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 / 성경인물
(행11:19-30)
● 성경에서 자주 혼돈되는 인물이나 이름 가운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다. 분명히 엘리야가 스승이고 엘리사가 제자인데, 이름도 비슷한데다 두 선지자의 활동 가운데 유사한 부분들이 있어 혼동되기도 한다. 신약에서는 대표적으로 바나바와 바라바가 있다. 바나바는 사도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사도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인물이고, 바라바는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때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 대신 풀려난 강도다. 그는 민란을 꾸미고 살인한 유명한 죄수로 소개되는데, 단순한 살인강도라기보다 로마에 항거한 유대인 열심당원의 한 사람으로 보인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이란 다소 애매모호한 뜻으로, ‘랍비의 아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부 사본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로 기록되어 있어, 예수님과 이름이 같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바라바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 빌라도가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고 묻고 있다. 하여튼 이 바라바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나바는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이므로 혼돈해서는 안될 것이다.
● 바나바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행4:36이다. 그는 구브로 섬에서 태어난 레위족속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이며,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히브리식 이름인 ‘바나바’는 원래 ‘예언의 아들’이란 뜻인데, 행4:37에서 누가는 이것을 ‘권위자’ 즉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초대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바치고 헌신의 길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행9:27인데, 사도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후,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예전의 바울의 행적을 아는 제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여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때 바나바가 앞장서서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를 변호하여 제자들의 모임에 동참시켰다. 이때가 바울이 회개한 후 대략 3년 정도가 지난 다음이다. 이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했다. 유대교의 핵심인물이 변절자가 되었으니, 유대인들로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을 피신시켜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낸다. 이처럼 바나바는 회심한 바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중재하여 교회의 일원으로 동참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어 세 번째로 바나바가 등장하는 장면은 오늘 우리가 읽은 행11:22 이하이다. 스데반집사의 순교를 계기로 예루살렘에 일어난 환난을 피해 흩어진 신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인의 수가 증가했다는 소식을 듣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여 소문의 실상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행8:14에 보면 이전에도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선교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바 있다. 이처럼 중요한 일에 바나바가 파송을 받았다는 것은, 바나바가 새로운 상황을 처리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바나바의 활동을 미루어 볼 때, 바나바는 12사도와 바울에 버금가는 초대 교회의 중요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장면에서 성경은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착한 사람’이란 구제와 같은 선행을 일삼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안디옥에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바나바의 사역으로 인해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이때, 바나바는 사울(즉 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달려간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그의 고향인 다소에 가서 은둔하고 있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30km에 위치한 다소로 달려가 바울을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둘이서 같이 사역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26절에 보면(읽기), ‘둘이서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하고 기록하고 있다. 즉 누가는 이미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방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를 일컬어 ‘그리스도인’ 즉 ‘기독교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경멸하는 의미에서 ‘나사렛인’ 또는 ‘갈릴리인’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안디옥에서야 바로소 주님의 믿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이 명칭은 점차 공식화되어 2세기 초에는 완전히 로마제국 내에서 공식명칭이 되었다.
● 이어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었는데, 흉년의 피해는 주로 유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방에 흩어져 살던 형제들이 유대에 있는 형제들을 도왔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먼저 신령한 구원의 은혜를 이방 교회에 나누어 주었듯이, 그리고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에 감동받은 이방 교회의 형제들이, 이제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대의 교회를 물질적으로 돕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방의 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고통받는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신에 입각해서 구제 헌금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바나바와 바울이 각 교회가 모은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이로보아 바나바와 바울은 당시 안디옥 교회의 공식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12:25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 일을 마치고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였다. 이후 바나바는 본격적으로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행13장에 들어오면, 바나바는 안디옥의 지도자로서 사역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이 선교를 위해 파송받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부분이 있는데, 행13:1을 보자(읽기). 안디옥교회를 소개하는 내용인데, 안디옥교회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제일 먼저는 바나바요 제일 마지막이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이었다. 