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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선교전략
제 1차 전도여행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 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전도자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 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 있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 이 여행의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브로 섬 바보 전도이후는 거의 `바울과 바나바' 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고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행의 중간 이전에 이미 바울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때부터 누가는 히브리 이름 玲岾?라틴 이름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② 바울은 항상 지방의 중심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도 방침의 하나였다. 혹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 왔다는 신념에서 하루 속히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도시 중심의 전도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또 도시 출신인 그가 특히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③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 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④ 바울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수에 의한 구약 종교의 성취 완성,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역설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3:16 4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14:15 17의 루스드라인에 대한 설교 등은 그의 메시지의 내용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 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 더베 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 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제 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 일행을 버리고 도중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 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술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실은 다름 아닌 누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종용(慫慂)이 구라파 전도의계기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못 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 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 깊은 전도가 펼쳐진다. 사도행전 16:1- 18:22에는 제2차 전도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①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아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②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 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③이 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 굳혔다.
④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 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 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 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⑤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따라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는 열쇠가 될 만한 중추적인 연대이다.1905년 에밀 부르게(Emile Bourguet)가 연구 발표한 델피 비문(Delphi 碑文, 글라우디오 황제가 델피 시민에게 보낸 서신)에 바울의 고린도 전도시 아가야 총독으로 있는 갈리오(행 18:12- 1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그의 부임하던 해, 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와 체재(滯在)의 연대를 아주 확실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제 3차 전도여행
제 3차 전도는 제 2차 전도여행의 연속이었다. 제 2차 때 성령으로 금지되었던 소아시아 전도, 특히 에베소 전도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바울은 일찍부터 중심적 대도시의 중요성에 유의하여 그 전도를 꾀하였으나, 이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년 간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바울은 약 3년 동안 이 도시에 머물렀다. 그의 오랜 전도생활에서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은 곳은 없었다.
그는 이 동안 부근의 각 도시에까지 전도를 시도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는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다(골 4:13). 다른 여러 도시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를 보내 전도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누가는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줄곧 에베소에 머물러 전도에 전념했다고 여겨진다.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는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려" 있었다. 한편, 그에게는 "대적하는 자가 많아" 실로 다사다난한 3년이었다. 사도행전 19:1 4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험악하게 되어 바울은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고린도에 가서 화해에 힘쓴 일조차 있었다. 실로 "날마다…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감개무량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에 건너갔을 때"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고린도에 보냈던 디도의 기쁜 보고를 받고 그는 비로소 환희와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고후 7:5-16). 아마 이때 일루리곤 지방에서의 전도를 시도했을 것이다(롬 15:19,20,행 20:1-3). 이렇게 그는 완전히 화해한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평화로운 3개월을 보냈다. 이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고"(롬 15:19),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 되었다(롬 15:23). 전도에 지칠 줄 모르는 그의 눈길은 더 서쪽인 로마와, 로마 이서(以西)의 나라에로 돌려졌다. 사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롬 15:18-29). 그리하여 이제 여러 해 전부터의 숙원이 이루어지려는 찰라에 우선 로마 교회에 자기의 계획을 말하고, 그와 동시에 전부터 품고 있던 소신을 밝혔던 것이다. 이것이 곧 다름 아닌 로마서이다. 그러나 로마에 가기 전에 일단 예루살렘에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서신이 보이듯이(고전 16장, 고후8장,9장, 롬15:25-28),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준비하여 이것을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지참시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이와 같은 헌금으로 모 교회와 이방인의 여러 교회와의 사이에 밀접한 연락을 갖게 하여 굳은 결합을 유지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이 대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20:4).빌립보에서는 누가가 일행에 참가한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 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행 20:5). 오랜 격심한 전도생활 때문에 지칠 줄 모르는 바울도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육체에 가시'가 들은 병약한 몸이었다. 여하튼 이때 의사 누가의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에 이를 때까지 누가는 항상 바울의 반려자로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에 못지않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의 여행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비아 도로로사'(슬픔의 길)였다. 그도, 사람들도 불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라고 말했다. 그가 도중에 들린 드로아˙밀레도˙두로˙가이사랴 등의 각지에서 형제들과의 작별은 모두 눈물이었다. 특히 밀레도에서의 에베소의 장로들과의 작별장면을 이를 데 없이 애절하였다. 신약성경 중 이 기사만큼 페이쏘스(pathos)에 풍부한 곳이 다른 데는 없다(행 20:17-38)
4.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오순절 전날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따뜻하게 맞았다. 성도는 이 명절 때문에 각처에서 모여들은 유대인으로 붐볐다. 그 중에는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고 그에게 적의를 품은 극단적인 반 바울주의자들도 섞여 있었다.
팔레스틴 이외의 곳에서 로마 관헌의 제지로 바울 살해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로마의 천부장이 달려와서 바울을 붙잡아 안토니아의 영문으로 끌어갔으므로 간신히 무사하게 되었다. 누가는 당시의 사정과 그에 뒤따른 그에 대한 신문과 그의 변명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행 21:27-23:10). 유대인들 사이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까지 맹세한 일단의 혈맹단(血盟團)까지 조직되어 바울의 신변에 위험이 밀어닥치고 있었으므로, 그는 밤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로마의 총독 벨릭스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그의 후임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두 사람이 다 신속한 처리를 하지 않고 바울을 2년 동안이나 옥에 가둔 채 두었으므로 그는 분연히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신청했다.
이리하여 그는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하에 로마로 가게 되었다. 당시 가이사랴에서 로마에의 항해에는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도 동행했는데, 이 항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7장에 매우 자세하게, 또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의 항해기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귀중하고 또 흥미진진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다한 곤란을 겪은 다음 바울 일행은 AD 60년 초봄 보디올에 도착, 거기서 주 안의 형제들의 영접을 받고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다. 이렇게 다년간의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고는 하나, 결박된 몸으로서 로마 입성이란 그도 감개무량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되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재판의 날을 기다렸다. 로마에서는 많은 사건이 산적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성소가 심의될 차례가 오기까지는 실로 2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다. 많은 동역자가 그에게 출입한 것은, 그때 집필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의 끝에 열거되어 있는 인명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이때 있었던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빌립보서 1:12- 18에 의하면, 그 당시 바울은 더 적극적인 전도를 하여 비상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바울이…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말을 끝맺고 있다.
그는 질서를 소중히 여기고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역설하기로 했다. 바울의 인격에서 풍성한 근대적 인간미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울을 바울답게 한 것은 이른바 인간미도 아니고 근대미도 아니었다. 그것도 인간을 초월하고,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역사하여 그를 변화시킨데 불과하다. 다메섹으로가는 도상에서 체험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야말로 바울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것은 바울의 전심전령(全心全靈)을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고 말하고, 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바울은 놀라우리만큼 다면적인 성격과, 재능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생득적으로 종교적 천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전인격적인 사항으로써 파악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지성의 소유주였다.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의미하는 바를 질서 정연하게 해명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아름다운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진리를 위해 전심전력 다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또 실천가였다. 이론과 실천은 그에게 있어서 항상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도로서 그는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다. 기독교는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해석자를 발견했다. 기독교의 세계적 종교화는 그 대부분을 바울의 활동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의 근본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또 윤리나 교회의 실제적 문제 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또 그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상(像)을 볼 수 있다. <끝>
마데테스 선교회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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