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한국보수신앙의 수호자에 관한 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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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형룡의 교육적 배경

 

 박형룡은 1897년 음력 3월 28일,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벽동읍에서 박기수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해서 박형룡은 선천과 평양에서 공부할 때에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박형룡은 서당에 다니다가 그 후에 기독교 이념으로 세워진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열여섯 살에 신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현대식 중등교육을 접했다.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박형룡은 평양 숭실전문에서 공부하다가 중국 난징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에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 신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박형룡은 전통적인 유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박형룡은 유교 자체가 인류 윤리 진작에 공헌한 점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구한말 유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박형룡은 원래 유교는 유일신론을 갖고 있는 고등종교였는데, 음양사상, 귀신론 등이 들어오면서 타락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박형룡이 어렸을 때 받은 유교적 교육은 그의 삶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벽동군 벽동읍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동시에 이교회의 부설기관인 신명학교에 다녔다. 박형룡이 벽동읍 교회에 출석할 때에 “예수 천당” 으로 유명한 최봉석(최권능)이 조사(전도사)로 활동을 했었기에 어린 박형룡이 최봉석에서 얼마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박형룡이 어렸을 때에 목격한 신유사건은 이적에 관한 박형룡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형룡은 선교사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복음적 신앙을 배웠다. 박형룡의 아들인 박아론은 박형룡의 형제들이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박형룡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1910년 무렵 회심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지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박형룡이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목격한 대부흥운동의 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형룡은 1913년 4월부터 1916년 3월까지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16년 4월부터 1919년 겨울까지는 평양에 있는 초급대학인 숭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신성중학교는 양전백, 김석창, 노정관이 1906년에 세운 기독교 학교이며 후에 미국 선교부의 지원과 미국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교사를 지어서 운영하였으며 신성중학교의 교육이념은 한 마디로 ‘기독교적 민주주의’였다. 당시 미국 북장로교선교부는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고, 그 복음에 입각해 구습 타파, 민주주의 전파, 사회개혁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교육이라고 믿고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 당시 신성중학교의 교사였던 양전백, 강규찬, 홍성익은 박형룡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양전백과 강규찬은 목사이며 홍성익은 장로였다. 박형룡은 1915년 설날에 양전백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강규찬 목사를 스승이라 부르며 존경했으며 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강규찬 목사가 시무하는 평양 산정현 교회의 부교역자로 일하기도 했다. 박형룡은 홍성익 장로에게는 신성학교에서 조직적인 성경교육을 받았다.

 

 1916년 봄, 박형룡은 평양 숭실전문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은 당시 조선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최고 학부였으며 교장과 이사는 모두 미국인이었다. 박형룡이 숭실에 입학할 때에는 나도래 선교사가 교장이었다. 1918년에는 마포삼열이 교장이 되었다. 마포삼열은 박형룡이 숭실전문을 졸업하자 중국의 금릉대학으로 박형룡을 추천하고 장학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박형룡은 선교사들에게서 당시 복음주의자의 신학, 신앙적 특성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숭실의 선교사 교수들은 부흥회 운동과 복음 전파를 통한 구령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숭실의 교수들은 조선의 사회개혁에도 관심이 많았다. 선교사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사상을 전파하고 봉건적인 구습과 악습을 개량하며 사회를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서구의 발달된 과학과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일제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임을 알고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박형룡이 숭실전문 졸업반인 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숭실전문 4학년인 23세의 박형룡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당시 졸업반이었던 박형룡은 다른 학생들을 주동하였다.

 당시 평양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 민중의 편이었다. 이들은 심정적으로 독립운동에 동조하고 세계 여론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일을 돕기도했으며, 일본 경찰에 쫓겨 다니는 학생들을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박형룡도 숭실 설립자인 배위량 선교사 집에 숨어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박형룡은 1920년 4월 9일, 숭실전문과 중학생 연합부흥 전도대 강사로서 목포에서 연설을 했다가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체포되어 약 10개월(1920. 4.9-1921.2.11.)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숭실전문의 학장이며 평양신학교의 교장인 마포삼열 선교사는 출옥한 박형룡에게 유학을 권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유능하고 신앙 좋은 조선 청년을 공부시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포삼열은 가난한 박형룡의 유학 경비를 마련해 주었다. 신학을 공부하기에는 미국이 적격이겠지만 박형룡은 학사학위(B.A)가 없었기에 대학을 마쳐야했다. 결국 박형룡은 중국 난징 금릉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나서야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박형룡은 난징 금릉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해 2년 후에 졸업했다. 박형룡은 난징에서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혔다. 특히 난징에서의 생활을 통해 조선도 기독교를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난징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박형룡은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했다. 박형룡은 1923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만 3년 동안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후에 신학사(Th. B.)와 신학석사(Th. M.)학위를 받았다. 특히 박형룡은 변증학을 전공하여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불과 3년만에 해냈다. 미국 학생들도 힘들어 하는 과정을 동시에 이수할 정도로 박형룡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여기서 그는 변증학을 전공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특히 메첸(J.G. Machen)과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

