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과 교회 (비교)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다. 성경에 나오는 상수리는 성스러운 나무이며, 그 아래에서 단을 쌓거나 종교적 모임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정정숙 전도사의 성서식물' 중에서).


그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짓도록 지시하셨고,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매년 3차씩 이 성전으로 나아와 하나님 앞에 보였으며, 성전은 그들의 예배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BC 586년,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고 유대인들은 예배할 장소를 잃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설사 성전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드리고 돌아오는 일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거주지역 중심에 회당을 짓고 그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회당 역사의 시작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처럼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려야 했지만, 이러한 일은 현실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회당에서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으로 번제를 대신하였다. 엄격한 의미에서 예배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번제가 필요하지 않은 신약시대 입장에서 본다면 바람직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이다.

70년후, 유대인들은 드디어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번제도 다시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해 오던 방식대로 그들은 회당 예배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예수님도 때로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때로는 회당에 들어 가서 가르치기도 하셨다.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본의 아니게 전세계로 흩어져야 했다. 바로 이때부터 회당의 진가는 발휘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하던 것처럼 세계 곳곳에 회당을 세우고, 그곳에서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읽었다. 회당에서 할례를 행하였고, 성인식도 회당에서 치렀다. 결혼식과 장례식도 회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오랜 방랑생활을 끝내고 2천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로 ‘샬롬’이라는 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히브리어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배경은 물론 회당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이었고, 그 중심에는 토라가 있었다.
예루살렘 뿐 아니라 유대인 컴뮤니티 중심에는 지금도 회당이 존재하고 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할례식을 행하며, 성인식도 거행하는 것이다. 절기가 되면 회당으로 모이고, 속죄절이 되면 회당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회당 건물들은 크기가 그만그만한데, 그 이유는 안식일에 걸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에 버스를 타거나 차를 운전하지 않으므로 회당 건물이 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교인들은 유대인에게 먼저 전도를 시작하였다. 바울도 회당으로 들어가 전도하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회당의 예배방식을 자연스럽게 답습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설교와 기도시간을 가지는 일이었다.
교회의 건축 양식도 회당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당 맨 앞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고, 휘장 앞에 펼쳐진 성경책은 휘장 뒤편의 토라를 대신하였다. 말씀을 읽는 자리(비마)에는 강대상이 놓였다.

회당에 따라서는 토라를 낭독하는 자리가 앞쪽에 있지 않고 회당 중앙에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희생제단이 성전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을 본 뜬 것이며, 희생제사가 말씀을 읽는 예배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식 회당들은 기능을 감안하여 비마를 앞쪽에 두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회당들은 회중이 예루살렘(동쪽)을 향하여 앉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는 체계화되어 있지 않던 일로서, 디아스포라 시대를 거치면서 정례화되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한 일은 유명하다.

기독교인들이 회당에 들어서면 성당에 들어서는 것보다도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교회가 회당 모형을 거의 그대로 본 뜬 반면, 성당은 성모 마리아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였기 때문이다.
현대식 교회당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휘장(파로켓)들을 걷어 내고 그 자리에 십자가만 남기고 있다는 사실도 아쉬운 점이다. 찢어진 휘장이 십자가의 의미를 더해 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성막과 회당의 모습이 직사각형인데 비해 요사이 건축되는 교회당들은 기능적인 면만 중요시되어 대부분 원형으로 지어지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초대 한국교회는 남녀 좌석을 구분하였다. 이것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바 크겠지만 매우 성경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여인들의 뜰이 회당에서 여성구역(에즈랏 나쉼)으로 나타났고, 이것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대 회당들은 지금도 여성구역을 2층 난간에 배치하거나 칸막이를 설치하여 좌석을 구분하고 있다.

배는 교회에서처럼 시계를 보고 시작하기 보다는 정족수 열 명이 모이는 대로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일찍 온 사람은 혼자서 기도를 하거나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기도문을 읽다가 예배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참여하였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기도만 드리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미리 정해진 당번이 강대상 벽장에서 토라 두루마리를 꺼내 어깨에 메고 회당 중앙의 비마로 나오면 예배는 시작된다. 신도들은 토라를 주목하거나 손으로 토라 카버를 만진 후 그 손을 입에 갖다 대고 키스를 하기도 한다.
지정된 사람이 토라를 읽기 시작하면 보조자는 두루마리를 돌려 가며 토라를 읽는데 지장이 없도록 협력한다. 토라에는 음률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누가 읽더라도 동일한 음률로 읽도록 훈련이 되어 있으며, 마치 옛날 선비가 한문을 읽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토라 낭독은 1년에 한 번씩 읽을 수 있도록 미리 정해진 분량을 읽는데, 일부 개혁파 회당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읽기도 한다.
예배시간 내내 함께 찬송을 부르는 일은 없으며, 특별한 예식이 있는 날에만 이러한 순서가 추가된다.

토라를 읽는 지루한 시간이 끝나면 기도가 이어지고, 기도가 끝나면 곧 폐회된다. 예배에 모인 신도들은 특별한 친교를 나눌 겨를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귀가한다. 까다로운 안식일 규정 때문에 함께 친교를 나누는 일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가족과 함께 안식의 기쁨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스라엘에 3년 이상 살면서 연구를 목적으로 안식일에 여러 회당들을 다녀 보았다. 때로는 새벽에 나가 가장 먼저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 보기도 하였고, 절기나 행사가 있을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이곳 저곳을 골고루 방문하였다. 안식일에는 사진을 찍거나 메모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사진 자료가 아쉬운 점은 있으나 거부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기독교박물관 www.segibak.or.kr  기독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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