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작성법 요약


1 강 설교 작성방법

 

설교 작성방법

 

설교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 설교에 신학이 있어야 한다

 

1) 체험적인 신학

2) 윤리적인 내용

3) 복음적인 내용

      

예제)

본문: 골로새서 1:19-20

제목: 주님이 이루신 평화

논지: 주님이 이루신 평화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킨다.

 

1. 주님의 십자가 지심은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2.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하기 위함이다.

 

3. 서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을 이루어가기 위함이다.

 

4.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완성해 가기 위함이다.

 

2 강 논지(한 문장으로 말하기)

논지(한 문장으로 말하기)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혼과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인가! 설교자들은 감동적이고 영적인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며 항상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학 강의 들으러 온 목사님들에게 언제나 요구하는 게 있다.

 

"지난주에 한 설교를 한 문장으로 말해 보시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물론 별안간 들은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주고 기다려도 준비가 안된 이는 그냥 우물우물하고 있을 뿐이다. 설교한 사람이 모르는데 교인들이 알 리가 있는가?

 

기껏 말한다는 게 이런 식이다. "'사랑에 관해서' 했습니다."

"'전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외쳤습니다."

"...에 관해서"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용도 거기 맞추어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교 전체는 확실한 통일성을 지닌다. 문장이 되지 않으면 내용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예제1)

본문: 왕상 17

제목: 공급하시는 하나님

논지: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필요로

하는 모든것을 공급하신다.

 

1.엘리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왕에게 심판을 선포했고 그리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포도주를 공급받았다.

 

2.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엘리아에게 마지막 남은 양식을 공급하고 축복을 받았다.

 

3.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상상 하는것을 초월하여 공급하신다.

       

예제2)

 

제목: 나와 하나다

논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것이요.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와 하나되는 것을 의미한다.

 

1. 예수는 마지막을 우리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다.

 

2. 예수의 살과 피로 우리들은 예수와 하나가 된다.

 

3. 예수를 먹고 마신 사람들은 예수와 같은 삶을 살수있다.

 

3 강 제목과 논지

 

제목과 논지

 

많은 경우에 보면 제목과 논지가 전혀 연관되지 않는 것을 많이 본다. 제목과 논지, 요지, 그리고 전체 내용은 서로가 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확실하게 마음에 남는 설교가 된다.

이번에는 제목과 논지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연습을 해 보자.

 

제목과 논지가 논리 있게 연관되지 않으면 기억하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제목은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가"이다.

논지는 이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제목과 논지는 바늘과 실처럼 연결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란 설교 제목이 있다 치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한 문장으로 쓰면 그것이 논지이다. 그래서 전체가 제목대로 통일된다제목은 언제나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제목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앞의 제목에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피"가 주는 유익을 설명할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논지도 여기 맞추어서 작성이 되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제목에 내포된 약속을 잘 이행할 것이다.

한편 제목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은 어떤 질문을 일으키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가?" 또는 "그리스도의 피의 유익이 무엇인가?"등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해 보자. 그러면 분명한 논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목과 논지를 언제나 확실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목에서 곧 논지가 떠오르고 결국 전체 내용이 다 기억될 것이다. 대지들은 논지를 좀 더 자세히 진행시켜가며 말한 내용이다. 대지 작성법은 뒤로 미루기로 하자.

사실상 제목을 잡으면 설교는 작성은 이미 반쯤 한 것이 된다. 그만큼 제목 선정도 어렵다. 무엇을 말할지가 분명해야 한다.

 

제목과 논지가 내용상 다르면 청중의 혼란은 커진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을 잡고 나서 논지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자"는 식으로 해보자. 서로 연관이 잘 되는 것 같지만 바른 논리 진행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의지할 것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제목은 잘못되었다.

이 논지에는 오히려 "의지할 것"이란 제목이 어울린다.

그러면 "의지할 것에 대해서" 말하겠다는 약속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의지해야 할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자"는 식의 논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복잡하다고 짜증내지 말고 훈련해 보자.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란 제목에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표다"가 훨씬 연관되고 기억되는 논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항상 논리는 자연스런 진행을 따라야 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절대로 기억이 되지 않는다. 내용도 잘 전개되지 않는다.

 

제목을 문장형으로 쓰는 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미스바로 가자."

이런 식의 문장형 제목은 청중들의 흥미를 잃게 만든다. 이미 내용을 다 들은 셈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장형의 제목은 피해야 할 것이다.

제목은 여운을 많이 남기면서 호감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청중이 기대하면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또한 설교를 듣고 나면

그 제목에 이해가 한 문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확실하게 기억되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설교 자체가 통일성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을 것이다.

      

예제1)

 

1. 하나님의 위엄 있는 음성은 심판을 경고하시며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로 돌아가는 자들에게는 자비를나타내신다. 우리는 폭포의 위력을 볼 때 느끼는 강한 경외감으로 그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가 말씀하시는 진리는 우리가 판단하거나 고칠 내용이 아니다. 듣고 받고 이해하고 경배해야 한다.

 

주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제목: 말씀 앞

논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순종해야 한다.

 

 

예제2)

2.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제: 염려대신 감사로 기도하는 방법

제목: 감사하며 아뢰라

논지: 감사하며 아뢴다면 하나님의 평강속에 이루리라

 

 

예제3)

성경: 14:22-25

제목: 아름다운 손

논지: 이 세상을 좋은 환경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손을 가진 사람들이다.

 

1. 누가 만지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2.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 아름다운 손을 가졌다.

 

3. 아름다운 손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다.

 

 

4 강 설교와 목적

 

설교와 목적

설교를 할 때마다 목적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 설교를 오래 하다보면 매 설교마다 어떤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지에 별 관심이 없어지게 된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말씀 전한다고 생각할뿐이다. 그래서 설교하면서 청중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게되고 습관적으로 하게된다. 설교는 매번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1. 목적의식이 분명한 설교

왜 설교하는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어보겠다. 이 특정한 한 편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넓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금 하려는 설교의 목적 말이다. 물론 논지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설교하는 사람은 그 논지만큼이나 명확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멋진 설교라도 그 설교가 이루고자하는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힘이 떨어진다. 내용에는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 그리고 예화도 훌륭한 것들이다. 설교자는 아주 달변으로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그러나 설교가 그저 하나님 잘 믿으라는 식의 막연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면 청중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갈게 없다.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감동을 주는 것인가? 어떤 목사는 감동주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많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을 듣고 감동해야지 분위기나 감동적인 이야기 그 자체 때문에 감동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설교를 듣고 나면 흐믓하지만 아무 것도 기억에 남는게 없다.

목사는 목회현장의 신자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한다던지, 이신칭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시킨다던지, 자신의 영적인 은사를 발견하고 봉사하게 한다던지, 가정생활을 신앙적으로 하게 한다던지,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야 한다.

 

2. 근본적인 목적: 구원

자 이제 그러면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해보자. 영혼의 구원이다. 이 궁극적인 목표를 벗어난 것은 전혀 설교라 할 수 없다.

물론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설교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영혼에 유익이 되고 구원에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영원한 것이 된다. 반드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설교들이 신앙적인 단어를 나열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

 

충만, 하나님의 말씀, 기도, 은혜, 교회등 분명히 신앙적인 말들이다. 하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단어들이라도 그것으로 영혼이 일어나서 힘을 얻고 구원의 생활을 하게 하지 않으면 겉도는 설교일뿐이다.