 프린스턴에서 공부를 마친 박형룡은 1926년 켄터키주 루이빌에 소재한 남침례신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해 1933년에 철학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박사학위는 2년 과정이었는데 적어도 1년(32주)은 학교 안에서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은 교수의 허락을 받아 학교 밖에서도 연구할 수 있었다. 박형룡은 남침례 신학교에서 약 10개월간 공부한 후에 1927년 7월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박형룡은 한국으로 돌아와 논문을 작성해 미국으로 보낸 후에 1933년 1월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형룡은 남침례 신학교에서도 변증학을 전공했다. 박형룡은 전공과목으로 카버(Carver) 교수의 ‘변증학’을, 부전공과목으로 멀린스(Mullins) 교수의 ‘신학’과 가드너(Gardner) 교수의 ‘종교심리학,을 택했다. 박형룡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위의 세 교수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박형룡은 종교와 과학에 대해 프린스턴 신학교의 메천과 남침례 신학교의 멀린스 중 누구의 의견을 좇았을까? 박형룡은 프린스턴의 관점을 따랐다. 남침례 신학교에 제출한 학위 논문에서도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 성경을 우위에 놓고 담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성경은 과학과 다른  입장에서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 둘째, 성경에는 과학적인 큰 결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박형룡은 역사와 자연에 관한 성경 기사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현재 성경의 사실이 모순으로 보여도 과학이 발달하면 반드시 그 모순이 해결되고 성경의 진리가 드러날 것이라 보았다. 셋째, 성경이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경 저자가 과학자의 시각으로 성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들은 모두 프린스턴과 일치한다. 박형룡은 남침례 신학교 멀린스에게서 성경과 과학과 관련된 영어만을 빌려 사용했던 것이다. 박형룡은 멀린스의 인격주의적 신학의 틀을 철저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박형룡은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과학적 발견들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과학적 발견들이 성경의 진리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후기의 박형룡은 진화론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과학과 성경의 조화를  꾀하려는 ‘신복음주의’를 “잘못 아는 형제들이거나 열렬하지 않은 이단자들”이라고 혹평했다.

 박형룡의 초기 저작들은 대체로 복음의 사회적 함의에 대해 열려있었다. 아마도 남침례 신학교의 영향일 것이다. 초기 박형룡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온건한 사회참여를 용인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신복음주의’에 반대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극단적으로 반대했다. 박형룡은 빌리 그레이엄을 ‘신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라며 반대했으며 마틴 루터킹 목사를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박형룡은 프린스턴과 남침례 신학교에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성경비평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박형룡은 [근대기독교신학난제선평]에서 진화론과 과학에 대해 어느정도 호의적이었고 그 객관적인 결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성경비평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박형룡은 남침례 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프린스턴의 입장을 따랐다. 남침례 신학교의 신학과 변증학 체계에 동조하지 않은 것이다.

 박형룡의 논문과 초기 저작에는 남침례 신하교의 학문적 입장의 단편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프린스턴 전통 위에서 남침례 신학교 변증학의 결과물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2. 한국 교회 신앙의 확립자

 

 박형룡은 1927년 여름에 귀국했으며 그해 8월 신의주로 가서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목회를 도왔다. 그 후에는 평양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8년 5월 10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싶었던 박형룡은 드디어 그해 가을부터 임시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30대에 접어든 젊은 신학자 박형룡은 한국 교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우선 과학과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해 기독교의 진실성을 변호해야 했다. 기독교가 과학적으로 결코 미신적이거나 뒤떨어진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변증해야 했으며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 조국을 구원하고 민족에게 도움을 주는 종교인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30대의 젊은 학자인 박형룡은 우선은 변증학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학문이 점차 성숙해지면서 신학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아들 박아론의 말처럼 “박형룡은 변증학자로 시작해 신학자로 마친”학자였다.

