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의 정의
통상 문화를 정의할 때 라틴어 cultura 를 활용하여 정의해왔다. cultura는 라틴어 꼴로 colo 혹은 꼴레레 colere 에서 나왔다. 꼴로 혹은 부정사형태인 꼴레레는 땅을 갈다는 뜻이다.
그래서 문화는 땅을 갈아서 곡식을 길러 먹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땅을 갈아 곡식을 내기 위해서 도구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생산한 곡식들과 채소와 과일들을 가공하여 새로운 형태의 식량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농사의 과정들이 진보하므로 문화로 정착하였다.
농사에 이어서 사냥에로 나아갔다. 농사만 하던 데서 짐승들을 잡아다가 식량을 삼고 길렀다. 사냥할 때 사냥기구들을 발전시키고 사냥해온 동물들을 길러서 집안 가축으로 만들므로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말한다.
그래서 원시민족들은 자연민족이어서 문화가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구상에 사는 민족들과 종족들 중에서 순수 자연민족은 없는 것을 판명되었다.
인류역사에서 문화는 사람이 밭을 갈기 전에 벌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따라서 아담이 모든 사물들에 이름을 지으므로 문화는 시작되었다. 아담은 고도의 지성적 능력으로 창조주가 창조한 세계 안에 있는 만물들의 이름들을 지었다. 이름을 지으므로 그 사물의 존재방식을 확정하였다. 사물들의 이름을 지으므로 그 사물들의 성질과 법칙을 알 수 있어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고 먹거리를 즐기는 과정을 겪었다. 아담은 문화인으로 살고 활동하였다.
그러면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모방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그 결과들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무에서 우주를 한 순간에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에 무한한 지혜와 권능을 넣어놓으셨다. 창조주는 우주에 무한한 가능성과 지식과 법칙들과 보화들을 넣어놓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이 보화들을 계발해내어 활용하기를 바라셨다. 사람이 창조를 계발하는 것은 창조에 들어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드러내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성으로 창조를 계발해내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드러나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보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를 이루어내시므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를 바랐지만 창조세계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창조지혜와 권능을 드러내므로 영광을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창조세계를 계발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르는 자들이 창조를 계발하여도 거기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드러나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보시는 것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를 계발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드러내기를 바라셨지만 또 창조 속에 넣어놓으신 많은 보화들을 계발하여 사람이 활용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여 활용하는 것도 문화의 정의에 속한다.
그러면 문화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계발하여 무한한 지혜와 보화와 지식을 드러내어 사람이 자기의 수준에 맞게 활용하는 모든 인간 활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 넓은 문화의 정의에 학문 활동이 먼저 들어간다. 학문은 인간세계를 포함한 모든 창조의 영역들을 탐구하여 그 본성과 법칙들을 앎으로 자연 세계에서 나아가 새로운 발전과 진보를 이루기 때문에 학문 활동이 문화가 된다. 이 학문 활동으로 사고와 생활양식이 변화되고 진보하기 때문이다.
또 문화에는 예술 활동이 포함된다. 예술 활동은 인간의 창조력을 가장 잘 구현하기 때문이다. 미술, 음악, 조각, 건축 등은 자연을 개발하여 형상화함으로 아름다움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화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 혹은 영을 현시하기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 외에 인간의 모든 활동을 문화라고 한다. 문화는 인간이 하는 창조적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노동, 교육, 군사, 농업, 축산 등이 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2. 문화명령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경륜을 가지셨다. 창조경륜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가지시고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를 정하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 사람과 언약을 체결하여 창조주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정하셨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를 바라셨다. 언약백성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탐구하여 계발하고 응용하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창세기 1장의 순서에 의하면 사람과 언약을 체결하시어서 자기의 언약백성으로 삼으시기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사명으로 땅을 가득 채우고 모든 생명체들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통상 문화명령으로 이해해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아담은 이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열심이 하였다. 하나님이 친히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들을 아담에게로 모아오셨다 (창 2;19). 아담은 하나님이 모아온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들을 지어주었다. 또 아담이 만나는 모든 동물들,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들을 지어주므로 그들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이 정해졌다.
아담은 그 예리한 지성으로 모든 생명체들에게 이름들을 지어주었지만 하나님의 창조 작정에 맞게 이름들을 지었다. 아담의 지성의 활동은 하나님의 지성의 주파수에 맞게 조정되어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만들어진 사물들의 본성을 바로 알고 정확하게 알아 그 사물들의 본성에 맞게 이름들을 지었다.
