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상」 2007년 4월호 신학기고 란에 게재된 “기독교인이 창조과학을 지지할 수 있는가?” (원 제목은 Can a Christian be a Creationist? 로서 정확한 번역은 ‘기독교인이 창조론자가 될 수 있는가’ 이다) 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과학과 창조과학의 본성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껴 본 글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 사상) 편집자는 독자들에게 위 제목의 글을 쓴 커트 놀 (Kurt Noll)의 신앙관을 비판하기보다는 창조과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어떤 글이든지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그 글이 내 관점에 맞지 않는다고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창조과학에 대한 우리 학회의 관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커트 놀은 창조과학과 관련된 세 가지 주제를 제시했는데, 첫째,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 둘째, 성경, 셋째, 윤리이다. 이 세 주제는 창조과학자들에게는 사역의 중요한 세 축이며, 그런 점에서 커트 놀이 잘 지적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본 저자는 커트 놀이 자신의 글에서 보여준 과학(진화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비판하고, 창조과학이 왜 쓰레기 과학이 아니라 바람직한 과학인지와 성경이 진화와 무관하지 않은지를 보이고자 한다. 커트 놀(Kurt Noll)의 과학관 고찰
커트 놀이 자신의 글에서 과학과 관련하여 언급한 구절들을 통해 그의 과학관을 짐작할 수 있다. 몇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다윈의 이론이 진실이라면......그런 이유로...공립학교에서의 생물학적 진화론 교육을 지지하는 것이며...” (pp.180-181)
“과학적 방법론은 오직 과학적 가설에 한해서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p.188)
“과학적 방법론은 그 어떤 종교로부터도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p.192) 커트 놀은 또한 과학을 “자연에 관하여 질문을 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과학적 방법을 “자연에서 관찰된 특정 사항들을 기본으로,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가설을 세운 후, 그 가설을 시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개발해 내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p.182) 커트 놀의 과학과 과학적 정의는 수용할 만하지만, 그의 글에 나타난 과학에 대한 묘사는 매우 고전적인 과학관을 반영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과학철학자와 과학교육학자들은 과학이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 가설과 과학 이론은 참과 거짓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보다 잘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 정도에 따라 그 가설과 이론의 선택 여부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과학 가설과 이론은 ‘증명’의 의미를 함축하는 참이나 진실(혹은 진리)란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커트 놀의 정의대로 과학적 방법은 가설-연역적 논리에 기초하여 수행된다. 과학자들이 가설을 만들 때, 가설들이 가치와 신념이 배제된 객관적 지식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는다. 가설은 과학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사조, 과학자 자신의 신념, 그리고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과학은 그 본성상 종교를 포함한 신념과 가치로부터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람, 특히 과학자의 지식은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지식 구조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지식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통합적 지식 구조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커트 놀이 쓴 논문은 그의 종교관, 과학관, 성경관을 아우르는 통합적 지식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며, 각 요소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통합적이고 일관적인 한 편의 논문을 만들어내기란 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의 매우 소박하고 극히 수용적인 과학에의 관점이 논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데,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창조과학과 성경에 대한 그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창조과학과 과학
과학적 방법의 정의를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과학의 대상은 관찰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다시 말하면 재현 가능한) 자연현상이어야 한다. 창조과학은 현재 관찰할 수 없는 생명과 종의 기원에 대한 증거와 그에 대한 추론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위의 정의를 엄격히 적용하면 창조과학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역사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진화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진화는 커트 놀의 표현처럼 45억년의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생물이 발달한 과정이고, 지구 역사를 48시간으로 줄여 놓았을 때 인류는 막 1초 전에 발을 내디딘 긴 과거를 가진다. (p.189). 이 시간을 초로 환산해 보면 172,800초 중 172,799초 동안에 일어난 일은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기에 현재 사람들이 학문 주제로 다루는 모든 진화가 이미 일어나 버렸다. 즉 진화과학은 현재 관찰 가능한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고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다루며, 앞에서 창조과학에 적용했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진화과학 역시 과학이 아니라 역사라고 보아야 하지 않은가? 