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운동의 주역들
(김영익 교수)
A. 전기 퓨리탄
1) 존 낙스(John Knox, 1514-72) : 청교도의 창시자
(1) 정치적 배경
영국의 바로 위쪽에 자리 잡은 스코틀랜드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입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대결의 양상으로 많이 분출되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국위를 선양하려 했고, 스코틀랜드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국을 보호하려 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스코틀랜드는 실질적으로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 영국의 침략을 차단하였다.
영국 튜더 왕조의 창시자 헨리 7세는 국경 문제로 긴장 상태에 있는 스코틀랜드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에게 출가시켰다. 잠시 동안 양국간에 평화가 깃들었으나, 헨리 7세가 죽고 그의 아들 헨리 8세가 영국 왕이 되어 교황이 주도하는 신성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두 나라는 또 다시 대적이 되었다.
신성 동맹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것인데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우방이었기에 처남인 헨리 8세가 매형인 제임스 4세와 적대 입장에 선 꼴이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는 격분하여 영국군과 싸우다가 플로든의 전투(the battle of Flod- den, 1513)에서 전사하였다.
임종시 제임스 4세는 아내인 마가렛을 섭정으로 지명했으나 스코틀랜드 의회는 마가렛이 영국 왕 헨리 8세의 누나라는 이유로 이 지명을 거부하였다. 대신 알바니 공작(Duke of Albany)이 프랑스에서 불려와 섭정에 취임되고, 왕위는 생후 17개월 밖에 안 되는 제임스 5세에게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왕가는 지속적으로 프랑스와 깊은 결속을 맺는데 제임스 5세가 프랑스 왕의 딸 마들린(Madeline)을 왕비로 취하고, 그녀의 사후 프랑스의 실력자 로렌 공작의 동생인 기즈의 메리 (Mary of Guise)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함으로써 이 결속을 더욱 분명히 한다.
한편 야망에 찬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장악하기 위해 4만의 군사로 전쟁을 일으키나 스코틀랜드의 견고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일단 방어에 성공하자 의기양양해진 제임스 5세는 영국군을 기습했지만, 솔웨이 모스 전투(the battle of Solway Moss)에서 패한 후 불과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위는 태어난 지 7일밖에 안 된 메리에게 돌아갔다. 헨리 8세는 아들인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 여왕이 된 갓난이 메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를 정략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장악하려 했다. 개신교에 동정적인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 결혼을 환영하였다. 1543년 7월 1일 양국간에 결혼 조약이 맺어졌다. 그러자 가톨릭 진영의 성직자들이 맹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통치를 두려워했다. 헨리 8세 역시 스코틀랜드에 무리한 요구를 강행했다. 그는 즉각 프랑스-스코틀랜드간의 동맹을 파기하고 어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영국에 인도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고집은 스코틀랜드인의 저항과 반감만 부채질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후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에 보내져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고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황태자 프란시스와 결혼했다(1558년 4월).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보위를 이어 겨우 17개월 동안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가 1560년 12월에 죽었다. 이로 인해 메리 스튜어트는 1561년 8월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스코틀랜드 왕가가 친 카톨릭, 친 프랑스 정책을 취할 때 영국은 그 반대 입장을 취했다. 힘의 역학 구도 상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반 카톨릭의 힘으로 나타난 것은 대륙의 종교 개혁이었고 영국도 이 힘을 지혜롭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국이 반 카톨릭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였다. 교황청은 이러한 헨리 8세를 “믿음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로 추켜세웠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하여 유럽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 교회의 수장이 로마 교황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이다.
헨리 8세의 돌연한 변화는 그의 이혼 소송에 교황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왕정의 굳건한 토대를 세우려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어야 된다고 믿어 온 전제 군주였다. 자신의 아내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은 이러한 헨리 8세를 지속적으로 실망시키고 있었다. 캐서린으로부터 3명의 딸이 연이어 탄생되지만 모두 죽고 메리 튜더(Mary Tudor)만 생존해 있었다.
헨리 8세는 후계자 문제로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형수(원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결혼했으나 아서가 결혼 6개월 만에 죽자 다시 헨리 8세와 결혼했다)를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결론 내리고, 마침 궁녀인 앤 볼린(Anne Boleyn, 1507-36)이 마음에 들자 이혼을 결정하고 교황청에 이혼 승인을 청원했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 이혼을 허락하고 싶었으나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칼 5세(영문명, 찰스 5세)의 고모인 캐서린을 이혼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혼을 허락하면 당장 교황청은 황제의 군대에게 유린당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을 못 받자 대노하여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교회를 가톨릭에서 독립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900년 이상 영국에 가해 온 교황청의 힘은 제거되고 영국 종교 개혁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재위 1547-53) 때에는 개신교가 영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1549년에는 공동 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 1553년에는 42개 조항이 반포되었다. 이 기도문과 42개조항의 많은 부분에 칼빈주의 개혁파 사상이 삽입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죽자 뒤이어 메리 튜더(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어머니 캐서린이 이혼당한 것에 한을 품고 있었다. 이혼을 허락한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 특히 켄터베리 주교 토머스 크랜머를 미워하였다.
메리 튜더의 등극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런 차원에서 스페인 왕 필립 2세(스페인 명, 펠리페 2세)와 결혼도 하였다. 그녀의 통치 기간에 300여 명의 개신교도들이 화형을 당했다.
메리 튜더가 죽자 왕위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1세)에게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종교를 다시 개신교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메리 튜더가 사망할 때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엘리자베스 외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에게도 있었다는 점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딸인 마가렛의 손녀가 아닌가! 그런데 메리 스튜어트의 종교가 가톨릭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왕권 신장을 위해서라도 스코틀랜드 왕정의 종교와 반대되는 개신교를 택함이 유리했던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인 헨리 8세도 그의 통치 말기에 개신교에 기울어졌고, 에드워드 6세도 개신교도였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앤 볼린도 개신교도였으므로 엘리자베스가 개신교에 접근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영국내의 종교 전쟁을 원치 않았으므로 개신교도나 가톨릭교도들 모두에게 반감을 사지 않도록 처신하는 방법, 곧 헨리 8세가 실시했던 “교회 형식은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를 채택했다. 이 방법은 개혁주의 청교도들이나 독실한 가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2) 스코틀랜드 종교 상황
스코틀랜드 교회는 아일랜드의 켈트 선교(Celtic Missions)에 힘입어 수립된 것으로 보이며, 7세기에는 수도원들이 스코틀랜드의 영적, 지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교구가 영국 요크(York)로부터 독립되었고(1176), 15세기에는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 교구가 메트로폴리탄 교구로 인정받았다(1472).
