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 그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후 10년 사이에 놀라운
부흥운동의 영적 파고가 세 차례나 계속된 것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로 대변되는 제1차대각성운동도 1734-36년, 1740년-1742년 두 차례에 걸쳐 부흥운동의 파장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 놀라운 부흥운동을 이 땅에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현시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겨울남자사경회 기간 중 발흥했다. 그 부흥의 현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조지
매큔(George McCune)은 이 때 임한 성령의 역사가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성령의 역사보다도 더 강력한 놀라운 성령의 현시였다는 것이다. 장로교인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곧 교파를 초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한 평양전역으로, 그리도 거기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 결과 1907년 1월과 6월
사이 한반도 전역에서는 성령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이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경험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코리아 미션 필드(Korea Mission Field)에 이것은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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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앙운동이 그렇듯이 평양대부흥운동 역시 하루아침에 솟아난
것은 아니다. 이전의 수많은 지류들이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를 형성한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은 이전의 크고 작은 영적각성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 속에 강력한 부흥운동으로 현시되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이 시대의 부흥운동은 다음 세 가지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은 한국만의 독자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던 부흥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등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19세기 말 무디부흥운동, 1904년
웨일즈부흥운동, 1904년 호주부흥운동, 1905년 인도부흥운동, 1906년 오순절운동 등 전 세계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대 한국의
부흥운동은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엽에 전 세계적으로 이 같은 놀라운 부흥운동이 연속된 것은 돌이켜
볼 때 세계선교를 앞당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이 시대만큼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된 적이 없으며, 그 세계선교 가운데 눈에 띠게
두드러진 것이 아시아 선교였고, 그 아시아 선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한반도였다.
둘째,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의
퇴위, 1910년 한일합방, 1911년 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 조선의 역사는 비운의 역사였다. 미국의 유명한 외교가 포스터(John
W. Foster)가 증언한 것처럼 당시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노리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러시아, 청, 일본 등 강대국들의 식민야욕 앞에
조선정부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전쟁터로 돌변했다. 이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라면 이구동성으로 민족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암울한 시대적 환경이 백성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어 준 것이다.
셋째,
전국적으로 널리 시행된 사경회운동이다. 1890년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근간으로 사경회가 널리 시행되었는데, 이 사경회가 부흥운동을
위한 영적각성의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도 일종의 사경회였던 기도회에서 발흥했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역시 그해 1월에
열린 평안남도도사경회 동안에 일어났다. 1890년부터 사경회가 널리 시행되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한 영적각성이 서북지역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개혁주의 역사가 조지 말스든(George M. Marsden)이 지적한 것처럼 사경회가 미국 부흥운동의 토양을 제공했듯이 한국의
사경회도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때문에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전형적인
부흥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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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 주재 선교사들이 모여 가진 기도회
동안에 발흥한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각성의 모체였다. 초기 부흥운동의 모든 자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산부흥운동으로
귀결된다는 일치된 견해를 피력하였다.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기도회는 두 명의 무명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카나다 장로교 출신 여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차제에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3번의 강의를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하디가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명문 토론토대학, 그것도 그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입국한 하디는 그 내면에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영국시민이라는 백인우월주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이미 기도회 시작하기 전부터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통회했다. 하디 자신이 고백했듯이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그는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 창전감리교회 예배 때 하디는 자신이 맡고 있는
회중들 앞에서 또 다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교만과 성령충만하지 못함과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편견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디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1903년 8월 이후 계속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프란손이 원산을 방문하여 인도한 장감침(長監浸)연합사경회 동안에도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다. 그 후 하디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젊은이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최종손 강태수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얼마 후 로스 선교사의 어학 선생 진천수가 주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회중 앞에
일어서더니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한국인들만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하디를 통해 동료 선교사들도 원산부흥운동을 경험했다. 같은 카나다 출신 업아력(A. F. Robb) 선교사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게 거듭났다. 하디를 통해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를 받은 후 하디의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은혜를 받기 전 하디와 은혜를 받은 후 하디가
180도로 달랐다며, 은혜를 받은 후 하디는 마치 40일을 금식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얼굴에 광채가 나던 모세의 얼굴과 같았고,
베드로가 처음 갈릴리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와 베드로서를 쓸 때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은혜를 받기 전 하디는 평범한 의사, 아니
환자들이 기피하는 쌀쌀맞은 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 하디의 성품과 인격이 완전히 변했다.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났다며 병이
들어도 하디에게 치료를 받기를 주저했던 환자들은 하디가 은혜를 받은 후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였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후 하디의
성품과 인격과 삶은 이전과 확실히 달랐다.
