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도시 선교의 성경적 전략
바울의 선교의 동기, 바울의 메시지, 도시 선교의 성경적․신학적 근거, 도시 선교의 신약성경의 배경, 바울의 도시중심의 선교원리, 바울의 도시 선교 지역 특성, 바울의 도시 선교 전략을 통하여 바울을 통한 도시 선교 전반에 관련된 사항들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두 번째 선교동기는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잃은 세계(lost world)에 대한 불타는 비젼이 있었습니다(롬10:13-15, 고후5:13).
세 번째 선교동기는 바울은 “육신의 장막 집”(고후5:1)은 없어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고후5:2)를 기다리는데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5:10)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확신하고 열심히 선교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신을 보면서 보수를 위해 복음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며,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을 상급을 기대하였다.
네 번째 선교 동기는 영혼 구원은 차차 해도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긴급성을 요하는 것임을 확신하는데 있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그는 “지금” 이 영혼 구원의 날임을 확신하고 선교는 긴급성을 요함을 절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는 안디옥에서 그가 설교한 것 속에서 볼 수 있다(행13:16-41). 바울은 그의 메시지는 구약 성경에 그 닻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은혜롭게 다루신 것을 추적해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께로까지 이끌어갔다(23절).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하지 못한 것을하도록 즉 예수는 구약 예언들이 성취되어 오신 메시야이심을 인정하고 바울이 선포하는 이 구원의 말씀을 믿으라고 호소하였다. 바울의 메시지 속에는 그의 사명에 대한 열정과 그것의 최종적인 성과에 대한 낙관이 있었다. 그는 선지자 하박국을 인용하여 “조소하는 자들은 조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멸망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일러 주어도 믿지 않을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행13:41)라고 말했다.
바울 자신의 말로 기록되어 있는 바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고백은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화해라고 지적해준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이것이 바울이 그의 시대의 도시 세계에 일관되게 선포한 메시지였다.
화해를 통하여 한 인간이 죄와 사망의 굴레로부터 놓임을 받고 새롭고도 변화된 삶을 살도록 세상속으로 석방된다. 화해는 위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은 여기 지상에서 널리 미치는 효력을 갖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업적이 아니라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는 것이다. 또 동시에 이것은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활동,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끼친다.
도시에 대한 성서적 관심은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도시선교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도시에는 사람이 많다. 인구의 밀집지역인 도시에는 온갖 범죄와 죄악이 동시에 창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시에 대한 하나님이 관심은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도시를 세우시기도 하시고 멸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은 도시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도시가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온다면 심판하시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려한다. 그러므로 도시는 회개하고 구원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 도시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말씀을 선포하고 심판의 하나님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받도록 하고자 하는데 도시 선교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안디옥은 국제도시로서 동서의 문화가 교류되고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비도덕적인 타락의 도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안디옥은 아폴로 신전 등 수많은 신전과 종교적 매음을 일삼는 우상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죄악으로 가득찬 도시가 바울의 선교로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결과 안디옥은 도시선교에 대한 성격적 근거로서 주요한 위치에 있는 도시와 교회가 되었고, 세계 복음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바울 일행은 수리아 안디옥에서의 전도활동을 깃점으로 해서 갈라디아, 마게도니아, 아가야 및 아시아 등지에 많은 교회를 10년간의 짧은 기간에 설립하였으며, 설립한 교회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계획해서 여행과 서신으로 독려하였고, 도시교회를 육성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바울을 우리는 도시교회의 설립자일 뿐만 아니라 유리한 중요도시를 선교의 요충지로 삼아 전도함으로서, 인근지역까지도 복음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도시의 전도전략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그린웨이(R.S Greenway)는 바울의 전도전략은 곧 자기의 회심경험과 같이 개인적 회개와 회심에 그 출발점을 두었고, 여기에서 도시 전도전략으로 발전되어, 도시 전도 전략만이 교회에서 교회로, 이어서 로마의 지배지역에서 로마사회로, 그리고 로마의 정부, 제도, 종교 등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져나갔다고 주장한다.