또한 목적은 분명해도 영혼을 위하지 않는 설교는 얼마든지 있다. 거의 매일 교회에 와서 머물며 봉사만 만들거나 목사를 잘 섬기게 할 수 있다. 기복적인 이유에서 헌금을 많이 내게 할수도 있다. 그래서 이상한 헌금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혀 영혼에 도움이 안되는 목적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의 구원이다. 이것은 목회 자체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 목표를 향해서 나가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한다. 설교가 그 궁극적인 목표를 구원에 두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설교의 사명은 절대로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확인하라. 내 설교가 구원의 말씀을 주는지.

 

 

- 다음은 해돈 로빈슨의 [성경적 설교]에서 뽑은 에베소서 1장의 강해설교 요약이다.

아주 잘 만들어진 요약이다. 그러나 이 내용이 설교의 목적에 따라서 조금 달라질 것이다.

      

예제1)

 

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기에 찬양해야 한다. (1:4-6)

 

2. 하나님이 자기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기에 찬양해야한다.(1:7-12)

 

3.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유업을 완전히 소유하기까지 성령으로 인치셨기에 찬양해야 한다.(1:13-14)

      

예제2)

 

제목: 은혜의 확신

논지: 은혜의 확신은 하나님이 해주신 일들이 엄청난 것임을 알 때 온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2. 하나님은 자기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다.

 

3.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유업을 완전히 소유할 때까지 성령으로 인치셨다.

 

결론: 이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확신 속에 거하자.

 

 

예제3)

 

제목: 믿는자의 긍지

논지: 믿는자의 긍지는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알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2. 자기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다.

 

3. 우리가 받은 유업을 완전히 누리기까지 성령으로 인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긍지를 가지고 살자.

 

5 강 논지를 복음적으로 만들기

논지를 복음적으로 만들기

 

예제1)

 

제목:신령한 예배

논지:신령한 예배란 예수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예배이다.

1. 예수를 뵙는 은혜를 받는다.

2. 사죄의 은혜를 받는다.

3. 사명의 은혜를 받는다.

 

=>수정

      

제목: 신령한 예배

논지: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신령한 예배를 받을 수 있다.

1. 주는 높이들인 보좌에서 부르신다.

2. 주는 거룩거룩 하신분 이시다.

3. 주의 능력으로 성전 문지방이 흔들린다.

4. 그분이 부정한 백성을 만나신다.

      

예제2)

제목: 복있는 사람 (1:1-6)

논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 복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그 삶이 악인과 구별되어야 한다

2.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며 순종해야 한다.

3. 복있는 사람의 삶의 결과와 악인의 삶의 결과는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단 복있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그냥 "구별되어야 한다"든지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있는 사람은 복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구약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선택해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 신약 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이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할 일은 세상 사람들의 꾀를 좇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해서 그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요지를 이렇게 고쳐봅니다.

      

=>수정

      

제목: 복있는 사람

논지: (예수)을 영접한 사람은 그 힘으로 산다.

      

1. 세상의 꾀보다 복의 말씀을 믿는다.

2. 복의 능력을 의지하니 오만할 수 없다.

3. 말씀을 묵상하여 복으로 충만하게 된다.

불신자는 잘되는 것 같아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지만 신자는

자기 속에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시냇가의 나무처럼 영원히 번성한다.

 

 

6 강 논지에서 설교로

 

논지에서 설교로

 

 

이제 논지에서 설교까지 작성해 보자.

22:6-14를 가지고 두 개의 설교를 만들어 보았다.

하나는 예배에 집중하였고 또 하나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I. 첫 번 째 설교

사도바울이 늘 하신 말씀대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쳐졌으나 살아서 제단을 내려온 이삭에서부터 유래된다. 그는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그래서 산 제물이 되었고 평생 산 제사로 삶을 보냈다.

 

 

 

제목: 산제물

논지: 예배에서 자신이 산 제물임을 확인한다

도입부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죽는 심정을 자신을 드리는 것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모든 종교가 제물은 죽인다. 아벨도 죽음으로 제사.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원하신다.

그는 죽어야 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목숨이다. 자신이다.아들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은 이삭을 받고 양을 대신 죽인다. 이삭은 살아서 내려온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 양이 대신 죽음으로 이삭은 살았고 산제물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서 산 제사를 드린다.

예수를 양으로 대신 드렸다면 우리도 이삭이다. 산제물이다.

 

 

II. 두 번째 설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사랑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아들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가?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험하게 된다.

 

 

제목: 산제물

논지: 받은 사랑으로 살라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만 있는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사랑이다.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 필레오, 에로스, 아가페등 여러 말을 하지만 사랑은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증명된다.

;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거기 반응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랑이 자기 속에 있음이 증명된다. 이 결단을 통해 사랑은 자란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 사랑은 드림으로 산다. 그것이 본질이다. 이삭은 드림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그 사랑으로 인해 산다. 그래서 산제물이 된다.

 

7 강 설교의 형태

 

 

설교의 형태

 

흔히 듣는 질문이 있다. "제목설교가 좋습니까, 아니면 강해설교가 좋습니까?"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강해설교가 성경적인 설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런지 강해설교의 강좌들은 여러 곳에서 개설되는데 제목설교 강의는 찾아볼수가 없다. 과연 강해설교가 더 성경적인 설교인가?

여기서 대답하고자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목설교건 강해설교건 설교의 외형적인 형태일뿐이다.

 

어느 쪽이건 완전히 성경적일수도 있고 전혀 성경적이지 않을수도 있다. 아무리 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설명하면서 설교해도 비성서적으로 할 수 있다. 그렇게되면 물론 비복음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느 형태의 설교이건 복음을 전하기 좋으면 된다. 형태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커피잔과 바가지는 그 용도가 다르다. 옹달샘에서 아름다운 커피 세트를 꺼낸다면 이상해진다.

마찬가지로 설교의 여러 형태는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다.

 

 

설교의 여러 형태

 

 

1) 한 주제설교(One-idea sermon)

 

한 가지 강한 논지를 가지고 점점 더 깊이 있게 다루어 나간다.

단 한 가지의 주제만이 살아나와야 한다. 논지를 증명하기 위해 대지를 잡는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자료들을 나열한다. 예화나 간증 성경해석이 그것들이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이런 형태에 관해서 다루었다.

 

 

2) 두 대조적 주제설교(Two contrasting ideas sermon)

 

두 개의 상충되는 주제를 가지고 변증법적으로 설교한다.

천국과 지옥, 사망과 생명, 기쁨과 슬픔, 축복과 저주, 옛것과 새것등등 얼마든지 내용이 있다.

주로 한 쪽의 유익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쪽을 이용한다. 이것도 대표적인 제목설교가 될 수 있다.

 

 

3) 세 단계 설교(Three divisions)

 

다음의 순서대로 진행한다.

a. 설명 b. 증명 c. 적용이다. 한 가지 신앙적인 주제를 말하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다음에는 그것의 중요성과 효과를 이해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사용해서 각자의 삶을 살도록 적용시킨다.

