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로이드존스의 설교비교



1. 두 설교자의 설교를 통한 비교 (에베소서3장 1-7절에서)



에베소서 3장 1절


 먼저 로이드존스의 에베소서 3장 1절의 설교를 통해서 그의 설교를 직접 분석해 본다.


먼저 그는 3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 라는 설교의 처음에 3장을 고찰함에 있어서 그 문맥과 그 전후 관계를 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있음을 본다.1)


 그리고 바로 단어 하나를 집어서 그것을 해석한다. 처음의 단어인 ‘이러하므로’이다. 이 단어를 유심히 봐야 하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나누어진 장의 처음이라고 해서 새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는 것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2)  로이드존스는 1절에서 ‘이러하므로’가 나오기까지 2-13절은 주제에서 벗어난 다른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왜 사도가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벗어난 주제를 말하고 있는가 묻는다.3) 이것은 로이드존스의 설교에 있어서 적용을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4) 또한 자신의 그러한 방법적인 면이 바로 성경에서 성경의 저자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방법임을 말한다.


 “그는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스스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5)


 이러한 예는 다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나는 에베소서를 모두 다 읽었는지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개인적으로 아는지 묻고 있습니다.”6)


 그리고는 이러한 문체의 형식적 파괴는 바로 사도바울의 목회적 동기에서 그러하다고 말한다. 즉 1절에서 자신의 갇힘에 대해서 낙심치 말라는(13절), 성도들을 위한 마음에서 그러하다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는 교회사적 관점에서 설교가 듣는 성도의 이해에서 벗어나 학적이 되어 감을 비판한다.7) 그리고는 바울의 목적이 14절에서 3장의 마지막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광스러운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아주 현명한 교사였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이 자기가 그 때 로마에서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복음 그 자체에 대하여 의심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적 풍요에 대하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8)라는 말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로이드존스는 바울의 저자로서의 모습을 눈에 보듯이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바울의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들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이 서신을 해석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일 뿐만 아니라....”9)


 로이드존스는 지금 성경을 해석하고 강해함에 있어서 바로 그 성경의 저자 바울의 입장에서 바울이 문제를 전개하는 것을 그대로 쫓아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문제를 대처해나가는 방법을 고찰하는 것을 로이드존스는 체계적으로 전개한다. 그것은 첫째, 사도는 한마디의 불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사도의 모습이 단순히 불요불굴의 인간적인 극기정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로이드존스는 극기가 이교적인 신앙이라고 지적한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또한 성경의 여러곳을 통해서 풀어 설명하고 있는데, 빌립보서1장 12절, 디모데후서 1장7절, 2장 3,12절 3장12절이다. 또한 그것이 사도의 보편적인 신앙의 모습인 것을 베드로전서 4장 12-14절을 통해서 보여준다. 10)


 그리고는 설교의 핵심으로 바울이 갇히게 된 원인을 분석하는데. 첫째, 바울은 일반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가 된, 그리스도의 죄수라는 점이다.11) 즉 사사로운 고난이 아니라. 생애의 영예로 여길만한 것임을 보여준다.


 둘째, 바울이 당한 여러 환란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과 그리스도의 제자된 신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딤후3:12)12) 마지막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13) 


 따라서 “이러하므로” 바울의 갇힌바된 것은 에베소교인들이 걱정할 것이 전혀 못되고, 자신과 함께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특권이 된다는 점을 사도바울이 논증한다고 로이드존스는 설교한다.14)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받고 있는 사람은 사도바울이 이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15)


 로이드존스는 지금 에베소서3장 1절의 한 절로 설교 한편을 강해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해석학적인 방법론을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전개하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고, 또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인용하여서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논증함을 본다. 그리고 철저하게 성경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밝혀서 그대로 자신들의 성도들에게 메시지로 적용하게끔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칼빈이 설교한 내용을 살펴보겠다.


일단 먼저 칼빈의 설교에서, 칼빈은 본문을 3장 1절에서 6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끊어서 ‘바울에게 계시된 비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서론 부에서 칼빈은 그의 해석학적 특징의 하나인 간결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로이드존스가 그의 한편의 설교전체에서 하고자 전개한 내용을 한단락의 문구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바울은 앞서 자기의 입으로 가르쳤던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가 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통하여, 그들은, 바울이 자기가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던 그 가르침을 확증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과 피까지도 아끼지 않았음을 보면서, 자기들에게 행했던 바울의 말이 참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16)


 이어서 1절을 강해하는데. 여기서 칼빈의 진면목의 하나가 드러난다. 그것은 원어적인 해석을 적용한 점이다.