 

 박형룡은 워필드, 그리인, 메천 등의 프린스턴 신학자와 변증학자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박형룡은 변증학의 방법론에서,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서, 철학적인 기반에서, 과학에 대한 태도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적대감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기독교를 보호하려는 열정에서 프린스턴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해석의 유연성을 생각할 수 있는데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당시의 근본주의자와 달리 근대 과학의 업적을 인정한 결과 성경을 유연하게 해석했다. 박형룡도 그러하였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당시의 지질학, 생물학적 발견들을 받아들이면서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박형룡도 천문학의 업적들을 인정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3층 세계상(하늘, 땅, 음부)을 실재가 아닌 은유로 해석했다.

 박형룡은 “성경적 우주상을 정립하지 않는 편이 낫다. 성경의 참고 구절들이 충분하지 않고 성경에서 우주는 시적인 용어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형룡은 워필드의 입장과 유사하게, 유신진화론의 과학성을 의심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해서 ‘신복음주의’의 문제를 비판할 때도 박형룡은 유신진화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유신진화론이 성경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 신복음주의자 버나드 램, 카넬을 강하게 반대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명령의 말씀으로 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진화론을 끌어다가 창조 기간을 수백만 년으로 늘려놓고도 성경과 배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니! 이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라고 했다. 이제 박형룡은 유신진화론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반대하고 문자적인 해석 외의 모든 해석을 자유주의적 해석으로 본 것이다. 전기의 박형룡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아무튼 박형룡은 평생을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정통 기독교를 옹호하는 데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의 박형룡은 타종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여유있고 자신있게 나타냈다가 후기에는 [이교와 타협하는 선교의 사신](1961)과 [이교에 대한 타협의문제](1966)라는 두 편의 논문에는 초기 박형룡의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박형룡은 이 두 편의 논문에서 과거의 부드럽고 담대한 태도가 아닌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로 기독교를 방어했다. 그는 논문의 결론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에 타협이 아닌 충돌과 정복의 태도로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박형룡이 타종교에 대해 이와 같이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자유주의’ 신학과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선교협의회(IMC)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둘째, 한국의 토착화신학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박형룡은 복음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없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으로 토착화 신학을 반대했다.

 셋째 비교종교학이 기독교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넷째, 1960년대 한국 교회의 상황 때문이다. 박형룡과 그의 추종자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자유주의로 보았으며 국제선교협의회(IMC)는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이었기 때문이다.

 

 박형룡이 쓴 [근대기독교신학난제선평]은 총 18장 847쪽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으로 당시 한국 신학자가 쓴 몇 안 되는 본격적 신학서 가운데 하나로서 [근대기독교신학난제선평]의 가치는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반기독교적 혹은 신신학 사상들을 정리하고 이를 정통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비판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박형룡의 전략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바로 서구  기독교 체계와 그 용어를 사용하여 한국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박형룡의 이러한 방법은 후일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미국 기독교의 시각에서 분석 해석하게 했고, 미국 교회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을 통해 분열한 것처럼 한국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30년대 성경관을 둘러싼 논쟁에서 박형룡은 김재준, 송창근 등과 같은 소위 ‘자유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이들을 평양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김재준은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 사이를 방황하는 구도자였다. 고등비평의 결과를 수용했지만 정통적인 교리와 초자연적인 성경 기사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 영감설’과 ‘성경 해석방법론’을 구분하지 않았고 문자적 해석만이 유일한 참된 해석이라고 믿었다. 김재준은 성경의 유오, 그에 따른 자유로운 비평, 그리스도에 기초한 사상영감설을 택한 것이다.

 

 

3. 한국 교회 신앙의 수호자: 신사참배

 

 박형룡이 처음으로 신사참배 문제에 연루된 것은 1936년 초였다. 평안남도 지사인 야스다케는 1935년 11월 14일에 평안남도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모든 학교가 신사참배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숭실전문 교장인 윤산온 선교사를 비롯한 3개 학교의 대표는 신앙과 양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피해 1938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하여, 1942년 8월까지 동경에서 표준주석 집필에 전념하였고, 그 후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1947년 7월까지 만주신학원(동북신학교)에서 강사, 교수를 거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해방이 된 후에도 박형룡은 즉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약 2년 간 만주에 머무르며 신학교를 재건하려고 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유일한 일급 신학자인 박형룡은 해방 후에도 한국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박형룡은 제일 먼저 일본화된 교회를 정화.재건하고자 했다. 해방이 되자 박형룡은 평양으로 와서 출옥성도들과 함께 교회 재건운동에 합류하려 하였다.