이름들을 짓는 것은 그 사물들의 본성에 맞게 이름이 지어졌으므로 그 사물들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을 확정한 것이 되었다. 아담이 사물들의 이름을 지은 후에 그 사물들은 언제든지 그 방식으로 존재하고 활동하게 되었다.
이름들을 지어 그 사물의 본성을 밝히 드러내고 알게 되었으므로 그 사물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사물들의 이름을 지은 아담은 그 사물들을 즐기고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아담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문화인이 되었다. 아담은 아직 집을 짓지 않고 먹을 것을 조리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조물들을 누리고 어거할 수 있었으므로 문화인으로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다.
사물들의 이름들을 지을 때만 그의 예리한 지성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본성과 성질들을 잘 알게 된 사물들을 사용하고 누릴 때에도 그의 예리한 지성으로 그렇게 하였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사탄의 지능이 6004정도로 추정하였는데 아담도 그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사물들을 활용하기 전에 그 사물들의 본성과 법칙을 열심히 연구한다. 사물들의 본성과 법칙을 알아야 그 사물들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 아담처럼 하나님의 지성의 주파수에 맞추어서 이름 짓는 것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릇된 이론과 가설과 이름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사물들을 연구하여 그 본성과 법칙들을 알아냈다고 하지만 바르게 활용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은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지고 이어졌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바쁘고 괴롭게 일하는 중에도 사물들을 탐구하고 알아내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전 세대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힘써왔다.
땅 위의 모든 종족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살아남음을 지키면서 조금이라도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문화는 도성을 짓고 안전하게 사는 것과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다.
그러나 죄성의 역사가 갈수록 힘세어져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점점 더 잊어버리게 되어 하나님 없는 도성을 건축하는 것을 목표하고 삶을 이어갔다. 이런 삶의 목표는 근세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고 현대에 와서 꽃을 피워 그런 문화가 해체에 직면하였다.
3. 하나님 없는 도성 건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고 (창 4:7-11), 하나님 앞을 떠나 놋 땅으로 갔다.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표를 받았어도 사람들이 많아지자,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 (창 4:16-17). 그 후에 그의 자손들은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다. 가축을 치고 수금과 퉁소를 만들어 음악을 도시 생활에 들여왔다. 그리고 두발가인은 쇠와 구리로 각종 기계들을 만들어 더욱 도시생활이 편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도성에 하나님은 없었다. 하나님을 버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졌다 (창 6:6).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지므로 폭력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들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소제해버리므로 인류가 멸절할 단계에 이르렀다 (창 6:11-13).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였어도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보존하시어서 다시 자기의 백성으로 돌이키기로 작정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기계들로 폭력을 휘뒬러 다른 백성들과 종족들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구원경륜을 이루실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악하여 다른 사람들과 종족들의 생존을 소제하려고 하는 자들을 벌하기로 하셨다.
홍수를 보내어 첫 인류들을 다 멸절하고 노아로 새로운 백성을 만드시기로 하셨다 (창 6:14-8:17). 아담의 첫 자손들이 물로 다 망하고 노아의 후손들에게서 새 인류가 나오도록 하나님은 정하셨다 (창 10:1-32).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도 다 반역한 아담의 후손들이므로 동일하게 악하였고 도시를 건설하여 자기들의 안전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땅을 가득 채워 큰 인류가 되고 창조를 개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런데도 폭력에 의해서 인류가 다시 홍수 이전의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통치권을 주셔서 세상나라들이 법질서 아래 살게 하셨다. 그래서 니므롯이 처음으로 통치권을 잡고 나라를 세워졌다.
그러나 홍수로 크게 놀란 노아의 후손들은 다시 홍수를 만나더라도 홍수로 멸망되지 않고 땅 위에로 흩어지지 않도록 바벨탑을 쌓기로 하였다. 이 궤계로 두 번째 인류도 땅을 채우는 일과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런 사람들의 기도를 막고 인류가 온 땅에 가득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런 바벨탑을 쌓는 기도가 무너지게 하셨다. 그리하여 말이 달라지므로 달라진 말대로 여러 종족들로 나뉘어 살게 하셨다. 이 종족들도 대부분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창 11:1-9).
