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평전 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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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부름 받은 늦깎이 고학생
정암 박윤선은 1905년 12월 11일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해변 마을 장평동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박근수와 어머니 김진신 사이에서 2남 3년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윤선은 아홉 살에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 되던 해에 대동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6학년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6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대동학교는 기독교 학교이므로 아침마다 채플이 있었으며, 성경 수업도 있었다. 박윤선은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 신앙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박윤선은 겨울 방학 때 부모가 정해준 규수 김애련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랑은 18세였고 신부는 15세였다.
1923년 박윤선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 중학교 2학년에 월반 입학하여 다니다가 이듬해 선천에 있는 신성 중학교 3학년에 월반 전입하였다. 신성중학교에 다닐 때 박윤선은 가정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므로 학교에서 맡겨주는 대로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다 하며 고학을 하였다. 그러다가 선천 기독청년회(YMCA)에서 운영하는 무산 아동 교육 사업에 교사로 채용되어 매월 6원씩 받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선천 신성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주일마다 선천북교회에 출석하였다. 당시 그 교회 담임 목사는 신성중학교 설립자의 한 사람인 양전백이었다. 박윤선은 거기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러 해를 성경을 배우며 교회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차츰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며 이 무렵 박윤선은 그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신앙 체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 가까이에 있는 시냇가를 혼자 산책하느라 거닐고 있을 때 문득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며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이다.”
그 이후 그는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박윤선은 신성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내도 교육을 받게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선천에서 고향까지 팔십리 길을 걸어가 집에서 며칠 쉬고는 아내를 데리고 선천읍으로 돌아왔다.
선천에서 그는 생활비가 부족하지만 단칸방에 세 들어 지내면서 아내에게 글을 가르쳤다. 얼마 후 그는 아내의 이름을 영선(英善)이라고 개명해 주고는 아내를 선천 보성여학교에 입학하게 하였다. 박윤선은 이제 자신과 아내 두 사람 몫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므로 더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를 다닐 때에도 내내 고학을 계속하였다. 부인은 마침내 4년간 보성여학교에서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부와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나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내를 공부하게 한 일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그의 인품을 엿보게 하는 그런 대목이다.
박윤선은 1927년 23세의 나이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윤선은 전문학교 시절에도 여전히 고학을 계속하였는데 숭실전문학교 학장 모의리 선교사의 소개로 평양 철도 호텔에서 종업원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강사 자리였다.
박윤선은 숭실전문 4년 동안 순회 전도와 기도 생활에 힘쓰는 한편 모란봉 너머에 있는 가현교회에서 설교하고 심방하면서 목회하였다.
1931년 3월 박윤선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윤선은 신학교 시절에도 여름 방학이 되면 전도대에 참가하였다. 그럴 때면 특별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느라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였으며 농촌 교회를 순방하여 설교할 때면 박윤선은 그 전날 하루 종일 금식하곤 하였다. 사람을 회심하게 하는 일은 지혜로운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전도를 통하여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목회하는 한편, 학우 김진홍, 방지일과 함께 기독교 잡지 [겨자씨]를 출간하여 문서운동을 하였다.
2. 미국 유학에서 거둔 소득
1934년 3월 박윤선은 신학교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으며 그해 8월 나부열 교장의 추천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하였다. 박형룡은 박윤선을 일찍부터 신학 교수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미국으로 가서 유학하도록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추천하였다.
박윤선이 유학 중에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기뻤던 일은 모친의 회심의 소식을 들은 일이었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에서 교회사나 조직신학보다는 성경 원어를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며 메이천의 지도 아래 신약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주로 메이천의 강의를 들을뿐 아니라, 그의 경건한 삶에서 교훈과 감화를 받았다. 박윤선은 또한 메이천에게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확신을 전수 받음과 동시에 성경 해석 방법을 습득하였다.
박윤선은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며, 자신은 장차 한국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해석 방법을 메이천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박윤선은 후에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하면서 칼빈주의라는 말보다 개혁주의라는 말을 더 즐겨 쓰게 되었다. 개혁주의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 즉 성경 말씀을 따라 항상 새로워지려는 교회임을 표방한다.
박윤선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얻는 또 하나의 소득은 정통장로교회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통장로교에 속한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선교사를 학교의 같은 반에서 급우로 만나 평생을 사는 동안 그와 우정을 나누게 된 것 역시 큰 소득이었다.