수도사와 수녀들이 기거하는 종교 건물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산재하였고, 선교 초기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켈트 수도원들은 대륙의 양식에 의해 밀려 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소수의 인물들을 빼고는 영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의 종교 상황을 리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부분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그들이 국왕이나 귀족들의 자손들이었거나 혹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성직자들의 높은 도덕적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성직자들의 최고위층에서도 고상한 미덕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튼 추기경]에게는 수도원장 시절에 이미 1남 2녀가 있었으며, 추기경에 임명되기 이전에 아들 셋을 더 낳았고, 임명된 후에 네 아들을 더 가졌다. 다른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교 개혁 당시 12명의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이 낳은 사생아로 보이는 많은 수도원장들에게 또한 자기들의 사생아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하위 성직자들이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평 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이러한 세속성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민중들, 특히 교육받은 이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활기에 찬 시민 계급들이나 뭔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지주 계급들에게 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무식했고, 교회 공동체의 운영은 개탄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에 동감을 표시한 영국 사제 레스비(James Resby)는 성경적 신앙을 주장하다가 1407년 스코틀랜드 퍼스(Perth)에서 화형 당했다. 선교사로 파송된 후스파 크라바르(Paul Crawar)는 1433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고난을 당했다.
카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 재판관을 채용했고, 상당수의 롤라드파 사람(Lollard)들이 이 무서운 종교 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1525년 루터파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법률로 금했다.
이러한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혁 사상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1520년 스코틀랜드의 롤라드 파인 니스벳(Murdock Nisbet)은 위클리프 신약성경을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고쳐 썼고(이 성경은 1901년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틴데일 영어 신약성경이 1526년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이후부터는 스코틀랜드에 개신교가 하나의 운동으로 부각되었다.
이 운동에 좀 더 분명한 금을 그어준 사람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계명성이라고 호칭되는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28)이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하여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한 후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으로부터 이단 혐의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한 해밀턴은 마르부르크(Marburg)로 탈주하여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 등과 교제하면서 루터 파 신앙에 몰입하였다. 그는 “루터파의 신앙에 관한 짤막한 논문”(Loci Communes)도 작성했는데, 이것은 후일 틴데일의 친구인 존 프리스(John Frith)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 개혁의 열정에 충일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루스로 오라는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자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네 살이었다.
해밀턴의 순교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가톨릭을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지식층은 물론이고 상인들과 광부들까지도 종교 개혁자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가톨릭의 지도층은 계속 탄압과 박해를 하였다.
1539년 제임스 비튼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자는 그의 조카인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이었다. 그는 교황청과 프랑스와 더욱 깊이 결속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악한 행적은 “선하고 경건한 민요들”(Good and Godly Ballads) 속에서도 풍자적으로 나타난다.
추기경이 되자 비튼은 한층 더 이단 박멸에 열심을 내었다. 1540년 비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을 제어할 법률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사적 종교 비밀 집회를 금하였다. 그러나 비밀 집회를 가진 개신교 모임(소위 사적 교회, Privy Kirks)은 지하 운동으로 존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에 비튼의 표적이 된 자는 조지 위샤트(George Wi- shart)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 아카데미(the Academy of Montrose)에서 헬라어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위샤트는 1532년 루벵(Louvain)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으며, 영국과 스위스에 가서 대륙의 종교 개혁의 흐름을 맛보았다.
그가 스위스에 있을 때 스위스 최초의 신앙 고백을 영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츠빙글리파에 속했다. 그가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 코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강의할 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위샤트]는 키가 크고, 검은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금욕적이고 독실하며, 박식하고 자애로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샤트는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몬트로즈, 던디, 아이셔 지역에서 병자 간호 및 설교 사역을 하면서 종교 개혁의 당위성을 외치고 있었다. 그가 하딩턴 지역에 가까운 이스트 로티안(East Lothian)을 지날 때 그곳의 지배자 보스웰(Bothwell) 백작은 위샤트를 체포하여 비튼 추기경에게 넘겨주었다. 1546년 3월 1일 위샤트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해밀턴의 길을 따랐다. 순교의 역사에 동참한 것이다.
위샤트가 체포당하기 직전 양날이 선 검을 들고 위샤트를 호위하던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는 본장의 주인공인 존 낙스이다.
위샤트는 “종교 개혁의 일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다른 날을 기다리라, 희생은 나 하나로 족하다”며 낙스를 떠나보냈다.
위샤트가 죽자 시민들 가운데서 추기경에 대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특히 귀족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에 동정적이었다. 귀족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국왕과 결탁하여 귀족들의 국정 참여 권한을 축소시키고 재산(토지 등)을 몰수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았을 때 분노하였다.
1546년 5월 29일 무장한 귀족 몇 명이 잠들어 있는 추기경을 깨워 칼을 들이댔다. 그 중 개신교도로 알려진 한 사람이 추기경에게 위샤트 살해를 추궁하면서 “우리는 복수하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추기경을 두 번 찔렀다. 다음날 그들은 추기경의 시체를 창문 밖에 걸었다.
이 사건은 사실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공포, 분노, 증오가 뒤섞인 복합적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곧 귀족들과 시민들은 수비대를 만들어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함락시키고 가톨릭과 왕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낙스는 이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수비대의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3) 존 낙스의 등장과 활동
존 낙스는 1513년경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딩톤(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앤드류(St. Andrews) 대학에서 교육받고, 이어 신부로 서품되었다. 30세쯤에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설복당했고,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위샤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였고, 1546년 성 앤드류의 화형장에서 순교했던 인물이다.
향후 13년 동안 낙스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패로 끝나 버린 앤드류 성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노예가 되어 프랑스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에 19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에드워드(Edward) 6세 치하 말기에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크랜머의 1552년판 '공중기도서'(Book of Commom prayer)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에 참여하여 일익을 담당했다.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독일로 건너갔다. 한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있는 영국의 망명자 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낙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보다 철저한 개혁파 예배 의식을 소개함으로써 '공중 기도서'를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망명온 보다 보수적인 자들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고, 낙스를 즉시 몰아내려고 리차드 콕스(Richard Cox)와 그 이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낙스에게 항의하며 "그대들은 영국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낙스는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런 충돌은 엘리자베드 1세 치세시 '공중 기도서'를 견지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이 지니는 노선에 서서 보다 충실한 종교개혁을 요구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청교도(Puritan) 논쟁의 전조가 되었다. 콕스는 사람들에게 (낙스의 급진적인 교회 정치관을 환기시킴으로써)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낙스를 추방시켜야 한다고 조종하자, 그는 제네바로 건너갔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를 열렬히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곳에 머물면서 그의 유명한 '괴물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1차 나팔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저술했다. 이러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비난은 영국의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에게 향해진 것이었다. 1558년에 엘리자베드가 즉위했고 그녀는 낙스의 그런 저서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그 곳에서 교회 개혁을 도왔다.