말이 달라지므로 말이 다른 종족들 간에 미워함과 적대심이 많이 생겨서 서로를 정복하는 일이 민족들의 주된 관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들 간에 싸움이 늘 일어남으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일찍이 일어난 앗수르 제국은 많은 땅을 정복하고 넓은 나라를 세웠다. 15백년에서 19백년 가까이 나라를 이어간 강대국이었다.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 거의 전역을 다르시는 오래된 나라였다. 그 후에는 바빌론이 일어났지만 너무 강압적인 통치를 하므로 90년 만에 망하였다. 그 후에는 메데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넘어뜨리고 앗수르 제국이 다스린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근 2백년에서 그 이상 나라를 다스렸다. 이 나라는 매우 유화적 정책을 써서 본래 자기들의 나라에서 섬기던 종교와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 그리고 앗수르 제국 때부터서 잡아온 포로들의 일부는 자기들의 본래 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 페르시아 나라도 마게도니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알렉산더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하였지만 젊은 나이에 죽으므로 그의 나라가 네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
고대 중동에서 일어난 나라들 중에서 앗수르가 가장 오래도록 존속한 나라였다. 중간에 새로운 중흥시조에 의해서 다시 왕조가 바뀌어도 앗수르는 15백년에서 19백년 정도 존속하였다. 앗수르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 어둡지만 주전 4천년 경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천년대의 전성기에 말둑 (Marduk)을 주신으로 세우고 많은 잡신들을 섬겼다.
이들 고대 국가들은 전쟁과 살육으로 약탈을 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종족과 다른 나라들을 점령하여 그들을 노예로 잡아가고 정복된 민족들의 재산을 자기들의 나라로 가져갔다.
이런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고대국가들은 많은 신들을 만들어서 섬기면서 그들 중에서 주신이라고 하는 우두머리 신이 자기들의 정복을 정당화하고 그렇게 전쟁하여 이기도록 힘을 주고 명분을 주었다고 주창하였다. 이 민족들은 다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많은 신들을 섬기면서 그들 중에 우두머리 신을 최고신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 섬김을 버린 것을 그 방식으로 보상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국가들의 문화는 전쟁문화이고 우상을 섬기는 잡종교 문화였다. 이들 고대국가에서 다신교가 번창하였다. 많은 종교들이 새로운 창시자들을 만나므로 종교들이 다시 정비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열성을 빼면 언어와 철학과 문학적인 산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식량과 물을 빼앗기 위해서 열심히 전쟁하는 전쟁문화였다. 그리하여 군사전략과 군무기를 만드는 것에 정력을 크게 쏟은 전쟁문화였다. 새로운 정복자가 나타나 중동지역을 통일하면 그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언제나 정복되어 많은 백성들이 멸절되고 정복자들의 나라로 옮겨져서 종노릇하였다.
알렉산더의 출현 이전까지 그리스가 가장 문명화된 나라를 이루었다. 희랍어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언어들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정확하며 아름다운 언어로 인정되었다. 이 아름다운 언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할 것이다. 또 희랍 철학자들이 산출한 철학은 아데네를 인류의 지혜의 고향과 원천으로 만들었다. 이 철학이 생산한 여러 용어들은 기독교교리를 형성할 때 빌려다 쓸 수 있었다. 삼위일체교리를 확정할 때 사용하였던 희랍철학에서 빌려왔던 실체, 동일실체, 위격 혹은 인격 등은 희랍철학에서만 빌려다 쓸 수 있는 특별한 용어들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위퍼는 우리가 희랍 로마인들의 어깨 위에 서있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특별히 플라톤의 철학은 약 15백년간 서양인들의 사상을 지배하였다. 선의 이데아를 최고신으로 삼는데서 성경의 유일신 교리에 접근함을 보았다. 그리고 플라톤의 창조론을 힘입어 기독교의 창조교리를 힘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희랍철학이 인간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사상으로 여겨져서 희랍문화를 아는 사람들은 문화인 곧 헬라인으로 자처하여 대단한 뽑냄을 드러냈다. 헬라인들의 높은 문화 때문에 기독교는 저급한 종교로 취급받았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변증가들이 희랍철학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희랍철학을 활용하므로 기독교와 정면 배치되는 철학적 내용들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까지 되었다. 영원한 물질로 신이 세계를 처음 창조했다는 창조교리, 영혼은 이미 창조되어서 신들의 세계에 살다가 땅 위로 왔다는 영혼선재설, 물질은 악하고 천한 것이므로 구원은 영혼이 몸을 벗어나서 신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또 시간을 영원의 그림자라고 하는 희랍철학의 주장은 시간이 창조와 함께 시작하여 목표점을 향해서 가는 것이라는 성경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노시스주의 같은 이단은 초기 기독교의 존립을 어렵게 하였다.