하디는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자 자신을 부흥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게 그토록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지경터로
향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그곳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경터 근처 새 술막에 도착한 하디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가 인도한 12일의 지경터 집회 동안 1903년 8월에 있었던 것처럼 놀라운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하디가 자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사경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결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하디가 고백한
대로 성령께서 하디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디는 이어
개성, 서울로 향했다. 주님은 예외 없이 이곳 집회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부흥의 열기에 힘입어 1904년 6월에 들어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10월에 서울과 제물포와
평양 세 곳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이들 집회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하디가 안식년을 떠난 후 1905년에 접어들어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각성이 계속되었다. 1905년 9월
장로교 4개 선교회와 감리교 2개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함께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하나의 민족교회를 꿈꾸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으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들 모두는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영적부흥이라고 확신하고 1906년 신년 들어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새로운 신자의 영입보다 기성 신자가 먼저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성신자들이 은혜를 받으면 전도는 저절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06년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 신년부흥회를 통해 영적각성의 움직임은 한층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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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사경회가 개최되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다. 요한 1서를 본문으로 한 하디의 일련의 메시지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하디는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주셨는지를 진솔하게 회중들에게
전해주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이길함 선교사부터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rwood Hall)에 이르기까지 온 회중들은 하디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했다. 이날 하디는 이렇게 외쳤다:
인간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잘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 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 질 것입니다.
하디의 메시지는 어린 셔우드 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본래 서양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하디의 설교를 듣고 자신 역시 부모님들처럼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서 사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최초의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여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졌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실도 그가 처음 만든
것이다.
존스톤을 강사로 모시고 이어 열린 서울선교사 사경회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웨일즈와 인도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은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의 외침은 그곳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존스톤은 웨일즈의 부흥이 통성기도에 있었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 후 통성기도는 한국에 뿌리를 내려
한국교회의 기도로 정착되었다.
존스톤은 서울 사경회가 끝난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경회를 인도하며 다시 한번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소식을 전해주었다.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처럼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길선주 장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기왕의 영적각성을 경험한 길선주는 이때 큰 은혜를 경험하였고, 1906년 12월 12일부터 22일까지 선천에서 열린 황해도도사경회 때
주강사로 단에 올라 능력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현장에 참석했던 김익두 조사가 길선주의 메시지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웠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기 전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수석장로 길선주, 그리고 길선주의 뒤를 이어 한국교회
부흥을 이끌어갈 김익두를 준비해두셨던 것이다.
게다가 1906년
10월 남장로교 선교구 목포에서 발흥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이 땅에 부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신호로 인식되었다. 프레스톤이 맡고 있는
목포 선교구에서 하디와 쌍벽을 이루는 부흥사 저다인을 초청해 열린 부흥집회에서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마치 외과 의사가 메스를 들고 암세포를
도려내는 것처럼 성령께서 그곳에 참석한 회중들 심령 깊숙이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도려내신 후 치유의 향유가 각 심령 위에 부어졌던 것이다. 이어
목포 전역에서 놀라운 통회와 죄용서가 이어졌다. 평양지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목포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고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평안남도 도 사경회 동안에도 이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저녁마다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이들은 그해 크리스마스 휴가도 반납하고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한국인 지도들도 기도회를 가지며 간절히 부흥을
사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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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적분위기 속에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안남도 전역에서 올라온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렸다. 6일부터 저녁집회가 시작되었다. 낮에는 평양시내 사람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저녁에 열리는 저녁집회에는 평양시내 사람들도 참석이 허용되었다.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 기간, 특별히 사경회 마지막
14일과 15일 이틀 동안에 발흥했다. 12일 블레어가 말씀을 전할 때 은혜가 임했으나 13일 주일 저녁집회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고포드의
말을 빌린다면 마치 놋쇠로 된 지붕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것처럼 답답했고, 마치 사탄이 온 회중을 압도한
것처럼 그날의 영적분위기는 너무도 차가웠다. 오죽했으면 그날 말씀을 전했던 길선주가 너희 다 죽었어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길선주는 물론 모든 선교사들은 이렇게 사경회가 끝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14일 정오기도회에 모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다. 그날 헌트가 말씀을 전한 후 이길함이
나와 통성기도를 요청하자 청중들이 기도를 드렸다. 통성기도는 전날과 완연히 달랐다. 통성기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다
돌려보내고 600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받는 평양대부흥운동은 바로 그 때 모인
남은 자 600명 가운데 임했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모인이들 모두가 처음 체험하는 강력한 부흥이었다.
이날 회개의 포문을 연 사람들은 길선주였다. 길선주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한 것이다.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비취시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날 길선주는 자신이 은혜를 막는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라며 많은 회중 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의 회개는 마치
뇌관에 불을 당긴 것처럼 그곳에 모인 온 회중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현장에 있었던 이길함은 다음날 어제의 성령의 역사를 보고하면서 어제
있었던 그 집회는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5일 조지 매큔 역시 놀라운 성령의 임재가 현시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북장로교 총무 브라운에게 보고했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그 현장에 있던 선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처음 경험하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의 현시였다. 15일 선교사들은 정오에 모여 어제 있었던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곳에 참석한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을 부어주셨다. 선교사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만약 한국인들에게만 성령이
임했다면 평양대부흥은 반쪽만의 부흥일 것이지만 성령께서는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똑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15일
저녁에도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기는 한국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다.
