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청년학생운동의 역사와 과제

 

최 욱 준(명지대 97)

Ⅰ. 들어가는 말


지난 1997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우리 <새벽이슬>을 태동케 하셨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까지 이 시대의 대안이 되는 새로운 기독학생운동으로서 <새벽이슬>을 존재케 하셨다. 그 시간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운동은 우리 스스로 내재하고 있던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면서 여러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침체일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문제들을 철저히 성찰하고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올바른 운동의 방향성을 제고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가 이 땅 위에 온전히 선포될 수 있도록 우리의 결단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과거의 기독학생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운동의 과제를 전망해 봄은 필수적 선결과제라 하겠다. 비록 필자의 역량 부족과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깊이 있는 정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결단을 새롭게 하려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참고로, 이 글은 대부분이 이종철님이 「복음과 상황」에 1992. 9 ∼ 1993. 4 까지 연재한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 이진오 간사님이 쓰신 '기독청년의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인식', 기독청년 학생운동의 방향성(유재덕, 정인), 한국 기독청년학생운동사(김영철, IVP)를 요약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Ⅱ. 기독청년학생운동의 약사(略史)

1. 선교 초기의 기독청년학생운동


(1) 복음의 전래
한국 개신교 선교 운동은 청년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특색이다. 1884년 입국한 알렌의사는 28세,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은 24∼25세 청년 선교사였다. 선교 초기, 이들은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와 농촌 선교, 성경 번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2) 학교 중심의 운동
1896년 10월 배재학당에 20세 안팎의 학생들로 구성된 '협성회'가 서재필, 윤치호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이후 '독립협회'에 흡수되어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3) 엡웟 청년회(Epworth League)
① 감리교의 청년운동으로 1897. 5 조직되었으며 복음전파, 의식계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② 특히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소속 청년들이 대거 엡웟 청년회로 유입되면서 민족 의식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상동 교회 엡웟 청년회를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 상소 운동', '을사5적 암살 모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등을 전개하다 해리스, 스크랜톤 등의 친일적 선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1906년 해산되었다.


2. 일제 하의 기독청년학생운동(1901∼1945)


(1) YMCA 운동의 전개
① 1899년 태동한 Y는 1903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란 이름으로 창설하였고 독자적 노선의 학생 Y가 같은 날 배재학당에서 출범하였다.
② 1904년 1월 혁신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던 이상재, 남궁억, 유성재, 김정식, 안국선, 조종만, 이원경, 홍재기 등이 합류하였고, 이후 해산된 엡웟 청년회가 YMCA로 피신해 들어왔다.
③ 3.1 운동 이전까지의 암흑의 역사 속에서 YMCA는 국제적 조직망과 강력한 지도력 아래 치외법권과 같은 조직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1906년에는 김정식을 일본에 파견하여 독립된 한국 YMCA를 조직하였다.
④ 각종 종교 사업, 교육 사업, 체육 사업 등을 활발히 한 YMCA는 비폭력, 무저항 정신, 민족주의 정신, 실천 교육 정신을 기본으로 국민의 실력을 배양하는 단체로서 기독교 사상의 토대 위에서 당시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면에 개혁과 소망을 주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⑤ 민족의 자각과 실력 배양에 힘써 오던 YMCA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늦추어지자 국제 무대까지 운동을 벌여 나갔다. 또한 1920년 이후 '고려 공산당'이 건설되자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대응 세력으로 기독교가 활동하기도 하였고 YMCA운동이 중심이던 기독교 민족 운동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작부터 사상적 차이성 때문에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탈퇴로 해체되었다. 이후 YMCA운동은 1923년부터는 농촌사업을 전개하였다.
⑥ 1937년 10월 일제의 강압 속에서 YMCA는 농촌사업의 순회 지도를 중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그 활동이 마비되어 갔으며, 1938년 8월 9일 일본의 강요에 따른 굴욕적인 의결로 YMCA는 일본 동맹에 재가입 형식으로 벙합되었다. 1943년 4월 24일 조선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한국 YMCA)는 해산 명령을 받고 일본 YMCA의 직할 아래 놓여졌다.
(2) YWCA 운동의 전개
① 1922년 6월 김필례, 김활란, 유옥경씨가 주동이 되어 창설하였다. YWCA는 사회 안에서 기독교적 이념을 기초로 여성들을 선교, 계몽하는 일에 힘썼다.
② YWCA는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 계몽 운동으로서 구습, 폐풍 타파, 금주 금연, 여성 지위 향상, 문맹퇴치, 축첩 폐지 등에 적극적이었고 1930년대에는 농촌계몽에도 동참하였다.