주제대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

 

 

4) 네 부분 설교 (Four segments):

 

네개의 대지를 가지고 논지를 증명한다. 예를 들어서 "신자의 삶이 더 행복하고, 더 힘들고, 더 거룩하고, 소망적이다"는 식의 진행이다. "하나님 사랑의 네 차원"도 같은 형태이다. 네 면, 네 계절, 네 방향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합력하여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예를 하나들어 보자. 20세기 초 미국의 저명한 설교자 포스딕의 "기도하는 법을 배우자"는 제목에 따라 대지를 발전시킨다.

 

(1) 수용적 태도로 기도하라.

(2) 확고한 자세로 기도하라.

(3) 모험적으로 기도하라.

(4)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라.

이 대지를 가지고 감동적인 예화를 섞어가며 설교를 진행한다.

 

5) 다섯 또는 여섯개의 소주제를 가지고 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 역시 대표적인 설교자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주제에 관한 여러 다른 면들이 한 결론으로 이끌어져 가야 한다.

하지만 잘못하면 주제들이 논지와는 상관이 없이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된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는 상황이다.

 

 

6) 질문-대답의 형태

 

웨슬리가 맣이 사용했던 방법이다. 청중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문제를 던진다. 그리고 함께 그 해답을 찾아나간다. 그러므로 설교는 관심을 끄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해서 청중을 이끌어 나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성경적이고 은혜로운 그리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대답으로 이끌어준다.

 

 

7) 사다리

 

제임스 스투어트라는 설교자가 많이 사용한 방법이다. 청취자들이 현재 있는 상태에서부터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간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예 들을 쌓아올리고 격려하면서 목표하는 지점으로 이끌어준다.

쉽게 말하자면 기초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8) 변증법

 

헤겔의 정반합의 진행으로 어느 정도는 항상 적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주제를 말한다고 치자. 그래서 들어가도 나가도 넘어져도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계속한다면 듣는이는 금새 싫증이 난다. 평면적인 진행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번쯤 반대 방향으로 꺾으면 달라진다. "우리 솔직히 말해 봅시다. 정말로 예수를 믿으면 다 잘됩디까?

예수 믿으면 병도 피해가고 문제도 비켜 갑니까?" 이런 식으로 도전을 하면 듣는 사람들은 집중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 믿고 받는 복은 그런게 아니라 이런 것입니다"하고 다시 방향을 돌린다.

이렇게 되면 그냥 예수믿으면 복받는다고 평면적으로만 말하는 것보다 말에 깊이가 주어지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입체적인 설교가 된다. 그래서 청중이 설교자의 다음 말을 예측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훨씬 흥미를 느끼면서 듣게 된다. 그러면서도 주제는 변증법을 통해서 깊이를 더해주게 되는 것이다.

 

 

9) 원인 결과

 

아모스의 설교와 같다. 결과에서 시작해서 원인을 찾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묘사한다. 그리고는 그 원인 무엇인지 살펴본다. 피상적 원인은 물론 돈, , 이별, 외로움등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죄요 더 깊은 곳에는 하나님과 단절됨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진행이다.

 

 

10) 순서대로 말함

 

어떤 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거나 그때는 이러저러했는데 지금은 이러저러 하다는 식이고 다시 지금은 이러저러한데 미래는 어떠하다는 식의 진행방법이다. 어떤 인물을 묘사할 때 하나님을 모를 때, 알고 예수를 영접했을 때 그리고 이제 성숙했을때 등으로 말해볼 수 있겠다.

 

 

11) 동기유발

 

이런 식으로 진행한다. 주의를 끈다.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쳐준다. 신앙적인 해답으로 그것을 만족시킨다.

그것을 영상화한다. 그리고는 행동하게 만든다. 설교의 대지도 여기 따라서 작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를 끌어서 시작하는 것과 영상화해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2) 본문설교

 

강해설교의 한 방법이다. 비교적 짧은 귀절을 뽑아서 다른 귀절들과 비교하면서 소지들을 나누면서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고는 각자의 삶에 적용시켜준다. 여기서 가장 조심할 것은 성경의 의미가 실생활에 적용되게 설명하는 것과 이것 저것 이야기하다보면 통일성이 없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3) 주해설교

 

좀 더 많은 분량을 해석해 주면서 진행하는 강해설교이다.

제목과 대지들은 택해진 본문에서 나온다. 설교는 그 본문에서 전개되어 나온다. 대지도 다 그 본문들에서 나온다.

가장 조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무시한채 현재 나타난 본문만으로 비복음적인 설교를 하는 것이다.

 

 

14) 염주

 

부흥회설교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염주를 꿰어놓은 것 같이 예화로 연속된다. 오랜 시간 동안 청중의 관심을 붙들어 두는데 좋다. 하지만 이 역시 논지를 벗어나서 흥미 위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많다. 아무리 예화가 많고 내용이 길어도 한 가지 주제에서 벗어난다면 아무 것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15) 이야기식 설교

 

앞에서 말한 염주식과 비슷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식으로 나가려면 설교자가 상상력을 잘 동원해서 묘사를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연극처럼 기승전결을 잘 연구해서 복음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설교하기 전에 여러번 연습을 해야 잘될 수 있다.

 

 

16) 장면회상

 

유명한 텔레비젼 드라마나 영화 또는 소설의 내용에서 설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아는 내용은 그 나름대로 또한 설교자만 아는 내용 역시 그 나름대로 청중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또한 그로부터 감동적인 내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가끔 사용하면 큰 감동의 설교를 할 수 있다.

 

 

17) 전기설교

 

성경 안과 밖에서 대상을 찾아서 어떤 인물의 전기를 설명한다. 반드시 완전한 인물일 필요는 없다. 잘못된 사람이라도 교훈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꽃밭을 뒤지듯이 탐구하고 밝혀내어 결론으로 발전해 나간다. 하나님께서 한 인물에게 어떠한 은혜를 입혀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한다.

지금까지 설교의 형태들을 소개했다. 제목설교와 강해설교로 양분할수만은 없음도 알게 되었다.

이제 다시 말하거니와 형태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더 중요함을 절감해야 한다. 형태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재미있고 감동적이지만 인간적인 설교로 그쳐서는 않된다.

 

8 강 주제가 서로 대조적 일때

 

주제가 서로 대조적 일때

 

 

 

지난 번에는 여러가지 설교의 형태를 소개했다. 이번부터는 그중 몇 가지를 골라 실제로 설교를 작성해 보도록 한다.

 

여기서는 두 대조적 주제설교 (Two contrasting ideas sermon)를 만들어 보자. 두 개의 상충되는 주제를 가지고 서로 비교나 대조 또는 변증법적으로 대화를 시킴으로 논리를 진행할 수 있다.

두 대조적 주제는 서로 간에 보완할 수도 있고 서로 견제할 수도 있다. 옛 것과 새 것의 예를 들어보자. 옛사람과 새사람은 서로 견제되는 개념이다. 옛사람은 육에 속하였고 새사람은 영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혜""은혜 위의 은혜"는 다르다. 앞에 것보다 뒤의 것은 더 발전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두 대조적인 개념을 대조 비교하면서 바라는 목표로 이끌어 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먼저 한 쪽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다른 쪽을 설명할 수 있다. 동시에 한 쪽을 설명하고 다른 쪽을 설명하고 다시 한 쪽 다시 다른 쪽 식으로 나갈 수도 있다.

