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하여

http://blog.yahoo.com/_YGSHWFQCQZH47YQUSU4RFBIRYY/articles/127046/category/%EC%97%AD%EC%82%AC%EC%8B%A0%ED%95%99

 

 

위(僞)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베네딕트의 수도주의적 신비주의

버나드의 신비주의

발표자 : 임승묵

1.위(僞)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인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긍정의 방법”과 “부정의 방법”이 그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위에 이르고 나면 말수가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어지고 만다.더 낮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말이 움츠러 들고 끝에 가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이르고 만다”

-영혼의 상승을 ‘정화’ ‘조명’ ‘합일’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정화의 단계는 영혼을 정결케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조명의 단계는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추어주는 것을, 그리고 합일의 단계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정화의 단계는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연결되어 있기에 영혼을 벗어나 영혼 밖에 존재한다. 조명의 단계에 속하는 것은 관상이다. 관상은 창조의 계층구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힘이다. 합일(deificatio)은 인간의 영혼이 에로스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되고 신화된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는 긍정의 방법(정념)보다 부정의 방법(무정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정념은 상상력과 감정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그려보려고 시도하는 긍정의 방법이며, 영성의 길을 처음 시도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무정념은 하나님에게 합당치 못한 모든 관념들을 제거하는 부정적인 방법이다.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따라서 무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부정의 길, 즉 영혼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멀리 달아나 어둠속에서 “알 수 없는 하나님” 즉 무지의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을 제창하였다. 하나님과 합일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은 무정념의 방법이 필요하며 지적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수동적 상태가 요구된다. 이 수동성은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과 융합되는 사랑의 엑스터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디오니시우스의 신학방법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와 부정적인 논의를 결합하고 마지막에는 긍정과 부정을 초월할 것을 주장한 점에 있다.

2.베네딕트의 수도주의적 신비주의(480년 경-547년 경 카시노에서 사망)

-수사학과 문학을 로마에서 공부하였다. 로마에서 사회의 퇴폐와 동료들의 방종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영적생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감지하고 그곳을 떠나 수비아코라는 한 적한 동굴에서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3년간 독수생활을 한다. 이곳은 회심의 초기를 지낸 뜻깊은 연고지로서 기도와 묵상과 극기를 하면서 성령에 의해 양성되던 수련의 장이었다.이곳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친교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곳이며 어느 때보다 맹렬한 유혹과 투쟁하면서 시련의 수행여정을 지낸 곳이기도 하다.

-주후 529년 경 베네딕트는 카시노지방의 웅장한 높은 산악지대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세례요한 성당, 성 마르티노 성당과 함께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게 되는데 그곳이 오늘날 성베네딕트 수도회의 본부로 역사적 명소가 된 몬테카시노이다. 이 수도원에 수도자들의 수가 점전 증가하면서 베네디그는 생활지침이 될 수 있는 규칙의 필요성을 느껴 결국 수도생활의 규범서를 집필했다. 이 규칙은 공동생활을 명백히 하고 순명을 최고의 덕으로 삼으며,재물의 사유를 금지했다. 또한 평생 한 수도원에 머물 것과 특히 전례를 중요시 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성실히 따를 것을 명하고 있다. 베네딕트는 서방수도원 제도의 시조 또는 입법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동방에서 시작되어 서방에 들어온 수도생활을 뿌리내리게 했으며 잘 정립된 수도 규칙서를 작성해 수도생활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베네딕트의 수도규칙서’는 로마가톨릭주의 수도원 운동에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규칙’의 핵심 사상은 평화와 기도와 노동이다. 이것을 쓴 목적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의 삶을 진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넘치는 사랑의 기쁨 가운데 살게” 되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신실하게 준수하고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우리가 준수할 수 있는 열정을 소유하기 위해 인내하는 것이다”(서문 21, 49-50). 그리하여 공동체 안에 있는 수도사들의 필요를 채우고, 엄격한 수도회를 유지하고, 그리고 인류의 이해를 돕는 데 있었다. 이 일들을 위해 개인의 금욕적 노력을 강조했고 신성화를 이뤄 가는 데 요구되는 영적 성장을 강조했다.