 “ I Paul, being the prisoner of Jesus Christ, am an ambassador for you Gentiles" 로 된 영어문장에서 두단어를 지적하여 비교한 것이다. 즉. ‘prisoner’(포로) 와 ‘ambassador’(대사, 사도) 의 두 단어이다. 그리고 이 두단어가 얼듯보기에는 물과 불처럼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파송하시고 또한 자신을 대신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세상의 온갖 부끄러움과 비난에 처하게 하시는 것 이상의 보다 더 나은 명예를 주실 수는 없으셨단 말입니까?“ 라고 반문한다.17)


 칼빈은 대립적인 두 단어를 사용한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두단어의 대립성을 드러내면서 고난의 종이라는 바울의 입장을 더욱더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바울사도의 메시지의 권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사실 우리는, 만약 그가 단지 설교에 있어서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만을 수행했을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바쳤던 순종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순종에 더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는 많은 문제들과 시련을 견뎌냈으며, 최후에는 투옥과 처형이라는 고난을 겪었습니다.”18)


 그리고는 간략하게 로이드존스가 언급한바와 같이 성경에서 다른 사도들의 고난받음에 대해서 언급해주고 있다. 그리고 로이드존스와 같은 전개로,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실 복음의 선포만으로도 우리가 충분히 교훈을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그런 방식 곧 순교와 같은 방식으로 그 말씀이 인침을 받을 때에는, 그것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또 다른 보증이 되어야 합니다.”19)    로이드존스에 비해서 칼빈은 그 짧은 설교내용이지만 그 속에 또한 순교자의 가치와 정신을 담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로이드존스에게서도 동일하게 결론에 앞서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음을 본다.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읽어보는 일보다 더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의심이 들거나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세상이 여러분을 유혹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사업가로서 내가 박해를 감수해야 할지 어떨지 의심이 들 때면 순교자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어보십시오.”20)


 이 부분에서  또 하나 집고 넘어갈 것은 다른 모든 설교에서도 나타나는바, 로이드존스의 특징인데, 그 적용에 있어서 아주 상세하고,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칼빈에 비해서도 그 적용의 대상을 항시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언급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앞의 내용에서도 그는 ‘학생, 직장인, 사업가, 등을 언급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순교자의 정신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2-7절


 이어서 로이드존스는 3장 2-7절의 내용으로 두편의 설교로 강해하였다. 칼빈의 에베소서 3장의 설교의 첫편이 1-6절로 이어짐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물론 이후에 3장17절 한절로만 다섯 편의 설교를 한 것에 비한다면 약과라고 할 수 있겠다.


 설교를 위한 본문의 문단을 한절이상 끊는데 있어서 성경의 장절과 의미단락의 구분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일지 모르겠지만, 로이드존스는 분명히 밝히기를 문맥의 의미단락에 따라서 나누고 있음을 본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설교의 초두에 그는 자신이 3:2-7의 본문으로 나눈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이 부분의 말씀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져 있지만, 단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에 이것을 총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21)


 그리고 전체적인 검토의 이유는 세분된 부분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전체적인 어떤 개념을 확립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성경저자의 특징을 하나 꼽아서 보여주는데 그것을 통해서 저자의 의도와 함께 자신의 성경해석의 형태를 이해시킨다.


 “훌륭한 교훈의 진수는 반복입니다.(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하고 있는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22)


 두편의 설교중 처음의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설교에서는 바울의 의도를 통해서 기독교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처음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듯이 기독교진리를 상세히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비밀이 결코,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명확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성령님의 은혜를 통해서 받을때만이 이해가 가능한 특징이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로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음을 설교한다.


 그의 마지막 결론부에서 그의 설교전체를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닌 성경저자로서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하는 말로 나타낸 것을 본다.


 “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받았으며,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받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친절로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해두신 것의 영광과 놀라움과 경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결과로서 여러분이 어떤 신분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23)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설교인 ‘두 가지 비밀’에서는, 또다시 하나의 해석학적인 전제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3,4절에서 ‘비밀’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칼빈의 설교에서도 동일하게 지적하고 있음을 본다.24)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는데 앞서 로이드존스가 지적한바와 같은 비밀이라는 단어에서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강조하며, 성도들은 신비와 같이 어렵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뜻이라도 분명히 깨닫기를 겸손히 구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그 비밀을 존경하여야 한다고 강론한다.25) 여기서 성령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로이드존스와 같은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절대의지에 순종해야한다는 칼빈의 일관된 신앙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로부터 유익을 얻는 길은 바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26)