한부선은 한위렴 선교사의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황해도 재령에서 자라면서 한국 민족의 비운을 한국 백성들과 함께 겪었으며, 한국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산 선교사이다. 박윤선이 나중에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에 종사할 때 정통장로교의 도움을 받으며 한부선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박윤선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얻은 귀중한 소득 가운데 하나는 큰 소리로 간절히 기도하는 습관이었다. 그는 숭실학교 시절부터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으나 여기서 그는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체득하였다. 박윤선은 기도할 때 큰 소리로 하듯이 설교할 때도 역시 늘 진지하게 힘과 열정을 쏟으며 하였다.
3. 성경 주석에의 소명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연구과에서 신약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6년 8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먼저 고향에 계시는 모친을 찾아뵈었다. 모친이 예수를 믿고 난 후 처음 뵙는 상봉이었다. 그 후 그는 가족들과 평양에 거주하면서 총회 교육부에서 편찬하여 발간하기로 한 [표준성경주석]을 위하여 일하였다. 그는 또 평양신학교에서 2년간 시간 강사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한편,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가르쳤다.
1934년 한국선교 희년을 맞이하여 감리교에서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유형기 목사의 주관 하에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이 번역은 고등비평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에 장로교에 큰 물의를 야기하였으며, 장로교 총회에게 [표준성경주석]을 편찬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박윤선은 [표준성경주석] 일을 박형룡의 배려와 부탁으로 맡게 되었다. 박윤선은 이 주석 집필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주석 작업이 그에게 주석가로서 헌신할 수 잇도록 용기를 준 계기가 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표준성경주석] 편찬에 참여하여 고린도후서를 맡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웨스터민스터에서 배운 방법대로 주석을 쓰려고 노력하였다. [표준성경주석 고린도후서]는 1938년 6월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박윤선은 신학교와 성경학교에서 가르치며 성경을 주석하는 귀한 일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핍박으로 인한 험난한 시국 때문에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일제 정부는 1935년 이후부터 더욱 강도를 높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한국 백성들과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여러 교파 교회들이 일제의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씩 굴복하였다. 그리고 굴복하지 않은 안식교회와 성결교회는 강제로 폐쇄 당하였다. 오래 버티던 장로교회 역시 1938년 2월 5일 평복 노회를 위시하여 다수의 노회들이 신사 참배를 받아들이기로 가결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해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사 참배를 하기로 결의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장로교회도 일제에 굴종하고 말았다. 그러나 1939년 초에는 평안도와 경남 지방에서, 그리고 만주에 거주하는 교포 신자들 사이에서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주기철 목사는 이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마산에서 목회하다가 1936년 산정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1931년 마산문창교회로 오기 이전 부산 초량교회를 시무할 때부터 경남노회에다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제출한 일로 한국 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부터 세 번이나 검속 당하였다. 1940년 5월 네 번째로 검거되어 평양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하였다.
장로교회가 총회적으로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결행한 일은 비통한 일이었다. 게다가 노회와 지역 교회들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을 징계하고 출교한 것은, 물론 일제의 강압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만, 엄청난 죄를 범한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이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 참배의 죄를 회개할 때 마땅히 동시에 회개해야 할 일이다. 신사 참배를 반대한 이들은 옥에 갇히거나 지방으로 잠적하거나 혹은 국외로 망명하였다. 장기수로 옥에 갇힌 70명의 성도들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대다수가 순교하였으며, 해방을 맞이하여 살아 출옥한 이가 20명 미만이었다.
4. 망명
나라와 교회가 이와 같이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대 박윤선은 두 번째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후에 두 번째 유학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맞서지 못하고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가 두 번째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갔을 때 은사 메이천 교수는 타계하였고 대신 반틸 교수가 후계자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박윤선은 성경 원어를 공부하는 한편 반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변증학을 연구하면서 화란의 개혁 신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화란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박윤선은 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1939년 10월 동경에 와서 수개월간 체류하면서 [표준성경주석]의 일부인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골로새서 주석을 집필하였으며 사설학원에 다니며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봉천에서 신학교를 열자는 초청을 받고 이듬해 1940년 3월에 잠시 귀국하여 가족을 데리고 마주 봉천으로 갔다. 그곳 교포들이 신학교를 세우려고 박형룡 박사와 그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봉천신학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조선기독교연맹의 후원으로 1941년 설립된 학교이다. 그런데 장로교 교세가 우세하다보니까 학교 운영을 장로교의 목사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박윤선은 1940년 봉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봉천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여 신약과 함께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가르쳤다.