(4) 낙스와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는 낙스와 그의 동료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의 작성을 요구했다. 낙스는 4일 만에 5명의 동료 존들(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과 같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 의회의 상임위원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그리고 본회의는 동년 8월 17일에 이를 승인하였다.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자들의 교리, 즉 칼빈의 요리 문답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 고백, 폴란드인으로서 칼빈주의자인 존 라스코(John Lasco, 1499-1560)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의 글들을 참조한 것이 역력하다.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서문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 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합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샤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고백서는 진리에 대한 진술들이 무오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안에서 수정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제20항은 교회 회의들의 무오성에 반대하면서 “어떤 회의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하였으며, 그것도 매우 중대한 내용에서의 과오였다”고 지적하였다.
낙스는 1546년 트렌트 종교 회의(The Council of Trent)가 취한 가톨릭의 구원관에 기겁하였다. 트렌트 종교 회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여 신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미사의 참석은 가톨릭의 구원관에서는 필수적이다. 가톨릭 신학에서 “미사는 구원 신비의 중심이며,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며, 아울러 사실적이고 현재적 희생이었다.”
낙스는 인간의 방법이 배제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었기에 미사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제8항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한다.
[동일하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은총으로 이 세계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형제요, 목자요,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지명하셨다.]
교회 관에 대해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3대 요소, 곧 말씀의 참된 선포,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그리고 정당한 교회 훈련(권징)을 언급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다.”
(5) 낙스와 장로교회
낙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안에는 칼빈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지만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로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낙스의 생존시 감독(Superintendent)이라는 직책이 엄연히 존재한 점이다. 그렇다면 낙스는 영국 성공회와 같은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를 스코틀랜드에 창설했는가 하는 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도널드슨(G. Donaldson)은 낙스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감독제였으나,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제2의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장로회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슨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첫째, 낙스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의 궁정 목사로 시무할 때 이미 감독교회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둘째,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개혁파 교회보다는 루터파 교회의 영향 하에 있었다.
셋째, 1560년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의하면 목사의 임명이 회중에 의한 선거와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시험과 공적 임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란 상당한 권한이 부여된 감독을 의미한다.
넷째, 감독은 1년에 2회 이상 담당 관할 구역을 시찰하고, 목사의 불경건한 삶이 발견될 경우 대회를 소집하여 해당 목사를 해임시킬 뿐 아니라, 감독구에 있는 주요 도시에 감독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독의 임명 또는 교인들의 이혼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관 기능을 했다.
다섯째, 연금 수령에 있어서 감독은 500내지 700파운드를 받았는데 반해 일반 목사들은 10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등 지불은 감독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슨의 학설은 내픈과 리드에 의해 반박되었다. 특히 리드는 낙스의 저술을 세세히 분석하여 낙스가 성직자의 주 임무를 말씀의 선포로 보았던 점 그리고 성직자는 성공회와 같이 교회 기구나 세속 권력의 관여가 아닌 오직 회중의 동의에 의해서 임명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1치리서 제5항 제1조에서 제3조에 기록된 “감독”이라는 용어는 낙스의 진의가 아니었다.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본에는 감독이란 용어가 빠졌으나 후에 그의 동료 윌록과 스포티스우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감독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감독이라는 명칭은 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마련된 행정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영구 직이 아닌 한정 직이었고(처음에는 3년, 1570년도부터는 1년으로 단축되었음), 자기 관할 구역으로부터 비판과 치리를 받는 입장이며,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장로 제도를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도널드슨이 생각한 것처럼, 영국 교회의 치리자의 입장이 아닌 지 교회를 돌보는 방문자 또는 순회 전도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1566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제2헬베틱 신앙 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을 채택하여 목사 직위상의 우월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서 낙스는 영국 망명 생활에서 로체스터 감독직을 제안 받았으나 감독 정치는 성경이 금한다고 믿었기에 정중히 사양한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따라서 낙스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장로교회의 씨앗만 뿌린 것이다.
1560년 당시 비록 개신교 세력이 절대 우위를 차지했지만, 카톨릭교회의 직분 자들(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계속 교회에 출석했고, 그들은 직분에 따른 재산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가톨릭 성직자 및 그들의 재산 관리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그들과 타협해야 했던 것이다.
1572년 추밀원과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합동하여 리스 협약(Concordat of Leith)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서 가톨릭 측 인사들도 개혁교회에서 임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면 개혁교회의 총회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낙스가 뿌린 장로교회의 씨앗은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 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다.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2차 낙스의 항거는 1568년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가 영국으로 쫓겨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그의 주저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로서, 164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낙스는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헌신했던 최초의 청교도 죤 낙스(John Knox)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갖는 영적 권세에 대한 생생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이런 사람들이 설교한 내용은 대부분의 헌신적인 필사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잘 보존되었는데, 그는 망명과 추격 속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설교문도 단 두 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설교할 때의 일이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카톨릭과 개혁 신앙 사이를 오고 가던 메리 여왕 앞에서 그는 설교하였다. 여왕은 자주 얼굴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깊은 두려움에 질려서 부축을 받으며 예배가 끝난 교회당을 걸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여왕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막상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자신도 설교자인 존 낙스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어 했는지를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1571년, 그러니까 죤 낙스가 죽기 1년 전의 일이다. 그는 이미 중풍에 걸려 있었다. 세인트 안드류(St. Andrew) 지방에 있는 낙스의 한 생도로서 그의 설교를 빼놓지 않고 들었던 제임즈 멜빌(James Melville)은 후일 자신의 일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을 술회하였다.