기독교가 시작할 때 희랍철학으로 신학을 표현하고 변호하는 일을 한 것이 기독교역사 내내 철학으로 신학하는 것을 벗어버릴 수 없게 하였다. 철학에로 복음을 번역하는 것을 바른 신학함이라고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철학에로 신학을 번역해 넣는 일로 인해 20세기 중반부터 성경적 기독교가 완전히 망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4. 거듭난 의식으로 문화활동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까지 인류는 하나님을 반역한 백성들로 죄인의 의식 혹은 자연인의 의식으로 문화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을 반역한 반역자들로 문화를 전개하였다.
첫째로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모든 의식과 활동에서 배제하였다.
모든 사상과 문화와 예술 활동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은 이름도 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국가들을 새롭게 시작할 때 귀신들이 역사하여 그 나라들의 생활습관과 법을 정할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둘째로 종교생활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기 위해서 많은 잡신들을 만들어서 섬기면서 사람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만족시켰다. 그러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당위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우두머리 신을 만들어 않은 잡신들 위에 두었다.
셋째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기 위해서 물질세계를 악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가 할 일은 영혼이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르치고 장려하는 것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모든 생활영역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러면서 귀신들과 사탄을 섬기는 것을 인간의 바른 본분으로 삼고 살아왔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과일과 곡식과 채소와 물고기 동물들을 먹으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은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래도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에다 자기의 권능과 신성을 알게 하는 빛을 늘 비추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도 역사하시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의식 밑에서라도 느끼게 하셨다.
이런 인류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경륜을 성취하기로 하셨다. 하나님을 반역하여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한 백성들을 다시 돌이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로 하셨다. 그러려면 하나님은 첫 반역죄를 무효화하셔야 했다. 첫 반역죄를 무효화하는 길은 반역죄의 죄 값을 지불하도록 함으로만이 무효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죄가 범해진 본성에서 죄값이 지불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이 말은 죄값은 사람이 지불해야함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는 아무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기로 하셨다. 이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 곧 아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의 자리에서 죄값을 지불하기로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의 자리에 오셔서 인류의 반역죄를 무효화하는 죄값을 지불하심으로 반역한 인류와 하나님은 화해하셨다. 반역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죄값을 지불하여 하나님과 화해하므로 새사람이 되었다.
새사람이 되므로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반역한 인류 종족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돌아가므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므로 새로운 거듭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된 사람들은 다 거듭난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새로운 의식으로 문화 활동을 하도록 정해졌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문화 활동을 할 때 전적으로 변화된 의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 활동을 할 때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세 기본주제에 의해서 활동해야 한다.
기독교가 처음 생겨난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된 거듭난 의식으로 신학과 문화 활동을 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문필활동을 하거나 기독교복음을 전할 때 인류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이라고 할 희랍문화가 당시 헬라로마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변증가들이 기독교신앙의 합리성을 변호하기 위해서 희랍철학을 원용하기로 하였다. 최초의 변증가인 유스티노스 (Ioustinos, Justine)는 본래 철학자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가 가장 합리적인 철학체계라고 보아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변증할 때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의 철학을 활용하였다. 플라톤이 창조를 가르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플라톤이 모세의 글에 접근하였고 또 애굽에서 예레미야의 글을 접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에서 전능한 창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철학대로 이미 있는 영원한 물질로 현상들을 조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신학의 모든 국면을 로고스로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로고스가 전체로서 성육신하여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하여 이성으로 사는 모든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들로 표기하였다 (2 apol., 10). 유스티노스, 저스틴은 희랍철학과 기독교간의 과격한 차이를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희랍철학으로 기독교신학을 설명하기로 한 이후에 반대도 심하게 일어났다. 텔투리아누스는 철학과 복음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철학과 복음이 먼 것은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먼 것과 같고 동이 서에서 먼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번 철학의 사용이 도입된 후에는 철학의 사용을 없앨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는 희랍철학을 대거 교회로 유입하였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의 요리문답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희랍철학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도록 노력하였다.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일자 혹은 단자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안에 있던 로고스가 출생하여 아들이 되었는데 아들을 아는 것은 지성으로 명상함으로만 된다고 하여 희랍인들의 지성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로고스의 사역을 주로 교사로 보았다 (Stromata, VII, 7). 그러므로 로고스의 주된 사역은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무지로 타락이 발생하였으므로 지식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교사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Paedagogus, I, 6). 또한 성경을 우화적으로 가르쳐서 유혹자 뱀은 실제 뱀이 아니고 배 속에서 일어나는 쾌락으로 보았다. 타락은 욕망에 져서 불순종하므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덕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주 임무라고 하였다 (Paedagogus, I, 1). 그리스도는 교사이면서 인류의 참 의사이므로 영혼과 육체를 고친다고 보았다 (Paedagogus, I, 3).
