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서 연구

 

서론 


1. 이 책의 저자는 에스겔(לאקזחי, God is strong)이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 자신도 제사장이었다(1:3). 에스겔은 B.C.597년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잡혀간 자로서(바벨론 1차 포로 시) 잡혀 간지 5년이 되던 해 그발강가에서 예언 사역을 시작하였다(1:1,3;21). 그발강은 바벨론 동남쪽에 있는 큰 운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이 강가에 있는 텔아비브(Tel A bib, 현재의 샷트엔-Schatt en-nil)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Bentzen에 의하여 이곳은 바벨론의 관계시설을 위하여 사로잡아온 유대인들을 수용하는 중앙 수용소였다고 한다. 에스겔은 그 자신이 포로였으며 사로잡혀온 포로들을 위하여 사역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였고 약 20년 동안(B.C.592-572)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였다(29:17).


에스겔서는 유대백성에게 하나님만이 그들이 섬겨야 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쓰인 책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말이 30회 이상 반복하여 나타나는데 이것은 에스겔서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 잘 말해 주고 있다.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었고 회개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그들에게 심판의 채찍을 드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채찍은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무지로부터 돌이키고자 하는 사랑의 매였다. 채찍의 목적은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자들에게 그들의 장래를 미리 보여 주심으로 소망을 갖게 해 주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유케 될 것이고 그들의 대적들은 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에스겔서에서 반복되고 있는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는 말씀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표현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2. 에스겔서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하심과 에스겔의 부르심에 대한 내용으로부터 시작 된다(1-3).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먼저 그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신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은 자는 부르신 이가 어떤 분이신지 알 때 비로소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실 때, 먼저 네 생물과 보좌에 앉으신 자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에스겔로 하여금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하셨다. 그리고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에스겔에게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되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해 주신 다음 메시지를 주신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은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매(3:1,2)” 이 말씀은 부르심을 받은 자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의 부르심을 확인 해 볼 수 있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의 유무(有無)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9)” 이 고백처럼 우리 안에 받은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짐을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이 영적 부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게 빚진 자니라(1:14)” 이런 부담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부담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시고 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3:18,19)” 이런 부담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소명 의식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영적 부담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식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에스겔서의 제1부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4-24). 유다의 부패는 거룩해야할 성전을 가증한 것들로 가득 채워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게 했다. 하나님은 환상 중에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예루살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 주셨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에는 우상이 서 있고 성소의 벽에는 가증한 곤충과 우상들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우상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고 남자들은 성전에서 여호와의 제단을 등지고 동방의 태양을 경배하고 있었다(8-11). 하나님은 더럽혀진 성전에 거하실 수 없으시므로 그 곳을 버리셨다(8:6). 이처럼 유다가 부패한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들의 부패였다. 그들은 백성의 선한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오히려 백성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로 변해 버렸다(13:17). 그들은 하나님께서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스스로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므로 백성들을 속였다. 그들은 평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이 있다고 말하였다. 영적 지도자들이 각성될 때 성전 예배는 신령과 진정한 것이 되어 그 예배를 통하여 백성들은 거룩케 될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들이 부패하면 성전이 황폐해 져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이 황폐케 된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부패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부패한 예루살렘을 버리셨다. 그때 예루살렘은 양식이 그쳤고 평강이 사라졌으며 또한 묵시가 그쳤다(4,7). 그 곳에 부모가 업신여김을 받았고 나그네가 학대를 받았으며 고아와 과부가 돌봄을 받지 못하였다(22).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떠나면 그곳에 평강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2부는 유다 주위의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들을 기록하고 있다(25-33). 여기에 암몬(25:1-7), 모압(25:8-11), 에돔(25:12-14), 블레셋(25:15-17), 두로(26:1-28:19), 시돈(28:20-26), 애굽(29:1-32:32)의 일곱 개 나라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이유들은 유다의 황폐함에 대하여 비웃었고, 또한 스스로 교만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형통케 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죄를 범함으로 황폐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에 대하여 가지신 본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방은 유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단순히 유다에 대한 멸시만이 아니었고 그들을 택해 주시고 그들에게 뜻을 두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였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넘어질 때 그것을 기뻐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이 그들 가운데 좌절 되는 것을 슬퍼하며 그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3부는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에 대하여 예고한다(33-48). 여기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이전에 있을 사건들을 말하였고(33-39), 또한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에 대하여 성전의 회복이라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말해 주고 있다(40-48).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패망이 삯꾼 목자들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시며,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셨다(3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34:14)” 이 언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보장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심으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세일을 대적하실 것이고(35), 곡과 마곡이 멸망할 것이다(38-39). 그리고 이스라엘 산들에게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이 올 때가 이르렀음이라(26:8)”라고 예언하셨다. 특별히 37장은 대언의 말씀으로 골짜기의 뼈들이 살아나서 이스라엘의 지극히 큰 군대를 이루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비전이다.


