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연구

 

 

Ⅰ. 배경

1. 고린도에 대해서 (참고; 사진 및 자료 보기)

헬라(그리이스)는 고린도만과 에게만(Sronic Gulfs)에 의해 거의 둘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사이에는 약 8km정도 넓이의 지협이 있는데 그 지협에 고린도가 위치해 있다. 고린도는 고대 세계의 거대한 상업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서, 로마제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리, 군인, 사업가, 선원들로 붐볐다. 고린도는 산업과 조선의 중심지로서 건축술과 예술로 유명했다. 고린도 시는 2년마다 헬라의 4대 경기중의 하나로 알려진 경기를 개최했다. 그리고 헬라와 로마 제국 각처에서 운동 선수들이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고린도에 몰려들었다. 당시 고린도 시에는 약 20만 명의 시민과, 약 50만 명 정도의 노예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헬라의 남쪽과 북쪽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품들은 모두 고린도를 경유해야만 했다. 또 헬라의 남단은 항해하기에 위험했기 때문에, 헬라 동쪽과 서쪽 사이에 이루어진 물건들도 모두 고린도 만과 에게만 중에 어느 하나를 이용해서 수송되었다. 만일 선박이 큰 경우에는 화물을 하역하여 반대편까지 육로로 수송했으며, 다시 그 곳에 있는 선박에 선적을 했다. 그러나 만일 선박이 작은 경우에는 그 배에 로울러를 달아서 지협을 가로질러 끌고 갔으며, 그 후에 다른 쪽에 있는 만을 통해서 다시 항해하곤 했다. 이러한 고린도의 중간 역할로 인해 고린도는 무역 중심지가 되었으며, 부와 번영의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울 시대의 헬라 세계는 성적으로 크게 방종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고린도는 성적 방탕으로 유명했다. 그러므로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종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였고, "고린도 여자"라는 말은 "창녀"를 의미하기도 했다. 고린도 시의 높은 곳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이나 되는 신전 창녀가 거주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창녀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 예배 예식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한 이올리아 사람은 연극에서 무대에 등장하는 고린도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2. 바울의 서신 왕래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라고 부르고 있다(1:2). 고린도 교회는 신약에 나오는 어떤 교회보다 더 많은 사실이 알려졌다. 이것은 바로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다(행 18:1-17). 그는 이곳에서 18개월 정도 머물면서 일을 했으며, 그가 이곳을 떠날 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사도 시대에 있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이 편지들을 읽으면서 바울이 "성도들"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수많은 죄로 인해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한 고린도 시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순결한 삶을 살려 할 때에 그들은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기간 중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썼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바울을 방문했다. 그들은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가 당파와 스캔들, 의심과 바울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는 보고했다. 바울은 이러한 보고를 듣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네 통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중에 두 통의 편지만이 보존되었다. 서신들의 전후 사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린도전서를 보내기 전에 바울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전 5:9). 이 초기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부도덕한 "기독교인들"과 어울리지 말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나서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들은 다시 바울에게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질문에는 결혼, 순결성,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일, 집회에서의 여인들의 행위, 그리고 기타 몇 가지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에게 편지를 전달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분파들이 조성되어 있었고, 근친상간과 스캔들로 인해 교인들이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2) 그 다음 바울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자신에게 보고된 일에 대해 이야기했으며(1-6장), 또 자기에게 제시된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였다(7-15장).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이 편지를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속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방문"이라고 일컬어지는 방문이었다. 그러나 이 방문 역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후 2:1, 12:14, 13:1-2).

 

3)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간 후에 다시 세 번째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록되었다(고후 2:3,4,9, 7:8,12, 10:1,9). 마침내 바울은 사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디도를 고린도 교회로 파송했다. 디도가 에베소로 떠난 후에 은 세공업자들의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행 19:23-20:1). 이 사건으로 인해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야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4) 그 후 바울은 감사하기 위해 다시 네 번째 편지를 썼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이다.

 

Ⅱ. 고린도 전서 내용 연구

바울은 (고후 11:22-23)에서 자신의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28절에서 그는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영적 자녀들 가운데 하나였던 고린도 교회는 그에게 상당한 염려를 안겨준 동시에, 가장 훌륭한 자녀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의 "자녀들"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는가 ? 그들이 이교 생활을 떠나지 않은 일로 인해 그들을 공격하였는가 ? 그는 그들이 범죄한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또한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받았으며, 그들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 된 지체들로서 고귀한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호소하였다.

 

1. 서론(1:1-9)

 

1) 인사(1:1-3)

헬라 사람들은 편지 양식을 따라 고린도 교회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헬라 사람들은 편지에서 인사를 할 때에 먼저 발신자를 밝히고 나서 수신자에 대해 기록했으며, 그 후에 인사를 하였다. 이러한 순서를 따라 바울은 먼저 발신자가 누구인지(자신과 형제 소스데네)를 밝히고 있다(1:1).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도"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와 같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가 바울의 사도성의 정당성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장). 바울은 그의 사도성의 정당성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인간이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통해서" 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형제 소스데네가 함께 인사를 드린다고 밝히고 있다. 소스데네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을 도왔으며, 유대인들에게 고소되어 재판정에서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한 사람이었다(행 18:17).

 

바울은 두 종류의 수신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첫 번째 대상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으며, 둘째 대상은 "모든 곳에서 그들과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다(1:2).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른다. 만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 사실을 인정했었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분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고, 거룩한 무리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다. 여기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로 인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멤버가 된 사람들"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는 이러한 거룩한 신분과는 달리 성적으로 부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거룩하신 부름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한 명의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화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1:4-9)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바울이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든 면에서 말과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5).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방언, 예언, 영 분별, 그리고 방언 통역과 같은(고전 12:4-11) 은사들로 풍족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신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증거가 확실하게 세워질 수 있었다(6). 성령은 바울의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이 확신 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함께 역사해 주셨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모든 은사들을 풍족하게 경험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었다(7). 바울은 이렇게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8).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리고 설령을 통해 그들이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주님이 재림하실 그 날까지 그들을 견고하게, 그리고 끝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도록 붙잡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으며, 부르신 그들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이러한 부름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9).

 

 

2. 교회 안의 당파들(1:10-4:21)

 

1) 분열의 모습(1:10-17)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사람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고하고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고한다는 말은 이 권고가 바울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권위 있는 권고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나뉘어지지 말며, 같은 마음과 같은 의견으로 서로 연합하라!"고 권고하였다(10). 바울의 첫 번째 권고는 "분열이나 나뉘어지지 않고 서로 연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러한 권고를 해야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가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다툼과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11). 글로에의 집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바울파와 아볼로파, 그리고 게바파와 그리스도의 파로 나뉘어져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12). 바울은 이 말을 듣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분열 양상을 바로 잡을 필요를 느꼈다.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13)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께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말한다(14). 바울이 갑자기 세례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세례를 받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초신자들을 직접 세례를 주지 않고, 그의 제자들이 대신 세례를 베풀었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아무도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15). 바울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푼 사람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 집 사람 밖에는 없었다(1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그들에게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보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로운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유창한 말은 청중을 설득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바울은 웅변술과 수사학을 공부했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지혜로 복음을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되는 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7). 네 번째 집단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그들의 입장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그들은 동방 출신으로 추천서를 휴대하고 고린도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고후 3:1). 그들은 유대 출신이며 그 사실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세 율법에 규정된 의식들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유대-기독교 전통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교회를 이끌갈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준 자유주의를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들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고 그의 재림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사들을 사사로운 "지식"과 "지혜"에 이르는 길로 이해하였다(3:18-20, 8:1-3,10,11). 그들은 이러한 특별한 종류의 지식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에 도달하면 구약과 사도의 글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이전의 표준적인 규범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이전과의 모든 관계들과 자신들을 단절시켰다. 그 결과 그들은 "모든 일이 내게 가하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호는 호소력이 있었다. 그 영향은 심각하였다.

 

2) 분열의 이유(1:18-4:5)

 

가. 메시지에 대한 오해(1:18-3;4)

고린도와 같은 헬라 도시의 사람들은 특히 철학, 즉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혜로운 연설"이나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볼로는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에 있어서 바울보다 그들에게 더 어울렸을 것이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 안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분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바울은 이들의 관심을 복음의 중심인 십자가로 돌리려고 하였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말씀)"가 구원받지 못하여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반역자로 취급되어 십자가에서 사형 당한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었다. 바울은 그러나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교리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선포하였다(18).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가 없었다. 바울은 (사 29:14)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를 가진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을 가진 자들의 총명을 폐하셨다"고 말한다(19). 하나님은 구원의 진리를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 자들은 복음을 미련한 사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하고 있다. "이 시대의 지혜자가 어디 있느냐?", "서기관(학자)이 어디 있느냐?", "변론 자(수사학자: 철학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냐?"(20)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의 미련한 일을 통해서 (복음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생각하셨다."고 말한다(21). 유대인은 종교적인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하는 헬라인들은 세상의 지혜를 찾는다(22).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는 한 편으로 유대인에게 장애가 되는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일이었다(23).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였다(24). 바울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선포하였다(25).

 

바울은 실제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한 가지 실례를 제시하였다. 실제로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부르실 때에 지혜로운 자들보다는 평범하고 천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바울은 그들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와, 능한 자, 그리고 가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26).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불러 주셨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2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28).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가진 것 없는 이들을 택하여,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을 폐하려고 하셨다"(29). 바울은 연약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었으며, 예수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성도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30).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2:1). 바울은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밝히고 있다(2:2).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또한 심히 떨었다"고 고백하였다(2:3).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아덴의 철학자들과의 논쟁으로 인해 바울이 흔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오직 하나님의 권위를 의지하고 순종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전도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복음 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했다(2:4). 그의 전도와 설교는 당시 순회 교사들이 했던 것처럼, 유창한 웅변이나 설득력 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가 이렇게 복음을 전했던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게"하려 했기 때문이었다(2:5).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세상의 지혜를 거부했다고 해서 복음이 참 지혜를 거부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바울은 "온전한 자들"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실상 참된 지혜였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 자들이 말하는 지혜나, 세상의 지도자들이 줄 수 있는 지혜는 아니었다(2:6). 이 지혜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지혜는 숨겨져 있다가, 우리의 영광을 위해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었다(2:7, 엡 1:4).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었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이다(2:8). 이것은 다음과 같이 기록된 성경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2:9)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다 아실 수 있기 때문이다(2:10). 사람의 모든 사정을 그의 안에 있는 사람의 영만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법이다(2:11).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해 주셨다(2:12). 또한 바울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말하되,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가르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가르쳤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영적인 일들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13).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 이는 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미련하게 보이고, 이 일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런 일들은 오직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2:14).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게만 심판을 받을 뿐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2:15). 이 세상에는 아무도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님을 지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에 주님의 마음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다(2:16).