오리게네스는 클레멘트를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의 요리문답학교 교장으로 오래 일하였는데 희랍 (希臘(희랍))철학을 과도히 신학에로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이단적인 요소를 많이 드러냈다. 가령 영혼의 선재, 물질세계의 창조가 영혼의 타락에 대한 벌이라고 한 것과 세계의 영원한 창조, 그리스도의 영혼의 선재, 종말에 사단도 원상에로 회복한다고 한 것, 또 신자들이 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말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신자들이 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가르침을 하여 553년 3차 에큐메니칼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종속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오리게네스가 신학체계를 정립한 후에는 모든 것이 신학 아래 매이게 되었고 신학은 철학으로 하는 것이 바른 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아다나시오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으로 신학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성경으로 신학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되었다. 특히 아다나시오스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이고 거기서 알렉산드리아의 대교구장이 되었으므로 오리게네스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어도 철학을 멀리하고 오직 성경과 신앙으로 바르게 신학하여 정통 삼위일체교리를 확립할 수 있었다. 아다나시오스의 모든 신학적 활동은 아들 곧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동일실체이고 아버지의 신성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한 하나님이라는데 집중하였다. 아들이 성경대로 아버지와 동일실체라는 니카야 교리를 변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교회에서 일어난 최대의 교부이다. 그도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의 철학의 영향을 크게 입었다. 또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점차 희랍철학의 영향을 벗어나서 성경대로 신학하여 삼위일체교리를 결말하고 기독론 교리의 확립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교리를 전개할 때 철학적 도식보다 성경주석의 방식으로 개진하였다.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하므로 희랍철학으로 기독교신앙조항들을 설명하는 것을 벗어났다.
특히 모든 현상을 플라톤의 철학으로 설명하던 데서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였다. 가령 사물의 변화를 희랍철학은 시간에다 돌렸는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하므로 기독교문화가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모든 현상을 설명할 기독교적 틀을 세웠다. 비록 중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희랍철학의 요소들을 합하여 신학하는 것을 바른 법으로 정착되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기초 놓은 것을 빼고는 중세 기독교문화를 생각할 수도 없다.
중세 신학과 철학은 11세기 초엽 안셀무스가 믿음은 해명을 구한다는 명언으로 시작하였다. 안셀무스는 모든 신앙항목들을 이성으로만 해명하기로 하므로 이성으로 혹은 희랍철학으로 신학하는 것을 필수적이게 하였다.
이 결과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으로 나타났다. 토마스는 12세기 구라파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잘 소화해서 기독교 신학을 구성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토마스는 희랍철학으로 기독교신앙을 설명하면서 성경도 함께 참조하여 스콜라신학을 체계화하였다. 그 결과로 로마 교황의 지도아래 구라파가 통일되고 한 교회와 한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 불안한 조화가 깨어지므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와 칼빈 두 종교개혁의 거인들이 다 철학과의 조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철학적 사변보다 말씀의 가르침에로 돌아가서 교회와 신학을 개혁하였다. 두 거인 다 철학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의 주권성에 부착하였다.
칼빈은 철학으로 신학을 설명하는 것을 전적으로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대로만 신학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철학은 성령의 설득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만큼 성경중심 곧 하나님의 계시 중심적으로 모든 신학과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신학내용들만을 성경대로 정립한 것이 아니라 시민정부와 문화 활동에 대해서도 개진하였다. 그러므로 완벽한 성경적인 기독교문화를 창조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칼빈은 이방인들의 문화 활동과 불신자들의 학적 활동을 통하여서도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은 다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 활동을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종속시킬 것을 제시하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마무리 되고 종교개혁이 얻은 신학적 획득과 자산을 다시 해명할 때 루터교회와 개혁파가 꼭 같이 다시 스콜라 철학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활용하므로 개신교스콜라주의 시대를 통과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신학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의 빛과 일반계시를 다시 참조하였다. 그런데도 그 내용은 성경적으로 신학이 구성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정통주의 시대를 지나 18세기에 도달하였을 때는 합리적 전통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신학과 모든 학문 활동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기로 하였다. 사실상 모든 학문과 예술 활동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떠나기로 하였다.
근세의 아버지라고 하는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학문을 이성으로만 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전적으로 벗어나기로 하였다. 특히 18세기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칸트는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한 이후에 모든 인간의 학적 활동은 경험만을 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감각기관으로 경험할 수 없는 계시나 하나님의 존재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식에서 배제하였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지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만 지식을 국한하므로 초자연적 지식이나 초월적 세계는 인간의 의식에서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 뒤를 이어 철학한 헤겔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자 혹은 절대정신으로 단정하여 인류역사에서 진행된 모든 것을 절대정신 곧 이성의 자기전개로 주장하므로 초월해 계신 하나님과 그의 계시는 학문 활동과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모든 학문과 인간의 활동이 완전히 세속적이 되었다.
