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2)

- 마태복음 27:36~43 -

샬롬선교회 


[마태복음 27:36~44]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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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시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을 나타냅니다. 유대에서는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를 '1야회',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를 '2야회', 오전 0시부터 3시까지를 '3야회', 그리고 오전 3시부터 6시까지를 '4야회'라고 불렀습니다. 세 시간이 하나의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오전 6시부터 9시까지를 '1',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를 '3',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를 '6',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인 오후 3시 이후를 '9'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것은 '9' 이후입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였습니다. 그것은 히브리 시간으로 세 번째 시간(오전 9)입니다. 이번에는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1)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2)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습니다."

(3) "여자여. 그곳에 당신의 아들이 있습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나는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1)~(3)은 오전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고, (4)~(7)은 오후 3시 이후에 나온 말씀입니다. 특히 정오부터 세 시간은 어둠이 땅을 지배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침묵하셨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4)만입니다. 그 의도는 '예수님은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마태는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욕설 속에 예언의 성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7:36~44] (본문)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굴욕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왕따'입니다. 그것이 가져오는 정신적 굴욕은 보통 사람이라면 회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정신질환을 유발합니다. 'PTSD',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질병뿐만 아니라 자살에 이르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왕따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 불신이 생기고, 정서가 불안정해지면 사회 진출이 어려워져 집에만 틀어박혀 니트족이 되기 쉽다고 합니다. 가해자에게는 가벼운 마음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피해자에게는 괴롭힘의 기억이 평생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왕따'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기심'과 깊이 연관된 인간 특유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윤리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에게도, 괴롭힌 가해자에게도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아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1. 예수님을 지켜보던 병사들

 

[마태복음 27: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27:32~36)의 마지막 구절에 로마 군인들이 "거기 앉아 지키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키더라.'(שָׁמַר)는 마태복음만의 기사로, 마가도 누가도 요한복음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지켜보고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숨을 거두기 전과 그 이후에 일어난 놀라운 여러 가지 사건들입니다(27:37~53). 그 사건들을 본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27:54)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방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유대인들은 단 한 명도 그런 고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수수께끼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마태는 처음부터 이방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의 시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라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자들', 즉 로마 군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 것이 먼저 되고, 먼저 된 것이 나중 됨'을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 이방인들이 먼저 ''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해 쓰여진 마태복음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또한 사마리아인의 동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10:5~6)고 명령하여 활동 범위를 이스라엘로 한정했고, 예수님 자신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곳에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장의 족보에는 이방인 네 여인의 이름(가나안 여인 다말, 여리고의 라합, 모압 여인 룻, 그리고 헤롯 사람 우리아의 아내)이 등장합니다. 또한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그분의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복음 2:2)라는 기사도 실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15~16)는 이사야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백부장'(마태복음 8:5~13)'가나안 여인'(마태복음 15:21~28)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며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예수님의 십자가 장면에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부장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증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중 된 것이 먼저 되고, 먼저 된 것이 나중 된다.'는 말처럼 이방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을 마태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다"라고 쓰여진 예수의 죄상

 

[마태복음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죄상'을 원문에서는 '그의 이유('아이티아' ατία)'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와 근거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다'라는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총독이 재판에서 예수님을 심문하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라고 대답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죄상에 대해 '자칭 ...이라 칭했다'고 덧붙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들의 명령에 화를 내며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다"라고 그들의 요구를 일축했는데, 이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바로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이분은 자기에게로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1: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양옆에 있는 두 인물

 

[마태복음 27:38] "그때에 예수와 함께 두 강도가 한 사람은 오른쪽에, 한 사람은 왼쪽에 십자가에 못 박히니라."

 

이 기록에는 예수님이 사회적 반란을 일으킨 혁명가로서 처형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운데에 놓여졌지만 원래 그 자리에는 바라바 예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회적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도 바라바와 같은 동료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을 '강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과연 강도죄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을까? 그들의 죄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정치적 반란이라는 국가적 범죄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회개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는 그런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태의 관심은 예수님 안에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3:12의 성취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씀과 이사야서의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에게 쏟아진 욕설을 들으면서

 

[마태복음 27:39~44]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처음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십니다. 이것도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퍼부은 욕설(비방, 조롱, 비난)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지나가는 사람들

(2)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

(3)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

 

(1) 지나가던 사람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 처형 현장인 골고다에 온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머리를 흔들며'라는 표현은 사람을 경멸할 때 하는 동작입니다. 이것은 시편 109: 25에 있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시편 109:25] “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수치의 대상'으로 번역된 어휘는 '수치'를 뜻하는 '헬퍼'(חֶרְפָה)이며, 그 어원인 동사 '하랄프'(חָרַף)'모욕하다, 비웃다, 조롱하다'를 뜻합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동작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15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의 모습은 창세기 1:2'토후'이자 '보후' 그 자체입니다. , '황량하고 아무 것도 없는', 기능 장애가 발생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이 우상숭배의 결과로 초래된 것입니다. 한때 아름다움의 극치, 온 땅의 기쁨이라 불리던 수도 예루살렘을 본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저으며 조롱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수치의 극치를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특히 유다 백성(그리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수치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벌거벗으셨던 모습도 그 사실을 나타냅니다.

 

'비방하다''모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는 '브라스페메오'(βλασφημέω), 히브리어는 '가다프'(גָּדַף)'모독하다, 욕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모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성전을 헐고'는 정확히 '성전을 때려 부수다(파괴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육신으로 이해하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에 그것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형식적인 죽은 예배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성전세가 들어오는 이권이 얽힌 종교 시스템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이 사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라는 뜻이었지만, 이를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은 사탄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을 일으켜서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들''거머리의 후손'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탄이 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유혹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2)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여기서 '지나가는 사람들''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포함됩니다. 그들은 사형이 확실하게 집행되는지 확인하러 온 것으로 보입니다. '조롱하다''희롱하다,'를 의미하는 '엠파이조'(ἐμπαίζω)의 미완료형입니다. , 반복적으로 예수님을 조롱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라아그'(לָעַג)가 됩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유대인 지도자들 역시 표적을 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예수님은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시편 22:7~8] “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3)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여기서 '욕하다'39절의 '모욕하다', 41절의 '희롱하다'도 아닌 '질책하다, 비난하다'를 의미하는 '오네디조'(ὀνειδίζω)의 미완료형이다. , 그들도 예수님을 질책하고 비난을 계속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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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잡히신 후,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예수님은 끊임없는 정신적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괴롭힘과 수치의 극한에 대해 예수님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통의 결과를 알기에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했던 메시아는 유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 있는 왕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메시아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성경의 일부분일 뿐 올바른 이해는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4:25~26]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미련한 자들''어리석은 사람들', '둔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지혜가 없는 사람'(로마서 1:14),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디모데전서 6:9)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도 그런 자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인데, 이를 위해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성취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첫 아담을 끝내기 위함입니다. 인간 속에 뿌려진 사탄의 씨앗을 없애고 새로운 생명을 주는 '마지막 아담'이 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메시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율법을 지키면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 믿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가르침을 믿었기에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메시아의 모습이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종교 시스템에 침투해 사람들을 바른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왜곡시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탄의 속임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탄의 가장 강력한 힘인 죽음을 이겨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가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계시로 이 '감추인 하나님의 지혜'를 더 깊이 알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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