 박형룡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으나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옥성도들에게 신학적으로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박형룡은 평양에서 출옥성도들과 함께 자숙안을 결의하고 만주로 돌아가는 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노회에 들러 평양에서 결의한 자숙안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 노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형룡은 만주로 돌아가 봉천노회의 자숙안 결의를 이뤄냈다. 그리고 1945년 11월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평북 선천군 월곡 교회에서 ‘신사참배 통회자복 금식기도 수양대회’에 박형룡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박형룡이 선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사참배 문제를 한 시간 만에 마무리 지어 놓은 상태였다.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노장 목사들이 이 대회를 주도했고, 이들은 공적인 권징이 아닌 개인적인 회개만으로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박형룡은 자책자숙운동을 개인적인 회개운동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목사들이 교회의 법을 어기고 범죄했으니 공적으로 회개하고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반면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의 실세 목사들의 의도는 이와 정반대였다. 이들은 수양대회를 통해 자숙.회개의 기회를 갖고 징벌을 받아서 깨끗해지기보다는, 약식 회개운동을 통해서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고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이용하려 했다.

 

 박형룡이 신사참배에 반대한 신학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지만 그 이유를 신학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고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으니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정도의 논리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 배경에는 신학적 배경과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신사참배에 반대한 성도들은 신학적 보수주의자였고, 신사참배를 인정한 성도들 중에는 자유주의자가 많았다.

 박형룡은 성경에 나타난 규범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삶을 지배한다는 규범윤리를 따랐다. 성경의 우상숭배 금지는 오늘날도 유효하며 이는 조상에 대한 제사나 신사참배에도 적용된다고 믿었으며 박형룡은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애국심을 연결시켰다. 박형룡은 민족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주어 기독교의 기반 위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애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전천년운동이 확산되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동기를 마련해 주었고, 투옥과 고문과 사형이라는 혹독한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천년설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연결한 이 주장은 최소한 박형룡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4. 한국 교회 신앙의 수호자:‘자유주의’와의 투쟁

 

 해방이 되자 박형룡이 염려하던 대로 ‘자유주의’의 세력이 확대되었으며 박형룡은 이 모든 문제에 직.간접으로 관련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일어난 한국 장로교회의 4대 중요 분열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박형룡은 자유주의자들과 부딪히면서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개방성과 포용성을 포기하고 성경문자주의와 프린스턴의 교리주의, 변증학을 결합하여 자유주의에 반대했던 것이다.

 

 박형룡은 1947년에 부산의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고려신학교 취임 강연에는 박형룡의 신학과 역사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연설에서 첫째, 박형룡은 고려신학교가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고 믿었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의 교수진 결성은 엤 평양신학교를 회복하는 기초 공사”라고 했다. 박형룡은 총회인준을 받은 조선신학교나 채필근 등이 세운 (후)평양신학교가 정통신학교 계보에 들 수 없다고 했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가 더 큰 계획을 위한 기초 공사이며 앞으로 전국을 대표하는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 교회 전체와 선교부에게 전국적인 신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으로 취임 연설을 마쳤다.

 

 박형룡은 부산으로 내려간 지 6개월만인 1948년 5월에 새로운 신학교(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박형룡이 고려파를 버리고 서울로 온 것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이탈하자 경남노회와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배척하였다. 그로 인해 고려파는 총회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

 박형룡은 교회 분리에 반대하고 총회의 인정을 받은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회 개혁과 정화를 뒤로 한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박형룡은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가 ‘자유주의’화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면서 스승 메천이 어떤 식으로 자유주의에 대처하였는가를 지켜보았다. 결국 박형룡의 바람대로 보수적인 세력이 신학교와 교단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한국 장로교회가 교리적인 ‘자유주의’를 척결하는 데는 앞장섰지만 정작 교회 생활을 정화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데에는 크게 공헌하지 못했다.

