의 세상에 대한 진술은 한편으로는 세상부정의 입장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긍정의 입장을 보여준다. 우선, 예수에 의해 언급되는 세상은 부정적이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하는 세상(마 6:25-32 참조)에는 재리의 유혹이 넘치며(마 13:22; 막 4:19), 세상의 지혜는 예수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눅 16:8).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 16:4)이고, "죄 많은 세대"(막 8:38)이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 17:17; 눅 9:41)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마 13:49; 24:3; 눅 11:50-51). 세상부정적인 예수의 진술은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화평이 아니라 분쟁이라는 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마 10:34; 눅 12:51). 한편, 예수의 세상에 대한 진술에 세상 긍정적인 입장도 나타난다. 예수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알려지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마 24:14),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실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4)이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예수의 세상긍정적인 입장은 원수에게까지 이르는, 그의 이웃 사랑 진술에 잘 나타난다(마 5:43-48). 그에 의하면 '이웃'은 결코 정의될 수 없는,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며, 따라서 이웃사랑은 원수를 포함한 나 이외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눅 10:29-37 참조). 재물 역시 예수의 철저한 재물 비판 진술(마 6:19-21; 막 10:23)과 함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용이 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의 관점에서 이웃을 돕거나(막 10:21; 눅 10:30-35), 예수의 사역을 후원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눅 8:3). 물론 예수의 경우 세상의 재물이나 제도 또는 기관에 대한 제한적인 긍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때 주된 관심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 선포의 관점 에서 어떤 사회 프로그램의 개혁이나 제도 개선에 있지 않다. 예수의 경우 세상이 유지되는 중요한 동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뜻이다. 환언하면, 복음에서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대(對)세상관은 결코 인간 중심적이거나 세상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다.

 

2.2 사도행전에 따른 원시 교회의 입장
사도행전은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원시 기독교의 선교사(宣敎史)이며, 하나님 자신과 그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28)가 세상을 사랑한 책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도행전은 책 제목이 "사도들의 행적"(pravxei" ajpostolw'n)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관통하는 역동적인 승리의 질주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에 대한 "성령의 행적"(pravxei" pneuvmato")이다. 세상 안에 있는 교회는 비세상적인 공동체이지만, 여전히 그 교회 안으로 악한 세상이 침투해 들어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회심에 따른 재산의 헌납 기사(행 5:1-11 참조)에서 기독교인이 이 세상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그 소유를 부정해야 하는 세상부정을 볼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선교를 위하여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세상긍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즉, 이 기사에서 선교적인 세상긍정과 함께 회개와 재산 포기의 형태로 표현된 세상부정을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2.3 바울
전체적으로 볼 때, 바울은 세상을 신학적으로 평가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서신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의 모습이 묘사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안에서 또 세상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시며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세상긍정이 함께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바울의 경우 '세상'에 대한 신학적인 진술은 인간론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우선, 세상부정의 입장은 세상이 다름 아닌 '육체'(savrx), 곧 하나님 앞에서 멸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이라는 데서 나타난다. 세상에 죄가 들어왔으며(롬 5:12), 인간은 죄 아래 있으며(롬 3:9), 율법 아래 있으며(롬 3:19), 또한 심판 아래 있다(롬 3:19).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대립되며(고전 1:20; 2:6; 3:19), 세상의 학문은 "초등학문"일 뿐이다(갈 4:3; 골 2:8, 20). "세상의 영"은 "하나님께로 온 영"과 대립된다(고전 2:12).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가는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전 7:31). 또한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것은 바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다(엡 2:2). 그리고 세상은 어두운 곳이며(엡 6:12), 정욕이 일어나는 곳이다(딛 2:12). 이처럼 바울서신의 곳곳에서 세상적 지혜, 세상적 행위, 세상적 경건이 비판을 받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세상부정적인 언급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금욕주의나 세상도피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음행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금지하는 바울의 권면은 결코 그들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고전 5:9-10). 여기서 세상긍정적인 진술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고후 5:19),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딤전 1:15), 만국에 전파되어 세상에서 믿은 바가 되셨다(딤전 3:16; 참조, 롬 1:8). 곧, 바울의 경우 세상긍정은 신앙적이며 선교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2.4 히브리서
바울과 비교해볼 때, 히브리서의 경우 세상부정과 세상긍정의 입장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히브리서의 경우 신학적인 강조점은, 그리스도인을 "나그네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고 히브리서의 신학을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um)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볼 때, '땅'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이 있는 '하늘'에 놓여 있다(히 11:14-16). 히브리서의 세상긍정적인 진술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중재자 되심 안에 잘 나타난다(히 1:2; 9:26).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도 세상긍정적 진술은 세상부정적 말씀과 함께 나타난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세상은 '장차 오는 세상'과 대조되어 있다(히 2:5). 또 믿음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인 노아가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히 11:7)는 언급에서 히브리서 저자의 세상부정적 입장을 엿볼 수 있다.