결국 바울의 도시 선교전략은 회심에서 출발하여 이 회심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지역으로 그리고 그가 가고자 하는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 확실하다.
문화의 중심이며 인구가 많은 도시를 택한 것은 그 도시가 복음화 됨으로서 인근지역의 복음화를 부채질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으며, 바울이 주로 로마의 행정적 속주에서 집중적으로 선교한 것은 한 선교사가 많은 선교지를 맡을 수는 있지만 결코 효과적인 사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문화의 중심지를 집중적으로 선교해야 할 대상자로 선택한 것은 도시 생활의 편리함이나 많은 군중 때문이 아니라, 그 도시가 복음화 됨으로 인근 지역의 복음화를 부채질 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그의 방문이 중요한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간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선교의 전략을 가졌기에 전략적인 지점으로서의 수도나 대도시를 파고들었다. 전략적인 도시들은 바울이 거기에서 새로운 능력으로 새롭게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 인도를 받은 자로 활동했지만 그가 어느 곳으로 인도를 받았던지 언제나 중심지를 찾았고, 그 중심지를 붙잡고 그곳을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은 정거장식 선교방법으로 중심도시에서 집중적으로 선교했다. 그리고 그 주변도시와 마을들에 대한 복음화는 새로 설립된 교회들에 일임하였다. 그리하여 복음은 다른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직접 가지 않았던 장소에도 교회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도시들은 로마 행정과 희랍 문화의 중심지들로서 빌립보는 작은 로마였고, 아덴은 그리이스의 문화적 중심지이고, 에베소는 제국의 종교적 중심지이며, 그리고 고린도와 데살로니가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편만케 하기 위해서 도시들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도시 중심의 선교전략을 가졌던 것이다.
바울은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였다. 바울이 도시 우선으로 전도한 것은 제한된 시일 안에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의도에서 인구가 집중된 곳, 보다 개방적인 곳, 공용어를 잘 이해하는 곳인 도시에 힘을 쏟을 것이다.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면 그 주변과의 사이의 지역들은 도시교회들의 전도활동에 의해 이차적으로 복음화 될 수 있다고 계산한 듯하다.
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단순한 이유로 선교전략상 도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 전략을 세우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에 수용적인 주민들은 도시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이유로 도시는 선교자원의 높은 우선권이 있다.
그리고 도시마다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도시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반응을 나타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저항적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선교전략을 세우기 위하여 가능한 범위에서 사전에 각 도시의 정확한 윤곽이 파악되어야 한다. 즉, 피부색깔, 문화, 언어, 및 종교에 따른 인종적 단위에 근거한 구분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도를 성공적으로 그린 사람은 도시전도의 중요한 열쇠를 이미 확보한 셈이다. 이것은 더불어 헌신적인 생활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할 때 수많은 도시 사람들을 선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제 1차 선교 여행의 출발지인 안디옥은 예루살렘 북방 약 300마일 되는 곳에 있는 크게 번영하는 중요한 상업도시인데,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있었던 성도들의 이산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세계주의적인 교회, 생동감이 넘치는 진취적인 교회, 가르침을 잘 받을 뿐만 아니라 증거하는 교회, 돈에 인색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순종하는 교회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으로 고생할 때 구제금을 보냈고,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사로 파송한 첫 이방 교회이었다(행11:19-30). 이때 바울은 다메석에서 회개한 후 13년 동안이나 충분히 선교사로의 준비를 한 다음이었다.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한 지방으로서 로마의 한 주였다. 갈라디아라고 명명된 것은 이곳의 거주자인 컬트를 따라서 그렇게 불러졌다. 이곳의 주민은 켈트 족이나 갈리아족의 일파로서 호전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호전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아민타스(갈라디아의 마지막 왕)가 죽은 후에는 로마의 한 행정 구역으로 전략해 버렸다. 새 갈라디아 주는 갈라디아 전부와 이사우리아와 비시디아 등을 포함하였다. 또 이고이온, 루스드라, 데베, 안디옥, 사갈라수스 그리고 셀게 등이 포함되었다. 새 갈라디아의 수도는 안키라였다. 이곳은 황제 숭배 사상이 극대로 행해졌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신전이 헬레니즘적인 건축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여기에 유명한 안키라비문이 새겨져 있다. 갈라디아 주는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기 때문에 바울의 전도가 행해졌던 도시들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루스드라
루스드라는 소아시아 남부의 중앙지역에 있는 한 도시이다. 루스드라의 주변은 비옥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입지조건이 상업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역이 아니고 다만 농경 정착지에 불과하다. 루스드라가 아탈루스 왕조(B.C.189-133)에 의해 로마에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루스드라를 로마의 요새지로서의 식민지로 설립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용사들을 이주민으로 옮겨놓았다. 따라서 루수드라는 부분적으로 로마화 되었다. 또한 황제는 이고니온을 경유하는 간선도로를 루스드라에 건설함으로 루스드라로부터 데베와 길리기아관문으로 통하는 길도 나게 하였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거주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게 되자 루가오니아 원주민들이 그들의 옛 신들이 현현했다고 바울의 일행에게 제사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사람이 바울의 제가가 되었으며, 그들로 인하여 새로운 교회가 조직되었다. 그 새로운 교회는 장로들을 택하여 교회의 조직을 구성하게 되었다.