바로 그해에 존 낙스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의 일이었다. 멜빌은 그의 설교를 받아 적기 위하여 펜과 노트를 준비하였다. 그는 반 시간 가량 온화하게 본문을 해설해 나갔다. 그러나 해설이 끝나고 그 내용을 적용하는 부분에 들어가면서 설교는 거룩한 열정에 불탔고 설교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멜빌은 더 이상 그 설교를 받아 적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설교를 들으며 필사자의 온 몸이 두려움과 신적인 능력의 영향으로 그를 받아 적을 수 없으리 만치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6)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낙스가 죽자 어린 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튼(Morton) 백작은 성공회식 감독주의를 소개하려 하였다. 모튼은 존 더글러스를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로 임명하고, 대주교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는 성공회식 주교들이 임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고위 성직자들은 “툴칸(tulchan)의 감독들”로 불렸는데, 툴칸이란 게일어(Gaelic)로 “암소가 우유를 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을 채운 송아지 가죽(a stuffed calf-skin)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에 칼빈의 제자이며 낙스의 후계자로 앤드루 멜빌이 등장한다. 멜빌은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도움을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시민법을 가르쳤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의 총장에, 1580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제네바 식 교육 행정, 교과 과정,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여 대학 교육 제도를 크게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낙스의 제1치리서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었다.
제2치리서는 감독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여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로만 나누었다. 제2치리서는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장로교 교육을 받은 제임스 6세가 영국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의 청교도는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도 그의 어머니가 지지해 온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대의 정치는 왕권 신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마찰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빌은 제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말씀드립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 왕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임스 왕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고,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귀하를 왕으로 섬기며, 귀하에게 합당한 예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멜빌을 런던탑에 4년 동안 가두었다가 영국에서 추방한다. 멜빌은 프랑스 세단(Sedan)에서 신학생들을 양육하다가 1622년 사망했다.
제임스의 사망(1625) 후 찰스 1세(재위 1625-49)가 통치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더 힘든 수난을 맞는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성공회주의를 강요하고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를 폐지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처분에 봉기하여 장로교회 정치를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에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과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가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두 사람은 1643년 영국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감독관으로 참석하여 영향을 끼쳤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신학교수인 러더퍼드는 낙스 식 계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이중 계약 아래 있다. 백성이 계약을 깰 때 법에 의하여 제재를 받는 것과 같이, 통치자도 백성과의 계약을 깰 때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한다. 결국 찰스 1세는 영국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연합 저항에 부딪혀 설 자리를 잃고, 1649년 1월 영국 의회 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올리버 크롬웰의 무단 정치가 끝나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는 찰스 2세(재위 1660-85)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영국 장로교도들도 찰스 2세가 장로교인들을 우대할 것으로 믿고 영국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이러한 기대를 모두 배반하고 장로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수많은 계약파 성도들을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찰스 2세의 사후,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가톨릭 화하려 했다. 그의 정책에 따라 나타난 저항은 신속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가 남편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같이 영국에 입성하였다.
네덜란드인 윌리엄은 이미 개혁주의자였다. 메리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했다. 169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감독주의를 폐지하고 장로 정치를 유일한 그리스도 교회의 정부 형태로 승인했다.
B. 초기 퓨리탄
2. 에드워드 데링 (Edward Dering, 1540 - 1576)
에드워드 데링은 켄트(Kent)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2년에 앤 로크(Anne Locke)와 결혼했다. 신부는 존 녹스(John Knox)의 설교를 흠모하였고 제네바에서 살기도 했던 부유한 과부였다. 청교도 학자인 패트릭 콜린슨(Patrick Collinson)은 데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청교도의 원형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은 그의 뒤를 따를 17세기 후배들에게 삶의 모델이 된다. 그는 청교도 정신의 긍정적인 자질들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훌륭하게 예시한다.
데링은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이때는 메리 여왕의 통치 초반기였는데 케임브리지가 청교도의 모판이었다. 데링이 동역 자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복음주의 신앙에 불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즉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앙을 통해서 대 심판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데링은 당시의 가장 우수한 헬라어 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4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했을 때 헬라어 연설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주교와 친분이 있어 중요한 행사에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570년은 그의 경력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국교회의 사역 수준이 너무도 저질인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데링은 이러한 감정을 그의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1570년 2월 25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채플에서 설교했는데 여왕을 대놓고 면박하였다. 그는 여왕이 무가치한 교회 사역자들을 제거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한다고 꾸짖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놀고 먹는 자, 사기꾼, 기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목사들은 '눈 먼 길잡이며 짖지 않는 개들'이라고 혹평하였다. 데링의 질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왕의 면전에서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휫기프트(Whitgift, 나중에 대주교로 승격됨)라는 사람은 여왕 앞에서 설교할 때가 되면 이를 여왕에게 잘보이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데링은 휫기프트와는 달리 여왕의 큰 권력에는 그에 비례하는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지적으로 받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심이나 자신의 유익을 따르는 유혹에서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사실상 그는 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설교치고 데링이 여왕의 책임에 대해서 견책한 담대한 설교보다 더 많이 인쇄된 메시지가 없다.
목회자들의 한심한 영적 상태를 노출시킨 이러한 용기 있는 설교들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파커(Parker)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신이었던 세실(Cecil)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데링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데링은 런던의 감독인 샌디즈(Sandys)의 신임을 받아 런던의 세인트 폴(St. Paul) 대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곳에서 데링은 심도 깊은 감동적인 히브리서 강해 시리즈로 당대의 최대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570-2년까지는 카트라이트, 필드, 윌콕스 등의 글로 인해 야기된 교회 정치에 관한 논쟁이 극심하였다. 데링은 소환되어 이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데링은 퍼킨스와는 달리 조직적인 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투명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대적자들은 데링이 누리는 특권과 직분을 박탈하려고 결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관들과 친분이 두텁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입을 막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링을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강의도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하였다. 여왕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데링을 고발할 죄목을 작성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링의 사역에서 편지 쓰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높은 신분과 영향력이 큰 귀부인들의 영적 상담을 위한 편지들도 썼다. 청교도 사역을 가장 열심히 지원한 사람들은 흔히 여성들이었는데 이것은 청교도 운동의 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에 깊이 헌신된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남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데링의 서신 수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허니우드(Honywood)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구원의 확신 문제로 몹시 시달렸다.
그녀는 한때 존 폭스에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유리잔처럼 확실히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잔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그 유리잔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되튕겨졌다고 한다!
데링은 36세로 죽을 때 동료 사역자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데링의 마지막 말들을 기록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귀중한 공헌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3. 존 도드 (John Dod, 1550 - 1645)
존 도드는 체샤이어(Che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지저스 대학(Jesu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도드는 본성에 따른 죄의 상태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대학 관리인에게 낼 돈을 바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화를 벌컥 내다가 고열로 인해 거의 쓰러졌다. 이때 '그의 죄들이 무장 군인처럼 도드를 덥치면서 그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회심은 참된 것이었으며 새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 관리인은 존 도드에게서 돈을 지불받았음을 기억했다고 한다.
