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란 무엇인가? 


합동측 총회신학부 보고자료

 

중보의 언어학적 배경 및 용어 

1). 언어학적 배경 

영어성경에는 "medi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있지 않으나 희랍어 신약성경안에는 "중보자(메시테스)"라는 용어가 6 회 사용되어 있고 이와 동일 어원을 지닌 "헤메시투세"가 하나님을 주어로 한번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양자간을 중재하며 이로써 일종의 보증을 제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중보자는 양자간을 중재함으로써 양편의 대리자가 되며 또한 양자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정의가 실행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보증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희랍어(헤메시투세)가 사용되어 있는 신약성경안에는 화해의 의미가 한층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효율성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히브리어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화해시킨 시로운 중재자라는 의미를 한층 더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적용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셨는데 이는 항상 "이질적인 것", "사이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서 이 용어는 흔히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대한 이미에 있어서 대화의 통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중보라는 용어의 용례 

중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극히 모호한 용어 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종교에는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것과 초 자연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으며, 다양한 존재의 범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될 경우 여기에는 반드시 일종의 중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 중보의 개념이 종교적인 개념에 가까위 질 수록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중보의 개념은 반드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양식 사이의 분리에 대한 개념을 한층더 보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반역과 불순종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호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악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악한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일련의 계약들을 준수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의 모든 ㄷ도우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그 스스로 방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를 인간에게 보내심으로써 강구하셔야만 했다. 

중보자나 중보의 뜻은 "사이에 들다",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 오시는 것은 납득이 되긴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죄로 불가능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3. 중보란 무엇인가? 

중보의 문자적인 개념을 살펴보면 먼저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중보하다(intersecede)는 "사이로 들어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투거나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중재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의 조정을 의미한다. 

조정한다(mediate)는 (1)양 극단 사이에서 양자 모두의 친구로서 당사자들을 중재하다. (2)화해시킬 목적으로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하다.(3)화평을 조정하는 중보의 뜻으로 나타난다. 즉 조정(mediation)을 정의하고 중보가 조정을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중보의 개념은 조정하고 양자 사이에 들어가고 서로를 위해 변론하고 법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해 한 쪽을 대표하지만 그러나 한쪽에 국한되지는 않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중보의 히브리어 "파가(paga)"는 "만나다"라는 뜻이다. 시 85:10 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라고 했다. 긍휼과 진리와 의와 화평의 하나님은 죄인에게 접촉될 수 없다. 죄를 멸하시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야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만 죄인인 우리가 의 자체가 되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요 14:6 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오 올 자가 없느니라"한 말씀과 딤전 2:5 에 "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였다. 

이로 보건데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중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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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합동 총회신학부 조사연구 총회보고자료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딤전 2:1-2 에 보면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한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를 섬기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기도의 네가지 종류인데 그 중 세번째 도고하는 용어는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도고(intercession prayer)는 글자 그대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중보기도의 능력>이란 책에 보면 (35p) 중보기도에 관련된 용어로 첫째 합심을 말한다. 합심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을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표현이 아니고 행 1 에 나타난 120 명의 성도들이 합심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지, 이것을 중보기도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인 것 같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의 중보기도에 보면 전체교회와 국가와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을 위해 중재하고 고인을 기리는 기도의 형태로 성공회 교회법 55조(1604년)는 설교에 앞서서 설교자들이 이 기도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기원을 보면 고대의 전례에서 설교나 복음서 낭독 이후에 등장했던 흔히 연도 형태의 도고 중보기도에 유래했다. 

이것은 로마카토릭의 성 금요일 전례의 기도문과 일반 라틴 미사문의 독립된 오레무스에 잔존하여 있다 

9 세기경 사제는 일요일과 축일의 미사에서 설교후에 모든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인을 추모아였다. 처음에 그것은 사제의 재량에 맡겨졌으나 점차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펴 나갔다. 

오늘날 중보기도는 대학교와 재판설교와 국가 절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계에서 중보기도라 하여 많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것은 유감그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맺는 말 

조직신학 기독론(p234)> 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킬 중보의 자격은 성경에 명시되어 잇다. 중보의 자격은 

1) 그는 반드시 사람이실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도가 천사의 성질을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성을 취해 입으신 이유는 그가 우리 인류를 구속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2) 그는 반드시 무죄하실 것이라 하였다. 

3) 그는 반드시 신적 인격이실 것이다. 위의 내용은 예수그리스도를 지적한 것이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거나 개인의 기도를 부탁받아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말 할 수 없고 다만 " 합심기도", "개인기도", "부탁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타당하다 보아야 겠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만 사용되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소위 요즈음 말하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 함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을 약화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기도를 이웃을 위한 (남을 위한)기도라 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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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측한국장로신문에 중보기도에 대한 칼름> 

총회용어위원회 전문위원(숭실대교수)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칼름을 발표 -- 

<기독교 용어해설32> 2002 7/6. p9 

"중보"(仲保)의 사전적 뜻 풀이는 "두 사람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 또한 "중보자"의 뜻 풀이는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예수를 이른다"고 되어 있다. 

기독교서회편 "그리스도교 대 사전"에서도 "중보자"에 관하여 "결정적인 화해자로서의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맡은 분이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이며 그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즉 유일회적인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로 주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로마카토릭 교회에서는 성모마리아 역시 중보자라는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딤전 2 장 5 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하여 예수님만이 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보자라고 할 때는 위의 뜻풀이와 동일하게 , 또한 성경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을 가리킨다. 또한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중보기도란 이처럼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기도다. 

다시말하면 중보기도란 중보자(예수님)가 하는 기도란 뜻이며 중보자(예수님)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 시키는 기도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용어다. 우리는 이 중보기도의 뜻을 확실히 알고 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교회안에서 중보기도란 말을 쓰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이웃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부르면서 중보기도모임, 중보기도회 같은 이름도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에서 중보자 예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하는 기도가 중보기도임을 분명히 안 이상 이웃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기도를 할자격이 없다. 

다만 예수님 이름으로 그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이웃을, 때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우리가 감히 할 수도 없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써야 한단 말인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는 항용 "주기도"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중보자(예수님)가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중보기도라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들의 기도를 중보기도라 부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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