2) 데베
남부 소아시아의 중앙 지역에 있었던 한 도시로서, 남부 아라톨리아의 중부지역에 있는 루가오니아 지방의 한 도시다. 데베의 중심 도시는 이고니온이지만, 이고니온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데베가 루가오니아인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도시는 로마의 속주인 갈라디아 주에 속하였으나, A.D. 1세기에 더베는 일시적으로 안티오쿠스가 로마황제 클라우디스를 기념하여 이 도시의 이름을 Claudiaderbe로 붙였다. 바울은 데베를 두 번 방문하였는데 첫 번째 여행중에서 바울은 많은 제자들을 얻었고(행14:6,20), 두 번째 여행 중에 길리기아에서 루스드라로 가면서 데베를 경유하였다. 데베 출신의 제자 가운데 바울의 선교 지역에 많이 조력한 자는 가이오이다.
3) 이고이온
이고이온은 소아시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다. 현재는 터키의 도청 소재지인 코냐 이나, 회람과 로마제국 당시에는 루가오니아의 수도였었다. 이고니온은 광대한 상업도시였었는데 이는 시리아에서 에베소와 로마에 이르는 대로가 이곳을 통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비옥한 평야로 인해서 곡식과 과일 산출의 중심지였다. “세계를 보라, 그러나 특히 코냐 (이고니온)를 보라”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고이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옥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와 같이 이고니오는 로마와 비잔틴시대 이후에는 크고 부유한 도시였었다.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중에 이고니온에서 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켰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건축하여 예배를 드렸던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설교함으로 많은 핍박을 받기도 하였으나 여기에서 얻어진 많은 믿음의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저희에게 일을 위임하였다.
4) 비시디아 안디옥
비시디아 안디옥은 고대 비시디아 지역과 브루기아 지역사이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소아시아 남서부 호수 지방에 있는 도시이다. 안디옥은 얄바취 평원이 내리다 보이며, 고원 위에 위치해 있어서 자연적인 안티오쿠스의 본거지였었다. 그러나 아티오쿠스 3세가 로마에 패배하면서 이 도시는 로마의 속주 갈라디아에 합병되었다. 안디옥은 비시디아의 로마화 과정에서 산업의 중심지였었으며, 이곳에는 셀루코스 시대에 정착한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바울은 역시 이곳에서도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희랍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마게도냐는 아가야 지방의 북쪽에 위치하는 지방으로, 주로 산악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비옥한 평야도 많이 지니고 있다. 마게도냐를 통치하던 여러왕들 가운데에서도 영토 확장에 괄목할 만한 역할을 한 왕은 필립 2세와 알렉산더 3세이다. 그러나 마게도냐 마지막 왕인 페르세우스 왕이 B.C.168년 퓌드나 전투에서 로마의 집정관 아이밀리우스 타우루스에게 패배함으로 그 위력은 수그러지고 말았다. 이때에 마게도냐는 네 개의 독립지구로 분할되었다.