박윤선은 봉천신학교까지 몰아친 신사 참배를 피하여 1943년 신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봉천에서 약 80Km 거리에 있는 만주에서 유명한 공업 도시 안산(鞍山)으로 가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까지 약 2년간 은거 생활을 하면서 그의 숙원인 성경을 주석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박윤선은 달도만이라는 시골에 사는 계노순 집사 댁에 머물면서 주석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는 요한계시록 주석을 탈고하고 시편 주석 일부와 공관복음 주석을 집필하였다. 때로는 봉황산 계곡의 바위에 앉아서 공관복음 주석을 쓰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박윤선은 가족을 데리고 봉천을 떠나 그의 고향인 평북 철산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약 6개월 머무는 동안 장평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그러다가 1946년 2월 말경 그는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는 3월 1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태원에서 두어 달 머물다가 한상동 목사를 만나 그의 권유를 받고 5월에 부산으로 갔다.
5. 회개 운동과 신학 교육
1946년 5월 20일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학교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신학교 설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진해교회 예배당에서 6월 23일부터 8월 23일까지 2개월 동안 신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박윤선은 신학 강의를 하는 한편 진해 경화동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봉사하였다.
1946년 9월 17일 신학교 설립 위원회는 학교 이름을 고려신학교라고 하고 부산에 있는 일신여학교, 즉 현재의 금성중학교 교실을 빌려 9월 20일 개강하였다. 얼마 후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는 부산 초량교회 부속 건물에서 한 달 반이나 강의하다가 광복동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있는 큰 이층 건물을 구입하여 이사하였다. 학교는 이 건물을 여러 해 동안 교사로 사용하였다. 교사 건물은 부산남교회와 연결 되어 있어서 전국 학생신앙운동(SFC) 수양회 집회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학교는 1956년 봄에 송도 암남동으로 이전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주한 미군 군사원조단의 물자 원조와 미국 개혁교회 교단의 후원과 지교회들의 헌금으로 부산 복음병원이 서 있는 같은 부지 안에 교사를 신축하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 목적이 과거 신사 참배에 동참했던 한국 교회의 과오를 회개하고 교계 정화를 이루는 것이었으므로 신학교는 1946년 9월 태동한 직후부터 ‘성경중심’, ‘진실위주’,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자’고 주창하며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박윤선은 학교의 시작 단계에 유일한 전임 교수로서 성경신학, 변증학, 교의학 등 여러 분야의 과목을 맡아 교수하였다.
1947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는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박형룡 박사 교장 취임식에 곁들여 박윤선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의 교수 취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부산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고려신학교의 진로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1948년 5월 21일 졸업식을 한 달 앞둔 시점에 박형룡은 교장 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가 떠나자 고려신학교가 한국 교회에서 갖는 비중은 그만큼 반감되었다. 박형룡을 따라 서울에서 부산으로 왔던 34명의 학생들과 함께 모두 50명의 학생들이 박형룡을 따라 학교를 떠났다.
1948년 박형룡이 떠난 후 고려신학교 이사회는 즉시 박윤선을 제2대 교장으로 세웠다.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나면서 박윤선에게 그와 함께 서울로 가자고 했으나 박윤선은 이를 사절하였다. 박윤선은 박형룡과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도 이미 설립된 고려신학교를 돌보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고려신학교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뿐 아니라 많은 정력과 애정을 쏟아 학교를 육성하였다. 그리고 많은 신실한 목사 후보생들이 모여들어 그의 강의와 인격적인 신앙 지도를 사모하고 있었으므로 박윤선은 학교를 쉽게 저버릴 수 없었다.
박윤선의 강의는 언제나 열강이었으며, 그의 설교는 늘 뜨거웠다. 신학교 채플 시간은 그냥 부흥회였다. 온 학생들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통성으로 회개하고 기도했으며, 주말이면 성령의 불을 안고 그들의 목회지로 향하여 갔다.
1953년 11월 2일 박윤선은 화란 자유대학교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칼빈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일관성 있게 주석을 하려면 칼빈주의 신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그는 화란 유학을 지망하였다. 박윤선은 옛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에 틈틈이 화란어를 자습하여 화란 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있었다.
1954년 3월 화란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겨우 반년이 되었을 대 부인 김영선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는 즉시 공부를 중단하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부인은 애석하게도 교통사고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5남매의 자녀를 남겨 둔 채 소천하였다.
