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언약과 성취 [상권.2-09]
- 사53:5-6, 눅2:11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다.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 라보며 깊이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은 죄를 질병으로 간주하셨다.
- 죄악은 참으로 질병 이상의 것이다.
⑴ 죄는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부터 본래적으로 가진 것은 아니다.
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행복하게 하셨다. (창1:26-27)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 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② 인간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인간 은 사단의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 (롬5:12, 엡2:1-2) <참조; 창3:1-24>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 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 사하는 영이라” (엡2:2)
⑵ 죄는 질병이 육체의 기능을 방해하는 것처럼 삶의 균형을 파괴한다.(마9:1-9)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 느니라.” (마9:2)
⑶ 죄는 질병이 몸을 약하게 하는 것처럼 도덕적 힘을 약화시킨다.(고전5:1-5)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전5:1)
⑷ 죄는 고통을 주거나 무감각하게 하여 분별력을 잃게 한다. (민12:10)
- 마치 어떤 죄악들이 문둥병에 걸리게 하듯이 <참고; 민12:1-16>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 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민12:10)
⑸ 죄는 사람 속에서 점점 증가되어 파멸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행1:16-20)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온지라.” (행1:18) <예수님을 은 30에 판 가롯 유다>
죄는 ‘죽음의 질병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사라도 그 죄라는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모든 육체의 고통을 종식시키는 죽음도 이 질 병만은 치료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죄를 멸하시고 그 죽음의 질병을 고치셨다. (롬5:17-18)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 (롬5:17-18)
2.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구주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⑴ 예수님은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곧 우리 의 구주 그리스도 주이시다. (눅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 도 주시니라.” (눅2:11)
⑵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인한 모든 질병과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셨 다. (사53:5-6)
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함이었다.
②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
③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
⑶ 예수님은 유일하신 구주로서 우리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 다. (마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 음을 품고 항상 주님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 루어야 한다. <참조; 빌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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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 마태복음 21:12-17 -
샬롬선교회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서언: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먼저 행하신 것은 성전을 정결하게 한 것이었다.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을 거기에서 쫓아내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체포될 때까지 매일 가르치셨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장한 후에, 성전 안에서의 언행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세 가지 언행에 모두 "성전 안에서"로 되어 있다.
1.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상인들과 환전인들을 쫓아내다. [마태복음 21:12]
+ 12절에, 예수님의 '성전 정결'이 예루살렘에 입장한 후 즉시 이루어 졌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것에 주목하고 싶다. '성전 청결' 사건은 요한복음 2:13~17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전 정결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두 번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한 번은 예수님의 선교 초기에, 두 번째는 예수님의 사역의 마지막 주간이다.
+ 예수님은 장사꾼과 환전인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장 집단의 이득을 탐하는 '소굴'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구약에서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단 한 번 밖에 없는, 특별한 예언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 예언을 인용하여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것은 "메시아 왕국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성전은 메시아 왕국에서는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그 "기도하는 집"을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 "나의 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제사장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남으로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성토되고 있는 것이다.
2. 맹인과 저는 자들의 치유. [마태복음 21:14]
+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 반, 갈릴리 전도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온 많은 병자들을 치유했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시연이었다. 그것을 예루살렘에서도 증거하셨다. 본문의 14절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치유의 수가 적은 듯하지만, "맹인들", "저는 자들"이란 복수형이다. 여기에서 치유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치유가 되고 있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왕국은 '맹인들', '저는 자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사야 35장에는 그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35:5-6]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그 때"는 '마지막 날', 즉 메시아가 땅을 지배하는 천년 왕국의 때이다. 또한 "물"은 성령을 시사하고 있다. 메시아 왕국의 특징은 폭발적인 기쁨이다. "맹인", "못 듣는 사람", "저는 자", "말 못하는 자"는 모두 복수형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그 영적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21:14의 "맹인들", "저는 자들"에 대한 치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사하는 예언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26:17-18]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시편 8편'의 말씀. [마태복음 21:15~16]
+ 본문의 "성전 안에서" 일어난 세 번째 사건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노한(화를 낸)일이다. 화를 낸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본 것과, 또 하나는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제발 구해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의미)"라고 하는 어린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편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을 예언적으로 표현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기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 주려하셨다. 그런데 갈릴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결언 :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에는 세 가지의 메시아의 사역 중 하나가 관련되어 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은 상당히 정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전 성결'은 예수님이 왕의 권위를 가진 메시아로서의 증거 행위이고, +'악한 농부의 비유'는 왕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고, 버려져, 살해되는 수난의 종인 동시에,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 그것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기초석이 되어 영광을 나타내는' 부활의 메시아로부터의 가르침이다.
여호와 이레
- 창22:14 -
샬롬선교회
[창22:13-14]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본문을 통해 “여호와 이레[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에 담겨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창세기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께 즉각 응답한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와 야고보서에 '시험'이라는 단어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일종의 테스트이다.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야고보서에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술수를 행하는 일종의 미혹 행위이다. 이 경우에 받는 시험은 오직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사탄이 그 틈을 노리는 것이다. 영어성경 번역본에는 두 구절에 나오는 '시험'을 다르게 번역하기도 한다.
2. 그 시험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다.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우리는 이 내용의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고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명령이 어떤 것인지 상세히 안다면,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첫 번째 큰 난관이 있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본문 바로 앞장에서 그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노라고 약속까지 해 주신 상황이다.
+ 두 번째 난관이 있다. = 이삭을 그냥 바치라는 게 아니라,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레위기 1장을 보면 그 방법에 대해 상세히 말씀하시는데, 제물을 번제로 드릴 때에는 먼저 피를 흘려 그 제물을 죽여야 한다. 피를 모두 쏟아내고 제단에 그 피를 뿌리며, 그 아들을 모두 제단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야 한다. .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믿은지라/新共同訳).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히브리서 기자는 창22장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태워 하나님께 드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확신했다.
+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또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산으로 향한다. 사흘 길을 걸어 아브라함이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두 종들에게 말한다.
[창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하나님이 명령하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 아브라함은 번제에 사용할 나무들을 아들에게 짊어지게 한다.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오른다. - 이 때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에 사용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한글번역에는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준비하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보고 계신다." 혹은 “보여주신다."라고 되어 있다.
+ 마침내 말씀하신 장소에 이르렀다. -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깔아놓고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묶는다.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삭은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을 굳건히 신뢰했던 것처럼 그 역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아브라함은 칼을 쥐고 아들을 찌르려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창22:11-12]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숫양을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른다.
3.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 보고 계신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인가?
+ 하나님께서 단지 아브라함에게 숫양 한 마리를 준비시켜 보여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기록했을까?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궁극적인 이유가 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친히 들려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미리 보고 즐거워하며 기뻐하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의 때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육신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분명 지켜보고 계셨다.
+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가 무엇인가? - 그것은 먼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인이 직접 아버지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보여주시는 어린 양이 되어, 번제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겠다는 ‘복음'이다.
결언
[창세기 22:15-19]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확실히 메시아 약속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복을 받을 것이다. 과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태복음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은 죄와 사탄의 권세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 복이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약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