이렇게 철학이 완전히 세속화의 방식으로 변화되므로 철학에 의존해서 신학을 했던 신학적 사고들이 다 자연세계에만 국한하게 되었다. 철학에서 규정한대로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한계개념일 뿐이므로 신학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신학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배제하였으면 일반학문에서는 어떠하였겠는가? 이런 과정의 연장에서 19세기 말 니체는 신 죽음을 선언하였다.
이런 정신적 상황에서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하나님 없이 모든 학문 활동을 자연주의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자연주의적 해석의 틀을 제공하였다. 생명의 기원과 발전을 다 자연주의적인 진화론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창조는 인간의 모든 활동분야에서 더 이상 자리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은 작용가설로서도 일반학문에서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뿐이게 되었다. 초월의 세계도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나님이 이 시공세계로 들어올 수 없도록 근세인들은 완전한 방어 장치를 하였다. 가인이 시작한 하나님 없는 도시 건설이 완료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로마교회가 신학적으로 대변신을 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존재자체를 하나님으로 세웠다. 19세기 헤겔의 말대로 존재자체는 무이다. 그러면 로마교회는 존재자체 곧 무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종교가 되었다. 이 새로운 신학에 근거하여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로마교황을 전 세계종교들 위에 교황으로 만들려는 허황된 꿈으로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채택하고서 세계종교들의 위에 교황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로마교회자체가 전적으로 해체되는 벼랑에 서있게 되었다. 교회자체의 존립 자체가 완전한 해체의 위협에 놓여있다.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회의 신학도 더 이상 기독교신학일 수가 없게 되었다. 구라파에서는 신학에 관한 한 배도가 완료되었다.
이렇게 신학이 완전히 변하므로 구라파인구의 1.5%에서 2%정도가 주일날 교회에 나간다. 구라파에 떼지어 몰려와있는 모슬렘들은 인구의 8%에 도달하여 구라파는 이미 이슬람대륙이 되었다.
교회지도상으로는 미국은 그렇게 구라파처럼 참담하지는 않다. 80년대 초에 미국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인구의 40%였는데 지금은 36%까지 내려와 있다. 수적 통계로는 그러하나 신학은 구라파 교회들의 신학과 대동소이해지고 있다. 한동안 오순절운동의 영향으로 교회들이 새롭게 부흥하는 것 같았으나 신학의 부재로 오순절 운동이 거의 소산되고 있다.
그러는 중에 모슬렘들이 기를 쓰고 미국으로 몰려가서 1970년대에는 10만의 모슬렘이 있었는데 1990년대에는 9백만의 모슬렘으로 불어났다. 다시 20년이 지난 지금은 수천만의 모슬렘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모슬렘들은 한 가지 목표를 굳게 정하였다. 미국의 헌법을 이슬람의 법인 샤리아 (sharia)로 바꾸어 미국을 완전한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수천만 아니 1억 정도의 인구가 몰살될 수 있을 것이다. 7세기 이슬람이 일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슬렘들이 칼과 코란을 들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5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런 모슬렘들이 미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해서 인구를 소제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한국의 상황도 미국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학교 교단마다 다 점령하여 구라파의 교회를 망하게 하였듯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는데 그 시간은 한 세대정도가 걸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보수교회도 복음 선포는 별로 하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추구에 힘을 크게 썼고 복음대신 세상적인 복의 선사에 힘을 기울이므로 교회가 바른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특별히 지성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다.
미국은 수천만의 모슬렘 인구를 가져도 이제 이슬람 단과대학을 준비하는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이슬람 종합대학을 세우는 준비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이슬람펀드를 도입하여 온갖 세제혜택을 다 주어서 이 자금을 운용하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다. 이 스크쿠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이슬람 돈이 천문학적 숫자로 들어오므로 모슬렘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되어 그 자금을 운용하여 포교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5.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사명
영국의 한 사회학자가 예언하기를 3대 흐름이 21세기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첫째가 종교적 근본주의로 이슬람근본주의를 꼽았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지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문화주의가 지배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과학기술을 지배하는 철학이 지배한다고 말해야 합당하다. 그것은 진화론과 자연주의적 우주발생론이다. 곧 요사이 열심히 유행되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발생했다는 빅뱅이론이라고 할 것이다.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하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가 진화론을 유일한 설명의 틀로 갖고서 과학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생물학과 관련된 과학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5%밖에 되지 않고 물리학계통의 분야에서 일하는 과학자들 중에서는 8%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통계가 나왔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거나 전제하는 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아니라고 하여 완전히 학적세계에서 배제한다. 그 독재와 횡포는 말도 못한다. 진화론을 학문하는 틀고 가져야 과학자로 인정한다. 창조신앙을 가졌으면 대학의 교수로 결코 취직할 수 없고 취직했더라도 계속해서 가르칠 수가 없게 되어있다.