창조과학이 과학의 정의에 비추어 미달하는 부분은 창조과학은 이미 답을 갖고 있으며, 이 답은 어떤 연구 결론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창조과학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종류대로 생물들을 창조했으며,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하여 지금 관찰되는 지층과 화석의 대부분이 형성되었다는 가정으로 구성된다. 그런 점에서 창조과학은 과학 지식의 일반적 특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은 내구적이면서 동시에 가변적이다. 만일 어떤 과학 이론이 절대 불변의 참 혹은 진리라고 인정되면 그 이론은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다. 그 지식은 형이상학적 지식이지 경험적 지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커트 놀이 약간 애매하게 표현했지만, 진화론을 진리라고 하였다.(p.180-181) 사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지, 진화 자체를 의심하고 감히 그 가정을 검증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화는 단순한 과학 이론 이상이다. 프란시스코 아얄라(Francisco Ayala) (1977)는 도브쟌스키에 대한 묘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브쟌스키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에 있어서 생물학적 진화의 위치는 그가 가끔 인용했던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글로서 잘 표현된다. ‘진화는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체계가 그 아래 복속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고려할만하고 참이기 위해서는 만족시켜야 하는 대 전제이다. 진화는 모든 사실을 비추는 빛이고 모든 사고 과정이 따라야만 하는 길이다.” (p.3)
유명한 진화론자인 후투이마 (Futuyma) (1983)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와 진화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능한 모든 설명을 다 포함한다. 생물은 완전히 발달한 채로 지구에 나타났던지 아니면 그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것들이 완전히 발달한 채로 지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종으로부터 변화의 과정을 거쳐 그 이전의 종으로부터 발달했어야 한다. 그것들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로 나타났다면 그것들은 실제로 어떤 전능한 지적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어야 한다.” (p.197)
진화론을 인정하는 과학자들은 진화를 불변의 진리로 믿으며, 기원에 대해 창조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진화를 바라본다. 그들에게 진화론은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유일한 답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창조론자인 듀에인 기쉬 (Duane Gish)의 말은 이 점에서 참으로 적절하다. 그는 말하기를 “창조는 진화만큼 과학적이며, 진화는 창조만큼 종교적이다.” (Gish, 1995, p.9) 여기서 논의가 끝난다면 창조와 진화는 함께 역사나 종교 시간에만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그 선을 넘는다. 사람은 창의적이며 호기심이 많다. 비록 관찰되지 않는 과거의 사건일지라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현상을 밝혀보고자 하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 더욱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이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는가에 따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에 관한 두 모델 중 어느 것이 현재 통용되고 있는 과학적 기준에 더 부합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적 방법을 보다 넓게 정의하자면, 자연 현상에 대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다양한 과정들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핵심은 여전히 가설-연역적 사고이다. 즉 가정에 일관적인 가설을 세우고 경험적 예측이 과거와 현재의 실제 데이터에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를 가지고 그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예측과 증거가 자주 맞으면 그 가설은 살아남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가설은 폐기된다. 창조과학은 이러한 역동적인 과학적 방법을 통해 수행된다. 칼 포퍼의 말처럼 형이상학적 명제를 검증 가능한 경험적 가설로 과감히 전환시킴으로써 과학은 발전한다 (Johnson, 1991/1993). 창조과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창조과학은 커트 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의 존재 여부(p.183)나 종교적 이상이나 종교적 주장(p.183)을 검증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 생명, 지구, 우주를 비롯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특히 생명체의 창조와 인류의 창조 등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노아 시대 전 지구적 홍수 결과 그 흔적이 지층과 화석 그리고 다양한 지형으로 남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창조과학이 사실 혹은 참으로 믿는 가정들이다. 가정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이지 과학은 아니다. 창조과학은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추론된 경험적 가설들로 구성된다. 첫째, 우주, 에너지, 생명의 무로부터 갑작스러운 창조. 둘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기구들은 한 원시 생명체로부터 현재의 모든 종류들을 출현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매우 불충분하다. 셋째, 원래 창조된 식물과 동물의 변화는 그 종류 안에서의 변화에 국한된다. 넷째, 사람과 원숭이는 별개의 조상을 가졌다. 다섯째, 전 세계를 덮는 홍수 사건을 포함하는 격변에 의한 지구 지질학의 설명. 여섯째, 지구와 생물의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위의 가설들은 현재 관찰 가능한 현상들, 과거 이미 일어난 사건의 흔적들, 그리고 이제까지 밝혀진 과학적 법칙, 이론, 원리들에 기초하여 검증될 수 있다. 과학 이론과 모델의 속성상 증거에 의해 진위가 증명될 수는 없지만, 정말 엉뚱한 주장인지 아니면 진화론보다 더 좋은 설명을 제공하는지는 비교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생명의 기원, 종의 기원, 화석의 형성과 지구의 나이 등에 관한 살아있고 가능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과학자가 검증하고자 하는 가설이 어디에서 왔든지 그 원천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 없이 가설을 세울 수도 있고,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올 수도 있고, 꿈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물론 성경에서 유래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일상 경험과 관찰에서 가져올 수도 있다. 