 

바울은 앞에서 영적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들, 즉 영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이러한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대할 수 없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할 때에 육적인 사람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다(3:1).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가 없었다. 이는 그들이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도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3:2). 바울은 아직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들 가운데 아직도 시기와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당파를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그들이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3:3).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그들이 좋아하는 사역 자들에게 더 밀착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3:4).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였는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그에게 친밀감을 더 느꼈을 것이다. 사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전도자와 복음의 자녀들 사이에 사랑의 결속이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속이 지나치게 되면 사람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이지 바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볼로 역시 바울과 함께 복음의 사역을 하였다. 아볼로 역시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파하였으며, 자신의 영예를 높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볼로가 복음을 전한 방법은 지혜를 추구하는 회중 들에게 더 친근하고 매력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보다 아볼로에게 더 친밀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러한 일에 발전되어, 바울을 좆는 사람과 아볼로를 좆는 사람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행동한 결과로 나타난 일이었으며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나. 사역에 대한 오해(3:5-4:5)

이제 바울은 이러한 그릇된 일을 바로 잡고 있다. 바울은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바울은 그들이 단지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믿게 한 사역 자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3:5). 바울은 복음 전파 사역을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로 비유하였다. 바울은 복음의 씨앗을 심었으며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그 씨앗을 싹트게 하여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3:6). 바울은 씨앗을 심는 자신이나 물을 준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그들을 자라게 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선언한다(3:7). 복음의 씨를 심은 바울과 아볼로는 같은 사역 자로서, 서로의 일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서로 협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충성한 대로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될 것이다(3:8).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동역 자"였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라는 "하나님의 밭"에서 일을 맡은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3:9).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건축물로 비유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 즉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 바울은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그 터를 닦아 두었다. 이 터는 십자가의 도, 즉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으로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볼로와 같은 다른 사역 자들이 이 곳에 와서 그 터 위에 집을 지었다(행 18:27-28). 아마도 베드로 역시 고린도를 위해 직간접으로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1:12,3:22).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는 이 외에도 다른 사역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각자 교회를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3:10). 그들은 바울이 이미 닦아 놓은 기초, 즉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기초를 놓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후에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후 11:4). 그러므로 후에 바울은 그들이 세운 다른 기초를 무너뜨리고 다시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3:11). 사역 자들은 바울이 세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 또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세울 것이다(3:12). 여기에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운 건전한 가르침, 2) 사역자의 선한 동기, 3) 중생한 성도들, 4) 성령을 좆아하는 사역. 그리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 그리스도 외의 다른 복음이나 가르침, 2) 사역자의 이기적인 동기, 3) 중생하지 못한 거짓 성도들, 4) 성령이 아닌 인간의 열심히 하는 사역. 하나님은 후에 각 사람이 한 일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날이 되면 불을 통해 그 사람이 한 사역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3:13). 지혜로운 사역 자는 복음을 통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시험의 불이 그 일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사역 자는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될 것이다(3:14). 그러나 미련한 사역 자가 한 일은 시험의 불로 인해 모두 사라지고,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비록 그는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그는 불에 타버린 나무나, 풀, 또는 짚을 건지는 것 같은 허무한 구원을 받게될 것이다(3:15).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또한 성령이 자신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3:16).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그들을 거짓 교리나 이기적 목적으로 더럽히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더럽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거룩하다"고 선언하였다(3:17). 그러므로 사역 자들과 성도들은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3;18). 왜냐하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를 자신의 꾀에 스스로 빠지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으며(3:19), 주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욥 5:13, 시 94:11). 그러므로 사역 자들이나 성도들은 지혜로운 말이나 아름다운 웅변을 통해 복음을 전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의지해야 한다. 바울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성도들의 것이라고 말한다(3:21).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도 모두 성도들을 위해 있는 사역 자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상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 모두 성도들을 위해 존재한다(3:22).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세 번째 집단은 "게바파"였는데, 그들은 특히 시몬 베드로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그를 따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공식 이름을 "베드로"의 아람형인 "게바"를 따라 게바파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보다 베드로에 대해 더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 보다 베드로는 더 권위 있는 기독교의 대표자로 생각한 것 같다. 이는 베드로가 직접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12사도 중에서도 대표자 격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일부는 바울보다 베드로에게 더 신뢰와 지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은 성도들을 위해 부름 받은 사역 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사역 자들이 모두 성도들을 위해 세움을 받은 자들이며, 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만일 그들이 이 사실을 기억했다면 사람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섬겼을 것이다(3:23).

 

그러므로 바울은 마땅히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종들(휘페레타스)"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오이코노무스)"로 간주하라고 부탁한다(4:1). 만일 사람들이 바울과 아볼로(또는 게바)를 하나님의 종과 청지기로 간주했다면 하나님께만 충성을 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분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신실함)이다(4:2).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신실하게 일했을 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사람들의 판단이나 칭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도 판단하지 않았다(4:3). 왜냐하면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아니었으며, 자기를 판단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의롭다고 간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명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시면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행한 모든 것과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든 동기와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각 사람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적절한 칭찬과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4:5).

 

다. 분열의 치유(4:6-21)

바울은 자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자신이 아볼로와 함께 사람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일에 모범을 보였다고 말한다. 바울과 아볼로는 말씀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을 하지 않고 겸손하게 일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 자기를 높이지 않고 겸손하게 행하는 일을 배우기를 원했다. 여기에서 사용된 "배운다"는 말(마쎄테)은 "제자가 되어 스승이 하는 일을 배우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을 배워서, 교만한 마음을 품고 서로를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4:6). 바울은 도대체 "누가 너희를 (바울과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파로) 구별을 했느냐?"고 묻는다. 물론 사도들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렇게 나눈 적이 없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교만해져서 그렇게 한 것이다. 또 바울은 "너희가 가진 것 중에서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각종 은혜와 은사를 충족하게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에는 사랑으로 하나됨과, 겸손의 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그들이 "어찌 하여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느냐?"고 추궁하였다(4:7).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왕이나 된 것처럼 착각에 빠져 서로를 주관하려고 했다. 그들은 영적 열광주의에 빠져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고난과 겸손의 정신을 잃고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바울과 아볼로 역시 사람이기에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했다(4:8).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과 아볼로를 죽이기로 작정된 사람처럼 맨 마지막 자리에 두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겸손을 따라 낮아지고 고난을 당하여 온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것이다(4:9).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세상의 지혜를 버리고 미련해졌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지혜를 자랑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좆아 스스로 연약하고 비천한 자리에 놓였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강하고 존귀한 자리를 추구하고 있었다(4:10). 바울 일행은 이 글을 쓰는 시간까지 굶주리고, 목 말라하며, 입지 못해 헐벗고, 매를 맞으며 정해진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4:11). 그들은 수고하여 친히 자기 손으로 일을 하고 있었으며, 모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핍박을 당하면 참고(4:12), 비방을 당하면 또 권면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쓰레기와 만물의 오물취급을 당하고 있었다(4:13). 이와 같이 사도들은 친히 십자가의 도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영광과 왕궁의 신학에 빠져서 교만하여 서로를 대적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신랄한 비판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나친 수치심에 빠질 것을 염려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권하는 것"과 같이 사랑의 동기에서 하는 비판임을 밝히고 있다(4:14). 그리스도 안에서 말로나 편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르치는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낳은 영적인 아버지는 바울 밖에 없었다(4:15). 그러므로 바울은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권고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정신을 본받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던 것이다(4:16). 또한 바울은 이 일을 위해서 이미 자신이 주안에서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인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로 파송한 바 있었다. 바울은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 가면 자신이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십자가의 정신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4:17).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동행했기 때문에 바울의 삶과 정신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십자가의 정신을 배웠으며, 또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게 이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의 말을 받지 않을 소수의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교만하였으며 인간 중심으로 행하여 고린도 교회에 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들은 마치 바울이 다시는 고린도 교회에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계속해서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4:18). 그러나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자신이 신속하게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면 교만히 행하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능력을 알아 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4:19).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세상에 임하기 때문이다(20).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말은 거짓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말과 지혜가 부족해도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임이 분명할 것이다.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질문한다. 바울은 그들이 끝까지 교만하게 행하여 바울이 징계의 매를 들고 그들을 찾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의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행하여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4:21).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그들에게 뉘우칠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3. 교회 내의 무질서들(5-6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였지만 그들에게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은 교회 안에 있었던 몇 가지 무질서한 일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성적으로 부정한 형체를 올바로 치리하지 못한 일(5장)과, 성도간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재판으로 확대시킨 일(6:1-11), 그리고 성적인 순결을 유지하지 못한 일에 대한 것(6:12-20)이었다.

 

1) 치리의 실패(5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음행 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울은 이런 음행 사건은 이방인 중에도 없는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은 한 성도가 아비의 아내, 즉 계모와 근친상간을 범한 일이었다(5:1). 그는 자기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계모)와 더불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구약 성경(레 18:8, 신 22:22)과 로마법에서 함께 금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너희가 교만해져서 이 일을 행한 사람을 치리하기 위해 슬퍼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였다(5:2).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 일을 행한 자를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울은 자신이 몸으로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어서, 이 일을 행한 사람을 이미 심판했다고 말한다(5:3).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영으로 함께 모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5:4), 이런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말한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교회 공동체에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이 세상은 사단의 유혹에 그대로 노출된 곳이다. 교회가 범죄한 사람을 치리하는 것은 "그의 육신을 멸하고, 그의 영을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5:5). 여기에서 육신(사르코스)은 죄의 본성을 따르는 육신을 의미한다. 이 사람은 성령을 좆지 않고 죄의 본성을 좆아 성도로서 마땅히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개적으로 그와 유지하던 교제를 중단하고, 그를 치리함으로 이러한 육신의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어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바울은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추궁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런 자를 용납하는 일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였다(5:6). 교회가 범죄한 성도를 치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적은 죄를 그대로 둘 경우 누룩처럼 퍼져서 다른 사람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너희가 누룩 없는 자로서 새로운 떡 덩어리가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 기간에 집에서 모든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다(출 12:15-20, 13:1-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벗어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이전의 죄를 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죄의 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교절에 누룩을 제거하고,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출애굽 사건을 기념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죄를 제거하고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일을 기념해야 했다(5:7). 기독교인들은 후에 유월절 대신 성찬식을 하면서 주님의 희생을 기념했다. 바울은 교회가 성찬식을 행할 때에 옛 습관이나 악, 그리고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신실)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5:8). 아마도 바울은 죄를 짓고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이러한 성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먼저 번에 쓴 편지에서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쓴 적이 있었다(5:9). 이러한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에 전달하고, 그 후에 다시 고린도 교회의 답장을 바울에게 전해 준 사람은 "글로에의 집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11). 고린도 교회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바울의 말을 오해해서 음행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이 말은 성도들이 음행하고, 탐심을 품으며, 노략질하고, 우상 숭배하는 모든 불신자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러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지 않으려면 세상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이다(5:10). 바울이 그들에게 쓴 것은 가깝게 지내는 형제, 즉 성도들 중에서 음행을 하거나, 탐심을 품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입이 거칠거나, 술 취하거나, 노략질을 하면 그들과 함께 먹지(교제하지)말라는 뜻이었다(5:11). 아마도 이러한 치리는 성찬 참석을 금지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일을 금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치리 당한 사람들을 모든 공동체의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금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회개케 하는 일까지도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14:24-25). 교회 밖의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은 바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도의 권한 하에 있으며, 따라서 교회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마땅했다(5:12).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성도로서 회개치 않고 계속해서 범죄한 사람은 치리 하여 내어 보내라고 지시하였다(5:13).