변증법적인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여하간 효과가 극대화되도록 이끌어간다.

 

 

설교 1

 

제목: 큰 자와 작은자

본문: 9:1-9

논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큰자는 작아지고 작은자는 커진다.

 

1. 사울은 본래 큰자였다.

2. 그리스도를 만나자 작은자가 된다.

3. 그리스도를 영접해 진짜 큰자가 된다

4. 스스로 작은자는 그의 은혜로 위대한자로 살아진다.

 

 

큰 자와 작은 자

 

행전 9:1-9

 

오늘의 주인공은 바울이란 사나이다. 그의 본명은 사울이었다. 큰자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 맞도록 세상에서 그는 큰자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유대인중에서도 최고인 바리새인이었다. 훌륭한 가문과 교육은 그를 교양인으로 또 지식인으로 키웠다. 이미 젊은 나이에 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어느날 그는 완전히 바뀐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는 자기의 이름을 바울이라고 바꾸었다. 작은자라는 뜻이다. 오 이 작은자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의 삶을 온통 뒤바꾸어 놓았던가? 그의 삶은 영욕으로 뒤섞였고 긴장과 감격과 권능과 수치로 채워졌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그처럼 큰자가 될 수 있다면!

 

1. 큰자. 사실 그는 세상적으로 모든 면에서 갖추어진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조금만 노력을 한다면 지도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믿는 신앙의 기준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율법대로 철저하게 이행하여 완전한 이였다. 대제사장도 그를 인정한 촉망받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는 예수를 믿는 이단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이 이단을 박멸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그 이단을 믿는 스데반이라는 한 청년이 붙잡혔다. 사람들에게 잡혔는데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천사가 보인다면 그 모습이었으리라. 그의 얼굴은 사랑과 확신으로 빛났다.

스데반은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에 계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율법을 외형적으로만 지키고 마음으로는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그러기에 우리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이제 우리는 조상보다 더 심하여 메시아를 못박아 죽였다. 그러면서 무슨 율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가."

듣던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이를 갈았다. 바른 설교가 주어져 마음이 찔리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모두 회개하는 사람이 되기를. 스데반은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선 것이 안보이는가!"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의 계시는 사람들에게 거부되었다. 돌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스데반의 얼굴은 부서지고 선혈은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모았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외쳤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곧 그는 돌무더기 속에서 잠들었다.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가 거짓으로 그랬다면 어찌 자기 죽음을 볼모로 장난을 할 수 있었겠는가.

청년 사울을 이 린치 장면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열심은 이 새로운 신앙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유대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 스데반의 죽음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었다. 어째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그렇게 초개처럼 던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태도와 아름다운 인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울은 괴로웠다. 열심으로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에는 언제나 한 다른 법이 있어서 그를 죄의 법 아래 끌고 가고 있었다. 겉으로 기도와 금식과 여러 의식으로 완벽한 신자였다. 그러나 내면에는 육신의 생각이 가득차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은 쾌락을 원할뿐이었고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는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다. 삶에는 기쁨이 없었다. 물론 평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투쟁하고 있었고 언제나 인간적일뿐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완벽한 예배를 하지만 내면으로는 육신의 기쁨을 원하였다. 입으로는 선행과 사랑과 금욕을 말했지만 마음은 그 반대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율법주의자들처럼 그도 엄격한 겉모습만을 가질뿐이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율법을 지켜야지. 경지에 이르르면 완전한 선행을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준에 도달하리라. 그래서 열심을 내어 예수쟁이들을 잡아내 없애려고 날뛰었다. 다메섹에가서 더욱 많은 이단들을 잡아오리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잡아 오리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리라.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길에서 그는 말에서 떨어진다. 큰빛이 비췬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때 큰 음성이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느냐?" 사울은 물었다.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는 놀랐다. 자기가 핍박하는 예수가 그렇게 추구하던 하나님이라니. 그리고 자기가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 되다니!

그는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 회개하였다. 바른 계시의 지식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이 하는 방법과 자기 생각만을 따라서 믿었던 것을.(10:2) 자기가 열심을 낼수록 육신의 생각이 판을 치고 그렇게 함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성령받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에서도 가렸던 장막이 벗기워짐을 알았다. 이제 진리가 바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2. 작은자. 그는 과거의 자랑을 이제 모두 버렸다. 전에 그렇게 추구하고 자랑하던 것글을 이제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렇게 고상하기 때문이었다. 거기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었다. 하나님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거기 비해 과거의 모든 자랑거리들은 배설물이었다. 이제 그는 생의 원리를 바로 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생명이요 삶의 원동력이었다. 바울은 깨달았다. "나는 그가 만드신 물건이요 생명의 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하면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껍데기뿐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도우려 하시건만 나는 그 힘을 외면하였었다. 그리고 내가 행한 것의 댓가를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확실히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얻는데 도움이 될 때만 소용이 있다. 내 잘난 것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서게 하는 이유가 된다면 그것은 배설물이다.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내 잘남은 모두다 없어져야 한다. 내 이름은 더 이상 사울이 아니다. 그렇다 가장 작은자인 바울이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싶어했다. 욕심과 자랑이 아니라, 의와 생명과 능력 속에 있는 자신을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믿음의 눈으로보면 그리스도는 지금 내 안에 계시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공유한다. 믿기만하면 이 사실은 그대로 내게 임한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써왔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받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다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큰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을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 일들을 완벽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은 죄를 없애는 것,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받는 것, 참된 자유인으로 사는 것, 모두 다 예수가 나를 위해서 해주셨다!

 

3. 진짜 큰자. 너무도 쉬운 그러나 확실한 진리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져 자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속에 유대인의 혈통과는 비교가 않되는 하나님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와 능력과는 상대도 않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채워졌다. 이 모든 것은 노력해서 조금씩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행한 것을 깨닫고 받아들임으로 즉시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왔던 성경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무력함, 천지창조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말씀들은 그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로 그에게 임해왔다. 그는 말씀대로 행동하였다. 마치 그리스도가 된 것처럼 말씀의 내용대로 움직였다. 그 말씀은 그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처럼 두려워하던 안보이는 세상이 말씀을 통해서 만져지기 시작하였다. 귀신이 굴복하고 병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모든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서 민망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외쳤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는 이 소식 전하는 것을 자기의 직업으로 삼기로 하였다.

 

4. 스스로 작은자. 그는 더 이상 편안히 안주하면서 지낼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된 소식을 전하느라 그의 껍대기인 몸은 전혀 쉬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스스로 나섰다. 그러면서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소란한 것 잠못자고 먹지못하는 각종 수고 속에 살게 되었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하였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기뻐하고...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6:8-10) 그는 평생을 그렇게 움직였다.

산 넘고 바다를 건너 세상 끝까지 복음들고 다닌다. 하나님이 속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고 보는 자신의 모습에 구애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정의해 주신 자신을 믿었다. 하나님은 그의 안에 계셨다. 그는 말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능력을 따라 힘을 다해서 수고하노라."(1:29) 그의 꿈과 능력은 한이 없었다.