이것은 바나바가 바울보다 연배나 신앙연륜이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당시에는 아직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책임있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나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직접 목격했을 것으로 본다. 12사도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 다음의 70인 제자에 들었을 것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중심한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으로서, 12사도 외에 바울과 더불어 사도로 불렸던 사람으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납하는 등 초대교회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으며, 가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평생 독신으로 온전히 복음사역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바울은 1차전도여행의 첫 여행지인 구브로에서의 사역 이후, 그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다. 그리고 처음 출발할 때 바나바와 바울이라 기록되었던 이름이 13:46에 보면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어 기록되는데, 14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다시 기록되었다가, 15장 이후에는 완전히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게 된다. 특히 15장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회의에 참석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바나바와 바울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한마디로 바울이 앞장서고 바나바는 뒤로 물러난 인상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의 성품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바나바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사울이었던 바울의 변호자가 되어 예루살렘 교회와 제자들에게 소개시킨 것은 바나바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바나바는 바울에게는 선배였다. 그리고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친 일로 사람들이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을 허메(헤르메스)로 생각하여 두 사람을 신당에 모시려고 했다. 그런데 제우스는 올림피아의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며, 허메는 위계가 훨씬 낮은 신으로서 신들의 길 안내자, 대변자였다. 바울은 몸매가 갸름하고, 바나바는 위풍이 당당하여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점점 사람들 앞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바울의 이름이 바나바보다 먼저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것을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기꺼이 바울의 밑에서 바울의 눈부신 활동을 보고 기뻐했다. 바나바에게는 조금도 사심이 없었다. 마가가 전도여행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제1차 전도여행 때 중도에 포기한 것을 바울은 몹시 언짢게 여겨 제2차 전도여행에 마가를 동반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다투기도 했는데, 바나바는 너그럽게 마가를 받아들여 결국 마가로 하여금 대전도자가 되게 했다.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이다. 흔히 사람들은 섬 출신이 내륙 출신에 비해 소견이 좁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바나바는 성령에 사로잡힌 바 되어, 그의 타고난 성품을 바꾸어 이같이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 이후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후에 갈라디아 2:13에 보면,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바나바는 원시교회 초기 바울과 필적할 만큼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로, 관대한 기질과 영적 분별력을 가진 정중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된다.
바나바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어느 곳에서든지 어려움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의 편에 서서 위로와 격려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모습은 너무도 쉽게 다른 이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비판해 버리는 경향이 팽배한 오늘날에 더욱 필요한 태도라 하겠다. 진정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사랑으로 다독거리며 권면하여 공동체 간의 신뢰를 도모하는 평화적 중재자가 필요한 이 때에 과연 당신은 이러한 평화적 중재자가 되고 있는가?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달란트, 자신의 생애 전부를 하나님께 그려 주의 일에 헌신하였다. 이같이 자신의 귀한 것을 모두 드리는 전적인 헌신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모습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다.
바나바는 바울과 자신을 신으로 오해하는 자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애통해 하고 자신은 다만 청지기에 불과함을 피력하였다. 이같이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자신은 다만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태도는 오늘날 복음을 전해야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모습이다.
담대한 복음 전파자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며 권면의 은사가 뛰어났던 바나바도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문제로 시험을 받아 외식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성도는 특히 우리를 쉽게 넘어뜨리는 바 ‘외식적인 신앙’에 대한 경계를 힘써야 하겠다.
● 구브로의 살라미에 있는 바나바의 수도원에서 출판된 쿠마가 쓴 조그만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구브로 태생의 바나바는 처음에는 주님의 제자인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후 바나바는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나라로 선교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구브로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살해 당했다. 바가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시신을 살라미 교외에 있는 바위 절벽으로 박혀 있는 빈 무덤에 안장했다.”
그 무덤은 A.D. 477년까지 잊혀진 채로 아무도 모르게 남아 있었다. 그 해에 살라미에 있는 콘스타니아 주교인 안데미오의 꿈에 바나바가 나타나 상록수 밑에 있는 자신의 무덤을 보여 주었다. 그 다음날 안데미오는 바나바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무덤 안에는 바나바의 유해가 있었으며 그의 가슴 위에는 나가복음이 놓여 있었다. 안데미오는 그 복음서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제노 황제에게 보였다. 그리하여 안데미오는 황제로부터 구브로 헬라 정통교회라는 독립교회의 특권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예복, 홀, 그리고 황제의 붉은 인장도 선물로 받았다. 그때부터 구브로의 헬라 주교는 축제가 있을 때마다 황제의 이 예복을 입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전승에 의하면 바나바 사도의 유해는 아주 널리 분산되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프랑스의 뚤루에 있는 세르닌 교회당에 있다고 전해진다. “바나바의 시신은 그가 순교한 장소에 가깝게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센족이 침입해 온 7세기 경에 그의 머리는 밀라노로 옮겨졌고 후에 다시 뚤루로 옮겨졌다.”
코니베어와 하우슨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닌 바나바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바나바는 유대주의자이며 또한 오래 동안 복음을 전파했고, 바울과 함께 일한 것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주장은 타당성이 있는 이론으로 보아진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나바는 바울이 죽고 난 후 한 동안 로마에 가서 디모데가 석방될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바나바가 구브로에 다시 돌아와 거기에서 죽었다고 하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