 

2) 개인의 분쟁 해결의 실패(6:1-11)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불화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이교 법정에 가지고 가서 투쟁하였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소홀히 여겼던 것 같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분쟁거리를 이방 법정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은 고린도 교회를 괴롭히던 분쟁의 영이 다른 형태로 표출된 것이었다.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도취되어 있던 고린도 교회는 곳곳에서 분쟁의 현상이 드러나고 있었다. 바울은 "당돌하게 그 문제를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불신자) 앞에서 송사하려는 자"의 그릇된 행위를 책망하였다(6:1). 바울은 "너희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추궁하였다. 바울은 세상도 성도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데, 어찌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느냐? 고 책망하였다(2:2). 바울은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성도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들까지(타락한 천사들, 벧후 2:4, 유 6절) 심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세상의 일은 만족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마땅했다(2:3).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세상의 분쟁거리가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시하는 세상 법관들에게 그 일을 해결하도록 맡기는 일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다(6:4).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형제간에 일어난 이러한 일을 해결할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그들 중에 하나도 없느냐? 고 책망하였다(2;5). 바울은 그들이 형제가 형제를 향해 서로 송사하고,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송사한 일이 옳지 않다고 추궁하였다(2:6). 바울은 이러한 분쟁이 세상 법정에 제기되는 일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고, 또 하나님의 이름에도 욕이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피차 세상 법정에 고소함으로 그들 중에 분명하게 허물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책망하였다. 바울은 차라리 이렇게 해서 영적인 손실을 가져오느니, 차라리 육체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한다(6:7). 바울은 그들이 의롭지 못한 일을 하고, 또 속이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이 고소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6:8). 바울은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질문으로 추궁하고 있다. "너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그들에게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한다. 바울은 "음란한 자와 우상을 숭배하는 자, 간음을 하고 색을 탐하는 자, 동성연애자와 도둑, 사람을 탐내고 술취하는 자, 습관적으로 욕을 하고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6:9-10). 이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불의한 일들은 당시 고린도 뿐 아니라, 헬라와 로마의 도시에 만연했던 일들이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도 과거에 이러한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을 받아 거룩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6:11).

 

3) 음행(6:12-20)

사도 회의는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음행을 금하도록 요구한 바 있었다(행 15:29).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요구가 고린도 교회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 같다. 고린도 교회에서 "기독교인" 남자는 창녀들과 자유롭게 결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욕의 충족을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유롭게 창녀들과 성적 결합을 하고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자주 사용했던 말을 가지고 교훈을 시작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능하다(합법적이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며, 따라서 성적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함으로 그 자유에 제한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자유를 남용하여 오히려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히려 제재를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달랐다. 바울 역시 "내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유를 그리스도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 결과 그는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자유와 함께 양심의 자유도 누리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하나님과 이웃에게 유익을 위해 사용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6:12).

 

또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어떤 사람은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즐겁고 필요한 일이며, 따라서 시장하다는 느낌이 들면 이를 충족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은 이와 마찬가지로 성행위도 즐겁고 또한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성적 욕구가 있으면 그것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성욕을 채우려는 부정한 성행위를 합법화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육신 적인 일들을 모두 폐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욕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몸은 음란을 위해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해 있으며,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6:13)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살려주셨고, 또한 그 권능으로 우리의 몸도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6:14).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 몸은 이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녀와 연합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창녀의 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6:15).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이 결코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창녀와 성적으로 연합하는 사람은 창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6:16). 그리고 주님과 영으로 연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을 이루게 된다(6:17).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음란을 피하고 그리스도와 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범하는 다른 죄는 몸 밖에서 그 죄가 있다. 그러나 음행 하는 사람은 그의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6:18). 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 몸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추궁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6:19). 바울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며, 따라서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라고 명령하고 있다(6:20).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몸을 마음대로 음란한 일에 사용할 수 없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2)(7-11장)

 

(참고: 성경 본문을 먼저 읽고 이 글을 읽어야 효과적인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4. 교회의 난제들(7-15장)

바울은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로 6장을 끝맺고 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의 네 번째 부분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고 있다. 바울은 이 부분을 "너희가 쓴 말에 대해서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이 문제들에 대해 바울에게 해결 방법에 대해 문의를 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 몇 가지 무질서한 일들에 대해 바울에게 보고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 즉 결혼과 독신(7장), 우상 제물과 개인의 자유(8-11장), 영적 은사와 교회의 질서(12-14장), 부활(15장)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세하게 답변하고 있다.

1) 결혼과 독신(7장)

 

* 결혼과 독신(7:1-9)

바울은 6장에서 결혼 외의 정사가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제 그는 7장에서 결혼한 성도들의 성적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비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부부간의 의무를 회피하려고 한데서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7:1). 여기에서 "좋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해도 좋다"는 말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스스로 독신으로 지낼 수도 있고, 때로는 결혼한 부부들이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성적인 관계를 절제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부가 성관계를 멀리하거나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에는 음행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권면하였다(7:2). 결혼한 부부의 경우에는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성적 의무를 포함하여)를 다해야 하며,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7:3). 결혼한 부부는 자기 몸을 가지고 마음대로 다른 이성과 관계할 수 없다. 결혼한 아내의 몸은 그 남편이 주관하고 또 남편의 몸은 그 아내가 주관하는 것이 정당하다(7:4).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함으로 결혼한 부부가 서로 상대방을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부부간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금욕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향해 부부가 분방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 성 관계의 근지가 부부간의 상호 합의 하에 결정된 것이어야 한다. 2) 다시 성 관계를 시작할 시기에 대해 합의되어 있어야 한다. 3) 이러한 일이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7:5).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지시가 그들에게 명령이 아니라 권면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7:6).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이 정죄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독신의 문제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독신과 결혼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따라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7:7). 그러므로 바울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독신의 은사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결혼을 했다가 이혼한 후에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홀아비나 과부들에게(처녀에 대해서는 25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자신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7:8). 여기에서도 "좋다"는 말은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성적인 욕구를 절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독신으로 지내지 말고 결혼을 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억지로 금욕을 하여 정욕을 불같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결혼을 해서 단정하게 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7:9).

 

* 결혼과 이혼(7:10-24)

바울은 이제 이미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말한다. 바울은 이미 결혼한 부부는 독신으로 지내기 위해 서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 명령이 자신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 밝힘으로 이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한 몸을 이루어 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임의로 나뉘어지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일단 결혼한 부부는 그대로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이 명령을 받기 전에 서로 나뉘어진 부부가 있다면, 재혼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거나, 아니면 기회가 닿으면 다시 자신의 배우자와 합하라! 고 명하고 있다(7:10-11).

 

또 바울은 불신자인 배우자를 가진 부부에게 말한다. 바울은 이 명령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권면 임을 밝히고 있다. 만일 한 형제가 있는데 불신자인 아내가 그와 이혼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바울은 아내와 이혼하지 말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남편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지만, 그 부인은 예수를 믿기를 거절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 그 아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바울은 남편이 신앙을 이유로 해서 그녀와 이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7:12). 또 반대로 아내는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그 남편은 이를 거절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원리는 마찬가지였다(7:13). 이미 믿는 성도들은 배우자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신앙을 이유로 해서 갈라질 필요는 없었다. 바울은 남편이 믿는 경우에 그로 인해 불신자인 아내가 거룩하게 될 수 있으며, 또 아내가 믿는 경우에도 그녀로 인해 불신자인 남편이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부모로 인해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7:14).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고, 이로 인해 온가족이 거룩하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불신자인 배우자 편에서 신앙을 이유로 해서 이혼을 요청하면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우 성경은 이혼한 부부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경우에라도 이혼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기를 부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자기 자녀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7:15). 혹시 잠시 신앙 문제로 인해 분쟁이 있다고 해도, 잠시 참고 기다리다 보면 그 배우자가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7:16). 바울은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그리고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고 권면하였다(7:17). 복음을 믿는 일은 개인에게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하게 가정을 깨뜨리거나 하여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필요는 없다. 각 개인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정해진 법칙은 없으며 각자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와 환경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다(7:18). 바울은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교회에게도 이와 같이 명한다고 밝히고 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환경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할례자, 즉 유대인으로 있을 때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 무할례 자, 즉이방인이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할례자, 즉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도 할례자, 즉 유대인처럼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유대인이냐? 아니면 이방인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7:19). 각 성도들은 그가 어떤 민족이든지 부름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권하고 있다(7:20). 하나님은 이미 그가 유대인지든지, 아니면 이방인이든지,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셨다. 그러므로 각 성도들은 다른 민족처럼 되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부름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하면 된다. 또한 바울은 종으로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주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이었던 사람이 자유인이 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일부러 종으로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종으로 있던 사람이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받아들이라고 권하고 있다(7:21). 바울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름을 받은 자도 주님 안에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반대로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름을 받은 자도 일부러 종이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 될 필요가 있다(7:22).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이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7:23). 그러므로 성도들은 민족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힘써야 한다(7:24).

 

* 결혼과 사역(7:25-38)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 대해서 말한다. 바울은 처녀에 대해서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으로서 처녀들에게 결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7:25). 바울은 처녀들이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은 이유를 세 가지 제시하고 있다. 1) 환난의 때가 임박했다(26-28), 2)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29-31), 3)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32-35). 첫째로 바울은 "임박한 환난"을 인해 처녀가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7:26).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은 앞으로 다가올 순교의 위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환난이 오게 되면, 결혼한 사람보다는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이 그 환난을 지내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혼을 한 사람이 이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미 이혼을 한 경우라면 다시 결혼을 하려고 아내를 찾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7:27). 그러나 총각이 장가를 가고 처녀가 시집을 간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고난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7:28).

 

또한 바울은 "때가 단축되어"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성도들이 이 세상과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살아야 된다는 바울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도들은 주님의 배림을 소망하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처럼 살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아내보다 주님을 우선으로 하고 살아가야 한다(7:29). 또한 고난과 슬픔을 당하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기쁘게 살고, 세상에서 형통한 사람들도 세상에 도취되지 말고 삼가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또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도 세상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7:30). 또한 세상의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 쓰지 못할 것처럼 살아야 한다. 성도들은 세상의 것을 얻고 그것을 나를 위해 모두 사용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성도들은 세상 너머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일시적이며 지나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울의 교훈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일시적인 세상의 것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주님을 우선으로 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에 결혼한 사람보다 헌신하기가 용이할 것이다(7:31).