그는 인생의 황혼은 로마의 감옥에서 마쳐진다. 그의 늙은 몸은 사형수의 도끼로 두 토막이 되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오 위대한 삶이여!

 

 

설교 2

제목: 자랑할 것 두 가지

본문: 고후 12:1-10

논지: 신자는 자신의 약함과 그리스도로 인해서 강해짐을 자랑한다

 

1. 신자는 약함을 자랑한다.

2. 약하므로 하나님을 의지해 강해진다.

3. 약한 나와 강한 나를 자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약함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가리려고 한다. 신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신자는 그 약함을 하나님 앞에 드러낸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의지한다. 결과는 하나님의 강함으로 나타난다. 그럴수록 인간의 약함을 절실히 본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대화를 시켜보자. 1번과 2번은 서로 대조되는 상황이다. 청중은 평면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보다는 자꾸 바뀌어나가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다. 그러므로 1번과 2번을 번갈아 가면서 대조를 시켜보았다. 물론 1번에 해당하는 것만 모으고 다시 2번에 해당되는 것만 모아서 할 수도 있다.

 

1. 인간의 기본 욕구: 자랑하고 싶은 마음

2. 신자의 자랑거리: 약함

 

1. 인간적인 자랑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

2. 하지만 약함은 하나님을 추구하게 한다.

 

1. 하나님을 추구할수록 더욱 약한 자신을 본다.

2.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1. 그럴수록 더욱 약해지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한다.

2. 그러므로 인간적인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은 동시에 나타난다.

 

1. 약한 바울에게 하나님은 3층천까지 경험하게 하신다.

2. 신자는 자신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을 동시에 자랑한다

 

 

자랑할 것 두 가지

 

고후 12:1-10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일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처럼 실제적이고 강렬한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 자체이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고 솟아오르는 가장 강한 욕망이다. 연약한 사람들일수록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강하기만 하다.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된 이유가 어디 있는가? 스스로 하나님되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도움으로만 살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다. 이 무서운 착각 곧 교만이 타락의 원인이었다. 교만은 곧 인간 자체가 되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길은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학문을 하고 재산과 명예와 권세를 가지려는 목적은 단지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좋은 차를 산다. 집을 사고 땅을 산다. 자식에게 좋은 교육을 시킨다. 이 모두 자신을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강함은 곧장 자기 자랑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까지도 자신을 강하게 하는 목적일뿐이다. 자신이 건강하고 평안하고 번영하려는 마음 아닌가. 기도하는 내용도 항상 자기와 자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되는게 아닌가. 그대로 잘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자랑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자랑은 인간의 근본적 욕구이다.

신앙을 이해하면 자랑하는 방법이 바뀐다. 어떻게 바뀌는가? 전에 자랑하던 것은 수치가 되고 전의 수치가 자랑이 된다. 무슨 소리인지? 기독교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약점이 너무나 명확히 드러난다.

은혜를 알수록 자신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약하기만 하고 자랑할 거리가 도무지 없다. 자기 속을 들여다 보라. 너무도 치사하고 너무도 불안한 존재 아닌가. 하나님의 빛 아래 보는 자신은 너무도 추하고 악하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오지 않으려고 한다.

 

1. 하지만 신자는 약함을 오히려 자랑한다. 그 약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 약함을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강함으로 대치시켜 주시지 않는가. 약한자만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찍어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어 하나님처럼 살게 하신다. 그러니 약함을 자랑할수밖에.

사도 바울이 그러한 자랑을 한 분이다. 오늘 본문에 그 방법이 그려져 있다. 그는 두 가지를 자랑했다. 그것도 따로 따로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했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대치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간격이 많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자들 속에 있어서 신자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기를 삼인칭으로 설명하며 자랑했다. 그는 하늘의 능력과 신비를 맛보며 가히 인간이 할수도 들을수도 없는 말을 하고 들었다는 자랑이다. 동시에 자신을 위해서는 약한 것들만을 자랑한다. 자기 몸에 사단의 사자가 와 있다. 그래서 너무도 약하고 고통스러웠다.

모두가 자기 강한 것만을 자랑하는데 그는 왜 약한 것들을 자랑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왜 자랑거리인가? 세상적으로 볼 때 그에게는 육신적인 자랑거리가 너무 많았다. 그는 유대인중에서도 유대인이요 그중에서도 귀족같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학교에서 세계적인 스승에게서 배웠다.

그는 인간적으로 가장 상류층인 바리새인이요 부요한 자요 엘리트였다. 그는 신앙적인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완전하게 율법대로 살았다.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는 흠이 없고 존경받는 대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사람들이 자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자랑거리들은 의지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진다. 자랑하는 사람을 강하게 하여 하나님이 필요없게 한다. 바울에게는 이 점이 가장 두려웠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면 저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건 자랑거리가 아니고 수치거리다. 그래서 배설물이라고까지 한 것이다.

유능한 원숭이 즉 가장 아름답고 사람 흉내를 완벽하게 하는 원숭이가 있다고 하자. 그래도 그는 사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인간적인 자랑거리가 많아도 그것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난 것이나 장점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강해서 자기 힘으로 서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필요없다. 의지가 약해서 의롭게 올바르게 살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 약한 것만 자랑했다. 약한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恥辱거리다. 모두 감추려고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운 것과 실수한 것들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솔직하였다. 그는 약하여 두려워 떨었다고 했다. 자기 몸에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와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 사자가 너희들을 시험하는 바로 그 존재라고 했다. 그에게는 전혀 허세가 없었다. 위선도 없었다. 그저 약하고 부족한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하였다.

신앙의 경지가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 이해할수록 더욱 부족한 느낌만 강해진다. 하나님 앞에 서서보면 자신의 부족함이 선명하게 보일뿐이다. 자신이 가진 것은 악한 마음이요 조잡스러움이요 자신의 상태는 무능이요 무력이요 주책으로 충만한 것뿐이다. 정확히 보면 자신에게는 절대로 자랑할 것이 없다.

 

2. 그러므로 약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신앙이 깊어지면 하나님을 더 잘 보게 된다. 동시에 자기의 죄성도 더 분명히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의지는 절대적으로 된다.

결국 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니 약함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다. 바울은 자기 몸에 주어진 사단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였다. 대답은 단지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그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였다. 즉 약함은 최대의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약하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약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약한자의 하나님이다. 약한자는 모든 자기의 수단을 포기한다. 어차피 약하기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 마귀를 이기고 문제들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인게 인간이다. 그걸 알면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 만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대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강함을 누리게 된다!그리스도께서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이다.(고후 13:4)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했다. 약해야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강해짐을 시범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가 용서했다는 말씀만을 의지한다. 나는 아무 것도 의로운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의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 그의 의가 곧 내것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나의 무능을 나는 감추지 않으리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졌음을 자랑하리라.나는 연약과 병듬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의지할 것은 나의 경험이 아니라 그가 고치셨다는 말씀이다. 나는 두렵고 불안하고 자신이 없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내 안에 계셔서 나를 기쁨으로 평안으로 능력으로 만들었음을 철저히 주장한다. 그렇게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3. 결국 두 가지 자랑은 동시적인 것이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강함을 자랑한다. 그래야만 한다. 자기의 약함만을 자랑하면 열등감과 좌절에 빠진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 잡힌 자신을 자랑한다면 전혀 분위기는 달라진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을 믿기에 강해진 자신도 믿을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잡힌 자신을 자랑하였다. 자신의 인간적 훌륭함을 자랑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지식만을 붙들었다.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 아무 것도 없고 자신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행동하였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께 잡힌 자신의 삶도 그러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자랑하였다. 그 사람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힘은 항상 그의 안에 머물었고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였다. 그가 설교할 때 그리스도는 그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가 안수할 때 그리스도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함께 얹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다. 거기서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고 말하였다. 참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험을 절대로 절대로 놓지 않았다. 자신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역사상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들뿐이었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채운다. 그리하여 세상의 잘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31) 자기가 잘난 것을 자랑하는 이는 그것을 의지하고 뽑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의 못난 것을 자랑했다.