 

2.5 요한서신을 제외한 공동서신
야고보서의 경우도 세상부정적인 진술이 강하게 전개되지만 세상긍정적인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예컨대,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약 1:18).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을 책망을 받는 야고보서의 신학적 강세는 세상부정적 진술에 놓여 있다. 선한 행위 없이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지혜는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다(약 3:15). 또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과 동일하며, 세상에 관여하는 자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택함 받은 그의 백성간의 혼인언약 비유에서처럼 다름 아닌 간음하는 자이다(약 4:4). 오히려 자신을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약 1:27).
베드로전서 역시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세상부정이 강조되나 세상긍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베드로전서에 창조주 하나님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 자체가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영지주의 세계관처럼 본질적으로 악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벧전 4:19 참조).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거류민과 나그네"(벧전 2:11)됨이 강조되며, 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됨이 입증되어야 하고, 이로 말미암아 이방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벧전 2:12). 곧 세상은 선교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고려된다. 베드로후서의 경우 신약시대의 후기에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 거짓 교훈과 관련하여 세상은 더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옛 세상은 탐욕과 과실, 불법으로 가득 찬 총체적인 불신의 삶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다(벧후 2장). 그리스도인은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함으로써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벧후 1:4), 죄악으로 더러워진 옛 세상(벧후 2:20)의 물로 심판받음이 언급된다(벧후 2:5; 3:6).
유다서의 경우도 베드로후서 2장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육체를 더럽히며 정욕대로 행하며 경건치 않은 자, 곧 육에 속해 있으며 그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 자인(유 19)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이다. 이 점에서 세상부정적인 입장이 강조되어 있다.

 

2.6 요한
요한이 남긴 복음서과 서신에서 '세상' 용어는 전체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요한의 경우 다른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과 긍정적인 진술이 공존해 있다. 즉, 요한의 문헌에서 한편으로는 말씀(lovgo")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을 대항하여 타락과 멸망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이 나타나며(요 1:3, 5, 9-11; 15:18-19; 16:8; 요일 2:17; 5:19),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지속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이 언급된다(요 3:16-17; 4:42; 요일 4:14 등). 그러므로 요한의 경우 세상 자체가 배척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다(요 12: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요한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도피주의나 은둔주의적으로 이런 세상을 떠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요한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도 세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계속해야 한다(요 14:11-12). 그러나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이 함께 주어진다(요일 2:15-17). 그러므로 요한의 경우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자세는 무조건적으로 세상에 대하여 거리를 두거나, 그 반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세상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거리 둠과 다가감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세상에 대하여 비평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전체 요한 문헌을 관통하는, 이러한 세상과의 비평적인 거리는 그리스도가 태초에 세상 밖에(extra nos) 계셔서 세상을 지으신 말씀(요 1:1-3)으로 성육신하여 세상 안에 거하시며(요 1:14),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7:18)는 기독론에 관련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은 자로 세상에 속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요 15:19; 17:14, 16).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비평적인 신앙 태도로써 세상은 그리스도인에 의해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복된다'(요 16:33; 요일 5:4-5).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은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보다 크며(요일 4:4), 이를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한다(요일 5:4-5). 요한의 본문에서 예수는 '세상화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탈(脫)세상화하는 것' 역시도 반대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양극단 사이에서 세상에 대한 비평적인 자세로 행할 때만 예수의 세상에 대한 입장 가까이에 머물게 된다.