박윤선은 부인을 여의고부터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진 가정을 겨우 지탱하며 이끌어 가다가 7개월 후 그해 10월 하순에 이화주(李和主)와 재혼함으로써 가정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이화주는 박윤선에게 배운 이로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남교회에서 여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던 미혼녀였다. 한상동 목사가 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중매를 섰다. 이화주는 오직 박윤선의 사역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결혼하여 전 부인이 두고 간 자녀들과 가난한 살림을 맡아 남편을 보필하였다. 박윤선은 새 부인과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박윤선은 나중에 비록 화란 생활은 어려웠고 체류 기간은 짧았으나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화란어의 독해력이 증진하게 된 것도 소득이었을 뿐 아니라, 화란 신학을 좀 더 익히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학 사상은 개혁주의 바탕에 견고하게 기초를 두게 되었으며, 그것이 또한 고신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6. 진실 추구와 쓰라린 고립
박윤선은 고려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고신측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육성하는 일에 헌신했으나 1960년 고려신학교를 떠나야 했다. 박윤선이 주일에 본국으로 귀국하는 한 선교사를 배웅한 것이 물의를 빚게 되어 학교를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윤선으로 하여금 고려신학교를 그만 두게 한 상황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성되고 있었다. 교회 재산을 위한 소송 문제가 교회 정치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박윤선은 소송을 반대했으나 소송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견해가 대세가 되면서 그의 입지는 약화된 가운데 주일 성수 문제로 추궁을 받다가 마침내 고려신학교 교장 직을 해임당하고 교수직도 정직을 당하여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박윤선은 14년간 고려신학교에서 봉사하는 동안 가장 왕성한 연구 활동을 했다. 25권의 신구약 성경을 주석하여 이를 7권의 책으로 묶어 발간하였다. 1947년 11월 요한계시록 주석을 출간한 이후 공관복음, 로마서, 요한계시록의 개정판과 바울서신, 히브리서와 공동서신, 시편, 요한복음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는 1979년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주석을 마지막으로 성경 책 전부를 주석하여 출간하기까지 이러한 보조를 늦추지 않고 매년 한 권씩 출판하였다.
7. 고난과 고독의 극복
1960년 11월 박윤선은 짐을 꾸려 이재만 목사가 있는 동래구 장전동으로 가서 작은 초가집을 전세 내어 살림을 시작하여 좁은 방에서 책에 파묻혀 성경 주석을 집필하였다.
1961년 1월 말경에 박윤선은 드디어 설교할 수 있는 강단을 얻게 되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동산교회를 목회하게 된 것이다. 동산교회는 새문안교회에서 나온 교인들로 구성 된 개척 교회였다. 박윤선이 부임한 이후 말씀을 사모하는 교인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어 교회는 곧 자립하게 되었다.
목회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박윤선은 신학교를 시작하겠다고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에 대한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신학교가 서면 또 하나의 교단이 분립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간하배 선교사는 선교부를 대표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박윤선은 간하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산교회에서 ‘개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3월이면 새 학기가 시작되므로 개교를 늦출 수가 없었다.
처음 등록 학생 수는 15명이었는데 그 중 12명이 보류 노회 교회에 속한 학생이었다. 9월이 되자 학생 수는 40명으로 불어났다. 박윤선과는 오랜 친구이며 고신에서 구약을 교수하며 같이 일하던 동료 김진홍 목사가 와서 교수진에 참여하였다.
개혁신학교 개설을 부정적으로 보고 이를 말리던 간하배 선교사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선교부가 개혁신학교를 돕는 것이 교회 연합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개혁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함께 가르쳤다.
8.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
1962년 11월 22일 박윤선은 총회신학교로부터 교수로 오라는 초빙을 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고신 측이 환원을 결행한 바로 그 다음 달이었다. 개혁신학교는 폐쇄되고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총회신학교로 편입하였다. 또한 박윤선과 개혁신학교를 지원하던 보류 노회는 합동 교단에 합류하였다.
박윤선은 1963년 3월부터 총회신학교에서 교수하면서도 동산교회를 계속 시무하다가 그 이듬해 1964년 3월에 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아쉬워하는 마음을 달래며 동산교회를 사면하였다.
박윤선은 1963년부터 합동 측 총회신학교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윤번제로 교장 혹은 대학원장 보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5년 3월 박윤선은 부산에 있는 총신 부산 분교의 책임자로 갔다. 박윤선은 부산 분교에서 교수하면서 주일에는 수정동에 있는 성산교회에서 설교하였다. 얼마 후 그는 그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부산에 가서도 교수하면서 겸하여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주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2년 후 그는 다시 본교에서 필요로 하여 서울로 갔다.