도드는 인기 있는 설교가여서 부르는 곳이 많았다. 그는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20년 동안 목회하였다. 그의 설교는 수백 명의 영혼들을 회심케 하는 도구로 쓰여졌다. 그는 4명의 다른 설교자들과 함께 밴 버리(Banbury)에서 공개 강해 실을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는 힐더샘처럼 1604년부터 계속 심한 박해를 받았다.
윌리엄 할러(William Haller)는 '청교도의 상승'(The Rise of Puritanism)이라는 저서에서 도드를 영적 동지애의 대표적인 경건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잉글랜드인의 유머를 가졌고 재치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가 있었다." 카트라이트(Cartwright)는 도드에 대해서 "목회 적 기능 면에서 그는 어떤 사람의 수준에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다음은 그의 한 제자의 말이다. "그의 말은 모두 하나의 설교였다. 그의 말은 마치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맛들인 음식과 같았다. 그는 재치와 흥미로 내용 있는 메시지를 골고루 섞어 전하였다. 만약 그의 말들을 모두 수집했다면 헬라어로 된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혹은 라틴어로 된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오면 대화의 주제가 항상 도드의 메시지가 되었다. 도드는 일반 서민들이 복음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어휘와 언어 스타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큰 효과가 있었다."
도드의 말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나는 준비하지 않은 새 설교를 하기보다는 준비된 옛 설교를 열 번이라도 반복하겠다."
존 도드는 주일에는 두 번, 주중에는 한 번 설교하였다.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의 아내는 목사관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환영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중에는 집사들처럼 그를 도운 6명의 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음식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좋은 벗들이 없는 것보다 고기가 없는 것이 더 낫소. 이 집은 추워도 무엇인가 줄 것이 있소." 도드 자신은 조금만 먹고 손님들에게는 많이 권하였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할말이 많았다. 그가 피곤해지면 맥주를 섞은 작은 포도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말씀을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받으려고 도드를 찾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들이었던 좁 스록모톤(Job Throckmorton)과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은 자신들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도드의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가까이에서 도드의 영적 자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좁 스록모톤은 청교도 목사로서 의외로 자신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도드에게 물었다.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아무런 위로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도드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말은 스록모톤 목사의 시달린 영혼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는 곧 죽었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도드는 95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래서 그가 목회 사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를 떠나 새 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거쳐 온 긴 인생살이의 여러 경험들과 성경 말씀을 토대로 지혜로운 상담을 해 줄 수 있었다.
4.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 - 1602)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원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왓톤(warton)에서 태어났으며, 케임브리지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 Cambridge)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학자적인 기질이 엿보였으나 그의 성격은 거칠고 험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종한 후에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며 영적 생활의 욕구가 강하였다. 퍼킨스는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첫 목회는 케임브리지 감옥의 죄수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 대해서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죄수와 만나게 되었다. 퍼킨스는 그 청년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형제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싶소.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당신도 죄를 용서함 받는 체험을 갖고 구원을 받으십시요!"라고 눈물로서 간곡히 호소하였다. 이 청년 죄수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그의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렸다. 그 청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임하기를 바랬다.
퍼킨스는 학창시절에 예정론에 대해서, 냉담하고 인정이 없는 신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감옥전도를 통해서 예정론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모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퍼킨스의 예정과 파멸을 다룬 금사슬 이론(Golden Chain)은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였고 그것이 오늘의 개혁주의 교리로 나타났다. 퍼킨스의 종말론에 대한 분석과 조직은 놀랄만하며 특별히 택함 받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관계를 명백히 하였다. 그는 믿음이란 죄인들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에 대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성화(聖化)의 결과이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금 사슬 이론의 흥미 있는 관점은 종교적인 열광자들의 참회는 단지 일시적이며 영원성이 없다고 하였다. 퍼킨스는 구원은 세례나, 신앙고백, 교회의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의 진정한 인내와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결과라고 하였다. 퍼킨스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였다.
퍼킨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행한 구원론에 대한 설교는 청교도 운동이 17세기에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학자로서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의 그리스도 대학의 연구원이자 성 앤드류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설교는 명확하고 실제적이며, 강한 영적 힘이 있었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포함된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불안한 인간의 양심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사자성 같은 웅변을 토하였던 퍼킨스는 영국에서도 특이한 청교도주의 자였다.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같은 청교도 저술가는 불안한 인간 영혼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를 다루는데 뛰어 났던 후대 청교도 저술가였다. 그는 처음에 그러한 주제에 대한 퍼킨스의 설교를 듣고서 목사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 받았다.
이들은 퍼킨스의 설명적인 설교와 경건한 삶을 영위했던 철저하고도 전형적인 청교도 기준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에 의해 청교도의 젊은 세대는 기적같이 쓰임 받은 퍼킨스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
퍼킨스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을 주로 썼고, 그의 갈라디아서, 마태복음서, 히브리서의 강해설교도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양심의 사례(Cases of Conscience)는 그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들은 라틴어, 불어, 화란어, 스페인어로 거의 번역 출판되었으며 퍼킨스의 사역이라는 3권의 책에 그의 논문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
윌리엄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사역했는데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그는 청교도 동지들의 특징인 영적 자질과 행정적 재질이 겸비된 사람이었다. 그는 강단에서도 특출하였고 펜으로도 많은 글을 써서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를 바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다른 어떤 목회자들보다 더 많은 저술을 했는데 후속 세대의 책꽂이에도 그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설교를 주제로 『프라퍼싸잉의 기법』(The Art of Prophesying)이라는 설교학 저술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퍼킨스의 설교는 적용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특징이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할 때 청중의 필요를 세세히 고려하였다. 그의 글들은 질과 양에 있어 당시의 다른 모든 청교도들을 능가한다.
윌리엄 퍼킨스는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었다. 예로써 그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돕기 위해서 옥중 사역 허가를 받고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물론 그는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와 같은 곳에서도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대규모의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모두 율법이고 동시에 모두 복음이라고 평하였다. 말하자면 죄의 수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모두 율법이었고,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전적인 용서가 거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모두 복음이었다. 그의 사역은 죄인들로 하여금 영벌의 실체를 보게 해서 영혼이 깨어나게 하는 각성 사역이었다. 퍼킨스는 커뮤니케이션에 남다른 은사가 있어 '저주'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으로도 죄인들이 떨었다고 한다.