위대한 대통령 링컨과 위대한 부흥사 무디는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자랑할 때 새 삶은 시작되었다. 누구든 자신 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다. 도대체 이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약함은 모두가 유익이 될 수 있다. 약함이 곧 축복이라는게 아니다. 그걸 유익으로 이용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경험하는 약함은 은혜이다. 자기 못난 것 깨닫는 것이 은혜의 중요한 단계이다. 나를 자랑할수록 그리고 자랑할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은 그 속에 없다.

나는 약하기만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설 수 없음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축복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강함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속에 넘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는 자랑하리라.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자랑하리라. 그리스도의 강함이 나의 약함을 통해 쏟아져 나오게 하리라.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하리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먼저 그리고 더욱 자랑하리라. 내 안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을 자랑하리라. 그것이 내 약함을 어떻게 덮어주고 나를 아름답게 하는 의복인지 쉬지 않고 자랑하리라. 그리고 이 자랑들이 날로 깊어지게 하리라.

 

9 강 대지설교

설교작성: 전통적인 대지 설교

 

 

1. 전통적인 세 대지 설교

 

알렉산더 메크레렌 (Alexander Maclaren)"양떼를 삼지창으로 먹였다"고 말했다. 늘 세 대지 설교를 했다는 말이다. 세 대지 설교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많이 익혀두어야 한다. 아래 나오는 스펄젼도 강해설교를 세 대지로 나누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의 싸움 (스펄젼):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9)

논지: 여호와와 함께 싸운다

 

1). 피할 수 없는 싸움--"그들이 너를 치나"

2). 패할 수 없는 싸움--"이기지 못하리니"

3). 정복 당할 수 없는 약속--"내가 너화 함께 하여 구원할 것임이라"

 

2. 네 대지 설교

목재가 사각으로 된 것처럼 설교를 사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앞의 메크레렌도 이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의 한 설교집을 보면 20개 중 13개가 네 대지 설교이고 7개가 세 대지였다. 그의 네 대지 설교를 하나 살펴보자.

 

 

제목: 능력의 비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17:19-20)

 

1). 신자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이 능력이 나타나는 조건은 믿음이다.

3). 이 믿음은 항상 불신앙에 의해 위협받는다.

4). 믿음은 끊임없는 헌신과 엄격한 자기 부정으로 유지된다.

 

 

3. 다섯 대지 설교

 

제목: 그리스도의 마지막 복음 메시지 (William M. Clow)

논지: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다섯 단계중 하나이다.(26:18)

 

1.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열게 하신다.

2. 그들의 얼굴을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하신다

3. 사탄의 능력에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신다.

4. 그리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신다.

5. 성화된 그들에게 유업을 주신다.

 

 

위의 몇 예를 통해서 전통적인 설교 방법을 살펴 보았다. 설교요약한 책들을 보면 대체로 이런 식으로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복음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 나온 것처럼 그렇게 복음적으로 요약이 되어있느냐는 것이다. 이글의 목적은 복음적인 설교를 작성하게하는 것이다.

이제 전통적인 세대지의 설교를 실제로 작성해 보도록 한다. 여기 나온 설교의 구성을 잘 살펴보자. 복음적인 설교이다. 먼저 요약을 한 뒤에 완전한 설교를 실었다.

 

 

<요약>

간단히 설명된 구원

논지: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1.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물은 공짜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무엇을 해서 복받고 은혜받았다고 자랑할 수 없다.

2. 구원의 통로는 믿음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주신 일의 내용을 믿어야만 한다. 거기에 대해 반응을 해야한다.

3. 구원의 불변성으로 우리는 계속 그 은혜 속에 있게 된다. 하나님의 상급에 참여하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성화해 갈 것이다.

 

 

<실제설교>

간단히 설명된 구원

2:8-10

헤쉘 홉스(Herschel H. Hobbs)

 

칼 바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잘 알려진 현대신학자입니다. 그가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누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발견한 신학의 진리중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르트는 찬송의 한 귀절을 불렀습니다.

예수 날 사랑하심 난 아네/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기에(411)

질문하는 사람은 실망했습니다. 무엇인가 심오한 신학교리에 대해 열강을 들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라도 이 보다 더 명쾌한 답변을 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하셨지만 인간이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에배소서 28절에서 10절의 말씀보다 더 잘 표현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제 판단으로 이 부분이 성경에서 가장 명확하게 진술된 구원계획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사람들이 여러가지를 덧붙여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교회에서 등록을 한다던지, 성찬예식의 준수, 율법의 부과, 게속적으로 강조하는 선행등이 자꾸 덧붙여졌던 것입니다.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게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무관심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말씀을 잘 살펴보는게 중요합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아주 간단한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세 귀절을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개의 단순한 설명으로 줄여봅시다.

 

 

구원의 기초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해 구원을 얻었나니." 제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의 의미는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은혜(Charis)의 헬라어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물을주다." "빚을 탕감해 주다." "잘못을 용서해 주다." "죄를 용서해주다." 근본적으로 은혜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과분한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십만 불짜리 땅을 1불에 팔았다칩시다. 이것은 바겐세일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믿음"은 여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란 대명사는 중성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라는 말은 은혜나 믿음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원얻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에서 "...에게서(ex)"라는 단어는 "...으로부터"로 의미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원천으로부터라는 말입니다.