1967년 3월 박윤선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와서 사당동에 생활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의 교수 생활은 이제 바빠졌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신약학 전과목을 다 맡아 교수하였다.
1968년 7월에 박윤선은 상도동에서 뜻을 같이하는 몇몇 성도들과 함께 한성교회를 개척하였다. 1974년에 그는 김진택 목사를 한성교회에 담임 목사로 추천하여 세우게 하고 자신은 매월 첫 주일 공 예배 설교를 하는 것으로 협력하였다.
1970년에 박윤선은 두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몸을 무리하여 병을 얻었다. 동산교회의 김성환 목사가 안식년을 얻어 1년간 미국 유학을 하게 되어 전임 목사인 박윤선에게 강단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여 박윤선은 이를 쾌히 수락하였다. 그는 동산교회의 설교 사역을 1년간 맡았을 때도 한성교회를 계속 목회하면서 양 교회를 섬겼다. 1971년 1월 김성환 목사가 귀국하자 박윤선은 한성교회만 섬길 수 있게 되어 홀가분해졌으나, 그 간에 이미 건강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71년부터 한 해 동안 담석증 신병으로 미국에서 쉬면서 치료를 받았다. 약 10개월간 필라델피아와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면서 많은 성도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주석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1974년 박윤선은 70세로 명신홍 박사와 함께 은퇴함으로써 11년간의 총신대학교 교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고려신학교 14년, 개혁신학교 3년과 봉천신학교 2년을 합하면 30년간 교수 생활을 한 셈이었다. 그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교수로 있는 동안 13권의 성경 주석을 집필하였다. 즉,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더, 다니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잠언, 욥, 전도서의 주석을 썼다.
1974년 11월 은퇴 후 박윤선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3년 7개월 동안 가족과 더불어 지냈다. 아내와 두 자녀는 1973년 7월에 미국으로 이민해 가서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마지막 남은 구약 중 3권의 주석을 완성하였다. 미국에서는 도서관을 이용하여 필요한 책들을 충분히 참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총신이 다시 그를 불러서 박윤선은 1979년 2월에 한국으로 와서 3월에 Th.M.과 M.A. 과정의 대학원 원장직을 맡았다. 그해 10월에 그는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주석의 집필을 끝냄으로써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20권의 책에 수록하여 완간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보다 한 달 앞서, 1979년 9월 3일 박윤선의 모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박윤선을 포함한 네 사람에게 명에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교장은 학위를 수여하면서 박윤선을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경학자”로 소개하였다. 한국 교회를 위한 헌신과 남긴 업적으로 보아 그는 명예박사를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9. 박윤선의 주석과 신학
박윤선의 주석은 한국 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의 서재에 꽂혀있어서 그들의 설교 준비를 돕고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오고 있다.
박윤선은 1938년 표준성경주석 고린도후서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979년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를 내놓음으로써 성경전서 주석을 완간하기까지 40년간 주석 집필을 거의 쉬지 않았다. 박윤선 주석은 우선 그 분량이 엄청나다. 구약 주석은 총 7,347쪽에 달하고 신약 주석은 총 4,255쪽에 달한다. 1988년 소천하기까지 그는 주석을 증보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증보한 분량만 해도 8,382쪽에 달한다.
박윤선은 그의 주석 책들마다 서두에 책의 저자와 연대 문제 등에 관한 비판적인 견해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고 변증하며 간략하게 기술한다.
박윤선은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시인하며 확신한다. 그는 워필드가 예수께서 성경의 절대 권위를 믿으시고 또한 성경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써 만전 영감(plenary inspiration)을 믿으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워필드의 견해를 지지한다.
박윤선은 자신의 주석을 자평하여 칼빈주의 성경 해석 원칙에 따랐다고 하면서 그가 제일 먼저 낸 요한계시록 주석 서론에 개혁주의 성경 해석 원칙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박윤선이 참고한 책들이 주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즉 헤르만 바빙크, 보스, 흐로쉐이드, 리더보스, 스킬더, 워필드, 흐레이다너스, 찰스 핫지 등의 책이다. 박윤선이 화란 신학자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1953년 화란에 유학 가기 훨씬 이전인 1936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메이천의 강의를 들을 때부터였으며, 그 때 이미 화란어를 배우기 시작했었다.
박윤선의 주석은 간결하게 쓴 편이며, 천여 개의 많은 간추린 설교와 설교 자료를 각 장의 끝에 첨가하고 있다.