 

바울은 처녀 된 성도들이 결혼으로 인해 세상 염려에 빠져 주님에 대한 헌신이 약해지고,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었다.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하고 염려하게 될 것이다(7:32). 그러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내가 어찌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그 마음이 나뉘게 될 것이다(7:33). 또한 이혼한 후에 다시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며 "몸과 영을 모두 거룩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시집을 간 사람은 세상의 일을 염려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게 될 것이다(7:34). 그러나 바울은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 자신의 말이 혼기에 찬 딸을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올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결코 그들에게 올무를 놓으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은 그들이 이치에 합당하게 행하여 단정히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7:35). 그러므로 혼기에 찬 딸을 가진 부모가 바울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 딸을 출가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바울의 말은 그들에게 올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 바울은 결코 처녀 딸을 출가시키는 일이 죄짓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7:36). 바울 당시 고린도에서는 자녀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그 부모의 권한이 매우 컸기 때문에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는 딸을 출가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1) 부모들이 굳게 결심을 한 경우. 이것은 부모가 딸의 독신의 은사를 확인하고 그 딸을 독신으로 두려고 결심한 것을 의미한다. 2) 꼭 딸을 시집 보내야 할 이유가 없는 경우. 이것은 남에게 빚을 졌거나 딸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인해 딸을 꼭 시집을 보내야 할 이유가 없는 경우를 말한다. 3) 자기 뜻대로 할 권한이 있는 경우. 이것은 부모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어서 딸의 출가 문제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경우에 부모가 그 딸을 출가시키지 않아도 역시 "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7:37). 그러므로 바울은 부뫄 "독신의 은사가 없는 처녀 딸을 출가시키는 일도 잘하는 일이지만, 독신의 은사를 가진 딸을 주님께 헌신하기 위해 그대로 두는 일이 더 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38).

 

* 재혼과 과부(7:39-40)

이제 바울은 과부들을 행해 말한다. 그는 아내가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 뜻대로 시집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경우에 대해 "주안에서만 결혼하라!"는 한 가지 단서를 붙이고 있다(7:39). 주안에서 결혼하라는 말은 예수를 믿는 형제와 결혼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동시에 재혼할 때에 주님의 뜻을 살펴서 배우자를 선택하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과부가 된 여인은 법적으로 그 남편에게 벗어났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보기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대로 지내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주님을 섬기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도 역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안다고 말한다(7:40). 이 말은 이러한 자신의 뜻이 성령의 뜻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결혼한 사람이나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이나 모두 축복해 주신다. 그러나 이혼한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대로 지내는 것이 더욱 좋다는 일에 있어서도 동의하고 있다.

 

2) 우상의 제물(8장, 10:14-11:1)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제기했던 두 번째 문제는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드렸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하는 것이었다. 헬라와 로마인들은 신전에서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때에 동물을 상징하는 일부분만 제단에서 불태우고, 나머지는 예배 자와 제사장들이 분배하였다. 경우에 따라서 예배 자는 잔치를 위해서 자기 몫의 고기를 사용하였으며, 이 잔치에 자기 친구들을 초대하였다. 이러한 잔치는 대체로 이교 신전에서 행해졌다. 또 제사장들은 자기 몫의 일부분을 시장에 내놓고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우상들에게 드린 고기를 먹지 않으면 사회적인 교제의 기회를 잃게 되고, 그의 가족들은 육류를 먹을 수 없게되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고린도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1) 기독교인이 이러한 고기를 사서 먹는 일이 합당한가? 2) 친구의 초대에 참석했을 때에 우상에게 드린 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3) 이교 사원에서 행하는 희생 제사와 잔치에 참석해서 함께 식사하는 일이 허용될 수 있는가? 이제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고 있다.

 

* 사랑으로 지식을 사용할 것(8장)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안다"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일부는 "우리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우리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지식을 주장하면서 교만해져서 이러한 지식이 없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많았다. 만일 그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했다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덕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다(8:1).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였다(8:2).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지를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식은 오히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알아주신다(8:3). 고린도 교회에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또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8:4). 그러므로 그들은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을 먹는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헬라와 로마 사람을 비롯한 이방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과 주인들을 섬기고 있었다(8:5).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아버지가 되시는 한 분 하나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만물은 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성도들도 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또 기독교인들은 오직 한 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으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8:6).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지식은 모든 성도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습관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이방 신에게 드려진 제물로 알고 먹었기 때문에 그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졌다(8:7). 바울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러한 연약한 성도들이 실족하게 된 일을 상기시키고 있다. 바울은 음식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고, 또 음식을 먹었다고 풍성해지는 것도 아니다(8:8). 그러므로 지식 있는 자들은 이러한 사소한 음식 문제로 인해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8:9). 바울은 지식을 가진 성도들이 우상의 신전에 앉아 먹는 것을 보면, 연약한 자들도 양심에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것이라고 추궁하고 있다(8:10). 이 연약한 형제들은 우상의 음식을 우상 제물로 알고 먹기 때문에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지식 있는 자의 지식이 연약한 자를 멸망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고 말 것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8:11). 그 형제들은 결국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지식과 자유를 위해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다치게 하는 일은 결국 그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8:12).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식물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연약한 형제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행동하도록 촉구하고 있었다.

 

* 사랑으로 자기 권리와 자유를 절제한 사례(9장): 바울

바울은 앞에서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를 절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일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이러한 원칙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자신이 성도들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어떻게 절제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아마도 이때에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며, 또한 사도였다. 그는 주님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전도한 장본인이었다(9:1). 그러므로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는 사도가 아닐 수 있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분명한 사도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사실을 주안에서 도장찍은 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9;2).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고 조사하는 자들을 향해 이러한 자신의 권한을 몇 가지로 변호하였다.(9:3).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비용으로 먹고 마실 권한이 있으며(9:4),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 그리고 게바와 같이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도 있다고 말한다(9:5). 이러한 권한은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복음의 일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이다(9:6). 첫째로 바울은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1) 첫째로 그는 인간의 관습에 근거해서 이러한 자신의 권한을 호소하였다. "어떤 군인이 자기 비용으로 군인 노릇을 하며, 어느 농부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으며, 어떤 목자가 양떼를 기르고 양의 것을 먹지 않겠는가?"(9:7). 세상의 관습은 일하는 사람이 자기의 일터에서 의식주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교회에서 의식주를 공급받을 권한을 가진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2) 둘째로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권한을 율법에 근거해서 호소했다(9:8). (신 25:4)에서 모세의 율법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 율법은 곡식을 발로 밟아 탈곡하는 소가 일하다가 허기가 지면 그 곡식 중 일부를 먹을 수 있도록 그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비단 소에게 해당되는 일이지만, 바울은 이것은 소보다도 인간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규정이 일하는 사람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9:9). 바울은 밭을 가는 사람이나 곡식을 탈곡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곡식을 얻을 소망을 가지고 일한다고 말한다(9:10).

 

3) 셋째로 그는 상호성의 원칙에 의해서 자신의 권리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신령한 것, 즉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육신의 것, 즉 의식주에 관한 것을 거두는 일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9:11).

 

4) 바울은 넷째로 다른 지도자의 예를 통해 자기 권한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권한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게바와 아볼로가 그들로부터 물질적인 후원을 받은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1:12, 3:4-6,22, 15:5, 16:12). 그렇다면 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해서 교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에게 이러한 권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일에 참고 절제했다. 아마도 일부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일부는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고 그가 가짜이기 때문에 물질을 받는 것을 주저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9:12).

 

5) 바울은 제사장들의 예를 들어 자기 권한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성전에 드려진 것 중에서 자기의 음식을 배정 받았다. 그리고 역시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제단에 드려진 것으로부터 자기의 먹을 것을 배정 받았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교회에서 양식을 공급받을 자격이 있었다(9;13).

 

6) 바울은 여섯째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자기의 권한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바울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을 상기시켰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눅 10:7).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복음을 통해 의식주를 공급받을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역시 이러한 권한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9:14).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권한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러한 글을 쓴 것은 결코 자기에게 물질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물질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랑스럽게 복음을 전한 일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9:15).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를 위해 부름 받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한다(9:16). 만일 바울이 스스로 자원해서 복음을 전하면 그는 이로 인해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는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9:17). 이러한 바울이 주님께 상급을 얻는 길은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 전파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9:18). 바울은 자유인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종처럼 행동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9:19). 그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9:20).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율법 아래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 율법 없는 자들처럼 행동했다(9:21). 그는 강한 자였지만 역한 자들을 얻기 위해서 약한 자처럼 행동했다. 그가 이렇게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여러 종류의 모습을 가지고 행동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9:22). 바울이 이렇게 복음 때문에 모든 일을 행한 것은 복음의 축복에 동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음의 축복은 더 많은 영혼을 추수하는 것을 의미한다(9:23). 바울은 경기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지만, 결국 상을 얻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상급을 얻기 위해서 이와 같이 달음질을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9:24). 한 분야에서 우승을 하기를 원하는 운동 선수라면 철저하게 자신을 훈련하고 절제하기 마련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하면서 경기에서 우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잠시 기쁨을 주고 썩어버리는 면류관(스테파논)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엄격하게 절제하고 철저한 훈련을 한다. 바울 당시 고린도 근방에서는 2년에 한 번씩 경기가 있었으며, 우승자에게는 소나무로 엮은 관이 주어졌다. 그러나 복음의 일꾼들이 얻기를 원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상급이다(9:25). 바울 역시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상급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그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목표도 없이 허공을 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9:26). 바울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나태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 그기 이렇게 절제하고 자신을 복종시킨 것은 자신이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유로 인해 연약한 형제에게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조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9:27).

 

* 자신이 받은 특권을 잘못 사용한 사례(10:1-13): 이스라엘

바울은 앞에서 자신의 예를 들어 성도들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할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제 바울은 반대로 무절제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의 예를 제시하여 경계로 삼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그들이 받은 많은 영적 축복으로 인해 그들의 무절제와 부도덕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많은 특권과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절제함과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한 사례를 들어 경계로 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일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특권은 다섯 가지였다. 1) 그들은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 광야를 지났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이러한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다. 2) 그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너서 애굽 군대로부터 기적 적인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10:1). 3)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에게 세례를 받았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옛 사람이 죽고(애굽),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하나님의 백성) 세례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고린 도 교회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10:2). 4) 그들은 모두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하늘 양식인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먹었다(10:3). 5) 그들은 모두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신령한 물을 마셨다. 바울은 모세가 물이 나오게 한 바위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생수를 마셨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때에 하나님은 믿음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다수를 모두 광야에서 멸망하게 만드셨다(10:5). 바울은 이러한 일이 성도들에게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건은 성도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방종한 삶을 살면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다섯 가지 악한 일들을 제시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이러한 악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즐거워하였다(10;6). 그들은 구원을 받은 후에도 이전 애굽에서 누리던 쾌락을 추구했으며, 정욕을 위해 고기를 요구하기도 했다(민11:4-34).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고기를 주셨지만,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 고기가 입에 있을 때에 그들을 치셨다(민 11:34). 그리고 징계로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예는 부도덕한 일이 허용되던 고린도 교회에 큰 교훈이 될 것은 자명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했다.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율법을 받는 40일 동안에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그 앞에서 기뻐 뛰놀고 있었다(10:7).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출 32장). 이러한 일은 우상 숭배 문제로 고민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큰 경계가 될 수 있었다. 3)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일부는 모압에서 우상의 축제에 참가했다가 모압 여인들과 간음을 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임을 당했다(민 25장).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적 부도덕에 대해 방임하고 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큰 경고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그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10:8). 4) 그들 중에 일부는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뱀을 보내 징계하셨다(민 21: 4-6).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도 그들과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고 권면하고 있다(10:9). 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하셨다(민 16:41-49). 고린도 교회 역시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10:10).

