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왜성


서생포왜성
(西生浦倭城)
대한민국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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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문화재자료 제8호
(1997년 10월 30일 지정)
면적151,934㎡
시대조선시대 1593년
위치
서생포왜성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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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
주소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번지 일원
좌표북위 35° 23′ 3.55″ 동경 129° 20′ 6.92″ / 북위 35.3843194° 동경 129.3352556° / 35.3843194; 129.3352556좌표: 북위 35° 23′ 3.55″ 동경 129° 20′ 6.92″ / 북위 35.3843194° 동경 129.3352556° / 35.3843194; 129.3352556
정보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서생포성
(西生浦城)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종목사적 제54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1997년 1월 1일 해지)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있는 일본성곽(왜성)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4호로 지정되었으나,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관련, 등급조정키로 함에 따라 1997년 1월 1일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고,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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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및 연혁

임진왜란편집


문서에 서생포왜성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593년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朱印狀)에 의한 축성명령이며, 같은 해 5월 히데요시 명령서에 성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의 수비에 가토 기요마사, 그 수비장에 사가라 나가쓰네(相良長海)가 명령되어 있는데, 한성(서울)에서 퇴각한 가토 기요마사는 그대로 서생포에 들어가 축성을 개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구체적인 일시는 알 수 없지만, 1593년에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3]

같은해 9월의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강화에 방심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하라"고 명령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명령서로 보아 서생포왜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손에 의해 보이는 성의 원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1594년에는 평화교섭이 활발히 진전되어 4월에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회견을 하였다. 1595년 6월 28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부산왜성, 죽도왜성, 가덕도왜성 등의 몇 개를 남기고 여러 장수를 순차 일본으로 귀국시켰는데,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기장의 죽성리왜성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한때 폐성이 되었다. 1596년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귀국하여 후시미(伏見)로 향했는데, 같은 해 9월 평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1번대가 되어 약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 기장과 양산을 거쳐 한때 폐성으로 되어 있던 서생포왜성에 입성했다.[4]

이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이 방면의 군사적 책임자가 되고, 같은 해 2월 21일자 히데요시 명령서에 수비 책임자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에게 3,000명의 재번을 명령하고 있다. 같은해 3월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회담을 했다. 같은 해 7월 21일경에 아사노 요시나가가 서생포왜성에 입성하고, 가토 기요마사는 북위작전을 위해 출진하고, 같은 해 9월 아사노 요시나가는 혼마루의 토목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4]

같은 해 10월말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서생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울산에 최전선인 울산왜성이 생기면 일본군의 점령지 수비는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았는데, 같은 해 11월 10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축성된 것이 울산왜성으로, 12월 중순 이후 성의 외곽부분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울산왜성은 갑자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약 보름동안 비참하고 처절한 울산왜성에서의 농성전이 벌어진 것이다. 같은 해 1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왜성의 수비만 전념케 하고, 서생포왜성에는 모리 가쓰노부, 시마즈 다다토모,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카즈키 타네나가, 사가라 나가쓰네 등 여러 장수가 입성하여 수비를 담당하게 되었다.[5]

1598년 5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지금까지 구포왜성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서생포왜성에 수비담당자가 되어, 이후 폐성까지 나가마사가 지키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이 전쟁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10월 15일자 고다이로(五大老)가 나가마사 앞으로 보낸 명령서에서 "울산이 공격을 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10월 2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서에는 "기요마사와 협의하여, 서생포성을 퇴각하여 부산성으로 입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11월 24일에 기요마사와 나가마사 등이 부산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자,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 점령했다.[5][6]

서생포진성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서생포와 부산의 다대포에 동시에 쳐들어와 서생포에는 서생포 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에 만호(萬戶)를 두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임진왜란 후, 서생포 만호진성의 수군만호는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로 승격되었으나, 일본군이 축조한 서생포왜성의 성곽이 견고하다 하여 수군동첨절제사를 인근의 서생포왜성으로 이동하게된다. 이래 서생포 만호진성은 폐성이 되고, 서생포왜성은 대진(大鎭)으로 승격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서생포왜성은 조선의 서생포진성(西生浦鎭城)으로 사용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蔚山西生鎭地圖)를 보면 서생포왜성의 외성(外城) 내부의 관청건물, 그리고 주변 지역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서생포진성의 남문 근처에는 시장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전선이 정박해 있는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서생포 왜성의 외성이 대촌(大村)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http://ko.m.wikipedia.org/wiki/%EC%84%9C%EC%83%9D%ED%8F%AC%EC%99%9C%EC%84%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