마게도냐는 오랫동안 지도적인 헬라나라이었다. 스토아와 에피쿠르스학파가 마게도냐에 대표적으로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헬라어가 라틴어와 더불어 많은 동방의 로마 속주들에게 공용어로 쓰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헬레니즘 시대의 오랫동안 지도적인 지역이었던 마게도냐를 선교지로 택했다. 마게도냐의 주청 소재지는 자유도시였던 데살로니가이다.
바울은 아시아와 서양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대로를 통하여 네압볼리로부터 빌립, 데살로니가 등에 전도여행을 했을 것이다.(행16:11-12)
1) 빌립보
네압볼리는 빌립보 시를 위한 항구도시였다. 빌립보는 중요한 도시였고, B.C.42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이곳의 종교는 여러 신들과 함께 황제 숭배사상 등으로 복합 종교가 존재해 있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를 보아 유대인 사회가 아주 작은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회당으로 가지 않고 빌립보의 유대인들과 유대인의 관습에 매료된 비유대인들이 기도 드리기 위해 정규적으로 모이던 장소로 갔던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염색으로 유명한 두아디라에서 온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났다. 유럽 최초로 가정교회가 바로 빌립보 여인 루디아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바울로 인하여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눈에 띄게 스스로 존속한 교회였으며, 그 교회 자체 내의 지도자들 아래에서 성장한 교회로서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었다. (에바브라를 비롯하여 잘 알려진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배출됨). 에바브라 디도 외에 바울은 클레멘트를 언급하는데(빌4:3), 그는 베드로와 바울이 죽은 후에 로마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2)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오늘날 살로니카로 알려진 마게도냐의 중요도시이다. 이 도시는 칼시더시 반도 서쪽에 있는 현재의 사로니카만에 위치했으며, 처음부터 마게도냐의 주요 항구였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제2구역의 수도로서 B.C.148년에 마게도냐의 속주가 되었고, 주의 수도 뿐만 아니라, 주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지중해 동부의 모든 주요한 국가들과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과 헬라인, 경건한 헬라인들이 있었다. 바울은 주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이때에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바울의 권함을 받고 바울을 좇았으나, 가장 교육받지 못하고, 가장 천하고 미신적인 형태의 이방 종교에 예속되어 있던 하류 계층의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광적이 적대감을 나타냈다(행17:5-9). 이들을 통한 사단의 공작에 의해서 복음의 시작이 좋았던 데살로니가를 바울은 떠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가로막기 위해 통치 세력에 의해 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는 핍박으로 인하여 약한달 밖에 지속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구 도시에는 견고하게 조직된 교회 하나가 생겼던 것이다.
3) 베뢰아
베뢰아는 풍요한 생활을 하는 헬라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도시이다. 베뢰아라는 말은 군정 소재지를 부를 때 쓰는 말로서,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로마를 향하는 간선 도로상에 위치 하고 있다.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농장들이 많이 있는 까닭에 이곳의 생활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농부의 성실미로 특징 지어질 수 있다.
1세기에는 이곳의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곳에서 성경을 논하였다. 유대인과 헬라의 개종자들과 양 민족의 여러 남녀들이 열린 생각과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은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의 데살로니가인 보다 더 고상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가야는 고대 그리스의 마게도냐 남쪽 대부분의 지방을 차지하였던 로마의 속주었다. 아가야 지방은 데실리 근처에 있는 것으로서 펠로폰네수스의 북부 해안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아가야 지방에서는 바울의 전도 여행지였던 아덴과 고린도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한다.
1) 아덴
아덴은 당시 로마 세계에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군사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는 물론 문화적 측면에서 아덴은 로마의 중심이 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은 우상의 수가 3,000이나 되는 곳이었다. 바울은 그 우상들로 인해 분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들의 철학적 사고 방식이 체계를 따랐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아코라(agora-집회장, 광장)에서, 아덴의 학당에서, 그리고 아레오바고 공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연설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록에서는 바울이 교회를 세웠다고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의 회의 앞에서 한 바울의 진지한 증거에 대해서 몇 사람이 믿었다. 그 중 아레오 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들의 있었는데, 이들이 아덴의 첫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어서 아덴에 전도의 열매들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아덴은 기독교 선교의 중요한 요지가 되었던 것이다.