퍼킨스는 노동을 강조하면서도 레크리에이션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레크리에이션 사상은 노동 중심적이어서, 모든 유희를 소명을 위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곧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논다는 것이다. 합법적인 모든 레크리에이션은 일상적인 것들을 사용하지만, 어떤 면에서 제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레크리에이션은, 첫째, 거룩한 일들 곧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 또는 다른 신앙의 행위 등이 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둘째, 인간의 죄나 허물을 구성하는 것이 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셋째, 하나님의 심판이나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을 그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레크리에이션과 관련된 경기에는 재치나 힘을 겨루는 것, 모험적인 것, 그리고 이 양자가 혼합된 것이 있다. 재치나 힘을 겨루는 경기에는 활쏘기, 사격, 달리기, 레슬링, 펜싱, 음악 그리고 체스와 장기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게임들은 심신의 단련이 주요 목적이며, 권장할 만하고 흥미도 있다고 하였다. 모험적인 경기는 오직 모험만이 지배하는 것으로,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첫째, 모험을 위한 게임은 단순히 운에 의지하며, 이렇게 운에 의지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행위로서 하나님을 주사위같이 결정권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경기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고 공포나 슬픔과 같은 역겨운 감정을 유발하는 경기들이기 때문이다...셋째, 탐욕이 경기의 원인이어서 보통 돈을 걸고 경기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경기는 부분적으로 모험이, 부분적으로 재치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모험으로 시작해서 재치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이다. 이 경기는 모험에 의존함으로써 보완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기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권장되지 않지만, 크게 규제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경기를 할 때는 아주 절제하면서 즐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① "최소한도의 사행성과 최대한도의 평판을 지닌 레크리에이션을 선택해야" 하며, ②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야" 하고, ③ "그 목적은 우리의 심신을 건전하게 하는 데 있어야 "하며, ④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까지도 적당히 하고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퍼킨스는 우선 가정을 세우고, 그곳에서 올바로 훈련된 성도들이 사회에 나아가 자신의 소명을 따라 이웃과 하나님을 섬김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5. 존 로저스 (John Rogers, 1566 - 1636)
에섹스 데드햄(Dedham, Essex)의 존 로저스는 청교도인 에섹스 웨더스필드의 리처드 로저스와 가까운 인척이었다. 리처드는 존 로저스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때 후원을 해 주었다. 그는 존 로저스가 세속적인 쾌락을 위해서 자기 책들을 팔아도 참아 주었다. 그런데 결국 존은 리처드 로저스를 너무도 실망시켜 리처드가 그를 포기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리처드의 아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사정하였는데 이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7-9). 리처드 로저스의 아내가 존 로저스에 대해 인내한 것은 보상 있는 일이었다. 존이 회심하게 되었고 나중에 청교도 설교자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 로저스에게 내린 설교의 은사는 너무도 커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떨지 않고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많은 영혼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 그는 자기 시대에서 영혼을 일깨워주는 가장 훌륭한 설교자의 한 사람이었다. 브라운리그(Brownrigg) 감독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존 로저스는 몇 자 적지 않은 급히 쓴 노트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 감독들이 잘 준비된 음악 순서의 지원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설교보다 훨씬 나은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멀리서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교회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해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인 자일스 퍼민(Giles Firmin)은 자신이 존 로저스의 첫 마디를 듣고 회심케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어느 날 젊은이들이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막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로저스가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여기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들어왔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당신들에게 유익할 것이 없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자일스 퍼민은 이 첫 말에 당장 마음이 붙잡혀서 즉석에서 회심하였다.
존 로저스의 설교 능력은 유명한 청교도인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의 체험에서 잘 예시되었다. 토마스 굿윈은 당시에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듣고 속절없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 책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의 대중을 사로잡는 설교 항에서 예를 들은 대로였다.
6. 리차드 십스 (Richard Sibbes, 1577 - 1635)
리처드 십스는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에서 강의를 맡았는데 그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이중에는 나중에 미국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로 건너가서 유명한 지도자가 된 존 코튼(John Cotton)도 있었다.
설교자와 교사로서 십스의 평판은 자자해서 런던의 그레이즈 인(Gray's Inn)에 정규적인 사역을 인도하게 되었다. 당시의 그레이즈 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법률 공부와 법무에 관해서 법조계의 중심부였다. 벤자민 브룩(Benjamin Brook)은 이렇게 말하였다. "해박한 법률가들 외에도 많은 귀족과 상류층이 일반 시민과 함께 십스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십스의 사역에서 받는 영적 유익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스는 청중의 머리와 가슴에 단단한 기초를 놓으려고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사생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목회자로서는 매우 훌륭한 목회를 하였다.
1626년에 십스는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St. Catherine's College)의 학장이 되었다. 그의 런던 교회사역 조건에 의하면 다른 성직을 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레이즈 인 교회의 부목이었고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중에 대학이 있는 케임브리지로 여행하는 일이 무리가 되지 않았다.
캐서린 대학은 십스가 학장이 되었을 때 장기간의 침체를 겪고 있었다. 재정은 거의 바닥이었고 학생들도 몇 명밖에 없었다. 십스는 이러한 상태를 완전히 바꾸어 캐서린 대학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로 일신시켰다.
케임브리지에서 십스가 목회자를 훈련시킨 일의 영향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ins)를 제외하고는 따를 자가 없었다. 십스는 퍼킨스가 사역했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도 설교하였는데 그 영향은 런던의 그레이즈 인 교회에서의 사역 효과와 같은 것이었다.
리처드 십스는 심령을 치유하는 의사였다. 그는 영혼의 갈등을 말씀으로 풀어 주면서 심령을 치유하는데 1세기 이후에 『신앙 정서』(The Religious Affections)라는 가장 유명한 저술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Johathan Edwards, 1703-1758)의 사역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되었다. 십스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The Bruised Reed and The Smoking Flax), 『돌아오는 탕자』(The Returning Backslider), 『영혼의 갈등』(The Soul's Conflict)과 같은 대표작들을 남겼다. 십스는 가장 유명한 청교도의 한 사람이다. 그의 영향은 청교도 운동의 구석구석에 퍼졌다.
C. 절정기 퓨리탄
7. 존 밀턴(John Milton, 1608-74) : 합리적 청교도
밀턴은 1608년 12월 9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공증인과 사채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밀턴은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국교도였고 상당한 수준의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 성 바울 학교에서 밀턴은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했고, 근대어 같은 부분은 가정 교사로부터 보충 수업을 받았다.
그는 학문에 심취했고, 12세부터는 자정 전까지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과도한 독서는 후일 실명의 원인이 되었다. 1626년 담임 교수와 충돌하여 1년 정학을 받은 일 외에는 큰 탈 없이 학문에 매진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 칼리지 문학사(1629), 문학 석사(1632) 학위를 취득하였다.