진화가 시작되었다는 단 하나의 사례도 만나지 못하였고 물질에서 유기체에로 그 다음 생명체로 넘어간 사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만이 생명의 기원과 진보의 유일한 설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진화가 과학적으로 불가능함이 모든 학적 분과들에서 자료적 증거들을 제시하여도 그런 것은 진화론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계의 절대다수가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생명은 창조되었고 고안되어 생산되었다는 수천만의 증거들을 제시해도 그런 것은 학이 아니라고 하여 전적으로 거부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하나님의 생명창조 대신 진화론적 생명발생을 바른 학으로 인정하는 단계에서 우주의 발생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바른 학으로 인정하는 단계가 되었다. 다윈 이래 생명체가 진화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우주의 기원과 생성이 무에서 스스로 이루어졌다는 소위 빅뱅이론 곧 큰 뱅 이론이 모든 학문 활동의 기본원리로 자리 잡았다. 모든 과학적 관찰과 증거들이 다 하나님의 우주창조를 증거하고 확증하여도 세속 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전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과학세계에서 인간사회로 우리의 주의를 옮겨오면 다문화주의가 자리를 잡은 이래 종교다원주의가 번창하여 기독교를 다 몰아내고 이슬람이 전 세계를 석권하려고 하고 있다. 로마교황청이 2010년에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로마교도들이 11억 3천이고 이슬람이 13억이라고 하였다. 로마교도들의 인구가 그렇게 많은지는 몰라도 모슬렘들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슬람의 법 샤리아에 의하면 코란에 모하메드가 가르친 대로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전할 때 거부하면 불신자라고 하여 칼로 목을 쳐서 죽이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그렇게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이슬람에 들어갔다가 싫어서 나오면 배도자라고 하여 그 자리에 칼로 목을 베어죽이게 되어있다. 그렇게 죽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지난 백년간 모슬렘이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죽인 수가 7세기 초엽 이슬람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19세기까지 죽인 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통계가 나왔다.
7세기 소아시아 지금의 터기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였다. 모슬렘들이 소아시아에 진격하여 거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다 몰살하였다. 11세기 경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터키족들이 터키에 들어왔을 때 또 남은 그리스도인들을 다 죽였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만일 모슬렘들이 정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지금 로마교도들보다 수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본다.
구라파에서도 대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는데 759년 샤를르 대제의 할아버지 샤를르 마르텔 (Charles the Hammer Martel)이 모슬렘의 진군을 막아서 구라파에서 그리스도의 대량학살이 멈춰졌다.
이제는 모슬렘들이 폭력과 자살폭탄 테러의 방식을 병행하면서도 인구를 대폭 구라파로 유입시켜서 유럽을 완전 이슬람화 하려고 하고 있다. 현 추세대로 간다면 개혁신학의 나라인 네델란드가 제일 먼저 이슬람화 될 공산이 크다. 그 다음은 불란서가 될 것이다. 벨기에와 영국과 독일도 이슬람화 되는 것이 멀지 않다. 그리고 미국을 이슬람화의 최대목표로 정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미국이 이슬람화 되면 전 세계가 이슬람화 된 것과 같다.
이런 21세기 세계 상황에서 우리 개혁교회가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한다. 우리가 문화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개혁신앙을 주셨으니 이 믿음으로 담대하여 문화적 사명을 이루어야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종교다원주의와 대항해서 싸워서 개혁파 기독교를 유일한 구원종교로 굳게 세워야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시므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어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므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에로 구원해내셨음을 늘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해야한다. 우리 개혁교회는 우리 복음의 핵심을 늘 중단없이 전파해야한다. 이 복음 선포에 성령이 역사하시므로 이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되고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 속에 살므로 아무런 동요를 겪지 않을 수 있다. 변함없이 우리의 개혁신앙을 굳게 잡고 현대신학과 결코 타협하면 안 된다.