  로이드존스의 이해는 칼빈의 이해보다 한 단계 깊어 보인다. 본문의 4절을 중심으로 삽입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다. 흠정역성경에 잘 나타나는 괄호로 묶여있는 본문에 대해서 로이드존스는 그 삽입구의 의미를 깊이 드러내고 있다. 4절의 삽입구에 나온 ‘그리스도의 비밀’에서 그 비밀은 일반적인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 복음의 모든 메시지,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모든 진리를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27) 바울이 본래적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비밀은 3절에 나오는 비밀이지만, 이러한 삽입구의 사용으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복음의 진리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3절에서의 비밀을 ‘특별한 비밀’이라고 구분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일에 대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내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그 비밀은 단순히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 즉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28) 즉 3절이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5절과 6절에서 이야기하는데.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비밀로서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제 교회 안에 나타났고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로서의 특별한 비밀을 지적하며, 자신은 그러한 비밀의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도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로이드존스는 결론 맺는다.



2. 두 설교자의 일반적인 분석비교


 이상의 짧은 본문의 한두 편의 설교였지만 두 사람의 설교를 비교 분석해보았다. 그리고 이외의 다른 설교들을 참조로 하여 두 사람의 설교에 있어서 장단점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칼빈은 로이드존스보다. 수백 년이나 앞서간 인물이다. 따라서 칼빈이 설교하고 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읽고 이해했으며, 자신의 설교에 도움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개혁주의의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더욱 알려진 칼빈이기에 그 비중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의 영향을 받은 이후의 많은 설교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후손중의 후손의 하나가 로이드존스임을 간과할 수 없다.


 앞선 설교에서도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두 사람의 설교의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함을 본다. 즉 수백 년의 시간간격과 거기에 따른 청중의 모습이 확연히 다를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강해한 그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사람이 모두 성경을 해석하여서 바로 그 성경을 강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나 칼빈이나 모두 성경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가? 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의 구제적인 선포된(proclaimed)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가장 이상적이 해석의 기준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현대의 유수의 설교자들이 경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성경은 과거 그 말씀이 선포되었던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가장 바르게 이해될 수 있으며, 바로 그 메시지를 오늘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이 설교자가 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29)


 또한 두사람 모두, 성경을 강해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주석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단어의 하나하나를 살피고, 문맥 속에 그 문장의 위치를 살피며, 본문의 앞, 뒤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본문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되는 성경의 다른 본문을 인용하여서 이해를 돕고, 예화를 따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성경구절을 하나의 예화처럼 사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주석방법론에 그치지 않고, 결국에는 항상 성령의 조명이라는 부분을 간과하지 않고 그것이 성경이해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먼저. 칼빈의 설교는 참으로 간결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로이드존스의 설교가 길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상대적인 개념을 떠나서 칼빈의 설교는 간결하다. 때문에 로이드존스에 비해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간단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여 분석하는 것이 없다.


 거기에 반하여 로이드존스는 성경을 인용하여도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용된 구절을 다시 나름대로 분석하여 청중에게 보다 논리적으로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칼빈의 설교는 명확하다. 즉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힘있게 강조하여서 최소한 청중은 그것이 무엇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로이드존스는 같은 내용이지만 그것을 여러 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전개한다. 물론 그 전개의 모습이 아주 논리적이고, 그 전체를 통해서 메시지에 확신을 강하게 더해주지만, 그것이 너무나 방만하여서 청중들이 그 논리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여러 유사한 사례가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게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로이드존스의 설교의 경우 후대의 설교자라는 점 때문인지. 칼빈의 설교에서 획기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하면서 거기에 살을 덧입힌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두사람의 성경강해의 내용이 성경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떠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청중을 향한 전달의 입장을 제외한다면, 로이드존스의 설교가 칼빈의 설교보다 더욱 깊고 넓게 느껴진다. 그것은 설교의 양도 그러하지만, 그 양이 질적으로도 꽉 차있음을 말해준다. 즉 많은 설교양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깊고 넓게 전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고, 그만큼 설교자의 머리에 말씀에 대한 충만한 이해와 열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많은 내용이 특유의 논리와 반복적인 요약을 통해서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참으로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칼빈에 있어서도 지적한 모습은 여기서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설교에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런 특징을 아주 잘 표현한 사람이 있다.