박윤선은 설교에서 예화는 숨통을 트게 하는 창문과 같다고 하는 자신의 지론을 따라 그의 주석에 첨부한 설교에도 풍성하게 예화를 들고 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박윤선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를 존중하여 풍유적인 해석은 금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주석에서 더러 풍유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설교에서는 풍유적인 해석에 근거한 설교를 자주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풍유적인 성경 해석, 즉 영해는 교회 역사에서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중세를 거쳐 오래 동안 전수되어 온 성경 해석 방법이다.
박윤선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며 그것이 곧 개혁주의 성경 해석 원리이요, 예수께서 친히 따르신 원리하고 말하면서 문법적, 역사적, 심리적, 학문적 해석 적용과 함께 마지막으로 영적 해석의 중요성을 말한다.
칼빈은 성경 전권 중 요한계시록만 주석하지 않았으나 칼빈과 달리 박윤선은 요한계시록을 암송할 정도로 좋아해서 요한계시록을 제일 먼저 주석하여 출판하였다.
박윤선은 지나치게 자유로운 영해는 삼가고 있으나 할 수만 있으면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박윤선은 1937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자 곧 신학지남에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박형룡을 지원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바르트를 비판할 수 있는 준비를 메이천에게서 배워 갖추었다.
박윤선은 계시 의존 사색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 말은 그의 변증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며 그에게서 배운 이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인상 깊은 말로 남아있다고 한다. 박윤선은 하나님이 오직 계시 의존 사색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신다고 하며, 계시 의존 사색은 다른 것이 아니고 곧 성경적 사색이라고 한다. 박윤선은 자신이 변증학을 반틸에게서 배웠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박윤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수학할 당시 그의 주임 교수 메이천과 나중에 반틸을 위시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무천년설을 지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견지하였다. 박형룡과 박윤선 두 사람이 다 종말론에 대하여 자신들이 신학하기 이전에 이미 얻은 전천년 신앙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10. 교회 쇄신과 바른 신학 교육을 위한 마지막 헌신
박윤선은 1980년 9월에 17년간 교수하던 총신대학교를 떠나 새 신학교, 즉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전에 이영수 목사가 1975년 교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영남과 평안도의 주류파와 호남과 황해도의 비주류파의 대결이 격화되어 1979년 9월 총회에서 합동 측 교단은 마침내 두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분열된 두 교단은 정통성의 명분 및 교세 확보와 확장을 위하여 신입생 모집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 총신대학교 이사회 역시 비주류 측에지지 않으려고 학생들의 입학 자격을 가리지 않고 모집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사회와 이를 반대하는 교수들 간에 갈등이 야기되었다.
1980년 65회 총회에서는 이영수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총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총신 문제에 책임이 있는 학생 교수 이사들을 색출하여 이들을 징계하도록 하였다.
교수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신복윤, 윤영탁, 김명혁, 박형용 네 교수는 10월 23일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교수들은 박윤선에게 학교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여 선두에 서 줄 것을 간청하였다. 신학교의 설립은 박윤선에게 올바르게 신학 교육을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희망이었다. 박윤선의 꿈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성취되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의 이념을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을 구현하자는 뜻에서 ‘바른 신학, 바른교회, 바른 생활’로 하였다.
1980년 11월 11일 남서울교회 예배당에서 학생, 교수, 목회자들과 성도들 약 500여명이 참석하여 합동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 예배를 드렸다.
1982년 11월 9일 학교는 수원시 원천동 산 42-3 번지 소재 학교부지 22,713평을 매입하여 학교 교사를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많은 교회들과 명동 소재 건물 1동을 헌납한 최상금 권사와 그 밖의 후원자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1988년 봄 학기의 강의가 끝난 얼마 후 6월 12일에 박윤선은 복부에 심한 통증으로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오랜 지병이 된 위궤양과 담석증이 악화되어 암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입원한지 17일 되는 6월 29일 밤 10시 5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합동신학교장으로 치러졌으며 가족들의 의사와는 달리 학교 측의 소원에 따라 합동신학교 뒷산 본관이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안장되었다.
많은 동역자들과 제자들 및 후학들이 존경하고 높이 평가 하듯이, 박윤선은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신학자였으나 경건을 더 추구한 기도의 사람이요,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는 진실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그는 강단에서나 교단에서 늘 진지한 어조와 자세로 열정을 쏟아 설교하고 가르쳤다. 그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의 사람으로 깊이 각인된 한국 교회의 참으로 귀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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