이럴 경우에만 이슬람의 무서운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 이 개혁신앙의 선포로 모슬렘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유일한 구원종교로 굳게 세우므로 배도에로 넘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성경적인 기독교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를 늘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파하므로 진화론을 물리칠 수 있다. 만물의 유래를 하나님의 창조에로 바로 귀속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진리이고 사실이다. 진화론은 완전한 거짓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으므로 그로 인해서 형벌받을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부정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지지 않으려고 진화론을 만들어서 그 거짓 가설을 학이라고 맹맹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개혁신앙과 신학으로 젊은 청년들을 잘 가르치고 무장하여 과학자들이 되게 하여 진화론의 부당함을 늘 공격하고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진화론이 주장하는 진화의 사실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없는 억지해설이라는 것을 파헤쳐야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의 구조가 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밝혀서 보여주어야 한다.
오랜 세월을 거쳐 즉 수십 억 년을 지나면서 물질에서 유기체로 생명체로 진화했다고 주장한 과학자들이 이제는 순간 진화로 사람의 두뇌에로까지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우주의 연대를 130억년에서 150억년까지로 늘려 잡은 것이나 지구의 연대를 46억년으로 늘려 잡은 것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 진화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숫자를 조작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진화론의 핵심주장을 뒤집어 순간진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님의 창조를 늘 가르치고 주장하여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개혁교회는 늘 강조해야한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수 천억개 이상의 별들, 지구와 지구 위에 있는 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로만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늘 가르치고 강조해야한다.
로마교황은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진화론과 타협하였다. 진화론은 전적으로 사기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우리 개혁교회가 진화론과 타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단순한 창조로 만물이 생겼다고 믿으면 과학자들이 우리를 낮은 단계의 지능을 가졌다고 여기므로 진화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가르침 받은 젊은이들로 물리학과 천문학, 지구과학과 생물학 등 모든 분야의 과학을 하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바른 우주발생의 설명임을 학적으로 제시하고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요사이 전 세계 과학자들의 학적활동의 틀이 된 빅뱅 이론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야한다. 이 빅뱅이론에 의하면 무에서 기체 같은 물질이 스스로 나와서 한 군데로 뭉쳤다가 터진 것이 빅뱅이라고 주장한다. 가스들이 뭉쳐서 너무 무거우므로 폭발했다는 것이 빅뱅이다. 이 빅뱅이전 단계로 물질이 무에서 스스로 나와서 한 곳에로 모인다는데 무엇이 그 가스들을 한 곳에로 모으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또 가스들이 뭉쳐서 너무 무거워지므로 폭발하였다는데 그 폭발된 파편들이 흩어져 나가다가 별들을 만들기 위해서 모여섰다는 데 어찌 그런 역학적 구도가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과학자도 설명을 제시한 것이 없다. 과학자들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별을 하나 만들고 별들의 떨기를 만드는 것도 아무런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캠브릿지의 천체물리학자인 스티브 호킹이 수학공식을 제시해서 상상도를 만들어내므로 빅뱅 이론이 바른 학인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정착한 것뿐이다. 아무도 빅뱅과 관련된 것을 보지도 못하였다. 그런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런 거짓이론을 널리 펴친 호킹은 우주발생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은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호킹은 우주발생을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목록에 넣었다.
모든 이방 거짓 종교의 세력과 과학적 주장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개혁신학뿐이다. 이 신학에 굳게 서고 그대로 살면 우리도 이런 세속문화를 물리치고 성경적인 기독교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다. 전능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우리의 시대적 사명을 깊이 새겨서 기독교문화를 창출해내기로 작정하고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기독교문화 아니 개혁신앙의 문화를 만들어내어 이 세계를 혼란과 충돌에서 구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엽 화란의 대 신학자이고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위퍼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확신하고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사회의 각 영역에서 세우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였다. 처음 교육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워져야한다고 하고서 기독교 학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이 성공하자 학문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고서 1880년에 암스텔담에 자유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가 세워진지 50년 쯤 되어 그 학교의 교수들에 의해서 기독교 철학이 세워졌다.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 수립이 잘 진행되어 성경대로 학문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 다음 정치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워져야한다고 주창하고서 정치에 뛰어들어 이름뿐이고 아무런 조직이나 인적 자원이 없는 반 혁명당을 재건하여 국회에 진출하였고 수상이 되어서 개혁신학에 근거한 정치를 펼쳤다.
그 다음에는 경제와 노동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노력하여 공산당 혁명이 오기도 전에 노동자들을 경영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 카위퍼의 기독교 문화 창출 활동을 우리의 문화적 사명 수행에 귀감으로 삼을 수 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maZ&articleno=15718144&categoryId=744228®dt=20120502231517&totalcn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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