에스겔은 성전의 회복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이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을 말하기 위하여 성전에 대하여 장황하게 말하였다(40-48).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이다. 성전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룩한 곳으로 구별되어 있는 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샬롬이 있을 것이다. 에스겔은 성전 기능이 회복된 이후에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The Lord is there)”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땅 바로 거기에 그 날 이후로 하나님께서 계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궁극적 회복이요 비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조롱 받고 또는 범죄 가운데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이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המשׁ הוהי םוימ ריעה משׁו)




상징적 언어들


  에스겔서의 특징은 상징적 언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선지자 에스겔에게 임한 말씀들 대부분이 이상(異狀)을 통하여 임하였다. 물론 이상의 내용들은 대부분 상징적 언어들로 구성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에스겔서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언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징적 언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적(知的) 한계를 아시고 유추(類推)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이해의 도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사자를 본적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사자에 대하여 말로 설명해 주는 것보다 그림을 보여줌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상징적인 언어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상징적 언어를 이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는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문화라는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기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성경에 기록 된 이상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문화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다. 즉 예언의 말씀이 임한 그 시대와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의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의 간격은 우리와 그 시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예를 들면 선지자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사람들에게 네 생물에 대한 이상을 말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이상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들을 수 있었지만, 우리는 들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시대의 문화 가운데 의사소통을 가능케 했던 언어와 우리 시대의 문화 가운데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언어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이상들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문화와 언어를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면 1장에서 네 생물의 모습은 고대 근동의 문화에 비취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계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상징적인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이 본 이상에 나타난 네 생물의 모습을 그려보면 얼굴의 모습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몸에는 손과 날개가 달려 있었고, 네 둘레로 돌아가며 많은 눈이 있었고, 그리고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모습은 바벨론이나 또는 앗시리아 등 고대 근동세계의 조각이나 그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런 모습의 형상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 문화에서 이런 종류의 형상들은 힘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언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대 근동문화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네 생물로 표현한 상징적 언어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 주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시 바벨론 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시므로 포로로 잡혀 온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힘이 바벨론의 힘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이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상의 어떤 나라도 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신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 지금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포로 된 유다가 이처럼 믿음과 구원의 소망을 갖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에스겔을 통하여 네 생물의 이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


상징적 언어를 이해 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열쇠는 에스겔이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내용의 범주들을 알 때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겔은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었고,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였으며, 또한 장래에 대한 소망을 말해 주었다. 따라서 에스겔서에서 나오는 수많은 상징적 언어들은 대부분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인 언어들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네 생물(1장)’ ‘박석에 그린 그림(4장)’ ‘날카로운 칼(5장)’ ‘행구(12장)’ ‘골자기의 뼈들(37장)’ ‘성전(47장)’ 등이 있다. 이처럼 동일한 내용을 말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메시지를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 ‘네 생물’에 대한 상징적 언어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적 언어이고, 8장에서 ‘더럽혀진 성전’에 대한 상징적 언어는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골짜기의 이상(37장)’ ‘거룩한 성전(47장)’ 등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상징적 언어들이다.