이외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의 '면려청년회', 성결교의 '성청'등의 활동이 있었고, '평양신학교'의 학생운동도 활발하였다. 해방 이전까지는 Y계열의 운동이 중심이 되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사상이나 신학적 대립에 따른 분리보다는 민족주의 운동과 함께하는 범민족주의 운동에 기독학생운동이 앞장서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기독학생운동은 사상적 갈등과 신학적 견해에 따라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분리되었다.

3. 해방 이후의 기독청년학생운동


(1) 진보 진영의 기독청년학생 운동
① 1948년 4월 25일 학생 YMCA와 학생 YWCA, 그리고 한국기독학생회 전국 연합회의 대표들이 모여 대한기독학생회 전국 연합회(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를 결성하고 강원용씨를 총무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49년 Y계열의 기독학생들이 KSCF를 이탈함에 따라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KSCF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의 전신)의 산하 단체로 들어가게 되어 각 교단의 뒷받침을 받게 되었다.
② 1951년 황성수씨의 지도 하에 '기독학생동지회운동'이 보수적인 신앙 노선을 표방하면서 새로운 학생운동으로 등장하였으며 이 운동은 IVF의 효시가 되었다. 한편 장로교 내부의 신학 사상의 분열과 교파 형성으로 인해 KSCF는 1955년 이후 예장측의 성갑식씨, 기장측의 신성국씨의 지도하에 분열된 두 단체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연합회가 주선한 명동협의회를 통해 1957년 '한국기독학생운동(KSC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출발하게 되었다. 이를 기해 KNCC에서 KSCF가 독립하게 되었고, 이 무렵 고등부를 KSCF에서 완전 분리하였는데 이는 1958년 시작된 '대학생선교회(CCC)'로 이어졌다. Y계열의 운동은 독자적 조직을 형성해 나갔다.
③ 1959년 11월 KSCM과 Y계열은 '한국 학생 기독교 운동 협의회'(KSCC)를 구성하고 기독교 사회운동을 본격화 하였다. 그러나 1960년의 4.19는 기독학생 단체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4.19는 기독학생운동을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변화시키는데 자극을 주었다. 4.19 이후 KSCC 주최로 개최된 '교회의 생명과 사명'연구회를 통해 한국 교회의 반성과 새로운 사명을 인식하려하였으며, 그 후 이 주제는 기독학생운동 진영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④ 1965년부터는 기술개발과 산업화에 따른 사회구조 전반에 따른 변동에 대처하여 새로운 신학 정립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새 대학과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기독자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연구 결과 '그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에큐메니칼'이라고 결론 내린 KSCM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전념하여 아시아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 연대해 나갔다.
⑤ 1968년 2월에 열린 '한국 기독학생운동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를 통해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한 YMCA, YWCA, KSCM의 세 단체는 1969년 11월 독자적인 운동을 결의한 YWCA를 제외하고 '한국기독학생총연맹(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으로 통합하였다.
⑥ 1970년대 기독학생운동은 일반 학생운동 이념과 실천에 있어서 결합하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KSCF는 '4.19 10주년 기념행사'와 '고 전태일 추도식'을 갖고 현실적 실천의 차원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고난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역사를 채득하고자 하였다. 71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선거 학생 참관인 운동'도 벌였다.
⑦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KSCF 지도부가 전원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학도호국단 설치 등으로 학교를 근거로 한 학생운동에 큰 제약을 받게되자 잔존한 기독학생운동 세력은 교회 내로 유입되어 각 교회 청년대학부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각 교단 청년연합회를 재건, EYC의 창립을 가져왔다.
⑧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정체성 논쟁으로 80년대 초 KSCF는 IT 그룹(신보수주의 그룹)과 비 IT 그룹(연맹파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IT 그룹은 대학내에서 대중적 기독학생회 건설에 주력하였고 기독사상에 입각한 기독운동의 전개를 역설하였으며, 후에 YMCA나 경실련 등으로 진출하였다. 비 IT 그룹은 정치투쟁우선론, 소수정예론, 학생운동주도론 등을 주장하였고 KSCF를 장악하여 정치투쟁을 선도해 나갔다.
⑨ 1986년 서울대 예수대축제 사건을 계기로 탄생한 '기독교문화연구회'(기문연)는 초기에는 세미나 위주로 활동하였으나 점차 공단 야학의 개설이나 빈민촌에서의 기초공동체 운영, 탁아소 개설 등을 하였고 방학중에는 공활, 농활 등을 함으로써 현장과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기문연과 함께 탄생한 것은 '대학기독신문'이었다. '대학기독신문'은 후에 '복음과 상황'으로 승계되었다. 기문연은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공정 선거 감시와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복음주의 청년학생협의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이 복협활동 이후 그 성과는 IVF내의 연합학생회의 구성, '복음주의청년연합회(복청)'의 결성, 기문여의 강화로 이어지게 된다. 복청은 '로잔언약'을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교회, 빈민, 노동, 통일, 농촌, 청소년, 여성분과 등의 다양한 분과를 만들고 활동하였다. 이후 기문연은 '기독교문화운동연합'이라 개칭하여 활동하다가 90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구성이라는 조직사건에 휘말림으로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IVF 자체 내에서 IVF 자체가 역사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발전으로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합학생회'가 구성되었으며 92년 내부진통 끝에 6개 대학지부가 분리하여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를 창립하였다.