 

바울은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들이 본보기(거울)로 기록한 것은 말세에 사는 성도들에게 충고와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10:11). 그러므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러한 말씀을 경계로 삼고 넘어질까 조심해야만 한다!"(10:12).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생각에 안정의 기초를 두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그들이 당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시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어려운 일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가 시험에서 피할 수 있는 길도 함께 예비해 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성도들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10:13). 바울은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서 성도들이 자유를 가지고 방종한 삶을 살지 말고, 주의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10:14-11:1)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내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이제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권면하듯이 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권면을 한 대상은 양심을 어겨가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권면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였다.

1) 우상의 신전에서 고기를 먹는 문제(14-22).

2)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문제(25-26).

3) 집에 초대되어 고기를 먹는 경우(27-30).

 

바울의 첫 번째 충고는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는 것이었다(10:14). 이러한 충고는 양심을 어겨가면서 우상의 제물에 참여하던 사람들에게 준 충고였다.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는 성도들을 "지혜로운 자"로 간주하고 말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혜로운 자처럼 그 말을 듣고 바울의 말이 옳은 지를 판단하라고 요청한다(10:15). 바울은 양심을 어겨가며 우상의 제물을 먹던 사람들에게 억지로 권면을 하지 않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권고하였다. 바울은 먼저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성만찬을 예로 들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만찬 시에 마시는 잔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코이노니아)이며, 기독교인들이 떼는 떡은 그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10:16). 성만찬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표시하는 예식이다. 많은 성도들이 한 개의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상징한다(10:17). 이제 바울은 이러한 원칙이 육신을 따라 행한 과거의 이스라엘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말한다. 모압에서 발람의 꾀에 속아서 우상의 제물을 먹었던 사람들은 우상의 제단에 참여한 자로 간주되었다(10:18). 그러면 성경이 우상의 제물과 우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10:19). 사실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참 신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이방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며,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귀신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한다(10:20). 그러므로 주의 잔에 참여하여 주님과 한 몸이 된 사람들이 귀신의 잔에 참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주님의 만찬의 상에 참여한 사람들이 귀신의 상에 참여할 수는 없다(10:21). 만일 이렇게 하는 경우에는 우리가 주님을 진노케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주님보다 강한 자냐? 고 책망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다면 주님을 노하시게 해도 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10:22). 그러므로 양심을 어겨가면서 우상의 제물에 참여하는 일은 금지되어야 마땅했다.

 

이제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10:23).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취지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한다(10:24). 바울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해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사다가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10;25). 왜냐하면 시장에서 기독교인들이 내다 파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 일일이 따지는 행위는 결코 덕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시 24:1),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행 10:15) 성도들은 그것을 사다가 먹을 수 있었다. 또 바울은 집에 초대되어 음식을 먹는 경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불신 자 친구 의 초대를 받아서 그 집에 가는 경우에는 그 집에서 차려놓은 음식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먹으면 된다(10:26). 그러나 그 집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이것이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이라고 말하면 그것을 알려준 사람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않는 것이 좋다(10:27). 바울은 여기에서 언급한 "양심"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음식을 먹다가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먹는 일을 그친 것은 자기의 양심 때문이 아니라, 우상의 제물을 꺼리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양심은 다른 사람에 의해 판단받을 필요는 없다(10:28). 왜냐하면 누가 음식을 먹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는 경우에 그 일을 비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0:29).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자신은 거리낌이 없다해도, 주위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우리는 그 음식을 먹는 일을 중지할 수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행동함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 말한다(10:30).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해동하되,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또 하나님의 교회에 누가 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10:31).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내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10:32).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있다(11:1). 바울은 자기 목숨을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물질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입장에 서서 행동했다. 이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러한 바울의 행동을 본받아서 연약한 형제들이 실족하지 않고, 교회에 덕이 되도록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3)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자유(11:2-16, 14:33-36)

바울은 앞에서 우상의 제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방종하게 사용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으로 자유를 사랑할 것을 권고했다. 이제 바울은 (고전 11:2)부터 또 다른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에 선포된 "자유"는 예배 생활에 있어서도 문제들을 일으켰다. 바울은 예배에 있어서도 자유의 방종을 막고, 사랑으로 그 자유를 사랑할 것을 권하고 있다.

 

* 예배에 임하는 여자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11:2-16)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였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일에 바울이 전해 준 교훈들을 기억하고 준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바울이 전해준 전통, 즉 복음의 핵심 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고 칭찬하였다(11:2).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진리에 대해서 좀 더 알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서 몇 가지 실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진리를 알기를 원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11:3). 여기에서 "머리"(케팔레)라는 말은 "종속", 또는 "기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모든 남자들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머리"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모든 남자들의 머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그 지배를 받고 있다. 또 바울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용된 머리나 남자 앞에는 정관사가 없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앞서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신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하게 되었는가? 원래 헬라 세계의 여인들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으며, 그 위치가 남자에 비해 천시 받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러한 여인들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서 여인들은 존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일부 여인들은 남성들과 동등권을 주장하거나 또는 남성들을 제치고 그 권위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7:3,11,39 참조).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향해 남자가 여인의 머리라고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비록 복음이 여인의 권위를 높여주었지만, 여전히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의 위치는 견지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문제를 일으키던 여인들에게 절제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1:4). 그러나 여자들이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1:5). 고대에 여자의 머리는 흔히 정욕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당시에 지중해 동부의 많은 지역에서 여자들은 자기 머리를 가려야 했다. 만일 여자들이 자기 머리를 가리지 않을 경우에는 오늘날 심히 노출된 옷을 입는 것같이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심해서 여인들이 머리 뿐 아니라 얼굴까지 가려야 했다. 그러나 일부 상류층 여인들은 자신의 멋진 머리 스타일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러한 풍습을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일부 상류층 여인들의 취향과 일반 성도들의 성적 예절이 무시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어야만 했다. 바울은 교회에서 공식 기도나 예언 사역을 할 때에 남자들이 여자처럼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남자가 여자 복장을 입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은 그를 남자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과 같았다. 또 바울은 여자가 남자처럼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일반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는 일도 옳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하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바울은 정 여인들이 당시 풍습을 벗어나서 남자처럼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기를 원한다면, 아예 남자처럼 머리도 짧게 깎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남자처럼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면, 다른 여자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부탁한다(11:6). 바울은 남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은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표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창조의 면류관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영광스러운 존재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그러므로 아담은 어떠한 권위 아래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권위 아래에 있는 표시인 긴 머리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또한 바울은 남자에게 있어서 영광은 여자라고 말한다(11:7). 아담은 하나님께 직접 지음을 받았지만, 여자는 남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여자는 하나님께서 남자를 통해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를 창조하실 수 있는 지를 보여주신 최고의 영광스러운 존재였다(11:8). 그러나 창조 순서로 볼 때에 여인은 분명히 아담이 지음을 받은 후에 그로부터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위해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11:9).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지으신 후에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돕는 배필인 여인을 지으셨다. 우리말 성경에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동등한 배필", 또는 "적절한 배필"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이 말은 하와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아담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아담에게 적절한 배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 목적 상으로 볼 때에 여자가 남자가 독처 하는 것을 채워줄 목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배를 드릴 때에 여자들이 천사들을 인해 권세 아래에 있다는 표시를 그 머리에 두라고 말한다(11:10).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중보하는 천사들 앞에서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이러한 신앙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당시 여인들의 문화와도 일치했으며, 또 본성에도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이 여자의 권위를 낮추고 남자들이 교만해지는 근거가 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또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고 말한다(11:11).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고 말한다.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났지만, 그 이후로 모든 남자는 여인을 통해서 세상에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 없이는 여자가 있을 수 없고, 또 여자 없이는 남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이 일로 인해 여자를 무시하고 교만해져서는 안된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서로의 권위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존재이므로, 궁극적으로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11:12).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요구한다. 바울은 여자가 당시 관습을 어기고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합당하냐? 고 묻는다(11:13). 또한 바울은 당시 상황에서 남자가 여자처럼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스스로 본능적으로 수치스럽게 느껴지지 않느냐? 고 말한다(11:14). 바울은 당시 상황 속에서 여인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에게 영광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여인의 긴 머리는 머리에 쓰는 수건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11:15). 그러나 바울은 또한 이러한 일을 반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으로 당시의 관습에 호소하여 대답하고 있다. 바울은 당시까지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관습은 사회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없었다고 말한다(11:16). 그러므로 그 동안 사회나 교회에서 하지 않았던 일을 자유를 앞세워서 억지로 하는 일은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결코 덕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분명히 자유를 사랑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4) 주의 만찬과 그리스도인의 자유(11:17-34)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마 26:26-29). 이때에 주님이 드신 음식은 떡과 포도주였다. 바울이 이 글을 썼을 무렵에는 떡과 잔을 나누는 예식은 공동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켜졌는데, 이 예식을 "유카리스트"라고 불렀다. 유카리스트는 헬라어오 감사를 의미하는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에서 왔다. 한편 공동 식사는 "사랑"을 의미하는 헬라어인 "아가페"라고 불려졌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글을 썼을 무렵에는 주의 만찬은 공동 식사인 아가페와 떡과 잔을 나누는 유카리스트의 두 단계로 진행이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지키는 주의 만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된 것은 아가페의 식사가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방종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주의 만찬에 대해서 칭찬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만찬이 교회에 유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1:17). 바울은 그들이 모일 때에 그들 중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울은 이 말을 듣고 앞으로 교회 안에 편당이 있어야 그들 중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11:18-19). 이러한 분쟁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11:20). 그들은 주의 만찬을 먹을 때에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었다. 이 경우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시장해 했으며,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고 마시고 취해버렸다(11:21). 이로 인해 주의 만찬은 부자의 재력을 자랑하고, 가난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예식이 되고 말았다. 바울은 그들이 먹고 마시기를 원한다면 교회가 아니라 집에서 먹고 마셔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부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책망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은 이러한 일을 결코 동의하거나 칭찬할 수 없다고 말했다(11:22). 바울은 주의 만찬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직접 그 제자들에게 행하라고 명한 예식이었다. 주님은 체포되기 전날 밤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다. 그리고 그 떡이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 예식을 기념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주님은 식사 후에 잔을 가지시고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 예식을 행하여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11:23-25). 이와 같이 주의 만찬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예식이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예식에서 이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예식을 이기심과 분쟁의 예식으로 만들고 말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11:26). 주의 만찬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재림을 행동으로 전하는 일종의 설교와 같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1;27). 그러므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자기를 먼저 살피고 나서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라고 명하였다(11:28). 바울은 이 떡과 잔이 거룩한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였다(11:29). 바울은 이미 이러한 일로 인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다고 말한다. 주의 몸과 피를 함부로 범한 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미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었으며, 또 병이 걸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11:30).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살폈다면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11:31).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징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그릇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려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그들을 바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그들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되어 결국 하나님께 정죄를 받고 말았을 것이다(11:32).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야 한다"고 권하였다(11:33). 바울은 누구든지 시장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은 집에서 음식을 차려 먹으라고 권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함으로 거룩한 주의 만찬이 비난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바울은 주의 만찬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범한 사소한 다른 잘못들에 대해서는 그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에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11:34).