2) 고린도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에 위치한 결과 폭넓은 해운 망을 통해서 제일의 상업도시로서 부유했으며, 로마의 속주 아가야의 수도였다. 고린도는 도자기와 청동기구로 유명하였다. 또한 고린도는 로마와 동방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고로 로마 세계안에서 영향력을 지닌 위대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해상교역으로 인하여 텍사스 주의 휴스톤과 같이 고린도는 인구가
많은 돈이 풍부하였다. 그 결과 심한 부도덕의 광장이 되어 버려서 선술집이 즐비하여 매음녀들, 장남들이 들 끊었다. 그래서 “고린도인”이란 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가르치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또한 이곳은 인구 이동이 매우 급속한 관계로 헬라 남부 전역을 대상으로 선교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파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고린도에서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회당을 건립해 놓았기 때문에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헬라인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동역자로 얻게 되었다. 이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글라우도에 의해서 로마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영적으로 매우 성숙한 자들로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바울과 동역하였고, 후에는 알렉산으리아 출신의 유대인 개심자로서 유명한 전도자가 된 아볼로와 같은 명성 있는 자들을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준다.
5. 로마
주전 8세기에 로마인들은 서부 이탈리아의 티베르강 언덕들에 정착한 작은 민족이었으나 점차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면서 전 지중해 세계뿐만 아니라 대서양에 접한 유럽 대륙에 까지 확장하였다. 이런한 정복 과정을 통하면서 문명화되었다. 이와 같은 영토 확장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은 B.C. 63년 경에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왔고, A.D.6년경에 로마 제국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로마의 도시화 과정은 농업 위주의 군사적 민족에서부터 희랍의 폴리스 형태를 지닌 도시 문명의 민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 사회제도의 기본단위는 씨족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각 씨족들은 피지배 시대의 고난 가운데서도 고집스럽게 지켜온 자신들의 고유한 제의들과 전통들을 지녔었다. 이러한 씨족들 외에도 로마에는 가지각색의 클리엔테스(Clientes:예속인)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상전에게 충성하고 그에 따른 조력과 원조를 받았었다. 씨족 제도 아래서는 가부장을 중심으로 뭉쳤기 때문에 가부장이 그 가족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군주체제로 들어가면서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종교 생활은 태고 적부터 본질적인 체계를 이루어왔다. 로마의 종교에 대해서 라테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종교는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사회적인 행위의 일부분이라 하겠다.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 종교적인 행위에 관한 어떤 기술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로부터 그들 스스로가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인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예배의식 및 재전, 각종의식들을 단정하고도 충심으로 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의 신탁들을 해석하고 관찰하는 일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로마 도시들의 사회적 상황은 무역과 교통이 융합으로 부요하고 유복하여 제국의 도시들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다른 도시들보다 뛰어나기 위하여 희랍의 건축양식의 요령을 따라서 넓은 장소에 신전을 세우고 수도 시설을 하며, 목욕탕을 만들고 극장과 경기장을 마련하기에 분주했다. 로마 국가의 우편 제도는 공무를 위해서만 사용되었고, 개인이 서신은 지정된 장소에 빨리 전달해 주는 여행자들의 여행하는 길에 함께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제국의 모든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던 로마 행정은 지방 관청에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최고의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다. 어린이들의 교육도 희랍의 선례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소년들이 희랍 세계에 정통하도록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Handriksen이 열거한 바울의 선교 전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바울은 성령의 인도로 비시디아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 로마 등과 같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작은 도시에는 큰 도시의 교회들로 인해 복음이 전파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도시만을 선택해 복음을 전파하였다. ② 바울은 회당을 복음 증거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 이유는 회당에서 메시야의 오심과 사역에 관한 구약 예언이 읽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회당에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③ 바울은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구약 예언의 핵심이며 중심인물임을 증거하였다. ④ 바울은 항상 청중들의 필요에 따라 메시지를 전하였다. 따라서 청중들의 즉각적인 관심을 모았고 그의 설교는 효과적이었다. ⑤ 바울은 복음을 전한 교회를 차례로 방문하여 격려하며 굳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재 기간중 계속 사역할 수 있도록 장로를 임명하여 세우고 편지를 써서 교회를 잘 보살폈다. ⑥ 모든 교회들이 잘 연합될 수 있도록 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였다. 교회간에 소식을 전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선교적 전략하에서 바울은 특별히 도시 집중 선교로 사역하였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개인적 회개와 회심이란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자기 자신의 회심 경험은 근본적인 영적 변화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그에게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자기 생애의 이른 시기에 종교, 도덕, 열정, 그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빌3:4-6). 그러나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또한 그것들을 모두 합친 것도, 그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스도께로 회심되어질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빌3:7-9)