과학에서 상관하는 것은 그 가설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느냐가 아니고, 그 가설이 경험적 증거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가이다. 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난 설명과 예측 능력이 있는 가설이라면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원에 관한 창조모델과 진화모델은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보다는 간접적인 증거에 의해 그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게 된다. 이 경우 아무리 많은 증거가 쌓여도 그 가설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참, 혹은 거짓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다만 더 효과적이고 유력한 가설이라는 위상을 가질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과학철학자와 과학교육자들이 생각하는 과학이다. 그 점에서 창조과학은 매우 과학적이며, 진화과학만큼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과학은 과학의 영역과 시야를 확장시키며, 과학의 역동적 본성을 경험하는 아주 좋은 소재이며 방법이다. 창조과학을 종교라고 하여 과학적 고려대상을 삼지 않는 것은 철학, 과학, 교육의 어떤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런 생각은 오직 자연주의 세계관, 즉 모든 현상은 오직 자연적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에게는 신, 성경, 종교의 함축을 지닌 창조과학이 아무리 기원과 다른 자연 문제를 잘 설명한다 하여도 그것을 용납하고자 하지 않고, 차라리 매우 부족하지만 진화과학을 고수하려고 한다. 그들은 창조과학을 수용하면 곧 창조주의 존재에 직면해야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의 발상을 그리스도인이 동조할 이유가 없다. 과학이 진정 자연 세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검증하기 위한 엄격한 방법이라면, 설령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하게 되더라도 진실이면 수용하여야 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존재와 부딪히기 싫어 자연주의적 설명 체계인 진화론을 고집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또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진화론자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과학의 방법론으로 물질주의를 채택했다고 하지만, 방법론뿐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물질주의, 자연주의 세계관만이 인정되는 세계관적 선택을 한 것이다. 1961년 『창세기 대홍수』가 출판된 후, 저자인 헨리 모리스 박사는 미국지질학회의 초청을 받아 수백 명의 회원들 앞에서 지질 형성에 대한 격변론을 소개하였다. 그 뒤 지속적인 연구들은 지형, 지층의 형성 모델로서 격변론이 우수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현재 지질학에서는 동일과정설에 관한 호소가 약화되고 대신 소위 신격변론이 매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격변론은 지층의 형성은 매우 급격히 짧은 기간 내에 형성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지층과 지층 사이의 긴 기간을 삽입함으로써 오랜 지구 연대 주장을 계속 지지하는 이론이다. 어쨌든 현재 지질학계의 이러한 변화는 결국 창조론자들의 격변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지난 7년간에 걸쳐 미국창조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에서 수행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에 대한 연구 보고서는 오랜 지구 연령의 기초가 되어 왔던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의 가정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헬륨 기체의 확산, 방사능 훈(radioactive halos), 엄청나게 가속화된 방사능 붕괴 속도, C-14에 의한 석탄의 나이 등이 젊은 지구 모델과 격변 모델의 설명과 일치하는 흥분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DeYoung, 2005; Vardiman, Snelling & Chaffin, 2005). 이 연구들은 창조과학이 종교이며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려고 하는 시도가 아니라, 성경에서 이끌어낸 설명 모델이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하고 좋은 것이며, 창조를 인정하고도 하나님에게 호소하지 않고 과학의 본성에 충실한 연구가 정말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직 진화 모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창조모델과 진화모델 둘 모두에게 개방적인 사람들보다 더 교조적이고 종교적이다. 창조모델에 기초한 연구는 현재 유전자 염기 서열에 대한 연구로 확장되고 있다. 돌연변이율은 한 종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가정된다. 즉 그 종이 처음 출발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에 비례하여 그 안에 유전자의 염기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있을 것으로 가정한다. 인간지놈이 밝혀졌기 때문에 서로 격리된 인구 집단 간의 염기 서열의 차이는 곧 얼마나 오랫동안 분화가 일어났는지를 지시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같은 종 내에서 그리고 비슷한 종 사이에 과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의 신실성을 믿기에 자신들의 가정이 옳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연구를 추진하며 실험 조건과 연구 방법 및 기술이 갖추어지기만 하면 그들의 예측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제까지 이 확신은 실현되어 왔으며 앞으로 더 많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창조과학과 성경, 그리고 윤리
