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장 주춧돌 - 신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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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구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 한국교회의 성장과 신학교의 발전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지난 110년의 역사속에 총신대는 2만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교회 성장·부흥 궤도 같이 했

정통보수 개혁주의 노선 견지…교단분열 중심에 신학 갈등 아픔도


교회·사회 발전 견인차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한통의 편지가 전달된다. 발신자는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선교사. 주 내용은 이렇다. “지금 한국에서는 교회가 기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교역자 양성이 불가피하며, 당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북장로교 후원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한다. 이 편지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다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와 있었지만 그중에 마포삼열 선교사가 신학교 설립에 중추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사택을 신학교로 개방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더 주목해야할 점은 한국교회 부흥과 신학교육은 땔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이다. 당시 사경회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신학교육이 부족했다. 부흥하는 교회를 지도할 교역자가 시급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개교 이후 1903년 원산부흥, 1907년 평양대부흥, 1909년 백만구령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간단한 예로 평양대부흥의 주역이었던 길선주는 1902년 평양신학교를 입학한 신학도 였다. 신학교육과 한국교회 부흥이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은 재학생 숫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01년 첫 학생은 평양 장대현교회의 김종섭, 방기창 두 장로뿐이었다. 그러나 1905년 22명, 1906년 50명, 1907년 75명, 1909년 138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신학교는 크게 발전하여 1916년에는 230명의 목사 후보생이 재학하고 있었고, 6명의 전임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가 있었다. 이때까지의 졸업생 누계는 171명에 달했다. 한국교회 최고의 부흥기 중심에 신학교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의 성장에 발맞춰 총신에는 1800여명의 목회자 후보생들이 한국교회 부흥을 꿈꾸며 신학교육을 받고 있다.

신학교육은 기독교 지도자 육성뿐만 아니라 민족 지도자들도 육성했다. 105인 사건, 3.1운동 등 일제 항거에는 항상 평양신학교 신학생과 졸업생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계몽운동, 한국문화 보급과 발전은 단순한 복음전파를 넘어 민족복음화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개혁주의 신앙 산실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장로회신학교, 그리고 총신대학교로 이어오면서 줄곧 견지했던 신학적 바탕은 ‘보수적 개혁주의’였다. 1903년에 편성된 교수진을 보면 마포삼열 박사를 위시하여 배위량, 소안련, 이길함, 한위렴, 변하설 등으로, 이 6명은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고수하는 데 엄격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철저한 칼빈주의 신앙과 신학을 표방하고 있었다. 이들의 개혁주의 신학은 한국 기독교의 신학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양신학교가 신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신학지남>의 간행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1925년 최초로 교수가 된 남궁혁 박사와 1928년부터 강의를 시작한 박형룡 박사의 등장으로 한국 장로교의 정통보수신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특히 박형룡 박사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무게 있는 신학서적을 1935년에 간행하였다. 그것이 〈기독교 근대 신학 난제 선평〉이었다.

그러나 정통보수신학인 개혁주의는 이내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이다. 일본은 1939년부터 평양신학교를 완전히 폐쇄했다.

해방 후 찾아온 남북 분단과 혼란 속에서 1948년에 설립된 장로회신학교와 1951년 총회신학교가 옛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해 나갔다.

물론 그 중심에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메이첸 교수의 제자로서 장로교회의 역사적 신앙과 신학을 계승한 대가들이었다. 이들은 총신에서 목회자 양성뿐만 아니라 성경주석을 간행해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곤고하게 다져 나갔다. 박형룡 박사는 조직신학과 변증학에서, 박윤선 박사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모두 주석하여 1978년에 간행했다. 이들은 총신 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 칼빈주의 신학을 확고하게 뿌리 내리게 하는데 기여했다.


시련을 이겨낸 열매, 부흥

질고의 역사도 있었다. 일제의 탄압과 민족상잔의 비극도 큰 시련이었지만, 내부의 갈등은 더 쓰라린 아픔을 남겼다. 가장 먼저 찾아온 시련은 1939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6년간 서울에서 신설한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김재준 교수의 활동이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바르트나 부르너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자유주의가 한국교회에 파고든 것이다.

그리고 이어 찾아온 1952년 고려파의 분열, 조선신학교와 김재준의 신학적 문제로 인한 1953년 기장의 이탈, WCC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1959년 통합의 이탈, 그리고 1979년 비주류측의 이탈이 있었다. 이들의 종착역은 교단 분열(이탈)이었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신학사상의 갈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를 반대로 유추해 보면, 교단의 중심에는 신학교육이 있으며, 한국교회는 신학교를 중심으로 성장과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련의 열매는 달다’고 했다. 이런 아픔이 있었기에 정통보수신학인 개혁주의는 한국교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세속화된 신학풍조 속에서 오히려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정신은 더 강렬했다. 시련은 순수한 복음만을 살리는 정화의 역할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교육이 일선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신학교에서 가르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영감설은 일선 목회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오직 성경을 부르짖고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와 선교에 박차를 가해 한국 최대의 교단으로 성장했다. 여기에 개혁주의 신학교육이 밑바탕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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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캠퍼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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