 

 박형룡이 고려파를 떠난 이유는 한 마디로 교회 개혁의 방법이 고려파와 달랐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고려파를 “신앙의 정조와 진리 수호에 생명을 걸고 싸웠던 열렬한 성도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기성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고려파를 독선적이라고 냉대할 때에도, 고려파가 교회에 남아서 교회를 정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박형룡과 고려파는 교회 개혁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이 같았다. 다만 개혁의 주안점과 방법이 달랐다. 박형룡은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학이고 ‘교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지만, 고려파는 신앙 개혁과 정화를 전제로 하지 않은 신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 10년 동안 헤어져 따로 교단을 형성했던 장로교의 일부인 승동 측과 고려파가 1960년에 연합했으나 정통 신앙의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합동’은 3년이 못가서 깨지고, 이전 고려파 교회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하는 ‘환원파’는 다시 그들의 옛 명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앞서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인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의 분열(1953)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형룡이다. 사실은 박형룡과 그의 추종자들이 김재준 일파를 장로교에서 몰아낸 것이다.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조선신학교의 개혁안을 총회에 제출하고 만약 개혁안이 거부되면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전략을 세운 바 있었다. 조선신학교의 개혁이 좌절되면서 세워진 학교가 장로회신학교이다. 어려운 과정을 겪은 후에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 결의를 얻어내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조선신학교와 연합하여 한 신학교를 만들고 숫자의 힘으로 ‘자유주의’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장로회신학교 측은 “모세오경의 저자 문제에 관한 총회 결의(24회)에 의해 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사람은 교수로 채용하지 말 것”,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을 교수진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총회는 1953년 제38차 총회에서 직접 김재준을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신학교는 총회에서 탈퇴해 기독교장로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이것이 장로교가 겪은 두 번째의 분열이다. 그 해 9월 박형룡은 장로교회가 운영하는 총회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견해 차이로 1959년에 세 번째로 분열하였다. 박형룡은 이 때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관한 이견은 1956년 제41회 총회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의 세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협력하던 한국 목사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찬성했지만, 선교사들과 관계가 석연치 않았던 복음주의협회(NAE)계열은 이를 반대하였다. 복음주의협회(NAE)는 미국의 복음주의협회에 영향을 받은 ‘51인 동지회’를 주축으로 1953년에 ‘한국복음주의협회’를 조직한 한국 목사 그룹이었다. 그리고 박형룡이 바로 이 그룹의 중심에 있었다.

 WCC 문제로 44회 총회는 양측의 총대 문제로 정회되었다가 그 후 양측은 서로 다른 곳에서 총회를 진행함으로써 결국 장로교회는 세 번째의 분열을 맞게 되었다.

 

 합동과 통합이 분열하던 1959년 당시 박형룡이 가장 신뢰하던 사람은 미국 기독교협의회(ACCC)와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를 창설 주도했던 칼 맥탄타이어였다. 해방 이후에 칼 맥킨타이어와 성경장로교회가 후원하는 독립선교부 소속의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그 가운데 마두원 선교사도 있었다.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그는 해방 전에 숭실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1940년 일제가 선교사들을 추방할 때에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마두원 선교사는 훼이스(Faith)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복음선교사로 내한해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59년에는 국제 기독교협의회(ICCC) 한국 지부장과 본부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칼 맥킨타이어는 고려파를 지원하면서 한국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고려파는 ICCC로부터 수년에 걸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박형룡이 칼 맥킨타이어를 환영하고 그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 까닭이, 단지 신학교 운영을 위해 기금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박형룡과 칼 맥킨타이어가 신학적으로 일치했기 때문에 그의 기금을 받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박형룡은 이미 1958년부터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 중에서 ICCC만이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정통 신앙을 옹호하고 자유주의에 매우 철저하고 강경하게 싸웠다”며 높이 평가했다.

 

 칼 맥킨타이어는 1920년대 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 때 근본주의의 주장인 성경의 문자적 무오류성과 완전한 영감, 그리고 기독교의 초월성과 같은 논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박형룡의 사상과 일치했다. 그리고 신신학에 근거한 단일 교회를 주장하는 WCC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 더 나아가서 복음주의연합(NAE)와 같은 단체를 ‘신복음주의’라며반대한 것, 공산주의자를 침략적 무신론 사상 체계로 간주해 이를 반대한 것도 같았다.

 교회 통일에 관한 견해에서도 박형룡은 칼 맥킨타이어와 일치했다.

 

 신복음주의는 1920년대의 근본주의가 갖고 있던 복음주의 요소인 성경의 권위나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고수하면서도 근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운동이다. 과학적이고 지성적인 복음의 변호,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신복음주의자들의 주요 의제였다.

