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뿌리는 교회의 잘못을 고발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붙힌 반박문.
'신본주의'에서
인문주의로의 전환점으로 보는 시작도 존재한다. 다만 이런 해석은 옛날의 해석이며, 종교 개혁 후의 사회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 분열의 사회"라는 해석도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신과 그가 정해놓은 운명에 인간을 종속시켰다는 것이다. 한참 지나야 부르주아 세력이 성장하고 그 전까지는 귀족 중심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종교 내부의 개혁 운동을 넘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유럽 문명을 부르주아가 이끄는 근대 사회로 변혁시킨 사건이다. 만약 종교 개혁 운동이 없었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유럽 사회는 지속되었을 것이고, 적어도 유럽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는 헤게모니를 쥐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 신학적 오류에 따른 면죄부 남용과 같은 행위에 분개하여 학문적 토론과 지적 차원에서[2]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3][4] 굳이 대문에 내건 이유는 딱히 비텐베르크 교회에 정치적, 신학적 중요성이 있어서라기보다 당시 교회의 문이 민중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고 싶어할때 모이는 게시판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루터 본인이 이 반박문을 게시할 당시에는 이것이 장차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고, 어디까지나 교회 내부에 만연한 신성모독에 대한 항의가 주 목적이었다. 이후 루터는 로마 교황청에서 파문을 받고 맞파문을 날린 뒤 본격적으로 종교개혁가의 길을 걷게 되지만, 당시까지는 가톨릭 교회를 박차고 나올 생각은 없었고 교회 내부에서의 개혁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95개조 반박문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가톨릭 세계관과 질서를 존중하는 뉘앙스를 버리지 않았음에도 교회의 사면 권한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하사한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근거로 `교회의 사면권'을 주장하는데, 특히 가톨릭교회의 권력 체계가 공고하던 전근대 시기에는 이 교리가 아주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루터가 제기한 다른 문제를 받아들이더라도 교황청에서 저 대목을 받아주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95개조 반박문 내용 자체는 이전 루터가 썼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박》보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 수위가 낮다. 그러나 이전의 비판은 공론화 되지 않았지만 95개조 반박문은 2주만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 퍼지고 1달여 만에 유럽 전체 지역에 퍼지면서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루터 신학의 가장 중요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바탕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라도 어지간한 신학적인 배경이 없으면 주석과 설명을 참조해도 사실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내용의 난이도가 신학생급 정도는 되어야 근접할 수준. 이에 대해 요한 테첼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반발해 일명 '106개조 반박문' 으로 루터의 주장에 대해 반론했으나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