모두 7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규칙서’의 제1장에서 베네딕트는 당시 네 부류의 수도사들이 있었음을 밝힌다. 케노바이트들(cenobites), 앙코라이트들(anchorites), 사라바이트들(salabites), 그리고 지로바구즈(Gyrovagues)가 그들이다. 케노바이트들은 한 규율과 대수도원장 아래서 섬기는 수도사들을 말하고, 앙코라이트들은 은자로서 한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마친 후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하고, 사라바이트들은 경험이 많지 않는 두 세 사람이 함께 사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지로바구즈들은 수도원들을 순회하면서 봉사하는 자들을 말한다. ‘규칙’은 케노바이트들을 위한 지침이었다.

제2장은 대수도원장에 관한 것, 제3장은 공동체에 중요한 업무들을 준행할 형제들에 관한 것, 제4장은 선한 일을 위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들인 74가지 도구들을 열거한다. 제5장은 지도자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제6장은 침묵을, 그리고 제7장은 겸손을 다루고 있는데, 하늘로 이끄는 12단계를 소개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 자기 의지 항복, 하나님의 사랑 앞에 의지굴복, 순종, 죄를 고백, 비천한 자신 인식, 낮은 자임을 인식, 연장자들의 지도를 받음, 질문 시에만 응답, 웃을 자제, 조용한 말, 그리고 내적 겸손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 등이다.

제9-18장은 오푸스데이(opus Die)라는 수도원적 삶을 다루고 있다. 제19장은 경외는 하나님의 편재를 강조한다. 제20장은 많은 말로 하는 기도보다 마음으로 행하는 기도를 권한다. 제21장은 10명의 수도사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임명에 관해, 제22장은 수도사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에 관한 규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모든 수도사들은 각자의 침대에서 자지만 새벽기도를 위해 일찍 일어나야하고 밤에도 등을 끄지 말도록 권한다.

제23-29장은 불순종, 교만, 그리고 완고함을 경고하고 벌을 언급한다. 벌들은 개인적 훈계, 공적 책망, 공동 식사를 금지, 그리고 출교이다. 지도자인 대수도원장은 공동체의 성장을 책임지는 자로서 수도사 한 사람에 관한 배려와 성장에 최선을 다한다. 제30장은 제멋대로 행하는 형제들의 퇴원과 입원에 관한 지침을 설명한다. 31-32장은 수도원에서의 다양한 업무들을 소개한다. 제33-34장은 개인 소유를 금하며 대수도원장이 그것을 관리하고 퇴원할 때에 되돌려 준다. 제35장은 부엌의 업무들을, 제36-37장은 병든 자들, 나이 든 자들, 그리고 젊은이들을 간호하는 지침을 명하고 있다. 제38장은 음식을 먹을 시에도 독서할 것을 권하고 제39-40장은 먹는 음식의 양과 질에 관한 규정을 소개한다. 하루에 두 끼와 두 접시 먹을 것을 권한다. 제41-42장은 음식을 먹는 시각과 존 카시안이 쓴 ‘회담’을 읽을 것을 권한다. 제43-46장은 음식과 기도에 관련된 잘못들을 소개한다. 제47장은 수도사들의 영적 임무들인 찬양에 관해, 제48장은 수도사들의 일상생활을 말한다. 제49장은 사순절과 자발적인 자기 부인의 일들을 행할 것을 권한다. 제50-51장은 여행이나 수도원 밖의 임무들을 권하고 있다. 제52장은 기도를 위한 지침, 제53장은 손님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처럼 친절하게 대하라고 권한다. 제54장은 대수도원장의 허락 없이 어떤 서신이나 선물을 받지 말도록 경고한다. 제55장은 수도사들의 옷 입는 규정을, 제56장은 손님들을 위한 음식, 제57장은 수도원 내의 장인들을, 제58장은 새로 입원하는 수도사들을, 제59장은 소년 수도사들의 입원을 위한 지침을, 제61장은 수상한 수도사들의 입원에 대한 지침을, 제62-66장은 대수도원장 선출에 관해, 수도원 행정인들의 선출에 관해, 그리고 업무들을 맡은 자들의 선출에 관해 설명한다. 제67-70장은 여행하는 수도사의 지침을, 제71장은 대수도원장을 포함한 모든 수도사들에게 서로 순종할 것을, 그리고 마지막 제73장에 이르러 이 규칙은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것이지만 완전에 이르기는 어려움을 천명한다. 단지 영적 삶을 시작하는 자들을 위해 특별히 쓴 것이라고 마무리 한다.