 박형룡은 미국에서 진행된 신복음주의 논쟁에 주목하면서 신복음주의를 강경하게 반대했다. 미국에서 신복음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칼 맥킨타이어일 것이다. 그리고 칼 맥킨타이어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 또한 신복음주의자들 간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복음주의 자체를 철저하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박형룡은 왜 신복음주의를 비판했을까?

 첫째, 신복음주의자가 근본주의를 혹평했기 때문이다. 신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가 성경과 과학의 학문적인 대화를 거부하며 사회 문제에 전혀 무관심할 뿐 아니라 분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둘째, 박형룡이 신복음주의자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들이 “과학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신복음주의자는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기  위해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였고,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아 홍수가 전 세계적이었다는 데에도 의문을 제기했다고 했다.

 셋째, 신복음주의자가 사회복음운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복음은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이 있다”고 말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반대했다. 또한 사회 개량을 위한 활동과 과격한 투쟁을 정죄했다.

 넷째, 신복음주의자들의 포용적 태도 때문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WCC의 포용주의를 찬성하고,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배타주의는 비판했다.

 

 1971년 박형룡은 총회신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났으며 박형룡과 그의 정치적 후원자들은 총회 내에서 소수파가 되었으며, 이에 반해 박형룡에 이어 교장이 된 김희보와 그의 지지자들이 총회에서 다수파로 교권을 독점했다. 1970-80년대 합동 측 장로교회는 다수파의 독재와 횡포, 그리고 그들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라는 불운한 시기를 겪었다. 이런 와중에 두 번의 분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79년의 합동과 비주류(합동보수)의 분열과 박윤선 박사가 주도한 1980년 합동신학교의 분리다. 이 중 1979년에 벌어진 비주류의 분열에는 1978년에 소천한 박형룡도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 바로 박형룡을 추종하던 총회 내의 비주류파가 박형룡의 신복음주의 비판을 근거로 김희보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즉 박형룡을 추종한 비주류파는 총회신학교의 교장인 김희보를 축출하고 다수파에 손상을 입히기 위해 김희보가 이끄는 총회신학교가 신복음주의로 좌경화되었다고 비판했다.

 박형룡은 현직에서 은퇴한 후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1978년 10월 25일 아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형룡이 한국 교회를 위하여 행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애국주의와 신비주의로부터 정통 기독교를 확립한 것이요, 둘째는 근대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한 것이다.

 박형룡은 자신이 1920년대 미국에서 목격한 것을 표준으로 한국 기독교의 상황을 이해했다. 박형룡은 정통주의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형룡은 처음부터 정통 신학에 대한 개념이 좁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좁아졌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에큐메니컬 운동이 카톨릭을 인정하고 용공(容共)이라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 결과 교단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박형룡의 후기 신학은 한 마디로 ‘근본주의’였다.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 극단적인 개인 경건과 윤리 강조,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 분리주의적 성향 등은 박형룡의 후기 신학을 특징짓는 요소들이다.

 박형룡은 자유주의의 도전에 맞서면서 신학의 양상을 자유와 정통(보수)의 이분법으로 파악했다. 박형룡의 태도는 ‘흑’아니면 ‘백’이었다. 그는 성경의 전통적이며 문자적인 해석과 어긋나는 모든 해석을 정죄했다.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과학과 성경의 관계에서 자신의 해석과 다르면 모두‘자유주의’의 이설(異說)이라며 반대했다.

 

    *박형룡 신학의 유산

 

 총신대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박형룡이 보수 신앙의  수호자이며 보수 신학을 위해 총신대학교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총신대학교를 졸업한 대다수의 합동 측 목사들은 박형룡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신학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박형룡의 권위(업적)를 빌려 보수 신학을 지키고 있다.

 박형룡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들이 있는 데, 박형룡이 소천하기 직전인 1978년에는 그의 제자들이 그가 평생에 남긴 논문과 저술들을 모아 20권에 달하는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을 편찬했다.

 

 

 *박형룡 신학의 과제와 가능성

 

⑴ 지성적 신앙과 영성의 조화

⑵ 신앙에 기초를 두면서도 과학적 발견들을 성경 해석에 도입하는 새로운 변증학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⑶ 복음에 기초한 풍성한 성경 해석이다.

⑷ 사회 참여의 가능성이다.

⑸ 분리주의적 성향의 극복이다.

⑹ 타종교와의 관계에서의 배타성과 개방성의 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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