 “ 그는 문장이나 구절을 설명해 나가면서 의미를 설명한다. 칼빈은 어떤 성서 해석 이론의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적이고 중세적인 설교가들의 성경의 다른 의미들(문자적, 도덕적, 영적 등등)의 해석방식을 조심스레 분리하지 않는다. 각각 그 장점에 따라 취급하지만, 무엇보다도 준비하는 중에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 어떻게 하면 회중들에게 유익이 될까?’ 모든 구절의 모든 부분이 직접 회중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비교를 할 여지가 없고 따라서 성경을 재해석하지 않았다. 학문적인 방법인척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 메시지를 현실성 있게 만드는 문제에 대한 칼빈의 해결책은 마땅히 성경이 속해야 하는 성령께 맡기는 것이었다. 그가 16세기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했을 때, 16세기 프랑스어로 16세기 회중들에게 전하는 것은, 진정 기원전 16세기에도 기원후 16세기와 똑같이 존재했던 성령께 맡기는 일 뿐이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칼빈은 성령의 보편적 적합성을 믿었다.”30)


 또한 칼빈의 설교에서 청중의 유익을 생각했다는 지적은 그의 설교가 간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할 수 있다. 이에 로이드존스와 칼빈의 또다른 유사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칼빈의 설교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목회자의 마음31)이 로이드존스가 지향하는 마음인 것은 다음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중대하고 중요한 어떤 것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진리의 전달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양편에서 모두 전인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우리의 설교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32)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오직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이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전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풀어야 비로소 바른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감히 성경에 인간적인 생각을 덧붙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런 정신이 칼빈의 설교에도 그대로 묻어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결국에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체계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교리가 되었다.


 성경전체에서 그 교리와 관계되는 성경을 다시 찾아 진리를 설명하고 확정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방법도 이후에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경의 교리적인 접근방법이라고 하겠다.


 특히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많이 설교했고, 그들이 남긴 설교는 주로 교리적인 설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청교도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로이드존스인 것이다.33) 따라서 그가 이렇게 한성경, 한 본문으로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런 교리적인 방법으로 본문에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교리적으로만 보려고 할 때 교인들이 설교를 딱딱하게 느껴지고 비현실적으로 생각되기 쉽다는 것을 알 때,34) 로이드존스는 그러한 한계를 잘 극복하였으나, 그 그림자는 어느 정도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는 남겨질 수밖에 없음을 부인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그림자의 영향은 읽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줄수 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남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결론


한국교회를 향한 의미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라는 찬송가 가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우리 한국교회강단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검의 위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개인의 삶의 변화와 사회의 갱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면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본다.


 혹자는 한국교회의 강단의 현실이 신학교에서는 그렇지 않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나중에는 자신들이 알레고리라고 비웃던 성경해석으로 되돌아가는 이유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는 서구 해석학의 잣대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잘 배워지지도 익혀지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말하기도 한다.1)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함이 정당하다 할것같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설교의 문제점을  “(1) 설교의 양에 비하여 질의 저하, (2) 성경의 이해, 해석의 차이로 교단교파가 분립되고, 잘못된 설교형태의 난립으로 교회의 본질이 퇴락의 현상을 초래한다”2) 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이 한국교회가 쇠퇴하기 이전인 1980년대 초반에 나왔다는 것은 이후 10여년이 지난 후 교세의 감소라는 현상으로 분명히 드러남을 통해서 더욱 올바른 지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쇠퇴하기 이전에 설교 해석상의 문제로 인해 이미 경고된 바인 것이다. 칼빈이 말한 “성경의 해석자가 첫째로 해야할 일은 해석자가 생각하는 데로 하지 말고 성경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도록 하라”3)라는 말은 더욱 가슴에 다가온다고 하겠다. 또한 한국교회의 성경해석의 문제점은 많은 설교자들이 알레고리칼한 설교와 함께 샤머니즘의 영향을 입은 기복적 설교를 한다는 점에 있다. ‘나타나 보이는 축복’을 신령한 영적인 축복보다 더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한, 그리하여 세속적인 가치를 심는 큰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곧 성경을 설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싶은 말과 청중이 듣고 싶은 말을 성경의 구절을 이어서 붙여 만들어 해석한 것이다. 진정 영혼을 사랑하는 설교자라면 강단 위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그대로 들려주어 그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설교는 그 동안 대부분 제목설교와 본문설교로만 고착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설교자가 현대 설교 학의 이론적인 접근에 얼마나 소홀했는가를 보여준다.4) 그리고 마치 주해설교가 성경적인 설교인양 하여서 설교를 성경의 주해에만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성경의 주석이 설교로 통용되어서 설교자의 경험담에 몇몇 구절의 본문만으로 한편의 설교가 되는 듯한 것이다.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의 케리그마이다. 따라서 복음에 적합한 성경의 해석을 통하여 그 복음이 바로 선포되도록 해야하는 것이 설교자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왜곡된 성경해석을 바르게 고쳐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에 강해설교의 아버지, 강해설교의 왕자라고 일컬음 받는 칼빈과 로이드존스의 모범적인 성경해석과  거기에 따른 바른 설교를 우리는 눈여겨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바른 성경해석자, 바른 설교자인 칼빈과 로이드존스의 성경해석의 근거인 설교의 근본전체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의 설교는 복음 적인 설교였다.