- 베네딕트는 어떤 수도회를 만들려는 의사가 없었고 중세시대까지 ‘베네딕트 수도회’라는 말은 없었다. 그의 ‘규칙서’은 바실, 파코미우스(283-346), 어거스틴(354-430), 존 카시안(360435)에게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수도원 운동의 규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규칙서’는 경건의 모습에만 치중한 나머지 영적ㆍ교의적인 부문에서 많은 취약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욕적이고 외식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공평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수도 규범서 제7장 겸손은 베네딕트의 전체 글침을 요약한 말이라 할 수 있다.베네딕트에게서의 겸손은 거룩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는 겸손을 12단계로 나누었다. 겸손의 첫 단계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담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행동으로 본받아야 한다. 셋째 단게는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정상에서 순면하는 것이다. 넷쩨단계는 순면 중에 겪게될 어려움과 시련 중에 닥쳐오는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를 요구한다. 다서째 단계는 겸손의 단게이다. 여섯째 단계는 자신을 낮추어 모든 것과 온갖 여건에 만족하는 평온함이다. 일곱째 단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말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확신하는 자기 낮춤이다. 여덟 째 단계는 공동체와의 일치이다. 아홉째 단계는 혀를 억제하며 절도를 지키는 침묵의 단계이다. 열 번째는 감정의 조절이다. 열한번재는 지혜롭고 절도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마음과 행동으로 언제나 겸손을 드러낸다.

-베네딕트에 의하면 수도자는 이 모든 겸손의 단계를 오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완전한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자는 단순히 공포심 때문에 지켜오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덕행에 대한 기쁨의 마음으로 기꺼이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8세기 이후 교회가 심히 타락했을 때 그 정화의 힘이 먼저 시작된 곳이 수도원으로 중세 정신사에서 수도원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었다.

3. 버나드의 신비주의

- 중세 신학의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은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도적이며 의식적 종교에 반대하고 또한 철학적 사변신학을 거부하였다. 그는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영성적 신앙의 길을 모색함과 동시에 깊은 영적 경험을 통한 신비적인 신학의 길을 개척했다.

- 제도와 의식에 치우친 중세교회와 사변적 논쟁으로 인하여 빛과 생명력을 심각할 정도로 상실하여 가고 있을 때 사랑에 근거한 사랑-신비주의를 확립시켰다.버나드의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명확히 함으로서 시작한다. 그 사상적 배경은 수도원제도와 신플라톤주의와 십자군운동이었다.

- 버나드는 모친 사후 이십대 초반 종교적 회심을 통해서 형제들과 함께 당시 교회개혁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시토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 버나드의 신비신학은 그리스도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최대 관심사는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 십자가에 까지 이른 고난의 인간 예수에 집중되었다. 십자가 고통을 사모하여 그 고통에 동참하는 신앙적 신비, 신의 사랑 추구한 것이다. 또한 그의 구원단계는 회심, 복종, 합일의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버나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는 과정을 3단계로 설명했다. 첫째단계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맞춤하는 단계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손에 입맞추는 단계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와 겸손을 본받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순종시키는 일이다. 셋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입술에 입맞춤하는 단계로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몰입되는 신비적 무아경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에서 인간의 신 인식은 신에 대한 사랑의 정도에 비례한다고 보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 신의 극치를 본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신비 속에 우리 사랑이 용헤된다고 느끼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비리는 신비적 무아경에 이른다고 제시한다. 버나드의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나 황홀경의 경험이 어디까지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주의를 지향했다.