 

2.7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서는 단순하게 개인이나 그의 탈세계화를 다루는 '환상종말론'(Spekta- keleschatologie)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과 그의 통치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밝히는 세상의 문제이며 역사와 종말론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곧,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권력을 절대화하고 자신을 '주와 신'(dominus ac deus)으로서 숭배할 것을 요구하는 황제에 대하여 세상을 소유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전능한 자'(pantokravtwr)"이신 하나님이시며(계 1:8; 4:8), 또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리스도라는 것을(계 3:7)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미래를 인간의 장래로 감축시키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개인의 종말론으로 축소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관적 이해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요한계시록의 세상 에토스는 묵시적이기 때문에 다른 신약성경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절대화하는 국가권력과 신격화하는 황제 숭배를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하는 태도는 세상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 나라가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 나라는 그날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주께서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될 것이다(계 11:15).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기 전에(계 21장),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대한 환상(계 20:1-6)은 이 세상 안에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통치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세상부정과 함께 세상에 대한 긍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8 요약
위에서 살펴본 대로 신약성경에서 '세상'은 물리학적이거나 천문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이다. 세상은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세상부정은 모든 종류의 이기심과 탐욕에 대한 투쟁, 모든 형태의 세속성에 대한 철저한 거부, 또는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적인 행동에 대한 대립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성도의 세상긍정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유지의 인정, 하나님의 세상 사랑을 본 받음, 세상의 회개와 최종적인 구원을 목표로 하는 세상사랑, 신앙적인 세상사랑, 또는 하나님의 세상 통치에서 나타난다. 신약성경 안에서 이러한 세상긍정과 세상부정의 공존은 결코 양자택일의 대상이나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새로운 피조물(kainhV ktivsi")인 그리스도인(고후 5:17)은 옛 세상을 부정해야 하며 동시에 신앙적이며 선교적인 목적으로 세상을 다시 긍정해야 한다. 그러한 세상에 대한 부정과 긍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일어난 구원이라는 선취(先取)적 종말론의 근거 위에 세워진 '세상이김' 내지는 '세상초월'에서만 가능하다. 요약하면,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시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입장은 그 본질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선교적인 관점 아래 세상을 긍정함에 있어서 각각의 신앙공동체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른 다양한 신학적인 강세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전체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이러한 신앙적이고 선교적인 세상긍정에서 '문화선교'는 그 설 자리를 얻게 된다.


3. 기독교 문화선교의 다양한 기초

신약성경은 어느 한 본문 단락에서 집중적으로 기독교 문화선교론을 전개하거나 그 체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기독교 문화선교와 관련된 본문으로써 위에서 다룬 신약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입장을 전제로 삼아 어느 정도 체계화 시킬 수는 있다. 이 단락에서는 기독교 문화선교론의 타당성과 그 이론 전개 및 실천의 방향설정을 위한 연구 목적에 부합되게 기독교 문화선교의 기초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문화선교의 기초는 한 관점 아래 체계화될 수 없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될 수 있다.

