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본문 : 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오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시작하면서 - 네팔에서 경험했던 일
제가 올 해 초 네팔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 일입니다. 두 번째 주일예배 대 선교사님이 새로 세운 군자너거르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네팔의 허름한 상가의 2층을 얻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팀이 왔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결국 그 작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교회 건물 옥상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네팔에서는 예배가 보통 2시간 이상씩 계속됩니다. 제가 네팔의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도 6-7명 정도의 무리가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분 중년의 네팔 사람들이었는데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온 몸에는 우상 장식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의 특징은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풀마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아주머니가 저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척을 따라 예배를 나왔는데 자신은 밤만 되면 귀신이 자신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지그몯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겠느냐고 물어봣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귀신을 쫓아내도록 기도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기도를 해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자신이 지금까지 섬겨오던 신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고 우겼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기도를 해 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여인의 기도요청을 거절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너무 그 여인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악한 영이 그 여인을 사로잡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들게 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네팔 사역자들과 함께 그 여인을 붙드록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이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그 모든 묶임에서 놓임을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한참을 기도하고나자 그 여인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순간 자신의 머리 아픈 것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 순간 그 여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온갖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질병에 눌려 있던 그 어둡고 침울한 얼굴은 사라지고 그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뿐만이 아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를 받고, 그 억눌림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복음에 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순간부터 복음이란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고, 더 나아가 그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를 못합니다. 설사 말씀을 통해 복음을 지식적으로 알았다고 해도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눌리고 찢기며, 상처 입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 시대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하며, 성경을 자신들의 교주를 신격화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종이 오려붙이기’를 하듯, 성경의 이 부분, 저 부분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교주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단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경을 통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밝히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까지 되었을까요?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 복음에 대해서 체험하지도 못하며, 단지 수박 겉핥기식으로 복음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올 해부터 주일 저녁 설교 시간에 로마서의 중요한 부분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로마서의 내용이 매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로마서를 읽기 힘들고, 목회자들도 이 부분을 설교하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는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의 깊이와 넓이가 꼭 필요한 시기이기에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복음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로마서를 처음 설교하면서 가장 먼저 택한 본문은 로마서 1장 16-17절입니다.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이 본문이 로마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와 같은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본문 안에 로마서의 중심 내용이 다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복음을 핵심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으로 우리가 읽을 로마서의 대부분의 내용이 이 두 구절을 자세하게 푸러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다라서 우리가 이 두 구절만 바르게 이해한다고 해도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복으므이 핵심적인 부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글로 시작합니다. 비록 한글에는 이렇게 시작하시만 헬라어 본문에는 ‘가르’라는 단어가 앞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의 원래 번역은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 본문의 앞의 내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로마에서 가서 신령한 은사들을 나누워 주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 신령한 은사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이며, 바울은 그 복음을 로마 교회에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이기데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로마로 가서 그것을 전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 알듯이 바울은 로마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습니까? 자신의 모든 지위와 학문을 버리고, 스스로 포박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그토록 희생적이 되게 하고, 무엇이 바울을 그토록 열정적이 되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신이 로마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바울서신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은 그의 글에서 무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반어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글로 보건데 매우 말투가 강한 사람 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코’, ‘정녕’ 등 확신이 있는 말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이 더 강조하여 표현하고 싶을 때는 반어법을 사용합니다. 즉 복음을 자랑한다고 말하기보다, 그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이 말은 자신이 복음을 자랑한다는 것을 강하고 표현하는 말입니다.
당시 헬라 시대에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조롱거리였습니다. 헬라철학자들은 복음을 논리적으로 형편없는 것으로 보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풍조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복음을 하찮케 여기고, 부끄러워하며 복음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햇습니다. 율법이나 철학, 동방종교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얼마나 현대교회의 모습과 비슷합니까? 비록 그 때처럼 교회 안에서 율법이나 철학, 동방종교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경영론과 처세론, 심리학 등 여러 가지 세상적인 학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듣고 있으면 사회에서 성골할 수 있을 것 같고, 듣고 있으면 지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가? 그러는 사이에 우리 안에 복음을 자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가장 중심에 놓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글을 쓰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내가 복음을 입으로 자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마음 속으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세상과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복음을 믿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내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체험하고 경험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체험하고 경험해야 하는 복음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즉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두 가지고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그 복음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바울은 이 부분을 로마서의 첫 부분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토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로마서 1:2-4)”
복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릿도가 누구입니까?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 분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토이었고,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입니다. 결국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고,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입니다. 결국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을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니”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죄가 조금도 없으며, 그 분은 반드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아담 이후로부터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인간으로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의 대가를 인간에게 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단순히 영적인 존재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면 인간의 죄를 대속한 것이 아니고 우리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였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죽으신 분이 단순히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만을 구원할 뿐이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이 흘린 피는 자기 자신도, 남도 온전히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으로 믿는 것이, 더 정확히 이야기 하면 우리 죄를 지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이기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두 번째 이유는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혼을 구원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그 복음은 우리 영혼을 구원시킴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키는 부분에 한정할 대가 많이 있습니다. 물로 이 영혼 구원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영혼구원받은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누린 것이 아닙니다. 복은은 나의 영혼을 구원시킴과 동시에 내 내면 깊숙한 곳에 들어가 나의 죄의 세력을 파괴하고,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시키며,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복음이 사람을 구원시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그 믿음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복음의 생명력도 일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여기서 설교를 하면서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부교역자이고, 나이도 어리고,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신앙생활도 오래 했고, 다 자신의 신앙관도 있으니 내가 아무리 설교해도 이 설교에 은혜 받지 않을 거야!” “혹시나 은혜 받는다고 해도 몇 십년동안 생각해 온 방식이나 생활습관이 변화되지는 않을거야!”만약 제가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한다면 이 말씀이 힘이 있을까요? 여러분 중에는 구역장이나 교사로 봉사하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구역장이나 교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씀을 전해도 저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슴이 힘이 있을까요? 결국 우리가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확신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신앙의 열정과 능력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왜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에 확신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 사건을 내게도 동일하게 일으키십니다. 그것은 내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죄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부활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킴과 동시에 사람을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킵니다. 이것에 예외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복음으로 변화를 경험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내 일평생에 일어나게 됩니다.
끝맺으면서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 두 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영혼이 구원받음과 동시에 그 사람이 복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 능력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복음의 능력을 믿고, 확신하며, 내 삶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지금도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죄성을 깨뜨리고, 나를 변화시켜 가며, 결국에는 나를 하나님나라에 이르게 할 그 복음의 능력을 믿고, 날마다의 삶에서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