 칼빈의 설교신학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밝힌바, 말씀사역은 곧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보았다.5)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만이 설교의 근원이 되며, 출발점이자 귀착점이 된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아래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 지식은 반드시 성경에서만 얻어지는 것이고, 성경을 통해서만 비쳐진다.


 로이드존스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설교하였는데 그는 좀더 구체적인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이것은 내가 볼 때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이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인 일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이것이 잘못되고 위험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가정한다면, 모든 예배에 기성신자에게 적합하게 설교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항상 교훈적이어서, 성경이 강조하는 복음전도적인 요소와 요점은 무시되어 아마 거의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6) 따라서 칼빈과 로이드존스는 각각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함에 있어서 복음적인 요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성경이 말하는 그복음을 그대로 전하고자 하였다.


 둘째로, 그들의 설교는 바른 해석을 통한 준비된 설교였다.


 칼빈이나 로이드존스나 강해설교를 위해서는 성경을 면밀히 분석하고 해석하는 사전작업이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굉장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기에 충분히 능력이 있으시다는 핑계 하에 설교를 전념하여 준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의 태도를 책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단언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단위에 올라서서 감히 책도 참고하지 않은 채 허튼 상상을 짜내며, 좋아, 내가 단위에 올라갈 때 하나님은 내가 말할 충분한 것을 주실 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마땅히 강조해야할 것을 감히 읽지도, 생각지도 않고 또한 성경을 백성교화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미리 잘 숙고해보지도 않고 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자만하는 자가 되며 결국 하나님은 나의 그 뻔뻔스러움을 사용하여 나를 혼란케 하실 것이다.”7) 칼빈의 눈에 비친 신실한 설교란 우선적으로 준비된 설교인 것이다.


 로이드존스는 그의 목회생활에서 오전의 대부분의 시간을 설교를 위해서 할애했다고 한다. 그리고 철저하고 연구하고 고민하는 설교자이자 동시에 학자였다. 그는 많은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한다. “ 능력을 얻는 길은 여러분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그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분석하십시오. 조리 있게 나타내십시오.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십시오.”8)


 이러한 두 사람의 태도에는 그들이 준비된 성경해석자라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셋째로, 그들의 설교는 성령의 조명을 통한 설교였다.


칼빈의 설교관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는 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또한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함으로 권위와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설교가 선포되는 순간에도 듣는 자와 전하는 자에게 동시에 작용할 때 구속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9) 즉, 설교가 우리 안에 활동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시거나 우리의 마음을 ‘감동’ 시키셔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강해에서도 언급되는데. “사역자들은 일을 하고 씨를 뿌리는 농부와도 같다.... 사역자들은 또한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린 후, 그 씨가 배태한 것을 생산해 낼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땅을 도울 때, 책임상 그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지 인간의 근면의 결과가 아니다.”10) 라고 함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로이드존스도 성령의 사역이 성경의 이해와 해석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성령만이 동일한 방법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하든지 그 능력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와주지 않습니다. 진리는 ‘영적으로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 자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11)


 "나는 모든 설교자에게 한마디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설교하기 전에 이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감동을 기다리며 간구합니까? 설교자에게 이보다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시금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사역을 수행하도록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입니다.“12)


 이상에서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두 위대한 설교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칼빈과 로이드존스 이 두 위대한 설교자가 이후에 종교개혁의 주력으로, 20세기의 마지막 설교자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지성이나 언변에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몰론 두시람 모두 남다른 천부적인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비범한 그 시대의 인물이었지만, 그보다도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임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날 고귀한 설교자로의 직책을 맡은 자들이 성경적인 근거에 따라 바른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분명하지 못한 메시지를 전하며, 교회가 성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말씀을 떠난 세속적인 방법들을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완전한 방편을 훼손하는 것이요 경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는 시대마다 그의 말씀의 사역자들을 세우셨다.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세우셨던 그분이. 부패한 카톨릭에 대항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주역으로 칼빈을 세우셨고, 20세기에 들어서도 당시의 혼란한 시대정신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로이드존스를 세우셨다. 우리는 이들의 설교를 통해서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야 하겠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한 말씀이 바른 성경해석을 통해서 이 시대에 세움 받은 우리들 설교자들이 그 뒤를 이어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증거해야 하겠다.


 그리할 때 어떠한 방법론과 조건들을 떠난, 진정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의 역사를 일으켜서 쓰러져 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마지막 때까지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다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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