- 버나드에 의하면 묵상의 극치에 이르면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묵상의 극치인 신과의 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인간영혼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다. 즉 합일상태에서(엑스타시) 인간 스스로의 참된 번성은 확증되는 것이다. 묵상을 통해 사랑하는 자의 의지와 사랑받는 자의 의지가 그들의 목적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지 결코 본질에서 하나나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일은 동일성이 아니라 의지의 화음이며 결혼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이다.

- 1)인간관

버나드는,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창1:27)는 성경과 어거스틴 전통에 서 있다. 「은혜와 자유 의지에 관한 논문」을 통해 타락을 의지와 결부시켜 설명했는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의지, 분별의 의지, 쾌락의 의지라는 삼중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버나드, 『하나님의 사랑』, 75). 선택의 자유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image)이, 분별과 쾌락의 자유 안에는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이 표현된다. 그러나 아담은 분별과 쾌락의 자유를 잃었고 그래서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이 파괴된 것으로 인간의 타락을 의미한다. 버나드는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비록 의지의 능력은 손상되지 않았으나 참된 지혜와 실질적인 도덕적 능력은 지니고 있지 않은 존재”라고 규정했다(버나드, 77).

버나드는 인간존재의 구조를 육과 영으로 구분한다. 육은 불, 공기, 물과 땅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혼은 기억, 이성, 의지의 삼위 일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버나드, 29). 육과 영은 모두 더럽혀져 있지만 정화될 수 있다. 육체는 금욕주의로 영혼은 사랑으로 정화된다. 또 육체의 정상적 상태는 건강이고 마음의 정상적 상태는 순수성으로 버나드는 육적 생활에서 영적 생활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나 육신 생활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2)삼위일체론

이러한 인간관을 전제로 인간영혼을 회복시키는 삼위일체론에서는, 그리스도는 버나드 신학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구속, 완성의 모든 구원의 질서에 개입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기 때문에(히1:3) 변형된 것을 보수하고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할 수 있다(버나드, 79). 그리스도는 순종과 겸손의 모범이며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하고 몰입하며 무아경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는 86편의 『아가서 설교』에서 영적 결혼을 말했다. 그리스도와의 입맞춤에 비유해 영적 진보의 3단계를 설명했는데, 첫 단계는 그리스도 발에 입맞춤이다. 이는 정화와 회심의 단계이다. 두 번째는 손에 입맞추는 단계로 조명하는 단계이며 경건이 결실을 맺어 선한 사업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은 입술에 입맞추는 단계로 결합의 단계이다. 희귀하게 경험되며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를 느끼고 그리스도와 합일되는 단계이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단계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듯이(요일4:19),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사랑하신 까닭에 그분을 찾고 입맞출 수 있다.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엇보다 고난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닮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기 사랑을 이루고 이웃 사랑을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버나드에 의하면 성령은 사랑의 은사이다. 아들을 통해 겸손으로 진리의 첫단계를 얻은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에 대한 연민을 갖는다(Bernard, The Steps of Humility & Pride, Ⅶ.20, 48). 성령의 역할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 의지를 연결시켜 사랑을 창조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 받은 의지는 정화되어서 이웃을 사랑하게 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에까지 순종하게 한다(Bernard, Ⅶ.20, 48).