말씀중 "아니요(ouk)"는 강한 부정입니다. 그러므로 강조해서 말하자면 구원의 원천은 너희들 자신이 아니요, 너희들의 선한 행위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만드신바"(poiema)란 선한 일을 위하여라는 말과 연관되었습니다. 그 말은 어떤 사람이 한 일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열매입니다. 스스로 된게 아닙니다.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는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작업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위해 하신 일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너희가 구원을 얻었나니." "얻었다"는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내가 공을 쳤다"는 능동태요 "내가 공에 의해 맞았다"는 수동태입니다. 수동태는 나 아닌 다른 대상에 의해 내게 일어난 일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나 아닌 다른 대상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신학생 때 조지 트루에트가 은혜에 대해 설교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 생애에서 나를 가장 훌륭하게 했던 순간, 그 순간이 나를 구원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훌륭한 날이나 훌륭한 시간이 아니라 훌륭한 순간조차도 구원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구원의 통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말미암아"란 말은 헬라어로 디아(dia)입니다. 그 말은 중간기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샘물이 우리의 삶 속으로 흐르게 하는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다"의 헬라어를 적절히 번역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없습니다. 그 말에는 "믿는다" "신뢰한다" "맡기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 대해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 영혼이 그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4:12)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의 뜻과 의지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 귀신들도 예수가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거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신뢰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면 그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는 모는 내용을 지적으로 믿는다해도 지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은행에 대해 듣고 은행을 믿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행에 돈을 맡기고 평안할 때 그것이 은행을 믿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디모데후서 1:12의 의미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

그리스도에 관해 믿는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은행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뢰한 것을"이라는 귀절은 "나의 예금"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 그리고 "확신한다"는 동사는 모두 완료시제이므로 이미 완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번역할 때 "내가 믿고 있는 그분을 내가 알고, 그분이 능히 내 예금을 그날까지 지키실 것을 내가 확신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날이란 마지막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은행에 예금하고 그리스도께서 안전하게 보관해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믿음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것입니다. 대리적인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수동적으로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일어나서 예수께로 가리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우리를 위해 누군가가 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살기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하고 숨쉬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이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록펠러는 말년에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 있는 유클리드 애비뉴 침례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외부 강사가 설교했습니다. 예배후 록펠러는 설교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백불짜리 수표를 드렸습니다. 목사는 기뻐하면서 받았습니다. 돈 자체보다 가장 부자로부터 개인수표를 받았다는 것이 기쁜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목사는 그 수표를 발행했던 은행으로 갔습니다. 창구 출납원이 그 수표를 보더니 도로 내밉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는 물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바로 이 은행인데요. 제게 발행된 것이지요. 록펠러씨가 준것입니다. 서명도 그가 했습니다. 확실히 백불짜리입니다."

출납원은 대답합니다. ", 이 은행이 맞습니다. 선생님 신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서명도 틀림없고요. 여러번 이 서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수표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뒷면에 이서하시는 것을 잊으셨습니다."

그 수표에 이서를 함으로서 목사는 그 수표와 은행을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 록펠러가 주려던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란 화폐를 지불할 수 있는 수표를 나의 이름으로 발행하셨습니다. 그의 무한하신 은혜와 자비의 은행에서 발행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울 수 없도록 그 아들의 피로 서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나 자신이 받아서 이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불변성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여기 구원의 불변성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믿는다" 또는 "확신한다"와 같이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동사도 완료시제입니다. 즉 과거 어느 시점부터 구원을 받아서 현재도 구원받은 상태에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 구원받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구원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미 해놓으신 것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의 불변성 역시 매일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 놓으신 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선한 행위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선한 일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이유가 아닙니다. "행한다"는말은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곧 그 삶의 행위가 선해야 하고 풍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동사는 감추다, 위험에서 구출하다, 혹은 문제를 풀다(2:12)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세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말은 거듭남(3:3,17) 성화(고후 2:15) 그리고 영화(9:28)의 뜻으로 쓰여집니다.

거듭남은 믿는자의 영혼이 구원받음을 말합니다. 성화 혹은 하나님의 섬김을 위해 구별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화는 성도의 영광과 하늘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게 옳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받고 있다." 그리고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거듭나는 순간 나는 성화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되어집니다. 성화된 것이 아니고 성화의 상태로 자라며 봉사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성화된 정도에 따라 하늘에서 영광과 상급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구원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구원의 불변성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믿고 싶소.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아니겠소." 상대방이 대답합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정말 구원받으면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지금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간단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이 복잡하지 않다고 그냥 지나쳐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꼭 해야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닙니다.

 

 

10 강 귀납적 설교

 

귀납적 설교

 

그리스도께서 들이나 해변에서 보고 듣는 배경을 사용해서 말씀하셨다 우리도 현장의 배경을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력을 이용해서 보게 만들어야 한다. 과거 경험과 연관을 시켜서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생생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성경 볼 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으로 시각과 청각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시키라.

 

 

1. 별로 안 중요하게 보이는 귀절도 자세히 보라.

2.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3. 일어나는 일마다 살펴보고 그 장면을 상상하라.

4. 자신의 경험과 상상으로부터 자료를 뽑아오라.

5. 복합된 동기를 찾기위해 행동의 뒷면을 살펴보라.

6. 사건이 일어날 배경을 생각하라.

7. 감각을 사용하라.

8. 기술된 고통과 슬픔을 자신과 동일시 해보라.

9. 직접용법을 사용해 문법이나 동사를 만들라.

10. 일이인칭 단수 형태로 하되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11. 기대하도록 사건이 변할 때마다 전조를 보여주라.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이 확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귀납적으로 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농부가 농사짓는 이론을 대하는게 아니라 벼를 심고 있다. 주부가 요리학을 연구하는게 아니라 찌게를 끓이고 있다. 학생이 대학입시에 대처하는게 아니라 당장 점수를 올리려고 공부한다.

귀납적인 설교는 실제로 사람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현장이다. 바로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이론과 교훈은 오른쪽 뇌의 불을 켜주지 않는다. 삶의 현장을 위해 여러 요소들이 사용된다. 설명, 대화, 유추, 질문, 비유, 확실한 경험등이다. 여기서 시작해 성경적 결론으로 나아간다.

반면에 연역적인 설교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그가 가진 원리, 성경적인 가르침, 자기의 의향이 말해지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나간다. 귀납적 설교는 증거나 예나 예화를 먼저 말한다. 결론이나 주장은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청중과 함께 만들어져서 설교의 끝부분에 말해지는 것이다.

루이스에 말하는 귀납적 설교자의 자세이다. 묵종하지 않고 적응한다. 할 수 없이 용납하는게 아니라 받아 준다. 명령하는게 아니라 묻는다. 타협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공감을 한다. 괴롭히거나 기분상하게하지 않고 손짓해 인도한다. 강요하지 않고 협조한다. 밀어붙히지 않고 대화하고 가르쳐준다.

모욕하지 않고 격려한다. 반대하는게 아니라 마음을 준다. 굳어 있는게 아니라 겸손한 태도이다. 주장하는게 아니라 묻는다. 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함께 연구해 본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동참한다. 설교조로 하지 않고 함께 조사한다. 비난하지 않고 존중해준다. 이쯤 말하면 어떤 자세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귀납적으로 전도서를 요약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헛되고 미련한 것을 보라.

 

 

어디에 의미가 있는가?

지혜에 없다

겸손에 없다

우는데 없다

술에 없다

바람에 없다 (14)

일에 없다

말에 없다

순종없는 예배에 없다

사악함에 없다

전쟁무기에 없다

책쓰는데 없다

그러나 올바로 걸으라

결론 (12:13,14)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의 명령을 지키라

인간의 의무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설교에서 귀납법과 연역법

귀납적 설교만 옳은게 아니다. 연역적 설교가 필요한 경우도 많다. 짧은 시간에 훈련된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는 연역적 설교가 편하다. 예수께서도 소수의 제자들에게는 원리부터 말하는 연역적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미 권위를 인정받을 때는 연역적설교가 더 확실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음 루이스의 비교를 보라.

