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견인

 

                                                                                       -루이스 벌코프

 

A. 성도의 견인론의 역사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에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최초로 설파되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엄격한 예정론자에게 기대된 만큼은 이 점에 대한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거스틴에게서는 이 교리가 위에서 서술된 것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선택된 자가 결국 궁극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새 생명과 진정한 신앙을 부여받은 자들 중 일부가 은혜로부터 완전히 타락하여 궁극적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로마 교회는 자유 의지론을 포함하는 반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로 인해 성도의 견인론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견인을 인간의 불확실한 순종에 의존하게 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교리의 정당한 위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루터 교회는 성도의 견인을 인간의 신앙의 지속적 활동에 의존하게 하고, 진정한 신자들도 완전히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칼빈주의적 교회만이 이 교리를 절대적인 확신을 부여할 수 있는 형태로 주장한다.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의 자녀의 약점과 실패를 다수 열거한 후 “하지만 풍성한 자비를 지닌 하나님은 선택이라는 불변의 목적에 따라 중죄에 있어서도 자신의 백성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며, 양자 됨의 은혜를 상실하고 칭의의 신분을 상실하며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이들이 완전히 유기되거나 영원한 파멸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신자의 견인을 신앙하고자 하는 의지와 선행에 의존하도록 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이러한 극단을 회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신인 협동설을 그 모든 결과들과 함께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웨슬리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많은 소종파들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추종한다. (이 부분은 원본과 약간 다르게 번역된 것 같아서 삭제했음- )

B.견인의 교리의 진술


견인의 교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진술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의 견해처럼 우선 선택된 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의해 중생하고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비록 때때로 악에 정복당하기도 하고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코 그 신분에서 완전히 타락하여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중생의 생명과, 성화 과정에 있어서 중생에서 발현된 성향들은 결코 전적으로 폐기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견인이 신자의 본래적인 자산 혹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서 견인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지속적인 활동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스트롱은 견인을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신앙과 선행의 자발적인 지속”, “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영적인 진보의 인간적 측면”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견인이 인간에게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개혁파는 성화에서와 같이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도 인간이 협력한다고 믿고 있지만, 성도의 견인을 우선적으로 신자의 활동이나 성향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신자가 홀로 남아 있다면 타락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엄격히 말해 견인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은
“심령 안에 시작된 신적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 사역” 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C.견인의 교리에 대한 증명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 진술과 다른 교리로부터 추론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1.성경적 직접적 진술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이 있다. 요10:27-29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메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롬11:2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후회하는 것처럼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관련되지만 일반적인 진술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위로한다(빌1:6) 살후3:3에서는 기쁨으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한다. 딤후4:18에서 그는 주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한다.


2.추론적 증명.

견인의 교리는 다음의 교리로부터 추론적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다.


(1)선택의 교리로부터

선택은 어떤 사람들이 일정한 외적인 특권으로 호의를 입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택된 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될 것이며 필히 완전한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선택은 궁극으로의 즉 구원으로의 선택이다. 이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감화력을 주셔서 이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견인하고 궁극적으로 구원되도록 인도한다.


(2)구속 언약의 교리로부터

구속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과 고난의 보상으로 자기 백성을 아들에게 주셨다. 이 보상은 영원 전부터 결정된 것으로, 인간의 여하한 불확실한 충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외면하시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간주되고 하나님의 보상의 일부가 된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거나, 생명의 연함으로써 언약에 들어간 자들이 타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롬8:38,39)


(3)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력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자신의 속죄 사역에서 죄인의 용서와 열납을 획득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의 의는 죄인의 칭의를 위한 완전한 근거를 구성하며, 그렇게 완전하고 효과적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정의받은 자들이 다시 정죄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 중보기도를 드리며, 백성을 위한 그의 중보 기도는 항상 효과적이다(요11:42;히7:25)


(4)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부터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의 영의 참여자가 되고 그의 한 몸이 되며 성령의 생명으로 약동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가 살아있듯이 그들도 살아 있다. 그들은 그 몸으로부터 다시 절단되어 신적 이상(ideal)을 무효케 할 수는 없다. 연합은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원인, 즉 하나님의 영원하고 값없는 사랑에서 발원하므로 항구적이다.


(5)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댑니(Dabney)는 “성령이 지금 역사하기 시작하지만 곧 그를 포기할 것이며, 천상적 출생의 생동적 불꽃이 일시적으로 불붙다가 완전한 흑암 속으로 스러지게 되며, 새로운 출생에서 증개된 영적인 생명은 돌발적이며 발작적이어서 죽은 영혼에 외면적으로 생명이 발현하는 듯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령의 지혜와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신자는 이미 이생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요3:36;5:24;6:54) 우리가 영생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 행동할 이유는 무엇인가?


(6)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성경을 보면 신자들이 이생에서 구원의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히3:14;6:11;10:22;벧후1:10) 신자들이 어느 순간 은혜로부터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확신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서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D.견인의 교리에 대한 반론들


1.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

견인의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진정한 자유는 무관심의 자유나 혹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일들에서 잘못된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함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일 때보다 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러한 자유를 누린다.


2.태만과 부도덕으로 인도한다

견인의 교리가 태만, 방종, 심지어 부도덕까지도 초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릇된 안정감이 이 견인의 교리로부터 유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 편에서의 지속적인 경계와 열심, 기도없이 지내도록 방임한다는 사상을 전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자에세 거룩함으로의 견인을 확신시키는 교리가 어떻게 죄의 동기가 될 수 있겠는가? 성화를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보다 더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이 될 것이다.


3.성경에 위배된다

이 교리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종종 주장된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성경 구절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배교에 대한 경고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가 타락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필요했을 것이다(마24:12;골1:23;히2:1;3:14;6:11요일2:6)하지만 이러한 경고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문제를 고려한 것이요, 진지한 의도로 진술된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점검을 촉진시키며 신자들이 견인의 길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이 구절들은 말한 대상 중 어느 누가 배교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원리의 예시로서 행27:22-25을 31정과 비교 해 보라.


(2)성경에는 신자들이 성화의 길에서 지속적으로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끝까지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1)에서 언급된 경고들과 연관되어 발견되며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신자들의 어느 누구도 견인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도덕적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3)또 성경은 실제적인 배교의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딤전1:19,20;딤후2:17,18;4:10;벧후2:1,2;또 히6:4-6참조)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진정한 구원적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신자들이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중생에 근거하지 않은 일시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이 신앙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롬9:6;요일2:19;계3:1) 요한은 일부 신자들에 대해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서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를 언급한다(요일2:19)


E.이 교리를 부정한다면 구원은 인간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견인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실제로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펠라기우스적 자력 구원관을 지닌 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은혜로 인한 구원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이러한 견해의 요점은, 인간이 성령만의 사역에 의해서는 혹은 성령과 인간의 의지와의 협력 사역에 의해서든 은혜의 상태로 옮겨진 이후에는, 신앙을 지속하느니 신앙을 포기하느냐의 여부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되어 인간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동기를 매우 불확실하게 하며, 인간이 신앙의 복된 확신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견인의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호비(Hovey)는 “이 교리는 큰 위로와 능력의 근원, 즉 감사에 대한 자극, 자기 헌신의 동기, 위험시에는 불기둥이 될 수 있다” 고 말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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