 

3.1 신학적 기초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학적 기초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세상 유지(維持) 그리고 그의 세상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기독교 문화선교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세상 창조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창 1-2장; 사 43:1; 시 8편 등 참조)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만물 창조에 대하여 언급한다(요 1:3; 행 4:24; 17:24; 히 3:4; 계 4:11 등). 기독교 문화선교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선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한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예컨대,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을 할 때 그들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가리켜 그곳 사람들을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행 14:15)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구약성경의 본문(창 1:26, 31; 5: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선한 창조에 대하여 알려 준다. 이를테면, 바울은 음식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고 말한다(딤전 4:3-4).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선한 창조 행위는 영지주의의 창조이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둘째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세상 창조뿐 아니라 그의 세상 유지 역시 기독교 문화선교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해 준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셨으며, 또한 세상의 '주재'(despovth")로서 자신이 친히 만드신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시며, 그 세상을 보존하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마 11:25; 눅 2:29; 10:21; 행 4:24; 17:24; 계 6:10 등). 곧,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뿐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신다(마 5:45).
마지막으로, 세상과 관련하여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학적 기초는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세상 유지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세상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희생당하게 하셨다(요 3:16). 하나님은 특정인에 대하여 편애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이러한 하나님의 세상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람 사랑'(딛 3:4)이 기독교 문화선교의 변할 수 없는 신학적 기초이다. '사랑의 이중 계명'(마 22:34-40; 막 12:38-34; 눅 10:25-28)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이때 '이웃'(plhsivon)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대립명제(Antithese)를 다루는 원수사랑 주제 단락(마 5:43-48)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의인과 함께 악인을 포함하며 의로운 자와 함께 불의한 자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은 단지 '형제 사랑'(filadelfiva)에 국한되지 않으며,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filanqrwpiva)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은 이방인의 그것에 비해 나을 것이 없으며, 믿는 자들의 '서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이웃 사랑의 구체화나 실천이 아니라 게토(Ghetto)화된 '끼리 사랑'에 불과할 것이다.

 

3.2 기독론적인 기초
신약성경의 모든 증인들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라는 것에서 그 '공통분모'를 가지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선교가 그 신학적 기초뿐만이 아니라 기독론적인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自明)하다. 기독교 문화선교의 기독론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보다 앞서 계신 분이시며, 만물창조 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성육(成肉)하신 분이시며, 교회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라는 사실에 있다.
우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선포한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다윗 자손 논쟁기사(마 22:41-46; 막 12:35-37상; 눅 20:41-44)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 되심을 보여주며, 신약성경의 주요 증인인 바울과 요한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나신 분'(prwtovtoko")이심을 알려준다(롬 8:29; 골 1:15, 18; 계 1:5; 참조, 요 1:1-3; 히 1:6).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선재 기독론은 그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모든 만물에 앞서 계신 분일 뿐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계셨던 말씀(lovgo")이 육신이 되신 분이며(요 1:1-2; 1:14),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차서 여인의 몸에서 나신 분이시다(갈 4:4). '육신이 되신 말씀'(logos ensarkos)은 '세상의 복음화' 이전에 '복음의 세상화'를 위하여 세상이 찾기 전에 먼저 세상을 찾아오심으로써 세상에 눈높이를 맞추신 낮아지신 하나님 아들이시다(빌 2:6). 즉, 성육신 기독론은 '문화의 복음화' 이전에 '복음의 세상화'의 기독론적인 토대가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변혁적인 문화선교의 기독론적인 근거가 된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계신 분이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또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그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kosmokravtwr)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을 능가하는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pantokravtwr)이다(고후 6:18; 계 1:8 등). 바울은 이러한 선재 기독론과 성육신 기독론 그리고 우주적 통치 기독론을 교회론과 연결한다(엡 1:3-14; 빌 2:6-11; 골 1:15-20 참조). 바울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롬 12:4-5; 고전 12:37).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골 1:18; 2:10; 엡 1:23; 4:15; 5:23).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포코르니(P. Pokorn )가 자신의 『에베소서 주석』의 특주 '그리스도의 몸과 충만으로서 교회'에서 오른편 도표로 설명한 것처럼,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간의 양자(兩者) 관계를 한 단계 더 나아가 교회와 그리스도와 세상간의 삼자 관계로 확대한다. 즉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세상의 머리요 만물의 머리이시다(골 2:10). 세상과 교회에 대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갖는 이중적인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바로 이점이 교회가 문화선교를 해야 하는 기독론적인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가득 차야 하며(엡 1:2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 받은 그리스도인(엡 4:24)은 교회와 세상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 한다(엡 4: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세상의 소금으로서 맛을 내야하며, 빛으로서 그 빛을 세상에 비치게 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고(마 5:13-16), 그리고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한다(마 28:19). 바로 이점에서 기독교 문화선교의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뿐 아니라 세상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머리이기도 하다. 또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렇게 교회와 세상을 이해하는 우주적 통치 기독론이 바로 문화선교의 기독론적인 기초이다.