 

 

고린도전서(3)(12-16장)

 

(참고: 성경 본문을 먼저 읽고 이 글을 읽어야 효과적인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5) 영적인 은사와 그리스도인의 자유(12-14장)

바울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영적 은사의 본질과 그 은사를 공적 예배에서 사용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영적 은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에 대한 방종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 은사의 사용에 대한 방종은 고린도 교회 내에 분열과 불일치가 조장되고 이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바울은 이 주제 역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랑의 원칙에 의해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해결하고 있다. 자유가 질서를 무너뜨릴 때에는 그 자유는 사랑의 원칙에 의해서 규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먼저 은사의 본질과 목적(12장)을 언급하고, 사랑의 우월성(13장)에 대해 언급한 후에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고하고 있다(14장). 성도들은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기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

* 은사의 통일성과 다양성(12:1-31(상))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일에 대해서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2:1).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믿기 전에는 이러한 영적인 진리를 알지 못해서,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이끌려 다녔다(12:2).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는 이러한 무지함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영적 은사를 분별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원리를 이야기하였다. 우선 누구든지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하는 자는 악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하면서 대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일은 사람의 힘이 아닌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12:3).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신 분은 같다는 점을 강조한다(4-6).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은사를 주신 성령은 한 분이시다(12:4). 섬기는 일(직무)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직분을 주신 주님은 한 분이시다(12:5). 또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12:6). 또한 바울은 성령께서 서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도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 것은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12:7). 이제 바울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은사에 대해 열거하고 있다(12:8-10).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1) "지혜의 말씀", 즉 지혜와 통찰력을 담은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해 2) "지식의 말씀", 즉 연구와 탐구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전하는 은사를 주셨다(12:8).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해 3) "믿음", 즉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은사를 주셨으며,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을 통해 4)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12:9).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능력", 즉 귀신을 쫓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죽게 만드는 능력을 행할 수 있는 5) 신유의 은사를 주셨다(행 19:12, 13:11, 5:5,10). 또 어떤 이에게는 6) "예언", 즉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은사를 주셨고, 다른 이에게는 7) "거짓 영과 진리의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8) "방언", 즉 영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이러한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셨다(12:10). 성령께서는 고린도 교회 각 성도들에게 이렇게 다양한 은사들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다양한 일들은 모두 다 같은 한 분의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며, 또 은사를 주실 때에 사람의 뜻이 아닌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고 말하고 있다(12:11).

 

바울은 이러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몸과 지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그 지체는 매우 많다. 그리고 몸의 지체는 많이 있지만 그 모든 지체는 모두 한 몸이다. 그리스도와 성도들 역시 이와 같다(12;12).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민족적인 배경), 또는 종이나 자유 자(신분적인 배경)을 막론하고 모두 다 한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모두 한 성령을 통해 한 몸이 되었으며, 모두 한 성령을 마셨다(12;13). 몸에는 지체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지체가 존재한다(12;14).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한 몸에 소속되어 있다. 만일 발이 '나는 손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 붙지 않았다'고 말해도 실제로 발이 몸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12:15).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 붙어있지 않다'고 말해도 귀가 실제로 몸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12:16). 또한 이러한 지체는 각자가 몸을 위해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다. 만일 온 몸이 눈으로 되어 있다면 우리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될 것이며, 온 몸이 귀로 되어있다면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말 것이다(12:17). 그러므로 하나님은 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 가지 지체들을 몸에 만들어두셨다(12:18). 모두 가 다 같은 지체가 되려고 하면 몸은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12;19). 그러므로 하나님은 몸은 하나를 주셨지만, 각자 역할이 다른 많은 지체들을 그 몸에 붙여주셨다(12:20). 그러므로 각 지체는 서로 서로 멸시하지 말고, 각 지체를 인정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그리고 머리가 발에게 '너는 쓸데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12:21). 각 지체는 같은 몸에 속했기 때문에 그 영광을 함께 나눈다. 우리는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지체를 더 귀한 것으로 입혀주며, 또 아름답지 못한 지체에게 더 아름다운 것을 공급한다(12:23). 이는 존귀히 여김을 받거나 아름다운 지체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몸을 골고루 평등하게 하시며,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해주신다(12:24).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몸 가운데에서 지체끼리 서로 분쟁하지 않게 하시고, 여러 지체가 서로 돌아보도록 만드셨다(12:25). 또한 각 지체는 영광 뿐 아니라 고통도 함께 나눈다. 만일 지체 중에서 하나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게되면 모든 지체들도 함께 즐거워한다(12:26).

 

이제 바울은 이러한 몸과 지체의 비유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적용한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한다(12:27). 바울은 하나님께서 몸인 교회를 위해서 각 지체 역할을 다음과 같은 직분들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1) 사도(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 자들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역할을 함), 2) 선지자(예언이나 하나님의 말씀 전함), 3) 교사(가르침), 4) 능력, 5) 병 고치는 은사, 6) 서로 돕는 것, 7) 다스리는 것, 8) 각종 방언 하는 것. 바울이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교사를 앞세운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극적인 영적 은사들을 강조하고 이러한 은사들을 경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특성상 이러한 은사들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성도들이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12:28).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각각 다른 은사와 직분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모든 성도가 다 사도나 선지자, 또는 교사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성도가 다 능력 행하는 자나, 병 고치는 자나, 방언을 하거나 통역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12:29-30).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따랐던 방언이나 능력을 행하는 은사들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하고 있다(12:31(상)).

 

* 모든 은사보다 우월한 사랑의 은사(12:31(하))-13:13)

 

"사랑의 우월성"(12:31(하)-13:3)

이제 바울은 가장 좋은 은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12:31(하)).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영적인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그 은사도 개인마다 다르다. 그러나 사랑을 비롯한 성령의 열매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다 맺을 수 있다. 특히 사랑의 열매는 각 개인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영적 은사를 받고 서로 분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의 열매로 이 모든 은사를 하나가 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던 영적 은사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들이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1) 방언;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13:1). 훌륭한 웅변과 방언은 귀한 것이지만 사랑으로 사용되지 못하면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것은 오히려 분열과 다툼만 일으킬 분이다. 2) 예언: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예언은 특별한 영적 비밀과 지식을 받고 이를 전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은사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 3) 믿음: 바울은 "내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주님은 믿음이 있는 자는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13:2). 4) 구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드려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구제의 은사를 받았다. 이러한 구제의 은사는 매우 귀중한 은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드려 이웃을 구제하고 이웃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고 말한다(13:3).

 

"사랑의 특성"(13:4-7)

바울은 1인칭으로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사랑을 의인화하여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 14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성품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성품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역시 필요한 것들이다. 1) 사랑은 오래 참는다(마크로뒤메이; suffer long).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형제들의 결점에 대해 오래 참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있었다(6:8). 그러나 사랑의 길은 부당한 일을 당할 때에도 보복하지 않고 참는 것이다. 2) 사랑은 온유하다(크레스튜에타이; kind).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11:21-22). 그들에게는 온유한 사랑의 태도가 필요했다. 3) 사랑은 질투(젤로이; jealous)하지 않는다. 서로 질투하며 다투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사랑의 은사가 필요했다(1:10, 3:3,21, 12:14-25). 4) 사랑은 자랑(펠페류오마이; boast)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열매가 필요했다. 5) 사랑은 교만(휘시오오; puffed up)하지 않는다(13:4).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자신을 남보다 높이지 말고 형제를 자신보다 더 높이는 겸손의 정신이 필요했다. 5) 사랑은 무례히 행동(아스케모네오; act unbecomingly)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에는 각종 무례한 행동들이 행해지고 있었다(11:2-6, 11:17-22, 14:26-33). 사랑은 성도로서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거나, 부끄럽고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도로서 합당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6)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서로 자기 입장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었다(8:9, 10:23-24). 그들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열매가 필요했다. 7) 사랑은 성내지(파록쉬노; provoke) 않는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형제들을 향해 분노하며 감정이 격해있었다(6:1-11).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감정을 절제하는 열매가 필요했다. 8) 사랑은 악한 일을 생각지(로기조마이; reckon) 않는다. 고린도 교회에는 악한 것을 생각게 하는 요인들이널리 퍼져 있었다(6:8, 7:5, 8:11). 그러나 사랑은 선한 일을 생각하고 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13:5). 9) 사랑은 의롭지 못한 일(아디키아: unjustice)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는 근친상간과 같은 의롭지 않은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다(5:1-2,8). 그러나 사랑은 결코 불의한 일을 즐기지 않는다. 10)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악이나 불의한 일을 멸시하고 진실과 진리를 사랑한다(13:6). 11)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스테고; 덮어주고, 참고 견딤, 8:13), 12) 모든 것을 믿어주며(피스튜오; believe, 15:11), 13) 모든 것을 바라며(엘피조; hope, 9:10,23), 4) 모든 것을 견딘다(휘포메데이; 고난 중에서 굳게 서 있음, 9:19-22)(13;7).

 

"사랑의 영원성"(13:8-13)

바울은 사랑의 우월성과 특성을 언급한 후에 이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핍토; fall) 않는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으며 영원한 것이다. 영적 은사들은 교회의 성숙과 필요를 위해 일시적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필요가 채워지면 거두어 간다.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지식도 그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13:8). 우리의 지식이나 예언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예언한다고 해도 지극히 부분 적인 것을 예언할 뿐이다. 이러한 일들은 불완전한 시대에 주어진 일시적인 은사들이었다(13:9). 그러므로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렇게 부분적으로 하던 일들은 중단이 될 것이다(13:10). 주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게 되면 이러한 영적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으며, 판단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성인이 되면 어린 아이가 하는 일들을 버렸다."고 말한다(13:11). 교회나 성도들 역시 어린아이와 같을 때에 어린 아이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이 성숙해지고 완전해지면 이러한 유치한 일들을 떠나게 되는 법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 말한다. 당시에 사용하던 거울은 청동 거울이었으며 지금처럼 밝히 비취는 것이 아니었다. 성도들이 지금은 하나님을 대할 때에 마치 청동 거울에 비췬 것처럼 희미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바울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내가 온전히 알 것이라"고 고백한다(13:12). 지금 우리가 가진 영적 지식은 부분적이며 희미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되면 이러한 부분적인 것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과는 달리 항상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바울은 앞에서 믿음과 소망이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13:7).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믿음과 소망, 그리고 전체로서의 사랑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특히 바울은 이러한 세 가지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한다(13:13).

 

*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할 것(14:1-25)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영적인 은사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주신 목적을 망각하고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은사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12장). 그러므로 바울은 13장을 통해서 이러한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사랑의 성령의 열매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야만 전체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은사의 남용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방언의 은사였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 은사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사를 무질서하게 사용함으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방언의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린도 교회에서 경시되고 있던 한 가지 은사, 즉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 언급한 바울은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그는 (12:31)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길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말한다. 우리말 성경에 "...을 따라 행하라!"고 번역된 말(디오코)은 "적을 격퇴하다, 추격하다, 쫓아내다. 갈망하다"와 같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에서는 "갈망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바울은 사랑을 간절하게 갈망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통제를 받지 못하는 은사를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신령한 것, 즉 영적인 은사를 간절히 구하되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하고 있다(14: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상대적으로 경시하던 예언의 은사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왜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힘써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 이는 그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며, 그는 영을 통해서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다(14:2). 그러나 예언을 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여 교회를 세워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위로를 해준다(14:3).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우는 반면,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워준다(14:4).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방언을 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보다 더 그들이 예언을 하기를 원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 방언을 통영하지 못한다면, 예언하는 자보다 못하다고 말한다(14:5).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 바울은 첫째로 자신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바울은 만일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 예언이나 가르침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14:6). 만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하루 종일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r 말을 듣고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바울은 둘째로 피리나 하프를 예를 들고 있다. 피리나 하프는 자신이 가진 고유한 소리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그것이 어떤 악기인지 피리인지 구별할 수 있다. 만일 피리와 하프가 자기의 고유한 소리를 내지 않는 다면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그것이 어떤 악기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14:7).