(2) 보수 진영의 기독청년학생 운동
① 죠이 선교회(JOY MISSION)
- Jesus first, Other second, You third의 첫 자를 따서 만든 명칭으로 1954년 주한 미군이던 리차드 포스터에 의해 고등학생을 위한 JOY Bible Class가 시작되었다.
- 이들이 대학에 진출함에 따라 대학생 복음 전도 활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58년 5월 18일 JOY Youth Club을 창립하였고, 1976년 2월 죠이 선교회로 개칭하였다.
- 우리나라 안에서 자생한 선교단체로 지역 교회와의 유대, 복음의 전파, 성경공부, 그리스도인의 지도력 함양, 사역자 및 선교사 양성 및 파송,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한다.
② 한국기독학생회(IVF)
- 1956년 이정윤씨에 의해 황성수씨 계열의 '기독학생동지회운동'과 연합하여 시작되었으며 59년 9월 IFES라는 국제 기구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 학원복음화와 지성사회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며 기독교 세계관에 관계된 문서운동이 활발하다.
③ 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 1958년 KSCF에서 분리한 ICCC계열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김준곤 목사에 의해 창립되었다.
- 1972년 '춘천성시화 운동', 74년 '엑스폴로 74'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1년 사이에 30% 이상 성장하였다.
- 80년대 후반부터 불거진 재정비리 문제로 분열을 겪기도 하였지만 한국 대학 선교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 '이 세대에 지상명령 성취를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전도, 육성, 파송을 목표로 하고 있다.
④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 4.19와 5.16의 혼란한 시대적 배경 가운데 1961년 9월 이창우씨와 배사라 선교사를 중심으로 대학생 복음화라는 목표하에 시작되었다.
- 주일 자체 모임으로 분리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며 그러한 교회론의 문제로 77년 학생성경읽기회(SBF)가 분리하였으며 SBF는 이후 한국기독대학인회(ESF)로 개칭하였다.
-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고 나아가서 세계 복음화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⑤ 네비케이토 선교회
- 1963년 미 8군의 장병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론 욕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66년 유강식씨에 의해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 세계 모든 국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길러 내어 이 지상의 명령을 성취하는 것을 근본 목표로 하고 있다.
⑥ 한사랑 선교회
- 1971년 김한식 목사를 중심으로 시작된 선교단체로 제자화를 통한 국내, 세계 복음화를 목적으로 한다.
- 회개와 사랑의 실천운동을 전개하며 미스바 성회를 주도하고, 정치적으로 친미반공주의적 색채가 강하며 세계 선교 비전을 가지고 세계선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⑦ 예수 전도단(YWAM)
- 1973년 11월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 '그를 알고 그를 전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타겟 2000선교운동을 추진,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찬양을 통한 문화 사역의 이미지가 강하다.
⑧ CAM 대학 선교회
- 1981년 여의도 순복음 교회 대학선교회로 출발하였으며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로 성장하였다. 개인, 대학, 민족,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⑨ CMF 한국 누가회
- 1979년 IVF 학생 수련회에 참석했던 의대생들에 의해 의료 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IVF와 내용과 조직면에서 상호 교류하며 성장하다 현재는 의대생 특수계층을 상대로 한 독립적 선교단체로 성장하였다.
⑩ ESF(한국기독대학인회)
- 77년 교회론과 교육방법 등의 문제로 UBF로부터 SBF로 분리되어 시작되었으며 이후 ESF로 개칭하였다.
- 성서한국, 세계 선교를 목표로 하며 각 캠퍼스보다는 캠퍼스 인근에 위치한 지구중심의 운영체계를 보이며 간사와 학생 간의 유대관계가 긴밀하여 졸업 후 학사회로 계속 모이고 있다.
⑪ DFC(제자들선교회)
- 92년 4월 CCC로부터 분리 창립되었다.
⑫ SFC(학생신앙운동)
- 1947년 부산 제1영도교회 목사관에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학생신앙협조회'를 결성하여 시작되었으며 1948년 '학생신앙운동'으로 개칭하였다.
- 고신교단의 지원하에 초교파적인 학원선교 및 세계 복음화 운동을 지향하며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목적으로 하여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을 신조로 한다.


