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교회
(참조 행16, 17장)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신약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점에 학자들은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 바울 일행은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주후 약 49/50 년경에 도착했다. 그들은 빌립보에서 Egnatian 가도를 따라 사회, 문화, 역사, 지리적으로 전도의 중심지가 될 그 도시로 들어왔다. 바울은 그곳에서 신학적 통찰과 차후 선교전략에 도움이 될 만한 많은 도전과 체험을 겪었다.
바울 당시 그 도시는 예전 장소(Theme 혹은 Therma)와 떨어진 새 지역(Thermaikos 만에서 Horitates 산맥으로 이어지는 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주전 4세기 후반에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장군 Cassander가 신도시를 건설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의붓 여동생이자 아내인 Thessalonice의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주전 148년에 마케도니아가 로마제국에 합병되면서 그 주의 수도로 지명되었고 로마총독이 주재하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바울 당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19세기 말 대화재로 소멸되어 안타깝게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그 유명한 군단을 신속히 이동시키기 위해 도로를 잘 정비했는데 오늘날 독일의 아우트반과 미국 고속도로의 원형이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Egnatian 가도로서 아드리안해의 Dyrrachium에서 시작하여 마케도니아를 동으로 가로질러 에게해까지 가며 거기서 또 빌립보와 네아포리스까지 이어진다.(그림 참조)
데살로니가는 주전 316/5년에 Cassander 장군이 새로 건축한 이후로 마케도니아 지역의 주축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로부터 도착했을 때에는 수출입의 중심지로서 당시로선 에게해의 항구들 중 고린도와 에베소 다음으로 컸다. 지금의 그리스에서도 같은 장소에 있는 Salonika가 Athens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라는 사실이 이 항구의 전략적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당시의 다른 상업중심지들처럼 헬라, 로마, 아시아, 바바리안, 유대, 기타 여러 나라에서 온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살았다. 당연히 사회, 문화, 종교, 정치적인 갈등이 많았고 그런 사실이 사도행전의 데살로니가 사역 기록에 반영되어 있다.(행17장) 특별히 잡다한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 배경은 바울로 복음전파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Serapis, Isis, Dionysus, Cabirus 신들과 올림피아 만신전의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이 숭배되었다.
소아시아, 중동, 애굽,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한 알렉산더 대왕은 정치적 필요로 자신을 신적인 위치로 끌어올렸는데 이후의 쥴리어스 시저나 아우구스토스 같은 로마 황제들도 그의 본을 따랐다. 많은 도시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이고 또 자신들의 신전을 세웠는데 데살로니가에도 아우구스토스 통치 시절에 지은 황제의 신전이 있었다.
바울 일행은 2차전도 여행 때에 소아시아의 Troas를 거쳐 먼저 빌립보에 들어갔는데 안식일에 강가에서 기도하는 여인들을 만났다.(행16:13). 율법에 따르면 유대 성인 남자 10명이면 회당을 구성할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빌립보에는 유대 사회가 회당도 짖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여인들은 안식일을 야외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데살로니가로 옮겨간 바울 일행은 유대 회당을 발견하여 세 번의 안식일 동안에 복음을 전했다. 일부는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거부하는 자도 많이 생겼는데 그 사역으로 두 가지 결과가 생겼다.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다. 또 시기한 유대인들의 선동을 받은 반대자들 때문에 잠시 머물고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보듯이 1세기 당시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 사회는 사도들의 복음전파사역에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마군의 중요요새였던 빌립보에는 유대사회가 너무 적었지만 상업중심지였던 데살로니가에선 비교적 큰 유대사회가 있었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각지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전해졌는데 유일신 신앙과 고결한 윤리 기준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당을 이용해 비교적 용이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또 제국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경건한 삶으로 인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복음 전파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자는 유대인, 경건한 헬라인, 그리고 귀부인들이었다(행17:4). “경건한 헬라인”(God-fearers-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말하는데 할례는 받지 않아도 되며 또 유대사회에 속하지는 않되 유일신 창조주를 믿으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기로 헌신한 자들이다.
문화, 인종, 사회, 경제, 종교적으로 다양한 도시에서 선교를 해야 할 오늘날의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동일한 다양성 속에서 겪은 도전을 바탕으로 기록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잘 참조할 필요가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새롭게 믿을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살전1:7)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보면 겨우 3주의 전도활동으로 생긴 소수의 신자가 몇 달 만에 큰 교회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교인들이 어떤 문제에 주된 관심이 있었는지도 볼 수 있는데,
- 이전의 우상숭배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살전4:1-8)
-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종말론적 관심(살전 4:13-18)
-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의 긴장 관계(살전2:14-16)
-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관심(살전5:1-11)
- 박해와 고난(살전 1:6, 2:14, 3:3-5, 살후1:5-7)
등을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두 서신서는 갓 태어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이 몸담았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함으로써 많은 새로운 어려움들을 겪었다. 현대의 독자들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의 환경에선 잘 알 수 없는 당시의 그런 요인들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으로 충만했는데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이겨내면서도 그랬다. 바울이 살전 1;1과 살후1;2에 강조한 ‘평강’(peace: 히 shalom 헬 eirene)이 무사안일의 의미가 아니라 많은 고통 가운데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직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