상징적 언어를 이해 할 수 있는 열쇠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상징적 언어가 주는 효과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상 또는 상징적 언어 중에는 극화(劇化)된 말씀이 있다. 이처럼 극화 된 말씀은 듣는 자에게 최대의 효과를 준다. 12장의 예를 들어 극화된 말씀의 효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2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낮 시간 동안 사람들이 보는 때 행구를 준비하고 이사하라고 말씀하셨고, 저물 때는 그들이 보는 가운데 포로로 잡혀가는 자처럼 나가라고 했다(12:3-7). 본문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때, 극화(劇化)를 통하여 전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극화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시고자 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라(12:2)”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일반적인 언어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을 극화(劇化)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극화시키심으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신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이 일반적인 언어로 말씀을 전했을 때에는 그 말씀에 대하여 조금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행동을 통하여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은 말씀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 에스겔이 행구를 준비하여 이사하고 있을 때, 그리고 성벽을 뚫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로잡힌 포로의 모습으로 성벽에 뚫린 곳으로 나갈 때, 그들은 선지자의 이상한 행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12장 8,9절에서 하나님은 극화를 통하여 주신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물으셨다. “이튿날 아침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패역한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심은 극화를 통하여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준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이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예조라 하셨고…(12:10-12)” 이 말씀은 이스라엘 족속이 극화를 통하여 주신 말씀에 관심을 보이거든 그들에게 그 의미를 말해 주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전해 주기를 원하시고 계셨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전해 주시고자 하신 것은 패역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저주스런 것은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는 인도하심도 받지 못하고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세속화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극화된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선지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징적 언어들을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징적인 언어’에 대하여 무엇보다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 언어는 성령님의 가르침 가운데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는 분이시다(고전2: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상징적인 언어는 성령님만이 정확하게 해석하실 수 있다. 특별히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언어들을 대할 때마다 성령님께 가르쳐 주시기를 구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둘째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을 부패케 한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의 부패라고 말하고 있다. 13장을 중심으로 지도자의 부패함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부패한 지도자를 ‘영혼을 사냥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부패한 지도자가 공동체에 얼마나 큰 해악을 주고 있는지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침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도록 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선지자들은 ‘지금 여기에’ 필요한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해 줌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하는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말씀은 로고스에 속하는 말씀이고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말씀은 레마에 속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제사장과 선지자는 가르치는 궁극적 목적에서는 일치하지만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할 보편적인 말씀이냐, 아니면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말씀이냐만 다를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파수꾼’ 또는 ‘성벽을 수축하는 자’로 불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신의 직임에 충실할 때 공동체와 구성원 모두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말씀의 사역자들이 언제나 자신의 직임에 충실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직임을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패케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영혼을 사냥하는 자’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은 자’로 부르셨고, 또한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니(13:9)”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직임에 충성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지도자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권위가 인정되는 직임일수록 부패에 빠질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별히 말씀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직임보다 더 권위가 있다. 말씀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누가 그 말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선지자나 또는 제사장은 그 직임 자체가 권위인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를 가진 자들은 그것을 사유(私有)할 위험성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다. 그러므로 이런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탐욕에 이끌림으로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서를 통하여 부패한 선지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 욕되게 하며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13:19)” 이들은 작은 것을 탐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영혼들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끝까지 충성하기 위하여 요청 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분주하고 시끄러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일지라도 분주함과 시끄러움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말씀의 전파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야 말로 우리에게 침묵의 시간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또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에스겔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 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3:7,8)”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이 증거하고 있는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대언의 말씀인지 아니면 자기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는 영혼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셋째 에스겔서에서 다음의 몇 가지 상징적 언어들을 살펴봄으로 에스겔서를 통하여 주는 메시지의 대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네 생물에 대한 이상이다. 네 생물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계시해 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계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네 생물은 고대 근동의 문화에 비취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계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상징적인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이 본 이상에 나타난 네 생물의 모습을 그려보면 얼굴의 모습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몸에는 손과 날개가 달려 있었고, 네 둘레로 돌아가며 많은 눈이 있었고, 그리고 바퀴가 달려 있었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이런 이상한 모습의 형상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형상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힘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언어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시 바벨론 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시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힘과 권위를 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유다는 이 상징적 언어를 통하여 비록 자신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하나님은 바벨론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앎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언제든지 자신들의 포로 됨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네 생물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 또 하나의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이다. 이 이상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무지개 모습이다. “그 사면의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이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1:28)” 여기 보좌의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무지개 모양을 볼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노아에게 또 다시 홍수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 해 주신 언약의 표라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의 표를 노아에게 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홍수로 인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유다에게 보좌의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무지개 형상을 보여주신 것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서 유다와 은혜로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도록 하셨다.


따라서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네 생물을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포도됨 가운데 있는 유다처럼 곤고함 가운데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어 주는 영적 원리가 무엇인지 교훈해 준다. 이 영적 원리란 하나님의 능력을 주목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곤경에 빠져 있을지라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소망과 위로의 원천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OHS3&articleno=5253&categoryId=40&regdt=20131014110835&totalcnt=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