15일 저녁 집회는 이미 집회가
시작되기 전 영적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이날 말씀을 전하는 길선주의 얼굴은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의 메시지를 들은 동료 장로의 증언을
빌린다면 그의 얼굴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말씀 앞에 부복하여 자신들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하였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한 홀의 죄악도 숨길 수 없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객적으로 고백되었다.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평양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장대현교회는 사경회가
끝났는데도 16일 수요일 기도회 때, 다시 20일 주일 예배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평양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소식은 곧 평양
전역으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평양의 남산현 감리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평양시내 전역에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부흥의 불길은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시내
교회들로 확산되었고, 평양시내 거의 모든 미션스쿨들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특히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 개강 사경회 때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현시되었다. 이것은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목회자들을 영적으로 무장하고 새로 조직될 한국교회를 축복하시려는 비상한 성령의
섭리였다.
장대현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길선주,
헌트, 블레어, 이길함, 스왈른, 편하설은 부흥의 불을 가지고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졌고, 성령께서는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한반도 전역에
부흥의 불을 지피셨다. 특별히 길선주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을 전국으로 가지고 간 주역이었다. 길선주는 제일 먼저 서울로 달려가 “승동(勝洞),
연동(蓮洞), 수구문(水口門), 상동(尙洞), 제교회(諸敎會)에서 집회(集會)”를 인도했고, 그가 인도하는 서울 집회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헌트를 통해 대구에서도 강력한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곧 서울, 대구, 대전, 공주, 신의주, 선천 등 전역에서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부흥의 불길은 다시 만주와 중국으로 놀랍게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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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첫째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한 이후 이처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에 임한 적이 없었다.
둘째 이 시대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성지위향상, 신분타파, 교육열, 의식개혁, 세계관의 변혁, 민족의식, 미신타파,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에 이르기까지
부흥운동은 사회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로 통했던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으며, 조선에
대한 명칭이 Choson에서 선민(the Chosen, 選民)으로 바뀌었다.
셋째 만주와 중국 부흥의 모체가 되었다.
중국인 교역자 호만성(胡萬成), 장석정(張賜禎)이 1907년 평양에 입국하여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전해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현시되었다. 같은 해 봄에 중국 목사 유전악(劉全岳) 등 2인이 평양에 방문하고 돌아가 그곳 교회
지도자들과 목단봉(牧丹峰)에서 중국에도 부흥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만주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케넷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의 지적대로 만주에서의 “놀라운 종교적 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넷째 놀라운 교회성장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하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그것은 세계선교의 기적이었다. 돌이켜 볼 때 비록 한국선교가
1884년 9월 20일 호러스 알렌의 입국으로 개신교가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한국교회가 교회로서 틀을 다진 것은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였다. 마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토대를 구축했던 것처럼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성장을 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다섯째 해외선교운동이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때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는 중국 블라디보스톡 일본에 계속해서 선교사를 파송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틀을
다져갔다. 그 원동력은 부흥운동이었다.
여섯째 연합운동이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교육사업, 의료사역, 해외선교, 복음전도, 문서선교, 성경번역에 이르기까지 교파와 교단을 초월
민족복음화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부흥운동은 지난 100년간의 한국교회 영적각성과 복음전파를 견인하는
출발점이었다. 복음이 전해진 후 거의 100년이 넘도록 교회가 성장하고 국내외적으로 복음전도를 견인할 만큼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것은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운동
이후에도 부흥운동이 한반도에서 수차례 지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1909년에 시작된 백만인구령운동이다.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은 시들어 가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을 안타까워하면서 일련의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절정에 달한 후 이내 시들기 시작했다. 1908년에 접어들어 교회는 성장하면서도 1907년 영적각성운동은 현격하게 줄어들어
1909년 초에 이르러 부흥운동의 열기는 더 한층 냉각되었다. 이것을 안타까워하던 평양장대현교회 담임목사 길선주와 개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톡스(M. B. Stokes) 리드(W. T. Reid) 갬블(F. K. Gamble)을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다시 한번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영적각성이 이 민족
가운데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회를 가졌다. 특히 길선주는 박치록 장로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세 명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의기투합하여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을 부으셨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100만명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909년 가을에 입국한 채프먼, 로버트 학니스, 찰스 알렉산더 등 외국 부흥사들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최한 전도집회는 백만인구령운동의 열기를 한 층 북돋아주었다. 비록 목표한대로 100만명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이 땅의 민족복음화를
염원하며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백만인구령운동 이후에도 1920-1921년 사이 김익두를 통한 부흥운동, 1932-1933년 사이
성결교부흥운동, 1950년대 부흥운동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대중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는 부흥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부흥의 역사는 평양대부흥운동과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꾸신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이 다시 이 땅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고백한대로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서나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땅에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의 끊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 주여! 다시 한번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놀라운
부흥을 주옵소서! 그 때 임하셨던 성령이여 다시 이민족 가운데
임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