밀턴은 학창 생활 7년 동안(1625-32) 라틴어로 운문을 쓰는 법과, 작품 속에서 자아를 표출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의 첫 영시, “어떤 아기의 죽음에 대해”(On the Death of a fair Infant)는 엘리자베스 시대 풍으로 1628년 쓰여졌다.
그가 21세의 생일 직후에 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는 혈기 왕성한 젊은 밀턴을 가둬 두고 신앙적 시를 통해 영성의 승화를 시도한 것같이 보인다(1629). 이 작품과 1628년에 쓴 “방학에”(At a Vacation Exercise)에서 고전 문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두루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밀턴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택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1630년경 마음을 바꾸었다. 영국 국교회의 제도에 들어가는 것을 노예 생활로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헌신 때문에 성직을 포기한 성 싶다.
6년(1632-38) 동안 밀턴은 호튼(Horton)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철학, 고전 문학, 역사, 수학 및 음악 등 폭 넓은 교양 과목을 공부하였다. 자유사상을 통해 점잖고 관대한 예술 세계를 접하려는 젊은 밀턴의 야심이 엿보인다.
1632년경 밀턴은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Arcades)와 1634년 또 다른 가면극 코머스(Comus)를 썼다. 코머스는 밀턴의 선악 사상을 최초로 극화시킨 작품이다. 1637년 모친 사망 후 밀턴은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지식층 인사들로부터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1638-39).
나폴리에서 밀턴을 환영한 후작 만소(Giambattista Manso, Marquis of Villa)와 천문학자 갈릴레오와의 교분은 밀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밀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영국 정세는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1625-49)가 국왕이었는데, 그는 왕권신수설 이론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반 칼빈주의 자로 열열한 국교도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여 비국교도들을 탄압하였다.
당시 의회는 비국교도인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과 의회는 자주 충돌했고, 왕은 청교도들의 간섭을 싫어하여 11년 동안(1629-40)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국교회 의식을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존 낙스 이래 장로교회 정치가 뿌리내려진 이곳 사람들은 찰스 1세의 강제 명령에 대항하여 영국을 공격하였다. 국왕은 군비 조달을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했고, 이 의회는 1640년에 시작하여 1660년에 막을 내렸다.
이 질질 끈 영국 의회를 장기 의회라 부른다. 장기 의회 기간 중에 청교도들은 눈에 가시 같은 국교회 대감독 로드의 목을 요구했고(1645년 1월 참수됨), 나중에는 왕정에 대항하여 청교도 혁명 전쟁으로 비화했으며(1642-49), 마지막으로는 올리버 크롬웰 장군에 의해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하였다(1649년 1월).
밀턴은 국교회의 사치스러운 의식, 대감독 로드의 전횡 그리고 국교회와 영국 왕실과의 정치적 타협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청교도 세력의 사회 참여로 그의 불만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1639년 7월) 후 밀턴은 뜨거운 정열을 쏟으며 정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641년에 쓴 소논문 “영국에 있어서의 개혁”(Of Reformation in England)에서 영국의 감독 제도와 주교들을 공격하였고, 1642년에 정리한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The Reason of Church Government Urged against Prelaty)에서는 이상적 교회 정치는 감독제가 아니라 사도 시대같이 민주적 단순성과 순수성을 보유한 장로 제도라고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
1643년 5월 밀턴은 연하인 메리 포웰(Mary Powell)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왕당파 지주의 딸이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무사 태평한 여자라고 밀턴은 후에 토로하였다. 33세의 대학자와 무학의 소녀와의 결혼이 평탄할 리 없었다. 결혼 직후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밀턴은 3년(1643-45)에 걸쳐 그의 “이혼론”(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발표하였다.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경우에는 이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결혼은 애정과 우정으로 맺어진 능동적 관계이기 때문에 당시 유일한 이혼 사유인 간통보다 애정 없는 것이 더 큰 이혼 사유라고 정의했다.
불행한 결혼은 1652년 포웰이 죽음으로 끝났다. 밀턴은 1656년에 캐더린 우드코크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그녀도 1658년에 출산 직후 사망하였다. 1663년 밀턴은 젊고 상냥한 민셜(Elizabeth Minshull)과 결혼하였다.
밀턴은 크롬웰의 공화정에 참여하여 정부 활동에 개입했으나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사상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대 작품들인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은 모두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밀턴은 1652년 완전히 실명하여 육체적 고통을 받았고, 왕정 복고 후에는 정신적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난과 역경은 그를 대 서사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8. 존 번연(John Bunuan, 1628-88) : 청교도 순례자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88)의 천로 역정이다. 번연은 이 책에서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우리 인간의 영성 체험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엄청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 용어나 과학 용어가 아니다. 번연은 주위에서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상생활 언어를 꾸밈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언어 속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역동적 힘이 있다.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부각되는 상승된 영적 희열이 있고, 왜곡된 믿음을 가진 위선자들에 대한 풍자적 책망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다.
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존 번연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 된 기독교인의 일생을 그린 우화집 세계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천로역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와 성경의 만인 이용을 설명한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한 우화집이었다.
베드퍼드의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1628년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받었다. 겨우 읽기·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갔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나쁜 습관을 버렸지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내용을 읽고서 회심하였다. 그리고 베드포드에서 평신도 설교자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낮에는 냄비와 팬을 수선하고, 밤과 주말에는 영혼을 구령했다. 그의 능력 있는 설교로 인해 수많은 회심 자들이 생겼고, 또 강한 대적 자들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찰스 2세가 복위하여 크롬웰이 통치하던 시기에 인정했던 종교의 자유를 취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1660년 존 번연은 허가(license) 없이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167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투옥되었던 기간에는 그의 아내가 만든 구두끈을 팔아 번 돈과 그의 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만 가족들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665년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시 투옥되었다.
존 번연은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688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번연이 지은 60여권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인데, 감옥에 면회 오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책으로 크리스쳔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오래 동안 사랑 받아 왔다.
번연이 옥중에 수감되었던 일은 아마도 <천로역정>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천로역정>은 고뇌와 회심, 전도와 박해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로 이어지는 번연 자신의 고달픈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1678년 출판된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어권의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신앙서적이 되었다. 천로역정은 1678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출판 첫 해만 1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천로역정>의 원제목은『순례자(Pilgrim)의 여로(Progress)』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천로역정』이라고 이름 하여 이 후 모든 번역본들이 이 제목을 취해왔다.
9.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죤 오웬은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린다. 맞는 말이다. 그의 전집(Works)은 건전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제일 먼저 택해야 할 책들이다. 현재 그의 글들은25권으로 나와 있다.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하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예로써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Works, vol. 3),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 『죄의 억제』(The Mortification of sin, vol.6) 등이다. 그의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 vol13)는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적실성이 있는 저서이다.