 

3) 바울은 세 번째로 나팔을 예를 들고 있다. 주님 당시에 사람들은 나팔 소리로 전쟁에서 의사를 전달했다. 각 부대는 나팔 소리에 맞추어 적을 공격하거나 후퇴했다. 그러나 만일 나팔이 그 소리를 분명하게 내지 못한다면 병사들은 그 신호를 구별할 수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14:8). 이와 같이 고린도 성도들이 혀를 가지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말은 마치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14:9).

 

바울은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이 있으며, 이 모든 소리는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4:10).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에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그 소리를 발한 사람에게 야만인이 될 것이며, 또한 그 말을 한 사람도 우리에게 야만인이 될 것이다(14:11). 그러므로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보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풍성하게 되기를 구하라 말하고 있다(14:12). 그러면 이미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들은 통역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14:13).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영으로 기도를 하되, 그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14:14).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자신이 영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그는 영으로 찬송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찬송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4:15). 이것은 방언과 통역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한 사람이 영으로 성도들을 축복을 할 경우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영으로 하는 축복 기도를 듣고 나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게 될 것이다(14;16). 이 경우 축복을 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훌륭하게 드렸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축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14:17).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누구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풍성하게 받은 일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14:18). 그는 결코 방언의 은사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14:19).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지혜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부탁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기심이나 분쟁과 같은 일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같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장성한 사람처럼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4:20).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사 28:11-12)을 인용하고 있다. "내가 다른 방언을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이 예언은 끝까지 거역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같은 동족인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이방인의 입을 통해 그들에게 예언을 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그들은 그 예언을 거부하고 듣지 않게 될 것이다(14:21). 바울은 이러한 예언을 인용하면서 방언은 거역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말로 선포되는 예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14:22). 만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서 방언으로 말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온 경우에 이러한 광경을 보고 그들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게 될 것이다(14:23). 그러나 만일 모든 성도들이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한 경우에는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듣고, 또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14:24). 그리고 또한 그들이 마음이 간직했던 은밀한 일들이 드러나게 되어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교회 안에 계신다고 전파하게 될 것이다(14:25).

 

그러면 이러한 원리를 실제로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각자 맡은 대로 시편으로 찬송을 드리거나, 가르치고, 계시를 전하며, 방언을 하거나 이를 통역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일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고 명하고 있다(14:26). 바울은 만일 누가 방언을 하려 하면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말을 하고, 이에 대해서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하였다(14:27).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을 경우에는 교회에서는 방언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자신과 하나님을 향해서만 은밀하게 방언을 하는 것이 옳다(14:28). 그러면 예언을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은 예언을 할 경우에는 두 세 사람이 말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해서 분별하라고 하였다(14:29). 바울은 한 사람이 예언을 하는 도중에 옆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말을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14:30).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두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격려를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씩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14:31). 그러나 이 경우에 예언을 하는 사람들의 영은 다른 예언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14:32).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한 분이 아니라,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14:33).

 

바울은 모든 성도들의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다. 당시에 다른 교회들은 모두 교회에서 여자들의 나서서 주관하는 일을 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역시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을 따르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교훈을 보면 당시 고린도 교회의 여자 성도들 중에 몇 사람이 앞에 나서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여인들에게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을 금해야만 했다. 바울은 여인들이 앞에 나서서 말함으로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고, 교회와 남편에게 조용히 순종하도록 부탁하였다(14:34). 바울은 여자 성도들이 만일 교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과 함께 있는 때에 개인적으로 물으라고 지시하였다. 아마도 당시의 헬라 사회의 관습은 여인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편과 이야기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이것은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14:35). 이는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에 우리나라도 역시 공개 석상에서 남자와 여자가 수군거리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서 난 것처럼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에게만 임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14:36). 그들 중에는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를 받은 것처럼 다른 교회의 관습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다른 교회들과 같이 모든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자신에 대한 반대자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향해 엄중하게 경고한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을 선지자나, 또는 신령한 자로 생각한다면, 그는 바울이 보낸 편지를 주님의 명령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14:37). 바울은 누구든지 바울이 보낸 편지가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신령한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자가 틀림없다고 말한다(14:38). 왜냐하면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영적 은사에 대해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을 말하는 일을 금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예언은 성도들이 귀중하게 여겨야 할 은사이다. 그러나 무질서한 것을 바로 잡겠다고 방언을 무조건 금하는 일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방언 역시 성령께서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하되 적당하게 하고, 모든 것을 하되 질서를 따라 행하라고 지시하였다(14:40).

 

 

6) 부활에 대한 가르침(15장)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소식은 곧바울에게 보고되었다(15:12). 헬라인들은 몸을 악한 것으로 취급하고 영만 거룩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헬라주의의 편견에 치우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인 육체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올바른 부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

 

* 육체 부활의 확실성(15:1-34)

 

"역사적 논증"(15:1-11)

바울은 고린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알게 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바울이 그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일부는 부활을 부인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 복음을 "받았으며", "그 안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그 복음에 굳게 서 있었다(15:1). 바울은 만일 그들이 "자신이 전한 말을 굳게 붙잡고, 헛되게 믿지 않았다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15:2). 바울은 이 복음을 자신이 먼저 받았으며, 자신이 받은 그 복음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했다고 말한다. 바울이 받고 또 전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이 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15:3),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소식이었다(15:4). 십자가와 부활은 바울이 받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복음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바울은 이제 주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먼저 게바에게 자신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후에 다시 12 제자에게도 자신을 보여주셨다(15:5). 그리고 나서 동시에 500여명의 형제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바울 당시 주님의 모습을 본 사람들 중에 일부는 죽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태반이나 살아 있었다(15:6). 그리고 주님은 그 후에도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셨으며, 그 후에는 모든 사도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셨다(15:7).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에게도 자신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러한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만삭이 되지 못해서 모태에서 나온 자와 같다고 말한다(15:8).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바울은 부름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사도로서의 영광을 가질 자격이 전혀 없는 자라고 부른다(15:9).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현재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바울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복음을 위해 더 많이 수고를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복음을 위해 수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15:10).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똑같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똑같이 복음, 즉 주님의 죽으심(십자가)과 부활을 전파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듣고 이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15;11).

 

"논리적 논증"(15:12-19)

이제 바울은 죽은 자의 육체가 부활할 수 없다고 하는 몇 사람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되었는데, 어찌하여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 고 책망하였다(15:12).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15:13). 1)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도 헛것이 되고,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15:14). 2) 그리고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한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15:15). 3)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사시지 않았을 것이며(15:16),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진 믿음이 헛것이 되고,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15:17). 4)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죽은 성도들도 멸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15:18). 5)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교도들의 생각이 옳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내세를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15:19).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함으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지대한 결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학적 논증"(15:20-28)

바울은 앞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인정할 때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15:20).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앞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도 사람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15:21).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게된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게 될 것이다(15:22). 그러나 부활은 각기 자기 순서를 따라 있게 될 것이다. 첫째로 첫 열매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며,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15:23). 그 다음은 마지막 때인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자와 권위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하나님께 넘기실 때이다(15:24).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온 세상을 통치하시게 될 것이며(15:25), 맨 마지막에 사망을 멸망시킬 것이다(15:26). 여기에서 사망을 멸망시킨다는 말은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의 주장은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시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만물에 속하지 않고 만물 위에 계시게 될 것이다(15:27).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되실 것이다(15:28). 이와 같이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사망이 멸망하며 영생의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

 

"경험적 논증"(15:29-34)

바울은 앞에서 부활의 타당성을 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이제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인들의 관습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자들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 고 묻는다. 바울은 실제로 죽는 자들이 다시 살지 않는다면 왜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겠느냐?"고 질문하고 있다(15:29). 사람들은 이 구절로 인해 "죽은 사람을 위해 세례 받는 일이 유용한가?" 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해왔다.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은 무려 30가지가 넘는다. 이 구절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휘페르 톤 네크론)라고 번역된 말이다. 우리 말 성경에 "....를 위하여"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 "휘페르"라고 하는 전치사이다. 이 전치사는 "....위에"(over), "....를 넘어서"(beyond)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원래 "죽은 사람 위에서", 또는 "죽은 사람을 넘어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석 가들 중 일부는 이 구절을 "죽은 사람 위에서"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죽은 성도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베푼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는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죽은 성도들의 무덤 위에서 새 신자들의 세례를 행한 적도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과 하나로 연합되었다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나중에 다시 살아서 살아있는 성도들과 연합하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휘페르"라는 전치사를 다른 뜻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휘페르"라는 전치사는 "over"나 "beyond" 외에도, "....를 대신해서"(on behalf), "....를 위해서"(for the sake of), "....로 인해서", 또는 "....에 관하여"(concerning)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 말은 1) "죽은 자를 위해서", 2) "죽은 자를 대신해서, 3) "죽은 자로 인해서", 4) "죽은 자에 관해서" 라고 번역할 수 있다. 4)번의 해석은 문맥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1), 2), 3)번의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이 중에서 1)번과(죽은 자를 위해서) 2)번의 번역(죽은 자를 대신해서)은 그 의미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하나로 취급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 일이 가능하며, 그것은 효과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는 일을 지지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 방법은 해결해야 할 난제를 안게된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 해결하고 있다. 첫째로 고린도에는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해서"(또는 죽은 자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종교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교회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 헬라 종교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사람들이 행한 일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따라 영혼불멸을 믿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해서(죽은 자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이방 종교의 일을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린도 사람들이 주변에서 행하고 있던 종교 관습을 예로 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둘째로 또 다른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가 실제로 주를 위해 죽은(순교한) 성도들을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박해로 주를 위해서 순교할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고린도 교회가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베풀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세례식은 주안에서 순교한 성도들이 앞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러한 관습을 예로 들어서 부활을 증거하는 사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로 다른 학자들은 3)번 해석을 지지하기도 한다. 저명한 구약 학자인 글리아슨 아처는 이 구절을 "죽은 자들로 인해서"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경건한 그리스도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에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살아남은 유족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고인의 영향을 받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죽은 자로 인해서"(즉 "죽은 자의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휘페르"라는 전치사를 이렇게 해석하면, 이 구절은 성경 전체의 사상과 아무 충돌을 일으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구절은 "휘페르"라는 전치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매우 다양해질 수 있다. 우리 말 성경의 경우 1)번 견해를 따라서 이 구절을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받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중에서 어느 해석을 지지할 것인지는 각자의 견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신중하게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성경 전체의 내용과 아무 충돌이 없이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굳이 성경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해석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과,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게 하신 성령은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관습을 예로 들은 바울은 이번에는 자신의 예를 들어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왜 우리가 항상 위험을 무릅쓰겠느냐?"고 질문한다(15:30).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다(15:31). 바울은 실제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여러 번 당했다. 그리고 날마다 부활 후에 주님께 상급을 얻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며 살았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생명을 취하려고 맹수와 같이 덤벼드는 원수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가는 것마다 유대인들과 그 지방의 반대 세력에 의해 이러한 위협을 받곤 했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고난을 다른 사람들처럼 육신 적인 이유로 인해 받았다면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 것은 그가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었다면 바울은 오늘 살다 내일 죽을 것이므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려고 했을 것이다(15:32).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교훈에 속지 말라고 말한다. 바울은 타락한 자들은 선한 행실을 악하게 만든다고 말한다(15:33).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거짓 교사에게 속아서 악을 좆아서는 안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깨어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기에 부활을 부인하고, 방탕한 생활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알게 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할 필요를 느꼈다(15:34).