4. 90년대 새로운 기독학생운동의 움직임


(1) 90년대 이후 기독학생운동은 격변하는 사회현실과 맞물리며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이어지는 운동권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를 요고 받게 되었다. 신학대학들은 80년대 '전대협'출법과 맞추어 '전국 신학대학 총학생회 연합'을 조직하였으나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전대협에 흡수되었다. 이후 한 두 번 정도 '수도권지역 신학대학연합' 등을 조직하였으나 그 운동력을 이어가지 못했다.

(2) 1995년 들어 계파별로 모이게 된 신학대학 모임은 '복음주의 대학 총학생회 연합'(복대총련)과 '장로교 통합 신학대학 모임'(장신련), '그리스도 신학대학 연합'등으로 나뉘어 각각 활동하였다. 이 모임들은 1998년 '기독교 대학 총학생회 연합'(기대총련)으로 통합하였다. 이들은 '연합과 일치'를 통한 대학내에서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를 균형있게 실현하고 '대학문화개혁', '교회 갱신', '사회정의 실현'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3)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기독인 연합회'(기연)은 각 대학에서 연합 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자생적으로 만들어 졌다. 기연 사역은 '서울대 기독인 연합회'(서기연)이 주도적으로 모델을 제시하였는데 각 대학별로 '기독인 신입생 O.T'와 개강예배 등을 진행하였다. 기연 사역은 학교마다 캠퍼스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특별히 '학원복음화협의회'가 주최한 '기연수련회'는 각 대학의 기연 사역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4) 1996년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탄생한 97년 연세대 기독 총학생회는 여러 가지 평가를 받으며 기독학생들의 학생회 진출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기독 총학생회를 목적으로 대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은 98년도 총학생회 선거에 10개 대학이 도전한다. 결과는 명지대만 당선되고 참패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새벽이슬'이란 모임을 만들고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99년에는 아주대와 숙명여대, 연대 총여에 진출하였다.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이제 대학가의 기독학생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먼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기독학생운동의 보수와 진보 진영은 각자의 신학과 믿음에 기초하여 대학 내에서 치열하게 생활하였다. 우리의 선배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훈련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충실했던 것이다. 이제 기독학생운동은 보수와 진보의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 보수는 전도하고 제자훈련하고 진보는 사회운동 한다는 단순한 사고를 뛰어넘어 '로잔언약'에서 고백하고 있는 대로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를 기독학생의 의무로 믿고 캠퍼스를 섬기고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사역으로 변화해야 할 때이다. 21세기 세계 속의 역사의 주역으로 기독학생들이 우뚝 설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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