 

귀납법 연역법

쌓아 올린다. 주장한다

설명해서 권위를 얻어간다 이미 권위를 가진 상태에서 시작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주장한다

사실을 보여준다 개념들을 사실처럼 주장

사실에서 원인을 추구 사실들을 분류해 묶는다

건설적 제한적

창조적 인식적

주장을 연기한다 해답을 선언한다

이유를 분석 이유를 변호

원인을 찾는다 결론을 선언

확장시킨다 축소시킨다

찾아서 노출시킨다 설명하고 권한다

유연하다 확고하고 결정되어 있다

통찰력이 있다 지적이다.

참여하도록 초청 원리들을 부과한다

열려있다 닫혀있다

예언자적이다 제사장적이다

실제적이다 조제가 되어있다

진보적이다 방어적이다

관계가 있다 제한적이다

원인 개념 결론을 추구 효과와 결론을 말한다

이유 증거 원리를 추구 결과와 증거를 말한다

쉬운 예는 이것이다. 예화나 실예로 충분히 이해를 시킨 뒤에 대지를 말하면 귀납적설교요 그 반대는 연역적설교이다. 두 방법을 비교한다면 다음과 같다.

 

 

귀납적 설교 연역적 설교

예 화 1. 서 론

통 계 2. 전체논지

 

첫번째 대지 첫번째 대지

예 화 예 화

통 계 통 계

 

실예들 두번째 대지

두번째 대지 실예들

인 용 실예들

 

예 들 예 화

소지 1 세번째 대지

예 화 소지 1

소지 2 예 화

 

세번째 대지 소지 2

 

전체 논지 3. 결 론

여기서 보는대로 가장 분명한 차이는 대지와 관련된 설명들이다. 대지가 먼저 나오는 설명이 나오느냐 아니면 충분히 설명이 나온 뒤에 대지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느냐가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귀납적 설교에서는 서론을 따로 만들 필요가 특별히 없다. 그대신 귀납적인 방법으로 들어가면 된다.

만약 귀납적 진행이 제대로 되었다면 따로 결론을 만들 필요도 없다. 저절로 결론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1) 예화A 2) 예화B 3) 예화C 그러므로 4) 논지 또는 결론. 그러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결론을 생각하도록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제 귀납적 설교와 연역적 설교의 요약을 한 번 살펴보자. "기도가 정말로 돕는가?"라는 제목이다.

 

 

귀납법

"기도가 정말로 도와주나?"

1. 주위에서 경험하는 예

a. 개인이나 가족이 경험한 기도 응답의 예

b. 교회나 교단이나 외국교회의 기도 응답의 예

2. 신약의 예들

a. 바울이 폭풍우 속에서 기도--선원과 승객이 구원받다

b.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다--사람들을 놀라게 하다

c. 예수께서 기도하다--나사로가 일어나다, 5천명이 먹었다

3. 구약의 예들

a.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기 위해 기도하다

b. 한나가 아들 얻기 위해 기도하다

c. 모세가 기도하다--재앙들과 출애굽

d. 아브라함의 기도--모리아산의 은혜

논지: 삶과 성경이 많은 예를 보여준다--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

 

 

연역법

"기도가 정말로 도와주나?"

1. 기도할 이유들

2. 기도에 필요한 자세들

3. 기도의 결과들

결론: 기도의 적용과 도전

다음은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을 섞어본 것이다. 1-9번은 귀납적인 방법이고 10-12번은 연역적인 방법이다. 그러니까 결론으로 유도하는데는 귀납적 방법이고 적용이나 권고하는데는 연역적 방법을 쓰면 좋다는 말이다.

 

 

1. 청중을 존중하며 받아준다

2. 청중의 요구와 맞춘다

3. 주요 질문을 던진다

4. 관심을 일으킨다

5. 대표적인 예를 들어 말한다.

6. 가설들을 확인한다.

7. 주장들을 평가한다

8. 잘 설명해서 이해시킨다

9. 결론을 세운다

10. 개인의 삶에 적용시킨다

11. 경험과 말씀을 가지고 권고한다.

12. 변호하고 주장하고 추천한다.

실제적인 귀납적 설교 작성

이제 실제적인 설교를 만들어 보자. 지면 관계상 루이스의 설교중에 맨 앞부분과 맨 뒷부분만을 여기 실어보겠다. 설교의 감각만이라도 느껴보자.

 

 

요약:

"예수는 우리를 통해서 울고 계신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오늘날의 세상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볼 수 있는가?

1. 현세상을 보라.

사실, 인용, 삶과 관련된 예화와 일반적인 경험을 말한다

임시적 결론: 급변하는 현세상은 외롭고 상한 심정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2. 현세상에서 주를 보라.

소개, 여러 질문들, 그리고는 기본적인 질문-응답의 귀납적 형태.

임시적 결론: 주께서는 말씀과 태도와 행동으로 사랑하셨다

3. 현세상에서 주를 위한 우리의 사명을 보라.

예화, 유추, 질문, 그리고 대답을 통해 주를 영접한 우리가 주의 마음을 가졌음을 이해시킨다.

결론: 설교의 논지가 언급된다. 기본적인 주장이 설명되고 적용된다.

도전이 주어지면서 설교는 마쳐진다.

 

예수는 우리를 통해 우신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강조했지만 사람의 아들 예수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요? 어떻게 현세상에서 예수를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말입니다.

 

1. 자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번 봅시다.

젊은이들처럼 우리도 소리 지를 수 있습니다. "자 우리는 X세대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그들이 말하는 X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얼마나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까? 40년전에 발명된 전기기구가 이제는 옛날 창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두배로 되는데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1760년까지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후 1880년까지 다시 그 지식은 두배로 되었습니다. 1914년에 다시 두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지식은 일년에 두번씩 두배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세상의 너무도 무섭게 바뀌고 있습니다. 우주적인 변화입니다.

이러한 우주시대, 컴퓨터의 시대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낙관적인 견해가 사라졌습니다. 비관적 견해가 지배합니다. 우리는 성공, 쾌락, 권력, 만족과 안전에 대해 거의 병자들처럼 추구하고 있습니다. 오 사람들을 보세요, 사람들을!

일반 가정의 거실을 들여다 보십시오. 이런 세상을 따라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지쳤습니다. 기진맥진한 남편과 아내가 내뱉습니다. "이렇게 사는게 바로 지옥이다." 산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기술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의 욕구도 더 높아지는데 채워질 길은 없습니다. 밖을 보십시오. 외로운 군중들을.

성경이 이러한 인간의 욕구 즉 외로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에 외로움, 고통, 그리고 죄지은 인간들에게 줄 보편적인 말씀이 있습니까?

2.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세상에서 우리 주를 한번 살펴봅시다.

3. 이제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주를 위한 우리의 할 일을 살펴봅시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11:35-37) 오늘도 외로운 사람들이 무덤 옆에 서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깨어진 희망, 공허한 삶, 이루지못한 꿈을 가졌습니다. 무너진 가정을 보십시오. 좌절된 계획, 엉망이 되어버린 관계를 보십시오. 그들은 내면적인 욕구에 사로 잡혀 있고 죄의 멍에에 눌려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우리의 관심을 느꼈나요? 그들이 우리 눈물을 보았을까요? 우리에게도 그들이 말할까요?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예수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는 인간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여러분 속에 계십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넣어주셨습니다. 그가 지금 당신을 통해 울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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