 

* 특정 문제에 대한 답변들(15:35-58)

앞에서(15:1-34) 바울은 왜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믿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역사적, 논리적, 신학적, 그리고 경험적인 논증을 통해 답변을 했다. 이제 바울은 계속해서(35-58) 또 다른 두 가지 질문, 즉 "어떻게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며, 부활한 육체는 어떤 종류의 몸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답변"(15:35-49)

바울은 사람들 중에 일부 사람이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할 것이라고 말한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일으킴을 받는가?", "부활 할 때에는 어떤 종류의 몸으로 오는가?"(15:35). 바울은 부활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 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을 비유로 들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생각하기에 부활은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이 죽지 않으면 싹이 되어 살아나지 못한다고 말한다(15:36). 우리가 땅에 뿌린 씨앗은 그대로 있으면 싹을 틔지 못한다. 그것은 물에 불려지고 사라질 때에 그 안에서 새로운 싹이 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후에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과 같다. 또 사람들은 씨를 심을 때에 벼나 새싹을 심지 않고 밀이나 씨앗 알갱이를 심는다(15:37). 그러면 하나님께서 각 씨앗으로부터 싹을 트게 하여 각각 그 씨앗에 적합한 다른 형체를 주신다(15:38). 입으로 불면 날아가는 마른 작은 씨앗이 각각 다른 형태의 식물로 변하는 일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육신이 죽어 땅에 묻힌 새로운 형체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육체는 모두 다 그 모양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육체를 각각 다르게 만들어 주셨다(15:39). 이러한 것들은 땅에 사는 생물들의 육체이며, 각각 그 영광이 서로 다르다. 또 하나님은 땅에만 아니라 하늘에도 여러 가지 형체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들도 각각 그 영광이 다르다(15:40). 하늘에 속한 형체들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데,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과 별들의 영광이 모두 다르다(15:41). 바울은 부활의 원리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땅에 뿌린 씨앗을 썩게 하여 그로부터 새싹이 나게 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썩어질 육체를 통해서 새로운 부활의 형체를 만들어 주실 것이다(15:42). 하나님은 영광스럽지 못한 육체를 통해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게 하실 것이며, 연약한 육체를 통해 강한 몸으로 다시 살게 하시고(15:43), 육신의 몸을 통해서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살게 하실 것이다. 지상의 몸은 타락한 것이며 시간의 제한을 받고 불완전하며 연약하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몸은 영원하며 완전하고 강할 것이다. 바울은 자연의 몸이 있는 것처럼 신령한 몸도 있다고 말한다(15:44). 이 두 종류의 몸은 씨와 그 씨로부터 자라난 식물처럼 서로 연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몸은 영광과 속성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 바울은 세상의 몸과 부활할 몸을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첫 사람인 아담을 흙으로 만든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그가 "산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15:45).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만드신 후에, 거룩한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15:46).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며 흙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둘째 사람인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하늘로부터 오셨다(15:47). 흙에 속한 아담은 흙에 속한 모든 인류의 예표이며,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는 장차 오게될 거룩한 몸의 예표가 되신다(15:48). 바울은 우리가 현재에 흙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앞으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도 입게될 것이라고 말한다(15:49).

 

"살아 있는 자들의 영광에 대한 답변"(15:50-58)

이제 바울은 두 번째 질문, 즉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성도들이 어떻게 부활하게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에 입고 있는 썩어질 육신으로는 썩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15:50). 이제 바울은 숨겨진 부활의 비밀에 대해서 밝히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라(죽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을 불 때에 갑자기 순식간에 모두 변화될 것이라고 말한다(15:51). 이 나팔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나팔소리이다. 바울은 주님의 오심을 나타내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한다(15:52). 바울은 그때에 썩어질 몸이 썩지 않는 몸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는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5:53). 바울은 이와 같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는 몸을 입게 될 때에는 "사망이 승리에게 삼키움을 받을 것이라"(사 25:8, 호 13:14 참조)고 기록된 성경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한다(15:54). 바울은 이 말을 하다가 승리에 감정이 격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15:56) 사망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창 3:17-19). 모든 인류는 아담을 따라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이로 인해 사망은 온 인류를 지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은 이러한 사망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말았다. 이제 사망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정죄의 화살을 쏘아대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던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쏘아댈 화살과 부를 승리의 노래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망은 아담과 인류에 대해 승리했으나, 그리스도로 인해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15:57)."

 

바울은 이와 같이 부활의 비밀에 대해 말한 후에 실제적인 교훈으로 그 끝을 맺고 있다. 바울은 부활이 이와 같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부활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항상 그리고 더욱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우리에게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주안에서 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15:58). 주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수고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며, 마지막에 주님으로부터 그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더욱 더 많이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부조에 대한 가르침(16:1-4)

바울은 그 동안 교리 적인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했다. 이제 그는 신앙을 실천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다룬 실천 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전도한 갈라디아(데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등) 지방의 교회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하도록 요구했다. 이제 바울은 똑같은 요구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요청하고 있다(16:1). 바울은 매주일 첫 날에 각 성도들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을 해서 자신이 그들을 찾아갔을 때에 따로 헌금하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16:2).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그 헌금을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에게 편지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가지고 가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16:3). 바울은 만일 자신도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합당할 경우에, 그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말한다(16:4).

 

* 장래의 방문 계획을 알림(16:5-12)

바울은 헌금 문제에 대해 언급한 후에 이와 관련해서 자신의 여행 계획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북쪽에 있었던 마게도니아(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로 전도 여행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곳을 거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것이라고 말한다(16:5). 바울은 어쩌면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겨울을 보낼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겨울에는 바다 여행을 하는 일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곳에서 겨울을 지난 후에 고린도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음 장소로 가기로 계획하고 있었다(16:6). 바울은 고린도에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얼마 동안 머물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는 바울이 그 곳에 머물면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7). 그러나 바울은 오순절이 올 때까지는 에베소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다(16:8). 그 이유는 수많은 대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크고 효과적인 문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16:9). 바울은 대적들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그 곳에 남아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바울은 자신에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자기 대신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가 그들에게 이르면, 그가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조심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 역시 "자신과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16:10). 그러므로 바울은 누구든지 디모데를 멸시하지 말고, 그가 사역을 마친 후에 평안히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 형제들과 함께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하였다(16:11). 바울은 아볼로에게도 형제들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도록 여러 번 권했다. 그러나 아볼로는 지금 당장에는 그 곳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닿으면 아볼로 역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11:12).

 

* 결론(16:13-24)

바울은 헌금과 여행 계획에 대해서 밝힌 후에 계속해서 몇 가지 강력한 권면을 하면서 서신을 결론짓고 있다.

 

* 바른 행위에 대한 권면과 칭찬(16:13-18)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부탁하고 있다(16:13). 1)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영적으로 각성하여 부지런히 주의 일을 힘쓰라는 말이다. 그리고 2)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굳게 서 있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유약하게 행하지 않고, 3) 남자답게 강건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말한다(16:14).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개인 적인 행동을 해서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도록 부탁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 도 교인들에게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가야는 로마령으로 헬라의 중부와 남부에까지 미쳤으며, 그 수도는 고린도였다. 스데비나 집은 바울이 이 곳에서 전도해서 얻은 첫 열매였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 자원해서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다. 아마도 그는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했을 것이다(16:15).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은 자들과 함께 일하고,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권하고 있다(16:16). 고린도 교회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그리고 아가이고를 바울에게 파송했다. 바울은 그들의 방문을 통해서 여러 가지 고린도 교회의 사정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바울에게 걱정을 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바울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들은 바울을 만나서 바울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었던 것이다(16:7). 바울은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이러한 고백을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의 수고를 알아 주라!"고 부탁하고 있다(16:18).

 

* 문안, 기원 및 축복(16:18-24)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다. 1) 첫째로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이 그들에게 문안을 한다고 말한다. 아시아의 교회들은 아마도 (계 2-3장)에 언급된 교회들을 말할 것이다. 2) 둘째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있다고 전한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장막 제조업자였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살았으며 그와 함께 에베소로 갔다. 그들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바울의 사역을 도왔으며,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기도 했다(롬 16:3-5). 3) 셋째로 바울은 모든 형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문안하고 있다고 전한다(16:19).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형제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에베소로 온 형제들이거나, 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모인 성도들, 아니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바울은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부탁하고 있다(16:20). 거룩한 입맞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과 용서, 그리고 일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거룩한 입맞춤은 주의 만찬이 시작할 때에 행해졌다. 이것은 성도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식은 불신자의 비난과 성적으로 남용될 것이 우려되어 2세기 후반에 금지되었다. 그리고 3세기에 와서는 이성간의 입맞춤도 금지되었으며, 4세기에 와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입맞춤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맞춤은 성도간의 사랑이 공개적으로 표현이 되었던 바울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바울은 그 동안 다른 사람을 통해서 대신 서신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 와서 바울은 친필로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16:21). 바울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그는 "주께서 임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16:22). 이 말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라나타"인데. 이 말이 아람어로 "주께서 임하신다"고 옮겨진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16:23). 그리고 이와 함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16:24).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들을 향한 "영적 지도자의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한다.

 

 

Ⅲ. 요약 및 결론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사역을했다. 그는 그곳에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형성해 놓았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불의한 행위들과 악습에 관해 보고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회중들은 네 개의 당파로 분열되었다. 그들 중에 하나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으로 인해 생겼다. 이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근친상간, 법률상의 시비, 성적인 부도덕, 결혼과 독신생활에 대한 악용, 우상의 제물,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친교의 식사, 주의 만찬의 준수, 회중의 예배 생활에서의 성령의 은사들의 사용, 몸의 부활에 대한 부인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게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메시지에 비추어 이런 문제들을 사랑과 단호한 자세로 취급했다. 그는 성도들이 한 몸이며, 서로 돕고 섬기는 몸의 지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교회의 공동생활을 이해하도록 설명했다. 그는 거짓 교사들이 자신의 사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분쟁을 일으킨 사람들을 공격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심각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다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네 통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동료 사역자들을 통해서 그 편지를 고린도에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직접 그 교회에 방문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마침내 그가 염려했던 대부분의 상황들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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