버나드는 성부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존재’(being of all things)로써 진리 그 자체, 위대함, 선함, 의로움, 지혜라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버나드 성부론의 특징은 ‘성부는 내려올 수 없다’는 점이다(Bernard, Ⅷ.23, 52). 성자도 성육신 했고 성령도 하늘에서 내려왔지만 성부는 내려올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삼층천에 이르려면, 이끌림이 필요하다. 결국 궁극적 신비체험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버나드 삼위일체론 신관의 중심은 사랑이다. 진리에 밀착되어 사랑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겸손의 사다리를 올라야 한다.

-3)신비주의 방법론

신과 연합하기 위한 버나드의 신비주의 방법론은 ‘겸손과 이성의 정화, 사랑과 의지의 정화, 묵상과 진리의 완성’, 세 단계로 구분된다. 겸손은 진리에 이르는 길, 진리의 연회의 첫 번째 음식으로 ‘쓰라린 것이며 정결케 하는 것’이다(Bernard, Ⅱ.3, 32). 자신을 투시하는 자기 성찰이며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베네딕트 수도규칙 7장에 근거해 겸손의 12단계를 설명했다. 야곱의 사닥다리는 교만으로 내려가고 겸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겸손에서 교만으로 빠지는 12단계는 다음과 같다: 호기심, 경솔함, 어리석은 즐거움, 허풍, 괴팍함, 독단성, 뻔뻔함, 죄를 변명함, 위선적 고백, 반항, 죄에서 자유하다고 억측하는 것, 마지막은 습관적 범죄이다(Bernard, X.28-XXI51, 56-78). 이러한 겸손을 통해 이성은 자기성찰을 이루어 진리의 첫 단계에 오른다.

진리의 두 번째 단계인 사랑은 영적 열정, 감정적 사랑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사랑에는 네 단계가 있다;1)사람은 자신을 위해 자기를 사랑한다. 2)인간은 자신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3)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4)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버나드, 205-212).

인간의 본성은 너무 나약하고 연약해서 먼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랑이다. 고통이 일어나고 죄가 관영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도움을 바라고, 즉 필요에 의해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런데 자주 하나님을 찾다 보면 세 번째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교제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알게 해주고 그것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가 된다. 이 사랑은 자발적이며 기쁨을 준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게 된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한다(고전13:5). 그리고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버나드는 “4단계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라고 한다(버나드, 210).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인간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 안에 집중되어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 그 때 일시적 쾌락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온전한 사랑의 결과 세 번째이자 최종적 단계인 묵상에 이끌리게 된다. 묵상은 지식과 사랑을 기초로 한 ‘그 분을 향한 활발한 운동’이다(Bernard, Ⅲ.6). 순수한 마음과 직관으로 진리를 향하는 것이며 진리 그 자체이다. 묵상은 은총을 통해 인간 본성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겸손과 사랑으로 인한 의지의 회복이다. 그리고 묵상의 극치는 신과 합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하는 자의 의지와 사랑 받는 자의 의지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 결코 본질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묵상상태에서도 인간 영혼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과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이다. 버나드는 이러한 영적 합일의 황홀경이 이생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현세의 체험은 미래의 행복에 유비적인 참여에 불과하다. 묵상의 결과, 순수한 이성의 기능이 회복되어 완전한 이해에 이르고, 순수한 의지의 기능이 회복되어 완전한 기쁨을 누리며, 영혼의 기능이 정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화합하여 완전한 정의를 이루게 된다.

버나드의 작품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한 논문』(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은혜의 단계)

본성의 자유

은혜의 자유

영광스러운 자유

『아가서 설교』

(입맞춤의 3단계)

(사랑의 4단계)

발에 입맞춤

노예의 사랑

손에 입맞춤

고용인의 사랑

입에 입맞춤

아들의 사랑

배우자의 사랑

『하나님 사랑에 관하여』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

자신을 위해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

『겸손과 교만의 단계』

(진리에 이르는 3단계)

“겸손”

겸손으로 이성을 회복

(자신의 유한성 인식)

“사랑”

사랑으로 의지를 회복하는 단계

(이웃에 대한 사랑)

“관상”

진리자체인 하나님을 묵상하고 진리자체의 지식에 이름