 

3.3 종말론적인 기초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약성경적인 기초로 신학적인 기초 및 기독론적인 기초와 함께 종말론적인 기초도 고려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의 여러 증인들이 일관성 있게 전하는 선포의 내용은 - 그것이 바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로 표현되든, 요한에게서처럼 '영원한 생명'(zwhV aijwvnion)으로 표현되든 - 예수의 '하나님 나라'(basileiva tou' qeou') 선포를 그 토대로 삼는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 도래하는 미래적인 나라이며(마 6:10; 막 13:28-29; 14:25; 눅 6:21; 18:2-5), 그와 함께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는 현재적인 나라이다(눅 11:20; 17:20). 바로 이점이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수 이전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자들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점이다. 예수 이전의 하나님 나라 선포자들은 단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선포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 안에 그 나라를 가지고 계신 담지자(擔持者)이며, 또한 자신과 함께 그것을 세상에 가지고 오는 운반자이시다. 따라서 예수 이후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기다려지는 희망재(希望財)가 아니라 그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재(救援財)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유대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리에 놓인 율법(torah)으로 돌이키는 회개나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말하는 율법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회개와 믿음의 전제로 제시하는 복음을 선포한다(막 1:14-15).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가 예수와 함께 그리고 예수 안에 시작되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이다. 즉, 예수의 종말론은 "미래와 현재의 시간적인 변증법" 관계 안에 놓여 있는 선취(先取)적 종말론이며, 그의 지상 사역은 "미래적인 것을 선취한 현재"이다.
예수의 경우처럼 바울의 경우도 이러한 선취적인 종말론이 나타난다. 바울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적인 구원 진술과 현재적인 구원 진술의 공존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취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해질 미래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자신의 행동을 일치하게 해야 하는 변증법적인 긴장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롬 13:11-14; 고전 7:29-31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의 경우 새 시대가 이미 임하였으나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아직 옛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새 시대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옛 시대는 다만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지나가는 세상'에 불과하다(고전 7:31). 요한의 경우도 예수나 바울의 경우처럼 선취적인 종말론이 나타난다. 영생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이미 주어지는 철저하게 현재화된 종말론, 곧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 나타난다(요 3:36; 5:24; 6:47; 8:51; 11:25-26). 그렇기는 하나 요한에게서 결코 미래적인 종말론이 배제되어 있지 않다. 영생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결정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활을 통해 실현된다.
옛 시대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새 시대의 시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과제를 가지게 된다. 하나는 앞서 살펴본바 신약성경의 세상부정적인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새 시대와 함께 옛 시대에 양 다리를 걸치고 살 수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새 피조물로서 옛 시대에 사는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 문화 선교의 종말론적인 기초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4 윤리적 기초
마지막으로,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약성경적 기초로 신학적인 기초와 기독론적인 기초, 그리고 종말론적인 기초 이외에 윤리적인 기초를 들 수 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약성경의 종말론은 선취적 종말론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며, 그것은 현재적인 차원과 미래적인 차원의 변증법적인 긴장 관계 안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받은 선취를 통해서 '이미'(schon)와 '아직 아니'(noch nicht)는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종말론과 윤리에서 양자가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 됨이 없이 미래적 종말론적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시작된 자의 삶과 행동의 총괄 개념인 윤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종말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윤리는 유대 묵시적인 임박한 종말 이전의 과도적이고 임시적인 사이 시간에 행해야하는 '중간기 윤리'가 아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윤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응답적인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 신약성경윤리는 결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행하는 '목적 윤리'(finale Ethik)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앙적인 응답으로 행하는 '결과 윤리'(eine konsequente Ethik)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윤리적인 지침이나 권면은 인간의 이성(理性)이나 양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율적인 윤리'(autonome Ethik)에 속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은혜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율(神律)적인 윤리'(theonome Ethik) 내지는 '기독율(基督律)적인 윤리'(christonome Ethik)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권면은 인간의 자율에 근거를 두고 있는 헬라적인 '권고'(paraivnhsi")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뿌리내려져 있는 '신적 권고'(paravklhsi")이다(롬 12:1). 물론, 믿음과 행함을 순수한 인과적인 관계로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신약성경윤리를 단순하게 결과 윤리로 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함, 칭의(稱義)와 성화(聖化), 구원의 '직설법(Indikativ)과 '명령법'(Imperativ)이 단순하게 전자(前者)가 후자(後者)의 전제나 근거로 이해되고 후자가 전자의 결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인과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관련되어 있는 쌍방향으로 교류하는 통합적인 관계이다. 하나님의 의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은혜로 의롭다 여기는 '법정적인 칭의'(justificatio forensis)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은 칭의자에게 실생활에서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칭의'(justificatio effectiva)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칭의가 '우리 밖에서'(extra nos)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성화 역시도 인간 스스로에게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여김 받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종'으로 드림으로써(롬 6:13, 18), 또 산 제물이 됨으로써(롬 12:1)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성화의 방법은 칭의자의 자기 경건이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삶의 형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 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이해에서 기독교 윤리는 성령론적인 관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 윤리적 진술에 나타나는 '주 안에서'(ejn kurivw/)-진술이나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진술은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진술과 내용적으로 동일하다.
요약하면, 신약성경윤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음의 윤리"(Ethik der Dankbarkeit)이며, 또한 그에 대한 책임적인 응답의 윤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종말에 앞서 이미 시작된 구원의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웃과 사회와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게 되며, 그것은 곧 신약성경윤리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행함과 삶의 결정기준인 사랑을 따라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 기독교적인 사랑의 내용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세상에서 봉사와선교의 형태로, 곧 기독교 문화선교의 형태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문화선교는 신학 안에 통합되어 있는 윤리 안에 뿌리내려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는 말