진정한 도시 전략의 첫 번째 시금석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 및 통치에 직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삶을 그분께 내맡기도록 촉구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도시 복음 전도는 안이한 ‘결신주의’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으며 그리하여 도시 복음 전도는 도시를 변화받지 못하고 감명받지 못하 채로 방치해 두어왔다. 도시의 절박한 사정은 기독교 신앙과 삶을 술에 물 탄 것처럼 하여 제시하는 것이나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을 회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울의 도시 전략에 있어서의 두 번째 핵심 요소는 교회들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단순이 개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어느 곳에서든지 교회들을 조직했으며 신자들을 영구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통합시키는 것은 도시에 대한 그의 전체 접근 방법에 기본적이었다.
바울의 교회 설립 전략은 우리 시대에 도시 선교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들 중의 많은 것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보수 진영에서는, 도시 선교란 일반적으로 도시의 그늘진 지역에 대한 구제 전략이나 전 도시 대상의 복음 전도 캠페인을 별로 넘어서지 못한다. 때때로 라디오나 텔레비젼 같은 대중 매체가 개인 대 개인 접촉을 대체해 가지고 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회심자들로부터 교회들로, 교회들로부터 전체 도시로,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알려진 전 세계로 진행되었다. 신약은 에베소 시와 그 주변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바울의 전략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해준다. 에베소에 대한 바울의 접근 방법에는 5가지 단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방법은 그 지역 회당에서의 접촉을 통해 그 지방의 유대인들 가운데다 복음의 씨를 심는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잘 받아즐이는 것 같아 보였고 좀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권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당시로서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뜻하시며”돌아 오겠다고 약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21절)
에베소 전략의 두 번째 단계는 바울이 직접적으로 관여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 그 도시에 그리스도인 교두보를 확립할 목적으로 바울이 에베소에 떨어뜨려 둔 것으로 보이는(19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관여된 것이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세 번째 단계는 사도행전 19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조력자 디모데와 함께 한 사역이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오는 것의 목표는 교회가 조직되어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신자들의 그 핵을 통해서 그 도시와 그 너머 지역이 복음으로 침투될 참이었다.
에베소의 도시 복음화를 위한 계획의 네 번째 단계는 정기적인 추후 지도 방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도행전은 추후 지도가 바울의 전략의 비결들 중의 하나임을 분명하게 말해주며 “목회 서신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정에 짜맞추어 넣을 수 없는 많은 여행들이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의 교두보를 구축해 두었었던 장소들에 새신자들을 양육하고 격려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또한 메시지들을 전달하고 잘못된 가르침들을 교정하고, 교회들을 조직하고, 신자들을 목양하기 위해 그의 조력자들 곧, 디모데, 디도, 두기고, 같은 사람들을 보냈다.(딤전1:3 ; 딛1:5 ; 엡6:21-22)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에 나타나 있다. 나는 이 서신이 교리, 윤리, 그리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대한 일종의 여섯 장 짜리 ‘공개강좌’(wxtention course)라고 여긴다.
많은 도시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그의 발길은 수많은 고초를 당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식어지지 않고 영혼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그의 생애를 지배했다. 바울은 도시 선교 전략가로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증거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도시선교를 위해 그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렸다.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인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였다. 바울은 4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도시를 중심으로 전략적인 선교 사역을 하여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충성되게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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