우리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글과 역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신 책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전 인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읽고 그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실 수 있는 뛰어난 문장 능력과 화법을 갖고 계시다고 믿는다. 창세기 6장과 7장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되, 길이가 300규빗, 너비가 50규빗, 높이가 30규빗되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또한 홍수는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그해 2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방주의 규모는 이러 했으며, 홍수는 이때 시작되었구나 하고 읽고 이해한다. 이렇게 분명한 묘사가 어느 책에 나오든지 어떤 조건이나 제한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을 가상적 이야기라고 믿을 어떤 근거도 그 문장에서 찾을 수 없다. 저자가 그 글이 비유나 교훈으로 읽히길 바라면서 그렇게 자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했다면 그는 사기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행동을 하셨을 리 만무하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6일 창조 (막10:6), 노아의 홍수 (마24:37-39)를 구약에 쓰여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셨고, 베드로 사도 역시 베드로후서 3장에서 분명히 모든 세계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함으로써 그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분명히 하였다. 그 정도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노아의 홍수의 역사적 사실을 믿어야 한다. 설령 믿지 않을 수는 없지만 문자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서 국지홍수설이나 평온홍수설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 주일이 부활주일이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을 통해 시편 16편 6-9절에 잘 예언되어 있다. 2천년 전의 역사적 정황, 성경의 선포, 내주하시는 성령의 확신과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났던 사건임을 증거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면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 눈앞에서 예수님이 다시금 육체로 오셔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지 않고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증명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증거가 있기에 믿는 것이지 증명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저자는 매우 비판적인 톤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증명’했다고 하여 그것이 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질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창조과학을 비판할 때 사람들은 항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비판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학적 증거, 혹은 고고학적 증거, 혹은 성경적 증거가 창조과학을 부정하는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판자들의 한계이고 그 비판이 신뢰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과학 뿐 아니라 여타 학문에서 비판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정당화되어야 하지 단지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커트 놀이 성경의 신실성과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기록에 대해 접근하는 그 만큼의 정밀함과 엄격함을 가지고 과학적 방법과 과학에도 접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과학적 방법과 과학은 성경에 비하면 풋내기에 불과하다. 고작 역사라고 해봐야 2~3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동안에도 과학적 지식은 계속 변하는 게 그 특징이라고 할 만큼 거듭 변해 왔다. 특히 진화론은 1859년 자연선택설이 나온 이래로 1900년대 초 신다윈설, 그리고 1950년대 이후 현대 종합이론과 1980년대 이후 단속평형설로 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론들 또한 매우 불안정한 위상을 갖고 있고 확률과 우연에 의한 종의 분화를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비적 힘을 의지하는 가이아(대지의 여신) 가설 등에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과학은 무조건 수용하면서 (p.187), 약 3500년 전부터 여러 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후 한 번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 우리 손에까지 오면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진리로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는 단 한 점의 실증적 신뢰도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혹시 커트 놀이 성경을 연구하려고 접근할 때부터 성경은 신화이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 맞춰 증거를 찾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떤 진리든지 그것이 진리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한다면, 커트 놀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과학적 진리와 성경의 진리를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p.188) 커트 놀에게는 진리가 그렇게 철저하게 구획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역사 속에서 사람의 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역사 속에서 사람의 입으로 고백되는 말을 통해 영광받길 원하신다.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찾아내어 마땅한 경배를 창조주께 드리기를 참으로 기대하고 계신다 (시19편; 롬1:20; 시104편; 계4:11, 14:6~7).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특별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어려우며, 결국 진화론적 윤리관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본다. 진화론은 다름 아닌 양육 강식, 죽음, 고통, 기형의 토대 위에서만 구축되는 잔인한 구조물이다. 『종의 기원』의 마지막 단락에서 찰스 다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리하여 만물의 투쟁에 의해, 기근과 죽음에 의해, 우리가 보기에 가장 우수한 개체, 즉, 더 고등한 동물들 (예를 들면 사람)이 잇따라 출현했다.”