전술한 바와 같이 본 연구는 기독교 문화선교에 그 신약성경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기독교 문화선교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먼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과 세상' 단락에서 양자의 관계와 관련 의미를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의 단계를 따라 예수, 원시 교회, 바울, 히브리서, 공동서신, 요한, 요한계시록의 순으로 조사하였으며, 그런 후 기독교 문화선교의 다양한 기초를 신학적 기초, 기독론적 기초, 종말론적 기초, 그리고 윤리적 기초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요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과 세상에 대하여 신약성경은 세상긍정과 세상부정을 신앙적 또는 선교적 관점에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문화선교의 신학적인 토대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때 세상은 기독인이 결코 기피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선교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에게 중재하며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머리가 되시며, 한편 이러한 우주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신다. 바로 이점에서 교회는 문화선교의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미래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도 세상부정과 세상긍정처럼 변증법적으로 이해되는데, 선취적 종말론이라는 관점에서 양자는 합명제(Synthese)에 이른다. 옛 시대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새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야 하며 결코 두 시대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새 시대를 가져다준 복음을 세상에 전하여 세상을 변혁시켜야 한다. 그것은 결코 무엇을 얻기 위한 목적 윤리가 아니라 이미 받은, 또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서 나온 결과 윤리이며, 감사의 윤리요, 책임적인 응답의 윤리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실로 한편으로는 교회와 세상,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에 대한 복음전파뿐 아니라 신앙적·선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총체적인 활동인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변혁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화선교의 과제를 수행하는 한국교회에 신약성경적인 기초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