오웬은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너무도 머리가 좋아서 12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0년 간 공부하였다. 그는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다. 또는 플투트도 불었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일과는 올림픽 챔피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웬은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런데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 목사가 대신하여 실망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방문 목사를 사용하여 오웬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오웬의 첫 목회 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때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정생활의 슬픔은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 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이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다.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다.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팰리스(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윌리엄 그린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엇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를 잃었다. 18개월 뒤에 그는 부유한 여자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마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편의를 돈많은 아내 덕분에 제공 받았다.
오웬의 글은 그가 분석적이고 조형적이며 통이 큰 두뇌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R.K.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 『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D. 후기 퓨리탄
10.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17일 사무엘 웨슬리 목사 부부의 열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교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게 된다. 그 후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1739∼1791에 있었던 '대 각성 부흥 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놀랍게도 자기가 설교할 때면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라며, 1753년 직접 발 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으며,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60년 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차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기 전날 그의 시신은 시티 로드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위대한 빛은(하나님의 보기 드문 섭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들을 비추기 위해 떠올랐다. 이 묘비를 읽는 이들이여, 하나님의 도구인 웨슬리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11.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 :
복음주의적 연합운동
휫필드는 1714년 영국 남서부의 도시인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신앙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1733년 옥스퍼드의 펨브로크(Pembroke)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훗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요한 웨슬리(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 그리고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등을 포함한 친구들과 교제하였는데 이들은 1729년 봄에 시작된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한 창립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Power station)이 되었다. 이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시간관리, 규모 있는 생활방식(method)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휫필드에게 큰 변화를 준 책 중의 하나는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중생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복음적 견해를 확립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6월 20일 성직(副祭)임명을 받으므로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자기의 고향인 글로스터의 성 메리 드 크립트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로서 그의 삶을 이끌어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설교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 첫 설교에서 외적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목마른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영적 해갈을 주었고 이 땅에서의 지친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 들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그가 1739년부터 옥외설교 혹은 야외설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곧 그해 2월 그는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Kingswood)지방 광부들에게 첫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약 2만 명이 운집할 정도로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이곳은 광산 도시로서, 산업혁명 초기 당시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관심밖에 있었다. 휫필드는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 전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터나 들판에서 설교하였는데 때로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1739년 4월 29일자 일기에는 "약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옥외설교는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영국 교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길과 산, 물가"로 나가서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였던 예수님의 설교는 그의 모범이 되었다. 휫필드의 옥외집회, 야외 설교 그리고 극장 전도, 가정 선교, 도시 선교 등은 당시 교회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1780-1847)는 휫필드의 방법을 '공격적 방법'(aggressive system)이라고 불렀다.
휫필드는 1736년 6월 26일 주일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후부터 1770년 9월 29일 미국 뉴베리 포트(Newbury Port)에서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그는 오직 한가지 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몰두하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즈에는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인도했던 공중집회는 1만 8천회에 달했고 스코틀란드를 14회나 방문하였다.
지금부터 250년이 넘는 그 당시의 도로, 교통, 통신 시설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당시 3-4개월이 소요되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한 일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대중에게 그만큼 많은 설교를 한 일이 없었다. 저명한 전기 작가인 루크 타이어만(Luke Tyerman)은 휫필드의 마지막 설교는 익세티 마을에서 죽기 불과 수 시간 전에 행한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평가는 거짓됨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 내에서의 그의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12.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92) :
마지막 청교도
찰스 해돈 스펄전(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온하고 독실한 목회자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스펄전은 사춘기를 구원을 향한 회의의 시기로 보내게 되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일상이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던 목사님이 눈보라 때문에 나타나지 않아서, 회중에 있던 한 성도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성도의 설교는 간단했다. 구원을 위해서는 다만 그리스도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죄의식으로 지치고 낙담한 스펄전을 가리키며 "단지 주만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그 순간 스펄전은극적인 회심을 하게 됐다. 구원이 오로지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스펄전의 삶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얻었다. 그후 일생 동안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의 힘차고, 신학적이며, 감미로운 설교는 그로 하여금 "설교의 황제"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861년 3월 31일 스펄전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에서 최초의 주일 예배가 드려졌다.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려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이 교회 건물은 6천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매번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1만 명을 넘었다. 그러고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항상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매 번의 설교를 위해 수 시간을 기도했다. 그는 결코 제목 설교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항상 성경 본문으로 강해 설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용이 다른 설교 3,500여 편을 중복해서 설교한 적이 없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은 그가 그토록 많은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개인 전도하는데 보낸 것을 보고 알 수가 있다. 그는 바쁜 일정 중에도 매주 화요일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개별적인 면담을 위해, 토요일은 복음을 위한 개별 방문을 정기적으로 행하기 의해 남겨 두었다.
그는 "내가 소유한 것 중에서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자기가 꼭 명심하도록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런 겸손은 처음에는 비우호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고조되어 가는 명성에 따라 자만심이 커져가기는 커녕,그가 우리의 눈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처음보다도 오히려 더욱 겸손하고, 더욱 자기를 부정하게 된 것 같다." 고 말하게 만들었다.
1891년 1월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불타는 진실성과 굽힐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과 열정을 가진'목음의 전파자'였다.
찰스 스펄전의 사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신학사상
찰스 스펄전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원 리를 위배하지 않는 지식과 지혜를 결코 멸시하지 않았으나 성경의 고등비평이나 진화론에 기초한 자유주의 사상이 복음을 타락시킬 때 그는 참을 수 없이 분노하였다. 또한 비록 복음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복음과 자유주의를 동시에 수용하려는 당시 교계의 타협정신을 거부하였음. 복음에 여러 가지 견해, 추리, 상상, 환상을 섞는다면 복음의 변질이 필연적인데, 스펄전은 자신이 속한 침례교단이 진정으로 고수할 근본 진리와 정반대의 가르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인 1887년 10월 그의 나이 53세에 교단을 탈퇴함.
② 설교 원리
1)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영접하지 않고 외치는 설교는 말씀 선포가 아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자나깨나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3) 설교는 가르치는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 내용은 건전하고 본질적이어야 할 뿐 아 니라 풍성한 교리가 있어야 한다.
4) 설교의 본문 선택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5) 설교자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담대히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6) 설교자는 음성을 잘 관리해야 한다.
7) 설교전달의 자세와 태도, 몸짓에 신경을 써야 한다.
8) 설교에 예화를 사용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9) 설교는 본문을 떠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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