도브쟌스키(1974)는 진화론적 윤리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적자생존은 자기 본위, 쾌락주의, 비겁함...속임수와 약탈...을 뒷받침할 수 있다. 윤리학은 인간의 윤리학이다. 그것들은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
차라리 진화론자들은 기독교와 진화론이 어떻게 서로 상충되는지에 대해 커트 놀과 같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잘 깨닫고 있는 것 같다.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한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기독교는 진화론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과학(자연주의를 의미함)과 싸웠으며 아직도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예수의 지상 사역 및 죽음이 필요한 이유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원죄를 파기해 버려라. 그러면 그 잡석 속에 버려진 신의 아들의 불쌍한 유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거절하라. 만일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구속자가 아니라면-이것이 진화가 의미하는 것이다-기독교 신앙은 허구이다.” (American Scientists, 1978, Feb. 19, p.30)
커트 놀이 진화론적 윤리관을 마음껏 환영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 윤리관을 저버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보면 1700년대에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대부분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창조론자들이었다. 1800년대 말 경에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대부분이 창조, 노아의 홍수, 젊은 지구설을 거부하고, 성경에는 오류가 있으며,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1700년대 말 제임스 허튼, 1800년대 초의 찰스 라이엘이 균일론(동일과정설)과 오랜 지구를 주창하였고, 1859년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성경에 대한 신뢰를 제거했다. 무엇이 대세를 바꾸어 놓았는가? 성경에 대한 반대를 주도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많았다. 1800년대 초부터 신학자들이 처음에는 오랜 지구 사상을 수용하더니, 다음에는 노아의 홍수 대신 균일론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당시 성경을 진리로 믿는 과학자들은 신학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옹호하려고 노력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창세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확신은 점차 사라지고, 한 세대 후에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였을 때는 과학자들까지도 그의 함정에 빠져, 과학자이건 신학자이건 더 이상 창조론을 인정하는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어 버렸다. 20세기 들어와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의 기초가 된 그의 책『자본론』을 찰스 다윈에게 헌정하였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현대 유럽역사를 가르치는 리처드 웨이카트 교수는 그의 저서 『다윈에서 히틀러까지: 진화적 윤리학, 우생학 그리고 독일에서의 인종주의』에서 미국의 우생학자들이 어떻게 독일의 나치에 영향을 주어 인종학살을 감행하게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현재 생명공학자들은 철저한 다윈론자였던 어네스트 헥켈의 진화재현설(발생반복설)을 굳게 믿고 배 발생 초기의 상태는 인간이 아니며 동물의 배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겨, 그것을 가지고 실험 조작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진화론은 항상 인류에게 피해를 주어왔고 현재도 주고 있다. 다윈의 말에 따르면 그런 피해를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인자와 진리가 풍성하신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 분이 인간과 생물에게 이토록 심한 고통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생물들을 만드셨다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 아담이 진화하기 까지 수십억 년 동안의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을 거쳐 출현한 아담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잔인하고 나쁜 신인가? 진화는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자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과 기독교 진리가 둘 다 진리일 수는 없다. 요약
과학은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만, 본성상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지식 체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과학을 수용하는 것은 자연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과학 이론은 항상 증거 앞에 노출되어야 한다. 과학의 본성은 가설-연역적 사고이며, 가설은 과학자 개인, 과학자 사회가 지지하는 가정에 기초하여 생성된다. 이 모든 점이 과학을 가치 내재적이고 상대적으로 만든다. 창조과학은 기원(생명, 종, 화석과 지층)에 있어 검증 가능한 예측을 제공하는 모델 아래서 수행되며, 진화 과학에 대비되는 모델이다. 창조과학은 역동적 과학의 특성을 보여주며 실제 여러 분야에서 유용한 결과가 산출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창조 모델을 뒤따라오는 유신론적 함축 때문에 창조모델을 채택하지 않지만, 유신론자들은 그것을 채택함으로써 받는 과학자로서의 불이익도 감수하며 창조 모델을 포기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기원에 관한 한 모든 측면에서 창조모델은 진화모델보다 훨씬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 성경은 영적 진리일 뿐 아니라, 피조세계를 다루고 있고, 그 일부는 과학의 원리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때로 형이상학을 경험적 가설로 바꾸어 검증에 노출시킴으로써 과학을 수행한다. 가설의 타당성 여부는 그 원천(source)이 아니라 증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여러 경쟁 이론이나 가설 중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많고 예측이 보다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채택되는 것이 과학의 관행이다. 과학을 다른 영역과는 별개의 독립적 영역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은 과학 및 다른 학문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이 처음 아담을 창조하신 후,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복을 주신 것은 사람에게 피조세계를 탐구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학과 공학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참고문헌 .Ayala, F. J. (1977). Nothing in biology makes sense except in the light of evolution, Theodosius Dobzhansky: 1900-1975. Journal of Heredity, 68(Jan/Feb), 3-10. .DeYoung, D. (2005). Thousands not billions.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Dobzhansky, R. (1974). Ethics and values in biological and cultural evolution. Zygon, the Journal of Religion and Science. .Futuyma, D. J. (1983). Science on trial. New York: Pantheon Books. .Gish, D. (1995). Teaching creation science in public schools.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Johnson, P. E. (1993). 심판대 위의 다윈 (이수현 역). 서울: 과학과 예술 (원전은 1991년에 출판됨). .Vadiman, L., Snelling, A. A., Chaffin, E. F. (2005). Radioisotopes and the age of the earth, Vol. II: Results of a young-earth creationist research initiative.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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